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0화. 명단
*
줄이 빠르게 줄어 성문을 지날 차례가 된 한립은 입성 비용을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관란성은 지은 지 얼마 안 된 성답게 모든 것이 깨끗하고 거리에 먼지도 쌓여 있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5층으로 이뤄진 탑 지붕에 남색 옥기둥 5개가 솟아 강렬한 별의 힘을 발산하는 것을 발견했다.
“류 수사, 흑풍해역으로 가시려고 관란성에 오신 것이지요?”
진중이 갈 길을 가지 않고 한립 옆으로 붙어서며 속삭였다.
“그렇습니다만, 예전처럼 백 년에 한 번만 전송진을 통해 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한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관란성에 들어온 수사가 흑풍해역으로 가고자 하는 것은 숨길만 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때맞춰 잘 오셨습니다. 이번 전송진 개방일이 2년도 채 남지 않았으니까요! 그저 보시다시피 흑풍해역으로 가려는 수사들이 많아서 경쟁이 치열합니다. 전송 명단에 들기 어려우실 거예요.”
“왠지 진 수사께서는 다른 방도를 아실 것 같은데 가르침을 주시지요.”
확실히 성안에 수사들이 북적여 명단에 들기 어려울 듯했다.
진짜 실력을 드러낸다면 손쉽게 전송 자격을 취할 수 있겠으나 그러면 신분이 노출될지도 모른다. 진중이라는 수사를 통해 일을 성사시킬 수 있다면 선원석을 더 쓰더라도 괜찮은 선택이었다.
“가르침이랄 것은 없고, 제게 전송권이 하나 있는데, 관심이 있으시면 자리를 옮겨서 자세한 이야기 나누시지요.”
진중은 눈짓으로 머지않은 주루를 가리키고 있었다.
“좋습니다.”
한립은 그와 함께 주루로 들어가 단정한 방에 자리를 잡고 술과 안주를 시켰다.
“이곳 청령주(淸靈酒)가 향이 괜찮습니다. 마셔보시지요.”
진중은 먼저 한립의 잔을 채워주고는 웃으며 술을 권했다. 술잔에 담긴 푸른 색 액체에서 심신을 편안하게 해주는 맑은 향과 영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한립은 잔을 내려다보았을 뿐 건드리지 않아 진중만 자작하며 두 잔을 비웠다.
“진 수사, 일단 전송권 이야기부터 나누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립은 그가 세 번째 잔을 채우는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
“하하, 우스운 꼴을 보였습니다. 속세의 음식을 끊은 지 오래인데 천하를 유람하면서 좋은 술을 즐기는 재미만은 포기하지 못하겠더군요. 류 형께서도 성격이 시원시원한 것 같으니 저도 단도직입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러시죠.”
“관란성에는 처음이시라 상황을 잘 모르실 텐데, 흑풍해역으로 가고자 하는 이들은 많아져 요 몇 년 사이 전송권 관리가 엄격해졌습니다. 선원석이 많다고 아무나 명단에 들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현지 세력이 신분을 보장해주지 않으면 외지 수사는 흑풍해역으로 들어가기가 더 어렵습니다.”
“흑풍해역은 선역의 다른 지방과 달리 혈족 사회를 기반으로 지선 수련을 위주로 해서 폐쇄적인 성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만 수사가 지닌 전송권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사실은, 제가 아니라 친한 벗이 지닌 전송권입니다. 원래 흑풍해역으로 가서 장사를 좀 해보려 구한 것인데 최근에 수련이 중요한 시점에 이르러서 급히 단약이 필요해 전송권을 팔려고 한다더군요.”
진중도 한립이 마음이 급하단 것을 알고 빠르게 답했다.
“전송권을 구하는 이들이 많을 텐데, 아직 팔지 못한 것을 보면 그만한 사정이 있겠지요?”
“하하, 솔직히 말씀드려서 그 친구가 주머니 사정이 안 좋은 만큼 받고자 하는 가격이 좀 높습니다.”
“친우분께서 원하는 가격이 얼마나 됩니까?”
한립은 진중의 말에 오히려 안심하고 물었다.
“음……. 선원석 15개입니다.”
“15개요?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이전에는 선원석 5개면 전송권을 구할 수 있던 것 아닙니까?”
“하하, 원래 가격은 여전히 선원석 5개가 맞습니다. 허나 암시장에서 구하려면 가격은 선원석 10개로 오르고 그들은 신분을 보장해 주지도 않지요. 선원석 15개가 약간 비싸기는 하지만 제 벗이 이곳에서 제법 명망이 있는 가문 출신이라 신분을 보장해 줄 겁니다.”
