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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648화 (1,405/2,000)
  • 1648화. 수확

    *

    “나를 따르거라.”

    한립이 먼저 객잔을 나서서 성 서쪽의 고즈넉한 정원, 관월원(觀月園)으로 들어섰다.

    영맥과 붙어 있어 천지영기가 풍부하고 인공적으로 조성된 대나무 숲에 독채 저택들이 곳곳에 퍼져있었다. 이곳은 외부에서 온 고계 수사들을 위해 세워진 임시 동부로 그들의 취향에 맞게 구성되어 있었다.

    한립 일행은 하얀 장포를 입은 청년 수사의 안내를 받아 정원을 거닐었다.

    “고인을 청해 설계한 관월원은 총 갑, 을, 병, 정 네 개의 구역으로 나뉩니다. 갑 자 구역의 동부가 영기가 가장 농염하고 정 자 구역의 동부는 비교적 연하지요. 저희가 있는 곳이 정자 구역인데, 생각보다 천지영기가 풍부하지 않습니까? 성의 다른 곳에 비해 이곳에서 수련해도 수련 속도가 2, 3할은 빨라질 것입니다. 물론 갑 자 구역에서 생활하시면 5할은 속도를 높일 수 있겠지만요!”

    백포 청년은 열성적으로 안내를 했다.

    “갑 자 구역으로 가지.”

    “예, 저만 따라오시면 됩니다.”

    무표정한 한립의 말에 백포 청년도 그가 책임자라는 것을 눈치채고 얼른 갑 자 구역으로 이동했다. 죽림과 이런저런 문을 지날수록 천지영기가 진해져서 촉룡도 내의 산봉우리와 비교해도 그리 떨어지지 않았다.

    몽웅과 몽광은 희희낙락했지만 몽천천은 묵묵히 그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여기가 바로 갑 자 구역입니다. 마음에 드시는지요?”

    “빈 동부가 얼마나 되지?”

    “세 곳이 비어있습니다.”

    한립의 물음에 백의 청년이 밝게 답했다.

    “오랫동안 거주하려면 얼마나 들겠는가?”

    백의 청년이 가격을 부르자 한립은 대답 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천운성에서는 가장 수련하기 좋은 곳입니다. 가격이 조금 비싼 것은 알지만 그만한 가치를 하는…….”

    혹시 몰라 다급해진 백의 청년의 부연 설명에 한립은 저물대를 던져주었다.

    “됐네. 3곳 모두 내가 3백 년간 빌리지.”

    저물대 안을 살핀 백의 청년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떠올랐다.

    “예! 세 동부의 금제 영패입니다. 제가 바로 그곳으로 모셔다 드릴까요?”

    “우리가 알아서 갈 터이니 물러가게.”

    “예!”

    백의 수사는 힘차게 답하며 눈치껏 사라졌다. 한립은 저물대를 따로 꺼내 세 개의 영패와 함께 그를 따라나선 세 사람에게 주었다.

    “안에 수련에 필요한 것들이 들어 있으니 너희는 안심하고 수련에만 정진하거라. 몽운귀와 손부정에게도 연락을 취해두었다.”

    “려 대인께서는 언제 돌아오실 생각이신지요?”

    몽웅과 몽광이 고개를 조아리는데 몽천천이 참고 있던 질문을 던졌다.

    “짧으면 수십 년 길면 백 년 이상이 걸릴 테지. 그동안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떠나도 좋다.”

    한립은 차분하게 답하고는 그녀가 다른 말을 하기 전에 휙! 하고 사라져 버렸다.

    무심결에 한립이 서 있던 곳으로 다가간 몽천천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의지를 다졌다.

    * * *

    몇 달 뒤.

    뇌폭해양 모처를 새까만 선박이 지나가고 있었다.

    선박은 무섭게 떨어져 내리는 뇌전에 아랑곳하지 않고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바로 고운대륙에서 출발해 황란대륙 뇌명성으로 향하는 과해뇌주였다.

    바깥은 먹구름이 가득하고 천둥 번개가 내리치는데 선박 안은 무척 평화로웠다. 사람들이 선실을 오가며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리고 최고층의 주루와 다실은 꽤 북적였다.

    몇몇 수사들은 옹기종기 모여서 소규모 교환회를 열거나 서로의 깨달음을 교류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간층의 어느 선실은 푸른 보호막으로 둘러싸여 외부의 소리가 단절되어 있었다. 침상에 앉아 있는 까만 얼굴의 거한은 가부좌를 틀고 7개의 남색 구슬을 띄우고 고르게 호흡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던 거한은 일곱 고리가 강렬한 법칙 파동을 내뿜자 웃음을 지으며 수결을 거두었다. 일곱 고리를 불러들인 까만 거한은 용모를 바꾼 한립이었다.

