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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644화 (1,401/2,000)
  • 1644화. 기억

    *

    수천 리 밖 웅산도 몸을 돌려 서쪽으로 향했고 다른 부도주들도 각자 살길을 찾아 흩어졌다. 망원봉에서 몇몇 진선 장로들이 떠나며 다채로운 빛깔의 둔광들이 날아올랐다.

    한립도 명청영목을 거두고 시선을 돌렸다.

    지금까지 주로 호언 도인 쪽을 주시했는데 그들이 멀리 달아났으니 그도 출발할 마음을 먹은 것이다.

    “기 형, 오래 머물 곳이 아닌 듯하니 먼저 가보겠습니다.”

    “먼저 가시지요. 저는 잠시만 더 머물다 가겠습니다.”

    넋을 놓고 전투를 지켜보던 기량은 한립의 말에 이렇게 답했다. 금선경 수사들이 겨루는 장면을 볼 기회가 드물기에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남겠다고 한 것이다.

    “그럼, 조심하십시오.”

    한립이 당부를 건네고 둔광을 일으켰다.

    푸른 빛줄기가 흐릿하게 변해 종적을 감추었다.

    한립이 다시 나타난 것은 천리 밖이었고 그대로 하늘을 갈라 수만 리를 이동했다. 외진 산봉우리에 내려선 그는 고개를 돌려 백옥봉 쪽을 보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촉룡도가 오늘의 고난을 넘겨도 북한선궁과 같은 거대 세력에게 걸렸으니 갈등이 끊이지 않을 것이 확실했다.

    평소 호언 도인과 왕래가 잦던 그를 누가 눈여겨보았을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화려한 복색의 청년이 아주 불길한 느낌을 주어 어떻게든 그와 멀어져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수결을 맺은 그의 몸에서 금빛 뇌전이 빠져나가 뇌전진법을 이루었다.

    콰릉!

    천둥소리가 울린 다음 뇌전진법과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 * *

    종명산맥의 어느 산봉우리 위.

    희미한 금빛 실이 흔적도 없이 웬만한 둔광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전진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뇌전의 형태를 한 금실은 뇌전의 힘과 공간의 힘이 결합된 둔광이었다.

    순간이동처럼 빠르긴 했지만, 신체를 뇌전의 형태로 변화시켜 번개처럼 빠르게 이동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금실이 늪에 빠지기라도 한 듯 무형의 힘에 가로막혀 느릿하게 변했다.

    나아갈수록 무형의 힘이 강해져서 나중에는 보통 진선의 이동 속도밖에 나오지 않았다.

    콰릉!

    금빛 뇌전이 뇌전진법을 이루어 그 가운데서 한립이 등장했다. 전방을 훑은 그는 푸른 빛줄기로 변해 수백 리 정도 날아가다 멈추었다.

    “…….”

    거대한 노란 벽이 하늘과 땅을 잇고 좌우로도 길게 펼쳐져 있어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벽 위로 노란 안개가 꿈틀꿈틀 움직여 구름, 맹수 등 만물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게 신비로웠다.

    은근하게 안에서 노란 주술문자들이 반짝여서 거대한 산을 앞에 둔 느낌이었다. 한립은 의식을 방출해 보았지만 노란 안개에 닿자 곧바로 튕겨 나왔다.

    눈동자에 남색빛을 일렁인 그는 감탄했다.

    “아주 강력한 금제야.”

    뇌전 전송진은 공간의 힘을 이용하는 거라 평범한 금제는 막을 수 없고 똑같이 공간의 힘을 지닌 금제라야 막을 수 있었다.

    영목 신통을 펼친 그의 눈에 깊은 곳에 퍼져있는 두꺼운 공간의 힘이 보였다. 그걸 제외하더라도 안개 벽 안에는 여러 종류의 금제들이 융합되어 있어서 그라도 단시간 내에 파훼할 수 없었다.

    의식을 퍼트린 한립은 몇 호흡 만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안개 벽 금제가 얼마나 광활한지 강대한 의식을 가진 그도 그 끝을 알아낼 수 없었다. 노란 안개 벽 금제는 백옥봉을 중심으로 펼쳐진 초대형 진법인 듯했다.

    ‘북한성궁과 촉룡도 금선 도주들이 미리 설치해 둔 것이겠지.’

    백옥봉으로 향할 때는 본 적이 없던 금제였기 때문에 이런 추측이 가능했다.

    파앗.

    곰곰이 생각하던 한립이 12개의 구뢰목을 불러냈다.

    복잡한 뇌전문양과 진법 도안들이 새겨져 있는 구뢰목들을 둥그렇게 배치한 그는 수결을 맺었다. 구뢰목들에서 금빛이 퍼져 수십 배에 크기의 복잡한 뇌전진법을 만들었다.

