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2화. 분쟁
*
반나절 후 한립은 푸른 빛줄기로 날아올라 도왕부 앞 광장에 내려섰다.
대충 보면 이전과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았으나 분명 겹겹이 둘러싼 금제와 순찰 도는 수사들의 수가 늘어나 있었다.
한립의 목적지는 광장 옆쪽의 임무를 수령할 수 있는 부신전이었다. 전각 안에는 예전보다 수사가 많았고 석벽에도 자잘한 임무들이 많이 적혀 있었다.
임무의 내용은 대부분 적을 상대하거나 어딘가를 지키는 임무였는데 그 상대는 당연히 청우도였다.
심지어 큰 보상이 따르는 청우도 수사 암살 임무도 보였다.
빠르게 석벽의 임무를 훑어 내린 한립은 그중에 촉룡도 사태와 관련한 것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런데도 왠지 안심이 되지 않아 주변을 맴돌며 몇몇 수사들에게 선궁 관련 추포령이 내려오지 않았는지 반복해서 확인하고는 한시름을 놓았다.
떠나기 전에 주의를 끌지 않으려 대충 요수 재료를 구하는 임무 하나를 수령한 그는 부신전을 나와 도왕부를 힐끗 쳐다보고는 성문 방향으로 날아올랐다.
쿠르르.
그러나 그가 성문에 이르기 전에 이변이 일어났다.
성 외곽을 따라 둔중한 굉음이 울리더니 흑풍성을 빙 둘러 남색 빛기둥이 솟아올라 거대한 울타리를 이룬 것이다.
강렬한 힘이 대지를 뒤흔들었다. 남색 울타리는 빠르게 성 중심에서 맞닿아 둥그렇게 연결되었다.
그러나 한립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성문에 이르렀다. 적잖은 이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아니, 왜 갑자기 보호 진법이 발동된 것입니까?”
“급한 일이 있어 성을 나가 보아야 합니다. 사정 좀 봐주시지요!”
“여러분, 청우도에서 흑풍도를 기습한다는 소식이 전해져서 보호 진법을 발동하게 되었습니다. 적의 습격이 사실이 아니라면 금방 진법을 거둘 것이니 모두 진정하시기 바랍니다.”
수사들이 따지는 소리에 수비병 대장이 큰 소리로 사정을 설명했다. 수사들 속에서 듣고 있던 한립은 깜짝 놀랐다.
흑풍도와 청우도의 갈등이 나날이 심해지고 있다는 것은 들었으나 보호 진법을 발동해 성을 봉쇄할 만큼 심각한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주위의 반응을 보니 다들 수비병 대장의 설명에 그리 놀란 표정은 아니었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요즘 흑풍성에 이런 일이 자주 있습니까?”
한립은 곁의 홍포 노인을 향해 물었다. 노인은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흑풍성 수사가 아닙니까?”
“방금 전송진을 통해 흑풍성에 도착해 이곳 사정을 몰라 그러니 가르침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한립은 가볍게 미소를 머금고 공손히 답했다.
“아, 그러면 그렇지요! 흑풍도와 청우도 간의 쟁투가 치열해져서 흑풍성도 그리 안전하지만은 않게 되었습니다. 몇 년 사이 이런 일이 종종 있었거든요.”
“쌍방의 전황은 어떠합니까? 어느 쪽이 우세한지도 아십니까?”
“원래는 흑풍도가 청우도 보다 우세했는데, 청우도에서 외곽의 섬들을 대거 끌어들여서 지금은 비등비등합니다! 에휴, 그러니 지금까지 다툼이 끊이지 않는 것이고요.”
홍포 노인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때 웅성거리는 수사들 사이로 까만 얼굴의 대승기 중년인이 앞으로 나섰다.
“죄송하지만 대충 언제쯤이면 보호막을 거둡니까? 이 많은 수사가 대책도 없이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태 족장께서도 계셨군요. 저도 확답을 드릴 수는 없고, 짧으면 2, 3일 길면 보름 정도 걸릴 거라고 알고 계시면 될 듯싶습니다. 특수한 사정으로 급히 흑풍성을 떠나야 한다면 도왕부로 가서 육 도주님께 직접 말을 드리시지요. 도주님의 허락이 떨어지면 저희도 절대 막아서지 않을 것입니다.”
수비병 대장의 말에 까만 중년인이 입술을 달싹이다 침묵했다. 성을 나가고자 하는 이유야 다 다르겠지만 함부로 청을 올렸다가 도왕부에 밉보이고 싶은 이는 없었다.
성문 앞에 모였던 수사들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 한립은 내심 탄식했다.
‘조금만 서두를 것을!’
한립은 하늘을 뒤덮은 남색 보호막을 올려다보다 홍포 노인에게 인사를 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이런 일이 빈번한 덕에 성안의 소란은 오래가지 않았고 몇몇이 불평을 늘어놓은 것을 제외하면 모두 평소와 같았다.
