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6화. 원영 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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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장, 80장, 70장…….
원합오극산이 방출하는 잿빛 광채의 압력에 진업보륜의 금빛 파문 구역이 위축 되어갔고 이에 따라 하얀빛의 속도도 빨라졌다.
이런 기세면 괴이한 하얀 빛은 결국 한립의 몸에 닿고 말 것이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한립은 하얀빛이 가까워지기만 하는데도 혼백이 마구 찔리는 듯한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체내의 법력을 진언보륜에 콸콸 쏟아 부어보아도 금빛 파문의 수축을 늦추는 게 다였다. 청년이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입에서 검은 주술문자를 품은 빛덩이를 날려 보냈다.
빛덩이는 둘로 나뉘어 거대 벼루와 원합오극산으로 스며들었다.
두 보물의 기운이 강성해지면서 한립을 압박하는 잿빛 공간도 실체화가 되어 금빛 파문이 오십 장 내로 줄어들고 말았다.
창백해진 한립의 곁으로 하얀빛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쿠쿵.
승리를 직감한 청년이 마무리를 지으려 할 때, 그의 뒤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커다란 황금 집게발 허상이 떠올라서 금빛 뇌전과 법칙파동을 머금고 달려들고 있었다.
청년은 급한 마음에 수결을 맺어 검은 갑옷을 불러냈다.
흑자색 광택이 도는 갑옷의 투구에는 용머리 조각이 붙어 있었고 어깨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 하늘을 찌를 듯한 흉살기를 내뿜었다.
쾅!
황금 집게발이 흑자색 갑옷을 찔러 경천동지할 굉음을 냈다.
튕겨 나간 청년의 갑옷에 미세한 균열이 생겨있었고, 체내로 전해진 막대한 힘에 오장육부가 진탕되어 울컥 피가 쏟아져 나왔다.
주인이 공격당해 통제를 상실한 하얀 빛기둥이 드디어 한립과 열 장 거리를 두고 스스로 흩어졌다.
원합오극산이 내리쬐던 잿빛 광채도 불안정해져 있었다.
화아앗.
압박감이 줄어든 한립은 천룡, 청란, 뇌붕 등 허상들을 방출했다가 체내로 흡수했다.
자금색 광채를 폭발적으로 일으킨 그는 단번에 삼두육비의 자금색 거인으로 변해서 금색 비늘과 은색 문양으로 뒤덮인 몸에 7개의 별 문양이 반짝였다.
방대하기 짝이 없는 그의 몸에서 강렬한 기운이 퍼져 회색 공간 자체를 뒤흔들었다. 자금색 거인은 한 손에 푸른 거검을 불러내 굳세게 쥐고 회색 장막을 향해 검기를 날려 보냈다.
서걱!
외부로 노출된 균열을 통해 회색 공간을 빠져나간 거인의 미간에서 칠흑 같은 제3의 눈이 떠졌다.
슉!
제3의 눈에서 수정 빛기둥이 쏘아져 흐릿하게 작은 검으로 변해 사라졌다. 작은 검이 화려한 복색 청년의 뒤통수에서 나타나 찔러 들어가기까지 모든 공격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집게발에 부상을 입고도 청년은 빠르게 반응해 검은빛의 손으로 뒤통수로 날아드는 작은 검을 잡으려 들었다.
퐁!
빛의 손에 붙들리자마자 작은 검은 거품처럼 터져 사라졌다.
흠칫 놀란 그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뇌리 속에서 작은 검이 나타나 혼백을 마구 가르고 다녔다.
“으악!”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는 청년 뒤에 해 도인이 나타나 두 손을 펼쳤다.
콰릉!
커다란 금빛 뇌전 구슬이 두 개나 떠올랐다.
표면에 굵은 뇌전들이 치지직거리는 것이 심상치 않았고 강렬한 법칙파동을 발산하는 주술문자가 가득했다.
해 도인의 합장에 두 거대 구슬이 융합되어 뇌전 거검으로 변했다.
천지영기들이 오색 빛구슬로 뭉쳐 거검으로 미친 듯이 빨려 들어가 바람이 몰아치고 주변 백 리가 어두워졌다.
청년이 극심한 통증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거검은 이미 그의 몸을 가르고 있었다.
흑자색 갑옷이 콰직! 터지고 청년의 육체는 뇌전에 휩싸여 핏물과 살점으로 흩어졌다.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간 한립은 멀리서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이때 살점 속에서 아주 새까만 빛 덩이가 번득 튀어나와 허공으로 숨어들었다. 그걸 본 한립은 미간의 제3의 눈을 번득여 검은빛을 쏘아 보냈다.
펑!
