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5화. 거대 눈
*
청년이 입에서 뿜은 검은 빛을 흡수시키자, 산 정상에서 수많은 주술문자가 가느다란 실들로 변해 청죽봉운검을 휘감았다.
점점 떨림이 줄어든 청죽봉운검들은 잿빛 고치처럼 변해서 반항을 멈추었다. 다시 입을 벌린 청년의 검은 빛에서 법칙파동이 전해졌다.
검은빛은 72개로 갈라져서 각각 청죽봉운검 안으로 흡수되었다. 한립은 상대의 괴이한 수단에 푸른빛을 일으켜 청년 쪽으로 달려들었다.
청년이 무언가를 하려 하자 곁의 흑의 뚱보가 입을 열었다.
“겨우 진선 후기 수사를 어찌 직접 처리하시려 하십니까? 비검을 굴복시키시는 동안 저희 둘이 저놈을 맡겠습니다.”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한립에게 속박되었던 것이 민망했던지 둘은 공명심에 나섰다. 이대로 돌아가면 앞으로 그들의 지위는 불안해질 것이다.
“그래, 너희에게 맡길 테니 죽이지는 말거라. 아직 알아내야 할 것이 있다.”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자 흑의 호위들이 희색을 드러내고 한립을 향해 날아갔다.
뚱보는 개구리처럼 갑자기 배를 크게 부풀려 입에서 번쩍거리는 대량의 별빛을 분사했다. 별빛 속의 모래 알갱이들은 은은하게 천둥소리를 내고 있었다.
마른 흑의인은 해골 허상이 어른거리는 검은 화염을 불러냈다.
케케켁켁!
그의 몸을 벗어난 검은 화염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흉악한 악귀들을 품고 한립을 향해 쇄도했다. 악귀들의 괴이한 웃음소리가 강철 바늘처럼 수사의 뇌리를 찔러 들어갔다.
한립은 그들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전신에 금빛을 일으킨 채로 별빛과 악귀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렇지!”
뚱뚱한 흑의인이 두 소매를 펄럭여 수많은 모래 알갱이들이 한립을 포위하게 했다.
쿠콰콰앙!
마른 흑의인의 뼈만 남은 손이 한립을 가리켰다. 크기가 부쩍 커진 악귀들이 입을 벌려 새까만 빛을 날렸다. 썩은 내가 진동하는 빛은 허공에서 겹겹이 물결치며 한립을 휘감았다.
금빛이 진해진 한립은 갑자기 속도가 확 빨라져서 별빛 속에서 모래알의 폭발과 검은빛을 간발의 차이로 피해 다녔다.
체내의 보륜을 이용해 역전진륜 신통을 사용한 것이다.
두 흑의인은 의식을 방출해 한립의 위치를 찾아내려 했으나 수십 개의 신영이 하늘을 이리저리 쏘다니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흑의인들은 믿기지 않는 광경에 입을 벌렸다.
그들이 다른 방법을 쓰기 전에 별빛과 검은빛을 통과한 한립이 귀신처럼 앞에 나타났다. 몸에 두른 금빛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진 뒤였다.
경악한 흑의인들은 뒤로 물러나며 그간의 전투경험을 통해 대책을 마련한 듯했다.
뚱보는 삼각형 수정 방패 두 개를 입에서 뿜어 그의 주위에 두꺼운 빛의 장벽을 쳤고, 동시에 별빛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리로 변해 한립을 덮쳤다.
마른 흑의인은 빠르게 주술을 읊어 체내에서 까득까득 거리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살과 피부가 신속히 사라진 그는 거목 크기의 새까만 거대 해골로 변해 이전보다 두 배는 강력한 기운을 내뿜었다.
검은 해골의 날카로운 다섯 손가락이 새까만 화염을 품고 한립을 할퀴었다. 이때 다시 찬란한 금빛을 머금은 한립 뒤로 고리가 나타나 신속하게 회전했다.