한립은 흑풍성 구석의 객잔을 찾아 들어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날 밤, 가부좌를 틀고 있던 한립이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나 열댓 개의 푸른빛을 날려 방에 금제를 펼쳤다.
이어서 빠르게 수결을 맺은 그의 몸에서 금빛 뇌전이 떠올라 뇌진을 형성했다.
콰릉!
한립의 신영이 흐릿하게 변해 뇌진과 함께 종적을 감추었다.
* * *
그 시각, 도왕부 지하 밀실.
밀실 중간에 남색 깃발이 가득 꽂힌 커다란 남색 옥 제단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깃발들에서 반구형의 보호막이 응결해 옥탑과 제단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단 위에는 흑풍성과 똑같이 생긴 모형이 올라가 있었다.
웅!
제단 옆에 앉은 흑포 노인 주변으로 남색 옥 원반들이 여러 개 떠 있다가 갑자기 그중 하나가 진동했다.
노인은 눈을 뜨고 이상이 생긴 옥 원반을 살펴보며 흰 눈썹을 끌어올렸다.
“저 수사, 무슨 일이지?”
밀실의 어둠 속에서 검정 비단 장포를 입고 머리에 깃털 관을 쓴 흑풍도주 육균이 걸어 나왔다.
세월이 흘러도 위엄이 있는 모습이었다.
“도주께 아룁니다. 누군가 방금 보호 진법을 통과했습니다!”
“보호 진법이 파훼되었단 말인가?”
흑포 노인의 말에 육균이 곧장 눈을 부릅떴다.
“그게 아니라 특수한 둔술을 이용해 지나간 것으로 보입니다.”
“전송이라도 되었단 건가…….”
“아마 공간의 힘을 이용한 비술일 겁니다. 흑풍성의 보호 진법이 평범한 둔술은 대부분 막아내도 공간 금제를 첨가하지 않아 허점이 있으니까요.”
어둠 속에서 또 다른 인영이 걸어 나왔다.
한립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백포 사내 무리의 검미 중년인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런 수법이 있다는 말만 들어보았지, 흑풍해역과 같은 외진 곳에서는 한 번도 실제로 그런 비술을 쓰는 자를 본 적이 없습니다.”
육균은 중년인을 향해 위엄 있는 표정을 거두고 정중하게 말했다.
“외부 세계에서는 흔치는 않아도 종종 볼 수 있는 수법입니다.”
“설마 청우도 사람은 아니겠지요?”
옆에서 듣고 있던 흑포 노인이 물었다.
“아닐 걸세. 나와 오랜 세월 암투를 벌여온 청우진인도 그런 실력이 되지 않는데 하물며 그 아랫사람들이야……. 내 짐작대로라면 오늘 외부에서 전송진을 통해 들어온 수사의 소행일 것이네.”
육균이 곰곰이 생각하다 답해주었다.
“그자가 청우도와 아무런 인연이 없기를 바라야겠습니다.”
“연관이 있든 없든 대비를 안 할 수는 없겠지. 수시로 성의 보호 진법을 드나들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반길 일은 아니니까.”
노인과 대화를 나누던 육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크게 걱정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육 도주. 제게 마침 공간의 힘을 함유한 금제 진법이 한 벌 있으니 보호 진법에 넣으시지요.”
검미 중년인은 은빛 찬란한 깃발과 원반들을 꺼내 건네주었다. 공간 파동을 느낀 흑포 노인은 서둘러 진법 기구들을 받아들며 눈을 반짝였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지요, 풍 수사!”
육균도 기쁜 표정으로 공수를 했다.
“작은 성의일 뿐입니다. 그 일은 어찌 되어가고 있습니까?”
“소식을 전해 들은 즉시 인원을 늘려 청우도 쪽에서 절대 넘보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화제가 바뀌자 육균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청우도 자체는 보잘것없지만 중요한 것은 윤회전입니다! 만일 그들 배후에 정말 윤회전이 있다면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유의하겠습니다.”
그 후로도 풍 씨 중년인은 몇 가지 당부하고는 밀실을 빠져나갔다.
풍 씨 중년인이 더 높은 지위에 있는 듯해 보였지만 육균과 흑포 노인 둘 다 불만스러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도주님, 이곳은 제가 지켜볼 것이니 돌아가 잠시라도 휴식을 취하시지요.”
흑포 노인의 말에 육균은 고개를 젓고, 근심이 가득한 눈으로 남색 옥 제단을 바라보았다.
“우청 아가씨가 걱정되셔서 그러십니까?”
“하아, 하필 이런 때 섬을 떠나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걱정되는군.”
“허허, 아가씨도 다 도주님을 돕기 위해 그러시는 것이지요. 또 유란도(流瀾島)는 흑풍도와 멀지 않고 그간 아가씨도 수행이 크게 느셨으니 별일 없을 겁니다.”
흑포 노인이 말에 육균도 약간 마음이 놓이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 * *
콰릉!
