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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651화 (1,408/2,000)

1651화. 의미심장

*

관란성 동쪽의 꽤 규모가 큰 상회였다.

설락은 약속을 지켜서 한립의 신분 보장을 해결해 주었고, 쌍방은 서로 원하는 바를 취하고 거래를 마칠 수 있었다.

한립은 설락이 더 머물다 가라는 것을 거절하고 길을 나섰다.

“일이 잘 풀리는 듯싶습니다.”

해도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한립은 하얀 영패를 꺼내 들었다.

한 면에는 납작한 머리에 매의 부리를 지닌 하얀 새 문양이, 다른 면에는 설가(雪家)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설락이 준 설 씨 가문의 영패였다.

“영패에 뭔가 특이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그저 여기 새겨진 새 도안이 특이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흑풍해역에서 본 적이 있는 표식이었다. 오몽도 인근의 설연도(雪鳶島)에서 이런 조류 문양을 표식으로 사용했었다.

오몽도에서 본 기록에 따르면 몇 만 년 전에 설연도에 거주하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인근 해역의 의혹으로 남았다던데, 설 씨 가문과 당시의 설연도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흑풍해역에 무슨 변고가 있을까 걱정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곳에서 가장 강한 자가 흑풍도주로 겨우 진선경 후기 지선에 불과하다지 않았습니까? 수사의 실력에 경계할 만한 존재는 아닐 텐데요.”

해 도인이 생각이 많은 얼굴의 한립을 보고 물었다.

“저도 그저 괜한 걱정을 하는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성 동쪽 길로 들어서자 거리에 지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연체, 합체기 수행의 산수들이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보물찾기를 하는 중이었다.

길 양편으로 늘어선 재료상점에는 신선한 각종 영초와 요수 재료들이 가득했다. 생각할 거리도 있고 딱히 급할 것도 없던 한립은 거리를 따라 아무렇게나 점포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관란성의 점포들은 그 수는 많지 않아도 다양한 물건들을 갖추고 있어서 수시로 희귀한 재료들이 눈에 띄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립은 물건을 진열해 놓은 장만 열댓 개인 상점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하얀 의복을 입은 청년이 그곳에서 나오다 우연히 그와 스쳐지나갔는데, 한립은 문뜩 걸음을 멈추고 그의 뒷모습을 살폈다.

한립은 한 번에 그가 겉으로는 합체 후기 수행을 지녔으나 진짜는 진선 초기의 수행을 지녔음을 꿰뚫어 보았다.

기운을 갈무리한 수단이 고명해서 의식이 강대한 한립이 아니었으면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백의 청년도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서둘러 인파 속으로 숨어들었다. 한립은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거두고 상점으로 들어갔다.

고계 수사가 평소 수행을 감추고 다니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손님, 따로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십니까?”

그가 들어온 것을 보고 장궤가 살갑게 다가왔다.

* * *

반나절 만에 성안의 모든 재료상들을 둘러본 한립은 쓸 만한 재료 몇 가지와 구하기 어려운 영초 종자 두 개를 구할 수 있었다.

관란성은 지어진 지 얼마 안 돼서인지 아니면 너무 외진 곳에 있는 탓인지 아직 선잔이 없어서 돌아다니면서도 마음이 편했다.

이제 그는 성의 중심부, 전송진이 위치한 하얀 탑 근처에 서 있었다. 밤의 장막이 내려온 성안에서 하얀 탑만이 달빛을 받아 그윽하게 빛을 발했다.

하얀 탑은 대문이 굳게 닫혀 있어서 내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이지 않았다.

한립은 굳이 의식으로 내부를 살피지 않고 걸음을 돌려 성 서쪽의 한적한 객잔을 찾아서 조용히 휴식을 취했다.

* * *

한립이 객잔의 방에서 머문 지도 거의 2년이 다 되어갔다.

그간 그는 가끔 용모를 바꾸고 외출해 상점을 한 바퀴 돌며 재료를 구하고 외부세계 및 선궁의 동태를 살폈다.

흑풍해역이 너무 외져서인지 관란성에는 북한선궁 수사가 나타나거나 하진 않았지만 촉룡도에서 발생한 일에 대해서는 이곳까지 소식이 흘러들었다.

호언 도인이 북한선궁 수중에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에 한립은 마음을 놓으면서도 선궁이 황란대륙 쪽 선잔에 그들에 대한 수배령을 내리지 않은 것에 의아해했다.

