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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653화 (1,410/2,000)
  • 1653화. 정체

    *

    검은 뇌전 그물 속에서 네 명의 흑풍도 수사들은 몸부림쳤지만 거미줄에 걸린 날벌레처럼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

    이에 대머리 거한이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뇌전 그물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의 앞에 있던 거대 깃발에서 굵은 뇌전 기둥이 뻗어 나가 흑풍도 수사들 위로 떨어졌다.

    콰칙!

    합체기 수사 셋은 보호막과 방어 법보가 터져 비명도 남기지 못하고 재가 되어 사라졌고, 누런 중년 사내는 뇌전 기둥에 몸을 관통당해 펑! 하고 육신이 둘로 쪼개졌다.

    쉭!

    중년인의 시체는 이걸 기회 삼아 핏빛을 터트리더니 같은 색깔의 빛줄기로 변해 육우청과 다른 방향으로 쏘아져 나갔다.

    동공을 수축한 대머리 거한은 수결에 변화를 주었다. 거대 깃발이 바람을 타고 훨씬 커져 핏빛 빛줄기를 순식간에 따라잡고 휘감았다.

    치지직!

    참혹한 비명과 함께 핏빛이 폭발해 재가 되어 흩날렸다.

    대머리 거한은 원래 크기로 돌아간 깃발을 불러들이고 육우청이 달아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육우청은 멀리 달아나버렸고 염소수염 노인은 여전히 그녀를 따라잡지 못했다.

    그걸 본 대머리 거한이 검은 뇌전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육우청이 아무리 빨라도 진선경 수사에 비할 수는 없었고, 몇 호흡 지나지 않아 검은 뇌전빛이 푸른 빛줄기를 따라잡았다.

    “겨우 대승기 수사가 본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보겠단 것이냐!”

    비웃음 섞인 소리와 함께 검은 뇌전으로 이뤄진 거대 손이 나타나 육우청을 낚아채려 들었다. 무시무시한 힘에 광풍이 몰아쳐 육우청이 휘청거렸다.

    당황한 기색이 가득한 여인은 손에 든 푸른 깃털 부채에서 어느 때보다 더 강력한 빛을 뿜었다.

    휘우웅…….

    희미한 법칙 파동을 품은 바람기둥이 실체를 갖추고 거대 손을 막아섰다.

    “현천의 보물!”

    대머리 거한은 의외라는 얼굴로 코웃음을 치고는 손바닥을 뻗었다.

    콰릉!

    그러자 거대 손이 배로 불어나 더 강한 법칙 파동을 발산했다.

    펑!

    붕괴가 된 푸른 바람기둥을 지나 거대 손이 떨어져 내렸다. 안간힘을 써 봐도 공기가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육우청의 얼굴에 절망감이 떠올랐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이때였다!

    거대 손 옆에서 푸른 그림자가 귀신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놀랍게도 거대 손은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터져 흩어져 버렸고 자유를 되찾은 육우청은 재빨리 천 장 밖으로 피할 수 있었다.

    “누구냐! 누가 감히 남의 일에 끼어드는 것이야!”

    열 받은 대머리 거한이 주변을 살폈다.

    이제야 도착한 염소수염 노인도 그걸 보고 놀라 급히 거한 옆에 붙어서서 의식을 퍼트렸다. 하지만 하늘 어디에서도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제 일격을 쉽게 파훼한 것을 보니 진선 수사겠지요? 정정당당히 나서지 못할 이유라도 있는 것입니까?”

    대머리 거한이 조롱하듯 외쳤다.

    “저는 흑풍도와 청우도 간의 쟁투에 끼어들 생각이 없습니다. 허나 이 여인은 저와 인연이 있어 모른 척할 수 없겠군요. 수사께서 물러나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담담한 목소리가 대머리 거한과 염소수염 노인 사방에서 울려서 도무지 어디에서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더러 물러나라? 어디 수사에게 그들 능력이 있는지 봅시다!”

    대머리 거한은 돌연 몸을 돌려 텅 빈 허공 어딘가를 향해 굵은 뇌전 기둥을 뿜었다.

    쿵!