    우웅!

    뇌전진법이 빛을 머금고 한립의 신형이 반투명해졌지만, 곧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펑!

    뇌전진법이 터지자 한립은 강제로 튕겨 나와야 했다. 그가 구뢰목들을 회수하고 다른 방법을 써보려는데,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머리 위에 먹구름이 나타나 검은빛들을 쏟아부은 것이다. 푸른 빛을 일으킨 한립은 그 자리에서 사라져 수천 장 밖에서 나타났다.

    그가 있던 산봉우리는 검은빛들을 맞아서 구멍이 숭숭 뚫린 채 무너져 내렸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한립은 세 인영을 보았다. 그중 한 명이 계속 신경 쓰이던 화려한 복색의 청년이었다.

    나머지 두 명은 마치 호위라도 하듯 청년 뒤에 흑의를 입고 서 있었는데, 한 명은 살이 뒤룩뒤룩 찐 비대한 사내였고 다른 한 명은 해골처럼 뼈만 남은 사내였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당신들의 목표는 백리염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 같은 촉룡도 진선 장로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텐데요.”

    한립은 표정 변화 없이 물었다. 말을 하는 동안 암암리에 의식으로 세 사람을 훑은 그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흑의 호위들은 진선경 후기의 수행을 지니고 있었고 화려한 복색 청년은 수행이 가늠되지 않았다. 수행을 숨길만 한 강력한 비술을 익히고 있는 게 아니라면 금선경 수사라는 이야기였다.

    “쯧쯧, 죽지도 않고 못 본 사이에 진선 후기 수사가 되어있다니 축하할 일이로구나.”

    화려한 복색 청년은 한립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저를 만나신 적이 있습니까?”

    한립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 말에 화려한 복색 청년은 득의양양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소주(少主)님의 멸혼진광(滅魂眞光)에 당했는데 저 녀석이 어찌 이전 일을 기억하겠습니까? 바보가 되지 않은 것도 천운이 따른 것이지요.”

    흑의 뚱보가 간사한 웃음을 흘리면서 비위를 맞추었고 청년이 웃으면 두 흑의 호위들도 박장대소를 하며 따라 웃었다.

    “한 수사, 기억났습니다. 저자가 바로 수사에게 중상을 입히고 저와 청죽봉운검을 봉인한 녀석입니다.”

    한립의 뇌리에 해 도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확실한 것입니까?”

    “확실합니다. 기억을 봉인하는 기괴한 신통을 지니고 있어 저도 선괴뢰를 장악한 후에야 차츰차츰 단편적인 기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직접 본인을 만나보니 의심의 여지가 없군요.”

    해 도인의 말에 청년을 바라보는 한립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너도 뭔가 생각난 것인가? 그간 너를 찾느라 고생했는데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이곳에 있었구나!”

    “당신과 제가 인연이 있나 봅니다.”

    평정을 회복한 한립은 태연하게 답했다.

    “쓸데없는 소리는 거기까지면 되었고, 수정 알갱이의 비밀을 이실직고하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이런 이번엔 제가 당신을 살려드릴 생각이 없습니다.”

    “죽음을 앞두고도 입만 살았구나! 이번에는 결코 운 좋게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한립을 본 청년은 웃음기가 싹 사라져서 손끝에서 검은빛을 쏘아 보냈다.

    요란하게 반짝이는 검은 빛이 쉭! 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이에 한립은 눈을 가늘게 뜨고 좌측으로 이동하면서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푸른 비검 네 자루가 떠올라 그를 중심으로 선회했다.

    챙!

    측면에서 나타나 그를 기습하던 검은 빛이 비검 중 하나에 막혔으나 한립은 그 충격에 쇠망치로 두들겨 맞은 듯 멀리 튕겨 나가다 겨우 몸을 가누었다.

    그제야 한립은 검은빛이 작은 종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현묘한 문양이 가득한 종은 놀라운 영기의 파동을 품고 있었다.

    작은 종을 막은 푸른 비검은 손상을 입었는지 부들부들 떨면서 웅웅 울어댔다. 한립은 나머지 비검 세 자루로 검은 종을 공격했다.

    챙! 챙! 챙!

    연달아 세 번의 소리가 들리고서야 작은 종은 튕겨 나갔다.

    한립의 소매 속에서 수십 자루의 푸른 비검들이 물고기 떼처럼 우르르 몰려나와 앞서 불러낸 비검들과 합류했다.

    72자루의 청죽봉운검들이 흐릿하게 수백 개의 푸른 검기로 갈라져서 강을 이루고 상대편 세 사람을 향해 흘러갔다.

    쉬쉬쉬쉭!

