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649화 (1,406/2,000)

1649화. 수배

*

촉룡도 종문 대전 안.

구양규산 등 십여 명의 금선 도주들이 중상을 입었는지 불안정한 기운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들을 마주 보고 선궁 금선 8명이 서 있었고, 유일하게 소진한만이 상석에 앉아 있었다. 그런 소진한의 태도에 구양규산 등 몇몇 촉룡도 도주들의 표정이 편치 않았고 심지어 몇몇은 은근히 분노를 드러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소진한은 불만스러운 태도를 모른 척하며 물었다.

“궁주께 아룁니다. 호언 도인과 운예의 행적은 파악했습니다. 중상을 입고 상아대륙으로 달아났다고 합니다. 노월 장로가 인원을 꾸려 추격에 들어갔으니 곧 소식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백리염은 무슨 비술을 사용한 것인지 전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선궁 장로 중 한 명이 보고했다.

“알겠습니다. 백리염을 주살하지는 못했지만, 그자도 중상을 입어 수행이 크게 떨어졌고 수백만 년 공들인 업화가 몸으로 되돌아갔으니 마음을 다잡기 쉽지 않을 겁니다. 이런 때에 다섯 번째 겁이라도 강림하면 어떻게 될지 모를 일입니다.”

소진한은 잘 되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선궁 수사들과는 달리 그 말을 듣는 구양규산 쪽 수사들은 마음이 심란해 보였다.

“구양도주, 호언 도인과 운예는 천정에서 쫒고있는 윤회전 역도를 돕는 죄를 범했으니 천정의 규정에 따라 그 직전제자들도 잡아가 엄히 죄를 물어야 합니다. 수고스럽더라도 이 일을 맡아 주실 수 있겠는지요?”

소진한은 고개를 돌려 구양규산을 향해 말했다. 상의하는 어투였지만 분명한 명령이었다.

“예.”

구양규산은 얼굴 근육을 꿈틀거리며 조그맣게 답했다.

“좋습니다, 다들 이만 가보세요.”

소진한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저었다.

이에 선궁 장로들은 빠르게 대전을 빠져나갔고, 촉룡도 도주들은 구양규산이 눈짓을 하고서야 발걸음을 떼었다.

“구양도주, 북한선궁이 대체 무슨 꿍꿍이란 말입니까! 백리염의 일도 일단락났는데 왜 안가고 우리 촉룡도에 눌러앉아 있냐는 소립니다. 설마 이 틈에 촉룡도를 집어삼키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대전을 빠져나온 이족 도주인 금털 장한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들을 도와 백리도주를 몰아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백리도주만 있었어도 소진한 저 쥐새끼 같은 놈이 촉룡도에서 저리 기고만장할 수 있었겠습니까!”

은색 피부의 이족 여인도 서늘하게 불만을 토로했다. 주먹을 불끈 쥔 도주들 사이에서 구양규산이 씁쓸하게 침묵을 지켰다.

선궁의 의도는 뻔했다.

촉룡도는 대규모 전투로 세력이 크게 꺾였고, 적잖은 제자들이 종문을 떠났다. 게다가 지금 촉룡도에는 소진한에게 대항할 자가 한 명도 없으니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는가.

구양규산 등이 애석해하고 있을 때, 촉룡도 종문 대전 안의 소진한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수사들이 나가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전을 서성였다.

쉭!

갑자기 하얀빛이 그의 몸에서 빠져나와 흐릿한 인영의 모습을 비추었다. 그는 중년 사내로 전신에서 요란한 하얀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도 장로님.”

소진한은 걸음을 멈추고 억지웃음을 짜냈다.

“소진한, 벌써 몇 달이 지났는데 내 아들을 죽인 흉수는 알아내지 못한 것이냐?”

하얀 인영이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룁니다! 공자를 죽인 흉수는 촉룡도의 외문장로로, 이름은 려비우라 합니다! 촉룡도를 탈출해 달아났기에 수사들을 파견해 찾는 중입니다.”

“외문장로? 겨우 외문장로 따위가 내 아들을!”

“평범한 장로는 아니었던 듯싶습니다. 처음 촉룡도에 입문했을 때는 진선 초기의 경지였는데 천 년이 채 되지 않아 지금은 진선 후기의 수행을 지녔더군요. 게다가 촉룡도의 진언보륜경을 수련했고요. 또한……. 아무래도 백리염 그리고 윤회전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소진한은 서둘러 설명했다.