허공 어딘가가 극심하게 진동하면서 손가락 크기의 검은 소인이 비척비척 빠져나왔다. 화려한 복색을 하고 있던 청년의 원영이었다.
파멸법목으로 날린 광선에 행적을 들킨 원영은 당황한 기색으로 작은 손을 움직이려 들었다.
팟.
허공에 수정 사슬이 기척 없이 나타나 원영을 번개처럼 휘감기 전까지. 수정 사슬은 의식의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한립과 해 도인이 그 앞뒤로 이동했다. 해 도인의 손에는 각각 원합오극산과 검은 벼루가 들려있었다.
“이런 필살기를 숨겨 두고 있었다니, 내 보기에 사슬은 의식 사슬이겠지? 의식과 관련된 금지된 비술이라도 익힌 것이냐?”
청년 원영은 힐끗 해 도인을 보고는 담담하게 물었다.
한립은 그를 상대해 주지 않고 푸른 빛을 날려 아래에 떨어진 뚱보와 말라깽이의 저물법기들을 거두었다.
이어서 화염을 날려 청년의 시체 잔해를 불사른 뒤 그 안에서 검은 반지를 불러왔다.
그는 느긋하게 전리품을 넣어두고는 원영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제 말해보시지요. 당신은 대체 누구기에 나를 노린 것입니까? 만족스런 답을 준다면 깔끔하게 저승길로 보내드리겠습니다.”
“허허, 죽일 테면 죽여 보거라! 네 놈의 말에 대답하라고? 웃기는 소리!”
청년의 냉소에 한립은 곧장 두 손가락으로 원영의 머리통을 붙잡았다. 그윽한 검은 빛이 폭발적으로 일어나 원영을 꿰뚫었다.
청년 원영은 잔뜩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이를 악물면서도 조롱을 그치지 않았다.
“겨우……. 진선 주제에, 금선에게 추혼술을 하려고 해? 제 주제도 모르는 놈!
한립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전력을 다해 추혼술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상대의 말처럼 아무리 애를 써도 원영의 의식 깊은 곳까지는 다다를 수 없었다.
“한 수사, 괜히 힘 빼지 마시지요. 진선이 금선의 경지에 이르면 혼백 자체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수사의 수행으로는 금선에게 추혼술을 쓸 수 없고 괴뢰에 불과한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해 도인이 옆에서 그를 말리자 한립이 청년 원영의 머리통을 놔주었다.
“좋은 정보를 주지! 네가 감히 나를 죽인다면 소진한의 영원한 추격을 받게 될 것이다. 나를 놓아준다면 이 자리에서 우리 사이의 은원을 없던 일로 하겠다는 혼백의 맹약을 해주겠다.”
“당신을 살려 보낼 생각이 없다고 분명히 말한 것 같은데요?”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한립은 입에서 정염의 불길을 뿜었다. 청년 원영은 은색 화염에 불살라지면서 끔찍한 비명을 질러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원영은 재가 되어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전에는 무적에 가깝던 정염의 불길이 청년의 원영에는 통하지 않았다.
이에 한립은 의식으로 은색 불길을 소용돌이로 만들었다.
화륵!
소용돌이 속에서 불길의 온도가 배로 높아졌다.
“한립……. 천정이 결단코 너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원영은 참혹한 비명을 지르며 점점 투명하게 변해갔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소멸하는 현상이 보이지 않았다.
한립은 손끝에서 푸른 검기까지 날려보았다.
펑!
허리에 가느다란 흔적이 남았다가 서서히 봉합되었다.
“금선경 수사의 원영은 금강석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진선경 수사와의 본질적인 차이이기도 하고요. 이런 식으로 제거하면 몇 년이 걸릴 겁니다. 시간을 지체하면 백옥봉 쪽에서 낌새를 차릴 수도 있습니다.”
해 도인이 끼어들었다.
“해 수사의 의견으로는 이 원영을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살려두면 반드시 화근이 될 터인데요.”
“사실, 금선 원영은 진선 수사나 멸하기 어려운 것이지 동급 금선 수사에게는 방법이 따로 있습니다. 선원석이 아깝지 않으시다면 제가 해보겠습니다.”
“방법이 있다면 당연히 따라야지요.”
한립의 허락에 해 도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벌렸다.
푸슉!
금빛 뇌전이 그물을 만들어 청년 원영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염 불길의 은색과 그물의 금색이 어우러진 동그란 빛구슬이 완성되었다.
파치치칙!
빛구슬 속에서 원영이 몸부림치며 빠르게 투명해졌다. 일다경이 흐르고 해 도인이 금빛 뇌전을 거두자 은색 불길에 둘러싸인 원영만 남았다.