“그런가요…….”
한립은 턱을 문지르며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류 수사가 잘 모르셔서 결정을 내리기 힘들어하시는 것 같은데, 요즘 흑풍도에서 드나드는 이들을 얼마나 엄격하게 관리하는지 모릅니다! 전송되어 들어온 사람이 흑풍해역에서 무슨 사고라도 치는 날에는 신분을 보장한 세력도 중벌을 면치 못하지요. 그러니 관란성에서 이름깨나 있는 세력들도 외지 수사를 위해 함부로 나서지 않습니다. 선원석을 써서 신분 보장을 따로 받으려면 5개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진중이 서둘러 덧붙였다.
“그렇다면 진 수사께서는 어찌 친우의 가문이 저를 위해 신분을 보장해 줄 거라 확신하십니까?”
“허허, 그에 관해서는 전송권 판매를 제게 맡길 때부터 미리 얘기가 다 되었습니다. 알고 지낸 세월이 길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제가 볼 때 그 친구가 약속을 어기거나 흉악한 짓을 할 사람은 아니고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알겠습니다! 제가 전송권을 사지요.”
잠시 고민하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바로 벗에게 거래에 대해 알리겠습니다.”
“다녀오실 동안 저는 이곳에 있겠습니다.”
진중은 안 그래도 싱글벙글하던 얼굴이 더 밝아져 술잔을 깨끗하게 비우고 일어났다. 한립도 그가 떠나자 일어나 창밖에 서서 하얀 탑을 바라보았다.
그가 떠나있는 동안 흑풍해역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 돌아온 것이 잘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반 시진 후.
방문이 열리고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은 진중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뒤에 삿갓을 쓰고 하얀 면사로 얼굴을 가린 하얀 인영이 서 있었다.
인영을 본 한립은 눈썹을 미미하게 꿈틀했다. 면사를 벗자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아름다운 얼굴의 여인이었다.
창백한 얼굴의 미인은 하얀 살얼음이 낀 것처럼 전신에서 냉기를 발산했다.
“오래 기다리시게 했습니다.”
진중이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아닙니다. 이 정도 시간은 충분히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한립은 간단히 답하고는 백의 소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맞습니다. 이쪽이 전송권의 주인인 제 벗입니다.”
백의 소녀를 보는 진중의 표정에 애정이 가득했다. 누가 보아도 여인에게 푹 빠져있는 모습이었다.
백의 소녀는 슬쩍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운 듯 진중을 노려보았지만 그녀의 눈빛에도 애정이 담겨 있었다.
한립은 그들이 어린 정인들처럼 애정을 과시하는 작태를 보고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는 설락이라 합니다, 류 수사.”
백의 소녀는 한립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움 많은 성격인 듯했다.
“설 선자,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우선 전송을 위한 신물부터 확인해 볼 수 있겠습니까?”
한립도 같이 고개를 숙였다.
소녀는 진중과 마찬가지로 합체기 최고봉의 수행에 전신의 기운이 당장이라도 다음 경지로 넘어갈 수 있을 만큼 충만했다.
“물론이지요.”
설락은 검은 영패를 꺼내 보였다. 한 면에는 ‘흑풍(黑風)’이, 다른 면에는 ‘나이(挪移)’가 적힌 손바닥 크기의 영패로 한립이 흑풍도에서 구했던 것과 똑같았다.
한립은 바로 탁자에 선원석 10개를 내려놓았다. 설락이 그것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류 수사, 제가 분명 선원석 15개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진중의 표정도 굳어졌다.
“부끄럽지만 저 역시 형편이 좋은 편이 아니라서 선원석은 10개 밖에 드릴 수 없을 듯합니다. 괜찮으시면 다른 물건으로 나머지 선원석 5개를 대신해도 되겠습니까?”
한립은 말을 하면서 탁자에 흰색 수정돌 다섯 개를 내려놓았다. 주먹 크기의 돌들은 한기를 풀풀 내뿜고 있었다.
솔직히 선원석 15개를 내놓는 것은 그에게 별 어려운 일은 아니나 지금은 합체기 수사인 척해야 했다.
흑풍해역 같이 곤궁한 지역에서는 진선경 초기의 지선도 선원석 15개는 지니기 어려울 것이다.
“한백정(寒魄晶)!”
설락은 하얀 수정돌을 무척 반기면서 바로 하나를 집어 들었다. 뭐라고 따지려던 진중도 그녀의 표정변화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한백정 5개면 충분히 선원석 5개의 값어치는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분 생각은 어떠십니까?”