“그놈이 누군지는 상관없다. 내 아들을 네게 맡겼는데 살해당했어! 소진한, 이 일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넌…….”

“안심하셔도 됩니다. 반드시 도 장로님께서 만족하실만한 대답을 드리겠습니다!”

소진한은 얼굴을 굳히고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이후 하얀 인영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도 소진한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여봐라!”

그의 외침에 누군가 대전으로 들어왔다. 금색 장포를 입은 청년이었다.

“궁주를 뵙습니다.”

* * *

2년 후.

뇌명성 바깥 해안 부두에 선박 한 척이 정박해 사람들이 내렸다.

“…….”

까만 거한으로 변신한 한립도 사람들 사이에 섞여 부두에 내리고는 추억에 젖은 눈으로 뇌명성을 바라보았다.

그는 기운을 대승기 초기 수사로 감춰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한립은 조용히 주변을 살피고는 빠른 걸음으로 성안으로 들어갔다.

뇌명성은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위로는 울창한 극뢰수들이 하늘을 막고 있었고 그 아래로 난 복잡한 길에는 수사들이 가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금색 건물, 그러니까 뇌명성 선잔 앞에 도착해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안에는 오가는 수사들이 많았고 임무가 적혀 있는 안쪽 벽에는 여러 임무가 적혀 있었다. 사람들 틈에 끼어들어 임무 벽 앞에 선 그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것은 바로 가장 앞줄에 쓰여 있는 금색 글자들 때문이었다.

“촉룡도 장로 려비우 수배, 이 자를 붙잡는 수사에게는 선궁과 촉룡도에서 선원석 2만 개를,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 자에게는 선원석 2천 개의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글자 뒤에는 한립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성가시게 되었습니다. 선잔은 각 대륙에 퍼져 있어서 다른 대륙에도 추살령이 떨어졌을 겁니다.”

해 도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선원석 2만 개! 선궁이 저를 이리 과대평가해 주니 고마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한립은 무표정한 얼굴로 냉소를 흘렸다.

“려비우? 이 자는 대체 누구기에 선궁에서 선원석을 2만 개나 걸은 것입니까?”

“아직 모르십니까? 몇 년 전 촉룡도에서 반란이 발생했는데, 듣기로는 제1도주가 사악한 조직을 꾸려서 선역 전체에 해를 끼치려 했다더군요! 다행히 선궁의 소 궁주께서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음모를 막았다고 합니다. 아마 이 자도 촉룡도 제1도주와 한패겠지요.”

“그런 나쁜 놈들이 있나! 어서 잡혔으면 좋습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얼마나 나쁜 짓을 했으면 현상금이 이리 많이 걸렸겠어요!”

임무 벽 앞에 모인 수사들이 수군거렸다. 한립은 그들 틈에 잠시 끼어 있다가 선잔 내부를 한 바퀴 돌아보고는 몸을 돌렸다.

선궁에서 그를 금방 찾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선잔을 나선 한립은 뇌명성의 재료상점들을 순회했다.

뇌명성은 황란대륙과 고운대륙을 잇는 교통의 요지라서 여러 종류의 재료들이 풍부했다. 흑풍해역으로 돌아가면 이런 재료들을 구하기 쉽지 않을 테니 무상맹에만 의존할 수는 없었다.

그는 볼 일을 마치고 바로 뇌명성을 떠났다.

이때 그는 더이상 까만 거한이 아니라 의복 자락을 나풀거리는 합체기 백면서생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푸른 빛줄기로 변해 느긋하게 날아가는데 해 도인의 목소리가 뇌리에 울렸다.

“뇌명성에 전송진이 있지 않습니까? 그걸 이용하면 훨씬 빠르고 편할 텐데요.”

“뇌명성은 황란대륙의 이름난 거대성이라 선궁에서 조사를 시작하면 눈여겨볼 곳 중 하나입니다. 강제로 본모습을 드러내게 할 보물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런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전송진을 이용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한립은 차분하게 설명하면서 속으로 다짐했다. 뇌명성이 아니라 앞으로 어떤 성에서도 전송진은 이용하지 않기로 말이다.

어차피 그의 둔술이면 황란대륙을 날아서 통과해도 몇 년이 걸리지 않았다.

“성에서 물건을 구하면서도 수시로 용모를 바꾸고 정말 조심성이 많으십니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요.”

한립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뒤에 누가 쫓아오지 않는지 수시로 확인하며 꽤 멀리 날아간 후에야 속도를 높였다.

그는 몰랐지만 이런 신중함이 그에게 위기를 넘게 해주었다.