    일곱 고리의 이름은 칠요성환(七曜星環)으로 뚱보 흑의인의 저물법기에서 찾아낸 선기였다. 주요 신통은 적을 가두는 것이라 함유한 법칙의 힘도 구속하고 금제하는 속성이었다.

    며칠 시험을 해보니 위력이 상당했다.

    특히 밤에 신통을 펼치면 별의 힘과 호응해서 위력이 크게 증폭되었다. 당시 똥보 흑의인은 이런 선기를 써볼 틈도 없이 그의 공격에 당하고 말았다.

    한립은 칠요성환을 체내에 집어넣었다. 원합오극산을 되찾았지만 이런 위력적인 보물은 많을수록 좋았다.

    며칠 동안 연화를 시켜서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완전히 장악할 수 있을 듯했다.

    그 밖에 마른 흑의인의 저물 법기에서 찾은 수라천귀번(修羅天鬼幡)이란 선기도 위력이 나쁘지 않았는데 음산한 속성의 귀도(鬼道) 선기라 그의 공법과 잘 어우러지지 않아 저물탁 속에 보관 중이었다.

    화려한 복색 청년은 금선경 수사에 특수한 신분으로 보였던 만큼 지니고 있던 보물도 상당했다.

    선기만 해도 네 개나 되어서 원합오극산과 검은 벼루 외에 은색 방울과 검은 송곳니 모양 괴검을 챙길 수 있었다.

    한립은 잿빛 산을 입에서 분출했다. 작은 산에 감도는 잿빛에는 주술문자와 강렬한 법칙의 힘이 함유되어 있었다.

    그가 가장 기본적인 뼈대만 마련했다면 화려한 복색 청년은 어디서 이렇게 많은 대량의 재료들을 구했는지 따로 술법을 펼칠 것도 없이 다섯 극산이 하나로 융합되어 있었다.

    한립은 생각에 잠겼다.

    영계에 있을 때는 법칙의 힘에 대해 몰라 원합오극산의 괴이한 역량에 대해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비승을 해서 진선계에 이른 그는 원합오극산이 발산하는 법칙파동을 더욱 민감하게 느낄 수 있었다. 구금 능력을 지닌 것은 칠요성환과 비슷했는데 무언가가 달랐다.

    한립은 고개를 젓고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잃어버렸던 보물이 더 세져서 돌아왔으니 경사였다.

    그는 원합오극산을 천천히 연화할 작정이었다.

    청년의 저물법기에는 잃어버렸던 풍뢰시도 들어있어 그를 기쁘게 했다.

    원합오극산처럼 강력한 보물은 아니라도 인계에서 늘 그와 함께였고 손에 익은 보물이라 되찾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

    청년은 풍뢰시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지 따로 제련하지 않고 봉인만 해서 저물법기 구석에 넣어두고 다녔다. 그 말은 즉 따로 성가시게 제련할 필요 없이 그냥 봉인을 풀어 사용하면 된다는 소리였다.

    지금 그의 몸속에는 원합오극산, 칠요성환 그리고 은색 방울이 연화중이었다. 청죽봉운검을 튕겨낼 만한 모종의 법칙을 지닌 선기인데 잘 길들여서 사용해야 했다.

    검은 송곳니 괴검은 수라천귀번과 비슷하게 음산한 속성을 지니고 있어 굳이 건드리지 않았다.

    의식의 힘이 동급 진선경 후기 수사를 월등히 넘어서는 그라도 동시에 세 가지 선기를 제련하는 게 한계였다.

    멸혼진광을 펼치는 검은 벼루는 원합오극산과 은색 방울보다도 법칙의 힘이 강한 보물이었다. 문제는 금제가 걸려있는지 어떻게 해도 발동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립은 한참 시도해 보다 일단 시간을 갖고 천천이 처리하기로 정했다. 청년과 흑의인들의 저물법기에는 선기 말고도 진귀한 재료, 단약 등이 풍부하게 들어있었다.

    특히 청년의 수중에는 법칙의 힘을 함유한 재료만 무려 열댓 종류가 나왔다. 선원석도 다 합쳐서 만 개가 넘게 들어있어 한동안 선원석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한립을 가장 기쁘게 한 것은 청년의 저물법기에 있던 도단 재료들이었다. 그가 오매불망하던 재료들이 대량으로 들어있었다. 이로써 도단은 남은 재료 9개 중 7개가 채워졌고 수량도 넉넉했다.