그밖에 촉룡도 13금선 도주 중 1인자이자 태을경을 한 걸음을 앞두었던 백리도주도 소진한에게 붙잡히지 않은 듯했다.

그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이었지만 한립은 이 소식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선궁에서 노리는 거물들이 많을수록 그에 대한 주의력도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이날, 관란성 중앙에는 5층의 하얀 탑이 찬란한 광채를 발하면서 탑 꼭대기에서 남색 빛기둥을 하늘까지 분출하고 있었다.

성안의 수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그 안으로 들어가는 수사들을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전송 자격을 지닌 이들만이 탑으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사람들 틈에서 부채를 부치고 있던 백면서생이 탁! 하고 부채를 접고는 하얀 탑으로 걸어갔다. 모습을 바꾼 한립이었다.

탑으로 들어간 그는 회랑을 따라 쭉 들어가 넓은 대청 입구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흑풍도 복색을 한 흑포(黑袍) 수사가 한 명씩 서 있었다.

“전송 영패와 신분을 증명할 신물을 보여주시지요.”

왼쪽의 회색 머리 사내가 평온한 어투로 말했다.

한립이 조용히 두 영패를 내주자 상대는 길쭉한 사각형에 위쪽 끝이 뾰족한 옥구슬인 옥규(玉圭)에서 주먹 크기의 금빛 주술문자 2개를 뿜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오른쪽에 서 있던 등이 굽은 노인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대청은 옥돌을 깐 바닥과 벽에 빼곡하게 주술문자가 새겨져서 하얀 광채를 머금고 있었다.

대청 안에는 흑풍도 복장을 한 흑포 사내 몇 명 외에 20명의 다른 수사들이 두세 명씩 모여서 기다리고 있었다.

전송진은 아직 발동하지 않았는데도 미약하게 공간파동을 발산하고 있었다. 한립은 걸음 닿는 대로 아무도 없는 대청 구석으로 가서 가부좌를 틀고 자리를 잡았다.

‘저자는…….’

2년 전에 관란성에 들어와 우연히 마주친 적 있는 수행을 감춘 백의 사내도 그와 열댓 장 거리에 서 있었다.

그뿐이라면 흑풍해역에 들어가려는 평범한 진선이라 생각했겠지만 백의 사내 주변의 대여섯 명도 예외 없이 진선경 수행을 합체기 경지로 억누르고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중 눈을 감고 있는 각진 얼굴의 중년인은 진선경 후기의 수사였다. 이런 실력자들이 흑풍해역에 집결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대청에는 십여 명의 수사가 더 늘었다.

“허허,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전송진을 발동할 시간이 다가왔군요.”

혈색 좋은 흑포 노인이 어디에선가 걸어 나왔다. 그것을 신호로 눈을 감고 운기조식하던 이들은 부산히 일어났다.

한립도 일어나서 일면식이 있는 ‘역 노인’을 쳐다보았다.

“이미 들어 알고 계신 분들이 많겠지만, 이번에는 예전과 달리 감응진법을 통과해야만 흑풍해역으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백발홍안(白髮紅顔)의 역 노인은 수사들을 훑어보며 수결을 맺고 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웅!

노인과 수사들 사이 지면에 옥돌 벽돌 몇 개에서 금빛 주술문자가 떠올라 뿌연 고리가 생겨났다.

한 사람이 충분히 통과할만한 고리에는 금빛 기류가 흘러내렸다.

눈동자 깊은 곳에 남색빛을 반짝인 한립은 금전문으로 이뤄진 현묘한 감응진법을 보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역 노인의 말대로 대부분 수사들은 감응 금제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는지 일행과 작게 몇 마디를 나누다 차례대로 고리를 통과해 지나갔다.

수사들이 고리 속을 지날 때마다 고리의 금빛이 바르르 떨렸고 역 노인은 그것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십여 명이 고리를 통과했다.

한립은 백의 수사가 무사히 고리를 통과한 것을 보고는 곁의 합체기 자발(紫髮) 여인에게 말을 붙였다.

“실례합니다, 저는 오몽도 출신 낙석이라 합니다. 수백 년 만에 흑풍해역으로 돌아가는데 이런 일은 처음 겪는군요. 혹시 흑풍해역에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것입니까?”

복색으로 보아 여인은 흑풍도 세력에 속한 남례도(楠禮島) 수사였다.