“제 생각에도 그렇네요.”
설락은 빠르게 탁자 위의 수정돌들을 모두 챙겨 넣었다. 한립이 후회라도 할까 조급한 눈치였다. 이에 한립도 미소를 머금고 하얀 영패를 가져갔다.
“신분 보장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를 따라 설 씨 가문에 한 번 다녀가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 문제는 전적으로 설 선자만 믿겠습니다.”
“류 수사, 저 이런 것을 물어도 될지 모르겠지만……. 혹시 더 지니고 계신 한백정이 있으십니까?”
설락은 머뭇거리다가 일말의 희망을 품고 물었다.
“따로 거래하고 싶으신 것입니까?”
“제게 꼭 필요한 것이라 류 수사가 더 지니시고 있다면 제가 고가에 구입 하고 싶습니다.”
한립의 질문에 설락은 진중과 시선을 마주치고 말했다.
“도움을 주시길 간청 드립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제가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드리겠습니다.”
옆에서 진중도 간절하게 거들었다.
“아……. 두 개가 더 있기는 합니다.”
한립은 그런 두 사람을 보다 탁자 위에 하얀 수정돌 두 개를 더 불러냈다. 머리통만한 크기의 한백정은 아까 꺼내 놓은 것보다 훨씬 크고 품질도 좋았다.
설락은 눈을 반짝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것들을 제게 넘겨주시겠다면 가격은 섭섭지 않게 드리겠습니다.”
“필요해서 일부러 구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얻은 물건이니 꼭 필요하시다면 그냥 드리겠습니다.”
한립은 한백정을 백의 소녀 쪽으로 밀어주었다.
“제가 어찌 이런 과분한 선물을 받겠습니까. 원하시는 가격을 말씀해 주시지요.”
설락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저도 사양하지 않지요! 선자께서는 관란성 세가의 자제시니 인근 소식에 밝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최근 흑풍해역에 무슨 큰일이 벌어진 적이 있습니까? 흑풍도는 어째서 흑풍해역을 오가는 이들을 이전보다 더 엄격하게 검문하는 것입니까? 이 두 가지 질문에 답을 주신다면 한백정은 선자의 것입니다.”
“정말입니까?”
“한 번 내뱉은 말은 어긴 적이 없습니다.”
“음……. 관란성에 흑풍해역으로 통하는 유일한 전송진이 있다지만 워낙 폐쇄적으로 교류해서 저도 아는 것이 많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흑풍해역에서 최근 벌어진 큰일이라면 양대 세력인 흑풍도와 청우도 간의 쟁투라고 할 수 있겠지요. 쌍방의 갈등이 점점 심해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설락이 열심히 아는 정보를 털어놓았다.
“그렇습니까? 흑풍해역의 외진 해역도 그 쟁투에 말려들었을까요?”
“확실치 않습니다만, 오가는 수사들에게 듣기로는 아직까지는 흑풍해역 중심지로 전투 구역이 국한되어 있다고 합니다. 외진 해역들은 평화로운 편이란 소리지요. 류 수사, 제가 아는 것은 이게 다입니다.”
설락의 대답에 한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오몽도는 아직 피해를 입지 않았을 것이다.
“아, 그렇지! 10년 전에 흑풍해역에 다녀온 수사에게서 한 가지 소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일로 흑풍해역이 떠들썩했다고 하더군요.”
옆에서 진중이 불쑥 입을 열었다.
“어떤 소식입니까?”
“구체적인 것은 저도 잘 모르고, 흑풍해역 주변부 어딘가에서 낙백량풍(落魄凉風)이 느닷없이 해역 내부로 불어와 섬 몇 개가 파괴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낙백량풍이…….”
한립은 미미하게 움찔했다.
“그 일은 저도 들었습니다. 낙백량풍은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흑풍해역과 외부 세계를 단절하는 천연의 장벽이 되어주었는데 이런 이변이 일어난 것은 처음이라더군요.”
설락도 덧붙였다.
“알겠습니다. 제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도 답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한립의 물음에 이번에는 설락과 진중 둘 다 고개를 저었다.
“그건 관란성에서도 원인을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지만 아무도 내막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어찌 되었든 제 질문 중 하나에 답을 주셨으니 한백정 하나는 그냥 가져가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설락은 수정돌 하나를 들어 올리고 나머지 한백정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머지는 제가 선원석 2개를 드리고 가져가고 싶은데, 그래 주실 수 있을지요?”
한립은 거절하지 않고 그렇게 하게 두었다. 세 사람은 잠시 한담을 나누다 주루를 떠나 설 씨 가문으로 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