우웅.
금색 파문이 천장 허공을 잠식해 뚱보와 검은 해골의 움직임을 늦추었다. 그들의 행동은 물론 화염의 움직임, 별빛 고리의 추락 속도까지 모든 것이 얼어붙은 듯 정지했다.
아주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어 완전 정지와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렇게 보인다는 뜻이었다.
“이건……. 시간법칙!”
멀리서 안색이 달라진 청년이 청죽봉운검은 원합오극산에게 맡겨두고 번득 날아들었다.
이때 한립은 급격히 몸을 부풀려 거대한 금색 거원으로 변해 은색 문양이 가득한 두 주먹으로 두 흑의인을 사정없이 때렸다.
퍽!
엄청난 괴력에 뚱보의 수정 벽이 썩은 나무토막처럼 부서지고 거대 주먹이 몸을 강타했다. 말라깽이가 변한 검은 해골로도 다른 주먹이 날아 들었다.
두 주먹이 흑의인들에게 닿는 순간, 금빛 파동이 사라져서 모든 게 원래의 속도를 되찾았다.
펑!
육신이 터진 뚱보는 살점 덩어리가 되었고, 단단해 보이던 검은 해골도 산산이 부서져서 뼈 파편이 날렸다. 혼백도 진언보륜의 영향을 받아 달아나지 못하고 같이 사라졌다.
모든 일이 한 호흡 만에 벌어진 것이었다.
막 거원 위에 도착한 화려한 복색의 청년은 노기를 드러냈다. 한립이 제법 실력이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진선경 후기 수사 두 명을 손쓸 틈도 없이 죽일 줄은 몰랐다.
청년은 생각 끝에 짐승 이빨 모양을 하고 법칙의 기운을 발산하는 새까만 괴검을 꺼내 들었다. 괴검은 순식간에 거대하게 불어나서 검은 교룡 허상을 두르고 순식간에 금털 거원을 베었다.
눈을 번득인 금털 거원은 진언보륜을 역전시켜 체내로 불러들였다. 금털 거원은 흐릿하게 사라졌고 그가 있던 허공을 새까만 거검이 갈랐다.
눈에 보일 듯 말듯한 금빛 환영이 원합오극산 방향으로 향하는데 그 속도가 가히 놀라웠다. 청년이 움찔해서 번개처럼 따라잡으려 했지만 거원의 속도에는 미치지 못했다.
거원은 다짜고짜 입에서 정혈을 분출했다.
화륵!
정혈이 연소하면서 핏빛 화염으로 변해 잿빛 고리와 잿빛 고치를 투과해 청죽봉운검 안으로 스며들었다.
제압당해 있던 청죽봉운검들이 푸른빛을 강하게 방출해 고치를 이룬 실들을한층 한층 끊어냈으나 아직 고리를 벗어나기는 무리였다.
“그만!”
청년이 노호성을 터트리며 수결을 맺으려는데 금털 거원이 휙 몸을 돌려 마구 주먹질을 했다.
퍼퍼퍼퍼퍽!
금색 주먹 허상들이 빽빽하게 나타나 청년을 미친 듯이 때렸다. 피하기에는 이미 늦어버린 청년은 검은 방패로 앞을 막고 검은 보호막을 펼쳤다.
쿠쿠쿠쿵!
주먹 허상들이 보호막과 충돌할 때마다 태양과 같은 폭발 현상이 일어났다. 검은 보호막은 부들부들 떨면서도 잘 버텼지만 공격을 막느라 더는 극산으로 접근할 수 없었다.
거원은 눈부신 금빛을 반짝이며 어깨 아래로 또 다른 팔 2개가 자라나 수결을 맺었다. 72자루의 비검들이 거검으로 융합되어 굵은 금빛 뇌전들을 난사했다.
우우웅!
푸른 거검이 거대한 검빛이 되어 잿빛 고리를 가르고 출구를 만들어냈다. 금털 거원 머리 위로 돌아온 검빛은 푸른 거검이 되어 날아다녔다.