흑풍도와 10만 리 떨어진 해역, 허공에 금빛 뇌전이 뭉쳐져 뇌진을 이루었다. 뇌전이 교차하는 가운데 한립이 나타나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깊이 들여 마셨다.
그는 예전에 구해둔 흑풍해역 지도를 꺼내 의식을 불어넣고는 방향을 정해 날아갔다.
흑풍도 주변이 평안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누누이 들었지만 그의 수행에 두려울 것은 없었다.
밤이 빠르게 지나 동쪽 하늘이 밝아져 왔다.
붉은 태양이 떠올라 바다를 금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흑풍해역은 선계로 돌아와 그가 처음으로 자리 잡은 곳이라 감정이 남달랐고 선계에서의 고향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름다운 일출을 바라보던 한립이 휙 하고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수천 리 밖에서 격렬한 영기의 파동이 느껴졌다. 수행이 낮지 않은 두 무리가 싸우는 중인 듯했다.
망설이던 그는 둔광의 방향을 살짝 틀어 전투가 벌어지는 곳으로 향했다. 날아가는 도중에 점점 투명해진 그의 둔광은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순식간에 도착한 한립은 구름 속에 몸을 숨기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두 무리 중 흑풍도 복색을 한 다섯 명은 대승기 수사가 둘, 합체기 수사가 셋이었다.
대승기 수사 중 한 명은 스무 살 안팎의 예쁜 여인이었는데 푸른 깃털 부채를 펄럭일 때마다 광풍이 날아갔다. 또 다른 대승기 수사는 누런 피부에 볼품없게 생긴 중년인으로 남색 거울을 발동해 빛기둥을 쏘아대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합체기 수사들은 여인을 중심으로 법보를 이용해 그녀를 보호하는 데 집중했다.
흑풍도 무리와 대치하는 이들은 푸른 깃털 장포를 걸친 두 수사였다. 그 중 대머리에 혹이 난 수사는 진선경 수행을 지니고 있어 흑풍도가 밀리고 있었다.
뇌신(雷神) 그림이 수놓아진 새까만 거대 깃발이 대머리 수사 앞에서 펄럭이면서 일대를 검은 뇌전 바다로 만들고 있었다.
수시로 굵은 뇌전이 튀어 나가 흑풍도 수사들의 공격을 흩어버리고 그들을 뒤쪽으로 밀어붙였다.
흑풍도의 또 다른 수사는 흰머리가 희끗희끗 나고 턱에 염소수염이 자라난 대승기 기운을 품은 노인이었다.
노인은 두 자루의 노란 장창 법보를 토룡(土龍)으로 변화시켜 대머리 거한의 공격을 보조했다.
한립은 소녀를 보고 눈에 이채를 띠었다. 그녀는 예전에 만난 적 있는 흑풍도 도주의 딸 육우청이기 때문이었다.
“육 수사, 흑풍도의 유일한 후계자가 멋대로 흑풍성을 떠나 돌아다니고 있을 줄은 몰랐구만. 흐흐, 이걸 담이 크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냉소를 흘린 대머리 거한이 수결을 맺었다.
쿠릉!
뇌전의 바다가 줄기줄기 뭉쳐 다섯 마리의 거대 뇌전 뱀을 이루고 흑풍도 다섯 수사를 향해 덤벼들었다.
이에 육우청은 푸른 깃털 부채에 맹렬히 기운을 불어넣어 힘차게 부쳤다.
휘이잉!
짙푸른 돌풍이 깃털 부채를 빠져나가 다섯 마리 뇌전 뱀을 포위했다. 돌풍이 품은 무수히 많은 빛의 실들이 뇌전 뱀의 움직임을 늦추었다.
옆의 누런 중년인이 빠르게 수결을 맺어 남색 거울의 크기를 키웠다.
카카칵!
거울에서 뻗어 나간 굵은 빛기둥이 돌풍에 갇힌 뇌전 뱀들을 꽁꽁 얼려버렸다.
“육우청 아가씨, 어서 가십시오! 저들은 저희가 막아 보겠습니다!”
그사이 누런 중년인이 육우청에게 외쳤다.
그가 수결을 바꿔 거울의 빛기둥을 적들에게 쏘아 보내자 나머지 합체기 수사 셋도 결연한 표정으로 미친 듯이 공격을 퍼부었다.
이에 육우청이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려 푸른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흥, 어딜 가려느냐!”
그걸 본 대머리 거한이 뇌전 뱀들에게 법결을 쏘아 보냈다.
콰릉!
빙산 속의 뇌전 뱀 다섯 마리가 뇌전을 뿜어 남색 얼음을 깨부쉈다.
검은 뇌전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그물을 이루어 누런 중년인을 포함한 흑풍도 수사들을 덮쳐왔다.
치지직!
뇌전 그물에 사로잡힌 네 수사는 피부가 금방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염소수염 노인은 대머리 거한이 그들을 가두는 동안 노란 빛줄기로 변해 급히 육우청의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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