“오래 타지에 계셨으면 사정을 모르시는 것도 당연하지요. 흑풍해역에 들어오기 전 감응 진법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은 백 년 전에 육 도주께서 정한 규정입니다. 저도 어떤 사수(邪修)와 관련이 있다고만 알고 있습니다.”

고리로 향하려던 여인이 대답해주었다.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립이 미소를 머금고 공수하자 여인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젓고 앞으로 나아갔다.

‘사수라…….’

한립은 그녀가 말한 사수가 자신을 일컫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진선경 수행을 지닌 자가 대단한 배경을 지닌 수사를 죽였으니 북한성궁에서는 척살해야 할 사수가 맞았다.

하지만 깊게 생각해 보니 그건 아니었다.

흑풍도와 북한선궁이 무슨 연관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고, 백 년 전이면 그가 얌전히 촉룡도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게다가 수행을 숨긴 백의 수사 무리가 걸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감응 금제가 찾으려는 대상은 진짜 수행과는 무관한 듯했다.

그가 머뭇거리는 동안에도 1명씩 금색 금제를 통과해서 이제 남은 수사들은 손에 꼽혔다.

이에 한립은 가볍게 숨을 내쉬고는 성큼성큼 고리로 걸어 들어갔다. 고리 주위의 금색 기류가 바르르 떨리면서 부드러운 힘이 그의 몸을 따라 흘렀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뒷짐을 쥔 역 노인은 신중하게 금색 고리를 응시했다. 네다섯 걸음 만에 한립이 고리를 완전히 통과했지만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다.

나머지 수사들까지 감응 금제를 통과하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인 역 노인이 고리를 거두고 소매 속에서 남색 부적들을 날려 수사들에게 한 장씩 나눠주었다.

후우웅!

전송진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와 수사들을 감쌌다.

한참 만에 몸이 아래로 묵직하게 쏠리는 느낌을 받은 한립이 원형의 또 다른 대청 안에 나타났다.

흑풍도 천성탑 안이었다.

“흑풍해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흑포를 입은 등이 굽은 노파가 진법 앞에서 웃고 서 있었다. 수사들이 노파에게 공수를 해보이고 전송진에서 걸어 나와 멀지 않은 원형의 통로로 걸어갔다.

무리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던 한립의 걸음이 순간적으로 느려졌다. 신경 쓰고 있던 백포 청년이 전송진에서 걸어 나와 대청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었다.

그와 같이 있던 수행을 숨긴 진선경 수사들도 통로로 향하지 않는데 등 굽은 노파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 * *

천성탑을 나온 한립은 다른 수사들처럼 백석 광장 밖 거리로 나가 인파에 섞여 들었다.

흑풍성은 흑풍해역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고, 그중에서도 이 지역은 수사들이 몰리는 장소였다.

길가 양옆으로 늘어선 화려한 상점들을 많은 수사들이 문지방이 닳게 드나들었다. 한립은 힐끗 천성탑을 돌아보고는 어느 점포로 들어갔다.

점포에는 손님이 많지 않아서 점원은 한립을 보자마자 열성적으로 다가왔다.

“손님, 찾으시는 재료가 있으십니까?”

한립은 점원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도 시선은 시종일관 천성탑 광장을 향해 있었다.

족히 반 시진이 지나도 아무 낌새가 없다가 그가 미간을 찌푸린 순간 광장 구석에 번쩍하고 한 무리의 수사들이 나타났다.

등이 굽은 노파와 백의 수사 일행의 끝에 검미 중년인이 서 있었다. 그들은 오래 머물지 않고 즉시 둔광을 일으켜 하늘 끝으로 사라졌다.

‘역시…….’

그가 기억하기로 그들이 향한 방향에는 흑풍도 도왕부가 있었다. 그는 대충 몇 가지 재료를 사서 그들이 사라진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떤 음모가 있든 그와는 상관없었다. 수배중인 그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이리저리 골목을 돌아 사람이 없는 한적한 길에 이른 그는 누런 얼굴의 거한으로 외양을 또 바꾸었다.

무상맹 가면을 이용하면 외모를 바꾸는 게 간단해서 새로운 장소에 이르면 항상 새로운 얼굴로 돌아다녔다. 남은 시간 동안 그는 흑풍성 곳곳을 돌며 필요한 재료들을 보충했다.

외부 세계와의 교류가 비교적 빈번해져서인지 성 내의 물자도 풍부하고 희귀한 재료나 단약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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