북한선궁은 그를 찾아내기 위해 엄청난 재력과 인력을 쏟아부어 각지 거대성의 전송진에 특수한 감응 금제를 설치했다.

선궁의 고인(高人)이 특수 제작해 한립이 전투 당시 남겨둔 기운을 바탕으로 그가 나타나면 공명하는 금제였다.

진선경 수사들이 지닌 기운을 감추거나 바꾸는 수단이 한둘이 아니라 백이면 백 다 감응 금제에 걸리지는 않겠지만 선궁도 할 수 있는 노력은 다한 셈이었다.

이 일을 위해 북한선궁은 대량의 선원석을 소비했고, 심지어 소진한의 주머니에서도 선원석이 나갔다.

게다가 금제가 설치된 곳은 전송 대전 자체가 아니라 전송진이었다.

소진한은 보통 수사들이 전송될 때 무의식중에 공법을 운용해 몸을 보호한다는 사실에 착안해서 그 순간 노출된 기운에 감응하도록 수를 써두었다.

뇌명성 인근에도 보는 눈이 많아서 한립은 외진 길을 따라 전속력을 다 내지 않고 평범한 진선경 수사와 엇비슷한 정도로만 날아갔다.

인적이 드문 지역으로 빠져나온 한립은 점점 고도와 속도를 높였다.

황란대륙 횡단이 위험하다 해도 지금 그의 실력에는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그는 길을 재촉해 3년이나 흘러서야 드디어 임해성에 도착했다.

한립은 바로 성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하늘에서 성을 내려다보다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흑풍해역으로 통하는 전송진이 있는 동굴이었다.

“하아, 돌아왔구나!”

한립은 신영을 흐릿하게 변해 그곳으로 날아갔다.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전송진이 있는 장소는 까먹지 않고 있었다.

‘흠?’

둔광을 거두고 내려선 그가 미간을 좁혔다. 해변 동굴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작은 성이 들어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하얀 옥돌로 만든 성벽이 십여 리 정도 둘러싸여 있었고, 그 바깥에는 희끄무레한 금제가 은은한 빛을 발했다.

금제 너머로 성벽보다 더 높은 하얀 탑이 하나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성벽에 있는 문에는 관란성(觀瀾城)이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적잖은 수사들이 줄을 지어 성안으로 들어가고 있어서 그도 누런 얼굴의 합체기 청년으로 모습을 바꿔 맨 끝에 섰다.

“낯선 얼굴 같은데 관란성은 처음입니까?”

그가 자리를 잡자마자 앞줄에 있던 통통한 몸에 동그란 얼굴을 가진 새까만 피부의 청년이 뒤를 돌아보며 말을 걸어왔다.

실실 웃는 모습이 붙임성이 좋은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한립은 짤막하게 답했다.

“오, 그래요? 어디서 오셨는지요? 바다로 나가서 요수를 사냥하러 오신 겁니까?”

청년은 한립의 미적지근한 태도를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웃는 얼굴로 질문을 쏟아냈다.

한립이 대답 없이 눈앞의 합체 후기 청년을 훑어보았다.

“하하! 초면에 좀 실례였나요? 저는 진중이라 합니다. 관란성에서는 제법 이름이 나 있지요. 혹시 무리를 이루어 요수 사냥을 하실 생각이 있으면 언제든 저를 찾아주세요.”

동그란 얼굴 청년은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는 한립을 보고는 멋쩍게 웃으면서 신분을 밝혔다.

“진 수사, 저는 류 가라 합니다.”

한립이 표정을 풀며 작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류 수사셨군요!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진중이라는 청년은 입담이 좋은 편이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분위기가 훨씬 편해졌다.

“그런데 관란성이 언제 세워진 지 아십니까? 수백 년 전에 왔을 때만 해도 보지 못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한립은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아하, 그러셨군요! 백여 년 전에 세워진 성인데 흑풍해역으로 통하는 전송진 덕에 명성을 얻게 되었지요. 그 뒤로 자연히 흑풍해역 관련 산물을 구하기 위해 수사들이 모여들었고 오늘날의 번영을 맞게 되었습니다.”

진중이 아는 바를 줄줄 늘어놓았는데 그 말을 듣는 한립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그 말은 즉, 흑풍해역과 외부 세계의 연계가 긴밀해졌다는 뜻이었다.

흑풍해역의 수사들에게는 북한선역의 풍부한 수도 자원을 공급받을 수 있으니 희소식이겠지만 몸을 숨기러 온 그로서는 반길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