    대량의 뇌전이 튀며 하늘을 울렸지만 뇌전빛이 빠르게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흠칫 놀란 대머리 거한의 귓가에 가벼운 한숨 소리와 함께 또렷한 두 글자가 들려왔다.

    “풍폭(風暴)!”

    말소리가 끝나자 대머리 거한이 보는 풍경이 확 달라지면서 바다가 아닌 광활한 모래사막이 펼쳤다.

    누런 모래를 품은 바람이 용처럼 바람기둥을 이루고 포효하고 있었다. 잠시 할 말을 잃었던 대머리 거한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환술!”

    그러나 그 순간 푸른빛이 그의 단전을 관통했다.

    푸른 비검 끝에는 원영 소인이 박혀 있었다.

    대머리 거한은 이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으나 비검 끝에 박힌 원영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모래사막이 사라진 해역에는 배에 구멍이 뚫린 대머리 거한의 시체만이 남아 떨어지고 있었다.

    화륵!

    은색 화염이 날아들어 그 시체마저 태워 없애버렸다. 홀로 남은 염소수염 노인은 겁먹은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진선경 수사를 순식간에 격살하는 적이라면 그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서, 선배님 제발 목숨만은!”

    사시나무 떨듯 부들부들 떨던 노인은 허공에 대고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푸른 검빛은 무심하게 어디선가 날아와 빠르게 노인을 휘감고 조각내버렸다.

    원영도 그 안에서 조각이 나서 살점과 핏물이 후두둑 바다로 떨어졌다. 푸른 검빛마저 사라진 뒤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바다 위가 고요해졌다.

    “흑풍도 육우청이 선배님의 은혜에 감사 올립니다. 누구신지 뵐 수 있게 해주시지요.”

    전투를 지켜보면서 평정을 되찾은 육우청이 허공을 향해 예를 올렸다.

    한립은 구름 속에서 청죽봉운검 한 자루를 회수한 뒤 저물법기 두 개와 검은 깃발을 챙겨서 떠나려 했다.

    “엇, 류석 오라버니!”

    놀란 육우청의 목소리를 들은 한립은 우뚝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눈동자에 파문처럼 기이한 검은빛을 머금은 여인은 정확히 그를 보고 있었다.

    괴이한 검은 눈동자와 마주치자 모든 것을 훤히 들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동급 수사에게서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은 놀랍지 않지만 대승기 수사인 육우청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수많은 생각이 스친 한립은 수결을 맺어 육우청과 멀지 않은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본 육우청은 왠지 모르게 당황스러워했다.

    “오라버니, 예전 그 모습이 아니시군요. 지금이 진짜 모습인가요 아니면 그 당시가 진짜 모습인가요? 아니면……. 전 한 번도 진짜 얼굴을 본 적이 없는 건가요?”

    여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약간의 원망을 담아 물었다.

    “변신술을 꿰뚫어 본 것이 아니라면 나라는 것을 어찌 안 것이지?”

    그녀의 말에 한립은 이상하다는 듯 눈썹을 끌어올렸다. 머뭇거리던 육우청이 빙긋 웃음 지었다.

    “오라버니께는 숨김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환동귀목(幻瞳鬼目)이라는 특이한 눈을 가지고 있어서 혼백을 통해 사람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화들짝 놀랐다.

    세상에 이런 천부적인 신통이 있었다니 무상맹 가면이 아무리 신묘한 변신술을 펼칠 수 있어도 들킬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었다.

    그는 코끝을 긁적이며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이렇게 다시 만난 것도 인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신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살인멸구를 할 수는 없었다.

    “저를 믿으셔도 됩니다. 오늘 일은 아버님을 포함해서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육우청은 한립의 마음을 알아채고 정중히 장담했다.

    “고맙군. 일개 산수에 불과한 난 흑풍도와 청우도의 분쟁에 끼어들고 싶지 않네.”

    “제 목숨을 구해주셨는데 고맙다는 말은 제가 해야겠지요.”