팟.
신형이 흐릿해진 거원은 거검을 데리고 사라지더니, 다음 순간 천여 장 밖 허공에서 나타났다.
원기를 분출해 검에 불어넣자 검신이 작열하는 푸른 불덩이처럼 밝게 변해서 안에 남아 있던 검은 빛을 제거했다.
청년은 음산한 눈빛으로 그런 한립을 쳐다보다가 원합오극산을 머리 위로 불러들였다.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내 너를 얕본 것 같구나?”
한참 만에 침묵을 깬 청년을 보고 한립은 대답 없이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였다. 푸른 거검이 72자루의 작은 비검으로 변해 푸르스름한 검진을 이루고 그를 보호했다.
“천천히 놀아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 이렇게 된 이상 당장 네 놈을 잡아다 혼백을 고문할 때나 시간을 들여야겠다.”
청년의 소매에서 네모난 법보가 날아올랐다. 검은 벼루는 산수도와 조충도 같은 그림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나타나자마자 빙글빙글 돌면서 방출한 깨알 같은 금빛 주술문자들에서 특이한 법칙파동이 느껴졌다.
한립이 동공을 수축했다.
드디어 수행을 드러낸 그는 예상대로 금선경 수사였다. 호언 도인, 운예와 비교하면 아직 멀어서 금선경에 이른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수행이 안정되지 못한 느낌이었다.
벼루가 커지면서 산수도와 조충도 같은 그림들이 생생하게 살아나기 시작하는데 한립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청년이 연달아 날려 보낸 법결을 흡수하고 거대 벼루가 먹처럼 새까만 구름을 형성해 청년과 원합오극산을 에워싸고 확산되었다.
한립은 주저 없이 뒤로 물러나면서 의식으로 상황을 훑었다. 먹구름에 다가간 의식은 마치 혼돈을 마주한 것처럼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이에 한립은 곰곰이 생각하다 청죽봉운검을 연꽃 형태로 바꾸어 대량의 검기를 날리게 했다.
쉬쉬쉬쉭!
먹구름 속에서 검기들이 교차하며 수많은 구멍을 내었는데도 확산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주변의 먹구름이 흘러들어 구멍을 채웠다.
위력적인 검기의 폭우에도 먹구름은 멀쩡했고 청년은 실종이라도 된 듯 보이지 않았다.
한립이 미간을 좁히며 다른 방법을 쓰려는데 드디어 확산을 멈춘 먹구름에서 검은 주술문자들이 떠올라 집채만 한 구슬로 응결했다.
한립은 푸른 연꽃을 펼쳐 꽃잎 하나하나가 푸른 보호막이 되도록 했다.
쩌억!
진동하던 검은 구슬이 세로로 갈라지면서 수직으로 타원형을 이루는 거대한 눈이 나타났다. 새하얀 눈알에 새까만 눈동자가 요사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 눈알이 홀연히 빙글 돌아 한립을 주시했다.
‘이런…….’
가슴이 철렁한 한립은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
눈알에 주시를 당하고 싶지 않아 이리저리 이동했지만 거안(巨眼)은 언제나 그의 위치를 찾아냈다. 게다가 거안의 동공에서 희미하게 하얀빛이 응축되는 중이었다.
한립은 코웃음을 치고는 푸른 연꽃을 거두고 둔광을 일으켜 거안 위쪽의 먹구름 속으로 몸을 던졌다.
시야가 깜깜해진 그는 소매 속에서 검은 중수를 띄워 육중하기 짝이 없는 구슬 모양의 보호막으로 검은 안개를 밀어냈다.
영목 신통으로 주변을 살펴도 어두컴컴해서 채 백 장을 제대로 보기가 어려웠다. 한립은 천천히 이동하면서 화려한 복색 청년의 위치를 찾아내려고 애썼다.