실패라 여겨 표정이 어두워졌던 한립이 얼굴을 폈다. 껍데기는 남아 있지만 눈이 풀린 게 혼백의 힘은 분리되어 사라진 게 분명했다.
“어째서 원영 자체를 없애지 않으신 겁니까? 두 번의 공격으로 선원석을 500개 정도 사용했어도 아직 여분이 있을 텐데요.”
“……선원석을 아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금선 원영은 그 자체로 금혼단(金魂丹)이라는 단약의 주재료로 쓰이기에 남겨둔 것이지요. 거기다 원영이 이 상태가 되면 어떤 금제도 남아 있을 수 없지요. 혼백과 함께 철저히 세상에서 지워진 겁니다.”
“금혼단이요? 어디에 쓰이는 것입니까?”
“저도 모르지만 기억의 파편에서 금혼단을 떠올렸습니다. 아주 희귀한 단약인 것 같은데 자세한 내용이 생각나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한립은 의식 사슬을 회수하고 금선 원영을 옥함에 담아 여러 부적으로 봉인했다.
“잃어버렸던 보물을 되찾으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이것도 비범한 물건 같군요.”
해 도인은 들고 있던 원합오극산과 검은 벼루를 넘겨주었다. 한립은 벼루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검은 벼루는 품계가 극히 높은 후선천기로 모종의 의식 관련 법칙의 힘을 함유한 멸혼진광이라는 신통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것에 당해 기억을 잃고 영환계를 떠돌아다닌 것이다. 한립은 눈길을 돌려 원합오극산을 살폈다.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비승의 겁을 위해 제련한 보물을 다시 만나니 감회가 새로웠다.
원합오극산은 잃어버렸을 때와 달리 근원은 여전히 원자신산 등 다섯 개의 산봉우리였지만 적잖은 재료가 더해져 새로운 신통을 지니고 있었다.
직접 잿빛 공간에 갇혀본 그로서는 더욱 흥미가 생겼다.
“백옥봉 전투가 끝나기 전에 떠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만 가로막은 금제가 만만치 않던데 방법이 있겠습니까?”
한립은 두 보물을 거두고 노란 안개 금제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해 도인은 훌쩍 금제로 다가가 살펴보다가 손을 뻗어 짙은 노란빛을 발산했다
한립의 눈빛에 신기함이 떠올랐다.
선괴뢰를 장학한 후로 해 도인의 행동거지는 더욱더 진정한 수사와 비슷해지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현묘한 금제들이 층을 이루어 결합해 있습니다. 대사의 솜씨입니다.”
“파훼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가능할 겁니다. 선원석을 대량으로 소모해서 선괴뢰의 어떤 신통을 발동하기만 한다면요.”
“대량이요? 어느 정도 수량을 말씀하는 것인지…….”
“제게 남은 것에다 3백 개 정도는 더 있어 합니다.”
“아……. 문제없으니 신통을 펼쳐주시지요.”
엄청난 개수에 속이 쓰리면서도 한립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청년을 유인하는 사이 해 도인이 기습하게 하려고 체내에 넣어둔 선원석 만도 6, 7백 개에 달했다.
이제 3백 개를 더 내주면 그가 지닌 선원석의 3분의 1이 사라지는 셈이었다.
무상맹을 통해 선원석으로 남은 도단 재료를 구하려면 앞으로는 해 도인을 소환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
한립이 던져준 선원석 보따리를 받은 해 도인은 사양하지 않고 꿀꺽 삼켰다.
“도병의 힘도 빌려주셔야 합니다.”
“도병…….”
한립은 움찔했지만 길게 묻지 않고 도병이 가득 든 호리병박도 내주었다. 해 도인의 거침없는 손길에 호리병박이 노란빛을 머금고 콩알들을 비처럼 뿌렸다.
그러나 콩알들은 도병으로 변하지 않고 크기만 몽둥이처럼 커졌다. 도병 방망이들이 바쁘게 진영을 이루는 것을 한립은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도병으로 진법을 펼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도병 자체를 진법 깃발 삼아 이용하는 것은 새로웠다.
이것도 봉인된 기억의 일부인지 궁금해졌다. 수백 개의 방망이들이 노란 진법을 이루고 금제를 향해 다가갔다.
해 도인은 빠르게 수결을 맺어가면서 부들부들 떨리는 노란 진법을 유지했다.
쿠르릉!
노란 진법이 안개 금제를 파고 들어가 오목하게 공간을 만들어냈고 해 도인은 아예 허공에 가부좌를 틀고 주문에 집중했다.
콰릉!
난폭한 법칙파동을 담은 금색 뇌전들이 넘실거리는 해도인 주변으로 만 리 내의 천지원기가 흘러들어 보라색 빛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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