    좋으면서도 이런 우연이 있을까 의아해하던 그는 자신의 것과 똑같은 도단 약방을 찾아내고서야 겨우 이해했다.

    화려한 복색 청년도 도단을 제련할 마음을 품고 재료들을 끌어모아 둔 것이다. 이제 도단의 재료 중에 없는 것은 천조삼과 노응초 뿐이었다.

    무상맹 쪽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언젠가는 다 모을 수 있을 것이다.

    팟.

    그가 문득 표정이 달라지며 손바닥 크기의 금색 영패를 꺼내 들었다.

    특수 금속으로 제작되어 무게가 천 근은 넘게 나가는 영패는 한 면에는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금룡 문양이 다른 면에는 도우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글자 위의 깃털 관(冠) 문양을 본 한립이 영패를 든 채 침음했다.

    “……!”

    그는 갑자기 창문을 열어 미친 듯이 뇌전이 떨어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과해뇌주 자체의 금제 덕분에 창문을 열어도 그리 시끄럽지 않았다.

    잘 보이지 않는 금빛이 극히 먼 곳에서 번득 사라졌다가 한립의 선실 안에서 뇌전진법을 이루고 해 도인이 나타났다.

    전신에 흐르는 금색 뇌전을 체내로 흡수하자 뇌진도 사라졌다.

    “회복하신 듯합니다.”

    해 도인을 살피던 한립이 부드럽게 말했다.

    “이곳의 뇌전의 힘이 강해서 생각보다 덕을 많이 보았습니다.”

    해 도인은 곧장 바닥에 자리를 잡고 가부좌를 틀었다. 그는 이전 전투로 기력이 많이 상했는데 뇌폭해양에서 풍부한 뇌전의 힘을 흡수하며 몇 개월 만에 회복해 한립을 안심시켰다.

    금선급 조력자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큰 차이였다.

    “도우라는 자를 걱정하고 계셨나 봅니다.”

    “도우야 이미 죽였는데 걱정할 필요 없지요. 그저 선궁에서 도우를 죽인 사람이 저인 것을 알아냈을지 생각해 보고 있었습니다.”

    무상맹을 통해 금색 영패를 조사해 본 결과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은 선궁 장로 영패로 화려한 복색 청년의 이름이 도우였다.

    도우는 원래 북한선역 사람이 아니라 특수한 신분과 배경을 지니고 다른 선역에서 경험을 쌓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는데 그의 손에 죽고 만 것이다.

    북한선궁이 이 사실을 알면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가 얌전히 과해뇌주를 타고 고운대륙을 떠나 흑풍해역으로 돌아가는 것은 지기화신이 잘 있는지 확인하고 싶기도 했고, 피신할 곳이 필요해서였다.

    흑풍해역은 아주 외진 곳에 있고 외부와 격리되어 있어 선궁의 추살령을 피하기에 적격이었다.

    “북한선궁의 실력에 수사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제때 전송뇌진을 이용해 먼 곳까지 달아나서 수사를 잡기는 쉽지 않겠지요.”

    “저도 그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해 수사께서 이렇게 빨리 뇌광진법을 장악한 것은 의외입니다.”

    “현묘한 진법이기는 하나 뇌둔술과 공간의 힘을 결합해 사용하는 것이라 뇌전의 힘을 다루는 데 익숙한 제가 익히기에 적합했습니다.”

    “뇌폭해양에서 수련하시면서 별다른 점은 발견하지 못하셨습니까?”

    “별다른 점이요? ……아니요,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립의 질문에 해 도인이 기억을 더듬다 고개를 저었다. 한립은 망설이다 예전에 뇌운 소용돌이 속에서 본 거대 눈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입니까!”

    놀란 해 도인의 눈빛이 신중해졌다.

    “기억나는 거라도 있으신지요?”

    “아니요, 저도 뇌폭해양은 처음이라서요. 다만 쳐다보는 것만으로 수사에게 중상을 입히는 것은 평범한 태을옥선도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하긴 금선 최고봉이라는 소진한이나 백리도주에게서도 확실히 그런 위기감은 느끼지 못했습니다. 뇌폭해양 중심부로 가고 있으니 해 수사께서도 앞으로는 함부로 나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무서운 존재가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니까요.”

    “알겠습니다.”

    해 도인과 한립은 대화를 멈추고 각자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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