    한립은 육의청에서 미소를 보이고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찬찬히 생각을 해보니 행적이 드러난다고 해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이곳에서 그는 류석이란 이름의 산수에 불과했고, 흑풍도에서는 다른 모습으로 활동해서 외진 오몽도에 있는 그를 찾아낼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흑풍도와 청우도의 쟁투가 조만간 흑풍해역 전역으로 번질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휘말리지 않기 어렵겠지요. 저를 두 번이나 구해주신 분이고, 당시 아버지께서도 오라버니에 대해 칭찬을 많이 하셨습니다. 흑풍도로 오신다면 다른 장로들보다 훨씬 극진한 대우를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육우청은 진심을 담아서 말했지만 한립이 가타부타 말이 없자 아쉬운 기색으로 검은 영패를 꺼내 들었다.

    “마음을 정하신 듯하니 저도 더는 설득하지 않겠습니다. 이건 제가 늘 지니고 다니던 영패인데 앞으로 흑풍도에 오실 일이 있으면 이걸로 자유롭게 드나드셔도 됩니다.”

    “난 해야 할 일이 있어 가봐야겠네. 이곳은 안전하지 않으니 육 수사도 어서 흑풍도로 가보게!”

    한립은 영패를 받아 살피고는 이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가 떠나자 육우청의 눈에 낙담한 감정이 어렸으나 한립의 당부대로 오래 머물지 않고 서둘러 흑풍도 방향으로 날아갔다.

    한립은 어느 정도 날아가다 방향을 틀어 다른 곳으로 향했다.

    반나절이 지나 흑풍도와 청우도 접경지역에 이른 그는 고도를 높여서 푸른 번개처럼 하늘을 갈랐다.

    * * *

    십여 일 뒤.

    섬조차도 찾아보기 힘든 흑풍해역의 아주 외진 곳.

    한립은 둔광을 멈춰 의식을 방출하고 주위를 살피다 펄쩍 바다로 뛰어들었다.

    한참을 내려가 해저에 이른 그는 평지에 남색 진법 깃발과 원반을 날려 진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한 시진이 넘게 바삐 움직여서야 완성할 수 있을 만큼 복잡한 진법이었다.

    우웅.

    주술을 읊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남색 보호막이 펼쳐졌다.

    물과 비슷한 짙은 남색 보호막이라 가까이 다가가도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었고 법력 파동도 전혀 새어나가지 않았다.

    한립은 흡족한 표정으로 금색 구뢰목 열댓 개를 불러냈다. 각각 나무토막에 새겨진 주술문자가 원거리 전송용 뇌진을 이루었다.

    육우청이 행적을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나 안심할 수는 없었다.

    하루가 꼬박 걸려 뇌진이 완성되었다.

    한립은 법결을 던져 뇌진의 웅웅거림에도 주변의 금제 덕분에 외부로 진동이 노출되지 않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급히 술법을 멈추고 조용히 그곳을 떠나갔다.

    * * *

    한 달 후.

    붉은 태양이 동쪽 수면에서 떠올라 안개로 뒤덮인 오몽도를 비추었다.

    해풍이 불어와 안개가 흩어지면 숲의 나뭇가지가 부드럽게 흔들리고 범인들이 사는 마을에는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와 아주 평화로운 풍경을 만들어냈다.

    섬 모처의 허공에 미약하게 파동이 일고 한립이 나타났다. 은신술을 펼친 그는 흐릿한 그림자처럼 보였다.

    ‘아직 평화로운 것 같구나.’

    현재 흑풍해역에서 오몽도처럼 매우 후미지고 으슥한 곳에 있는 작은 섬들만이 무릉도원 같은 안정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섬을 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어딘가에서 멈추었다.

    낙 씨 가문이 있던 촌락들이 말끔하게 사라지고 화려한 궁전이 들어서 있었다.

    옥돌로 지은 누각과 정자에 연꽃이 활짝 핀 연못 그리고 그 위를 노니는 학까지 제법 선가(仙家)의 품격이 느껴졌다.

    여러 둔광들이 궁전 곳곳을 바삐 누비는데 다들 낙 가 제자였다.

    예전보다 부쩍 늘어난 제자들과 그들의 비교적 높아진 수행이 그간 오몽도가 빠르게 발전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만족스럽게 웃음 지은 한립은 흐릿하게 사라져 궁전 앞으로 이동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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