그런데 외부에서 보기에는 그리 넓지 않던 먹구름 공간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한립은 어쩔 수 없이 멈춰서서 손날로 허공을 그었다.
사악!
굵은 푸른 검기가 빠져나가 전방의 먹구름을 뚫고 커다란 통로를 만들어냈다.
주변 검은 구름이 모여들어 순식간에 통로를 채우는 것을 본 한립은 아예 팔을 휘저었다.
쉬쉬쉬쉭!
소매 속에서 72자루의 비검들이 쏟아져 나와 거검을 이루고 굵은 금빛 뇌전들을 방출했다.
쿠르릉!
이번에는 먹구름 공간이 둘로 나뉠 만큼 커다란 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공간 자체가 흔들렸으나 먹구름은 금방 안정을 되찾았다.
“여길 기어들어 올 줄이야! 그런다고 내 멸혼진광을 피할 수 있을 거라 여기지 마라.”
돌연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말이 끝나기 전에 혼돈의 심연에서 날카로운 하얀빛이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한립이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거검이 72자루의 비검으로 분리되어 연꽃을 만들고 회전했다. 동시에 그를 둘러싼 중수 보호막에도 광채가 흘렀다.
수백 장 거리에서 멈춘 하얀 빛은 아까 본 검은 벼루였는데 웬일인지 지금은 반투명하게 변해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화려한 복색의 청년이 냉소를 지으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무서워 숨어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셨군요?”
“그리 죽고 싶다면 내 소원을 들어주마!”
한립의 비웃음에 분노한 청년은 수결을 맺었다.
거대 벼루가 더없이 밝은 빛을 방출해 강렬한 법칙파동을 발산하는 주술문자들을 불러냈다.
거안 허상이 그 안에서 나타나 한립을 돌아보았다.
한립이 재빨리 피하려는데 위쪽 먹구름이 갈라지면서 원합오극산이 나타나 잿빛 기운을 흘려보냈다.
대량의 잿빛 공간이 빠르게 그를 뒤덮었다. 청죽봉운검들이 암담해지고 한립도 꼼짝하지 못했다.
그가 아무리 기합을 넣고 힘을 내보내도 잿빛 기운은 정체 모를 법칙의 힘을 품고 돌덩이처럼 버텼다.
이때 거안이 번득 하얀 빛기둥을 분출했다.
하얀빛에 닿기 전에 뇌리에 극통을 느낀 한립은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면서 기억이 송두리째 잘려나가는 듯한 기분을 맞봐야 했다.
방대한 의식으로 회복하긴 했지만 기함한 그는 중수 보호막을 앞으로 뭉쳐 새까만 벽을 이루고 하얀빛을 막으려 들었다.
하지만 하얀 빛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중수 장벽을 뚫었다.
푹!
위기의 순간 한립이 입에서 내뿜은 검은 고리는 중수진륜이었다. 급속도로 회전하며 커진 고리가 법칙의 힘이 담긴 복잡한 주술문자들을 내뿜었다.
중수 장벽은 손쉽게 뚫었지만 중수진륜은 그래도 몇 호흡을 막아냈다. 그 정도 시간이면 한립이 숨을 돌리기에 충분했다.
중얼중얼 주문을 왼 그의 뒤로 진언보륜이 나타나 금빛 파문으로 강렬한 시간법칙의 힘을 퍼트렸다.
먹구름 안이어서 그런지 금빛 파문의 범위는 백 장이 되지 못했다.
하얀빛은 금빛 파문 속에서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얼굴을 굳힌 청년이 한 손으로 원합오극산에 법결들을 때려 넣었다.
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잿빛 광채가 진해지면서 금빛 파문의 범위가 축소되고 있었다. 두 개의 강렬한 법칙의 힘이 충돌해 금빛 파문이 바르르 떨려왔다.
거의 멈춰있다시피 하던 하얀 빛도 속도가 꽤 빨라져 차츰차츰 한립에게 다가오는 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