    파랗게 빛나는 검기들이 공명해 그 진동이 하늘을 뒤흔들고 있었다.

    두 명의 흑의 호위들은 한립의 신속하고 맹렬한 반격에 안색이 달라졌지만 화려한 복색 청년은 냉소를 머금었다.

    그는 튕겨 돌아온 검은색의 작은 종을 소매 속에 집어넣고는 이번에는 은색 방울을 꺼내 흔들었다.

    딸랑!

    방울 표면의 문양에 빛이 들어왔다. 이어서 은빛의 파동이 방울 사방으로 뻗어 나가 일대를 음파의 바다로 만들었다.

    푸른 검기의 강이 은빛 파동의 음파와 맞부딪치자 소리 없이 무너졌다. 기세등등한 검기가 가볍게 부서지고 만 것이다.

    72자루의 비검 본체만이 남아서 은빛 파동의 바닷속에서 방향을 찾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했다.

    한립은 놀라지 않고 수결을 변화시켰다.

    콰릉!

    72자루의 비검 표면에 금빛 뇌전이 일어나 각각 괴상한 무늬를 형성했다.

    기이하게도 금빛 무늬 위의 비검들이 동시에 은색 파동의 바다에서 사라져 화려한 복색 청년 등 세 명 주위에서 다시 나타났다.

    굵은 금빛 뇌전들을 서로 응결한 뇌전 진법이 세 사람을 둘러싸고 있었다. 워낙 빠르게 일이 진행되어서 그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이미 뇌진 속이었다.

    강력한 속박의 힘이 발산되어 세 사람의 선령력 운용이 느려졌다.

    이에 두 흑의 호위는 깜짝 놀라 남색과 검은색 보호막을 불러내 뇌진의 속박에서 벗어나려 했는데 청년은 꼼짝하지 않고 서서 주위의 청죽봉운검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청죽봉운검들은 이전보다 훨씬 굵은 검기들을 불러내 하늘을 가득 채운 금색 뇌전과 함께 세 사람을 향해 쇄도했다.

    “소주!”

    그걸 본 흑의 호위들의 외침에 청년이 뇌진의 속박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자연스레 방울 속에서 법결을 던져 넣었다.

    은색 파동들이 조밀하게 형성되어 수십 장의 은빛 구역을 형성했다.

    선령력 흐름이 정상으로 돌아가자 흑의 호위들은 표정을 풀었지만 검기들은 부쩍 가까워져 있었다.

    이때 청년이 입에서 잿빛 물체를 뿜어 세 사람의 머리 위에 띄웠다.

    다음 순간, 금빛 뇌전을 품은 수많은 검기들이 날아들어 그들을 매몰시켰는데, 검기가 가르는 소리와 뇌전이 터지는 소리 뒤에 쿠릉! 하는 굉음이 울렸다.

    거리를 두고 선원석을 들고 선령력을 흡수하던 한립이 눈썹을 꿈틀했다.

    잿빛 덩어리가 난무하는 푸른 검기를 뚫고 금빛 뇌전을 무시한 채 허공으로 빠져나와 청년과 흑의 호위들의 모습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들 머리 위에서 회전하고 있는 것은 잿빛 산이었다.

    뚱뚱하고 마른 호위들과 달리 청년은 의복도 구겨지지 않은 채 한립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립은 잿빛 산을 진지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이전과 모양은 달라졌으나 분명 그가 잃어버린 원합오극산이었다.

    “네 후천선기가 나쁘지 않더구나. 제련 수법이 졸렬하고 정순함이 부족해 이 몸이 적잖은 공을 들여 다시 제련했지. 어디 원주인인 네게 얼마나 통하는지 위력을 시험해 보아야겠다.”

    빙글빙글 돌아 더 큰 회색 산봉우리로 변한 원합오극산이 검기들로 뭉쳐 만들어진 푸른 빛무리로 떨어졌다.

    쿠쿠쿠.

    무시무시한 압력에 산봉우리가 닿기 전부터 푸른 빛무리에 파문이 생겼다.

    인상을 찡그린 한립이 수결을 맺자 푸른 빛무리의 수많은 검기들이 꽃잎에 금빛 뇌전을 품은 한 송이 연꽃으로 변했다.

    푸른 연꽃은 빙글빙글 돌아 잿빛 산봉우리를 향해 끝없이 푸른 검빛을 방출했다. 바로 이때 거대 산봉우리 정상에서 흐릿한 기운이 내려와 푸른 연꽃으로 향했다.

    놀랍게도 꽃잎의 금빛 뇌전이 소리 없이 사라지고 연꽃마저 갈라져 72자루의 청죽봉운검으로 갈라져 버렸다.

    잿빛 기운 속에서 혼란스럽게 움직이는 비검들이 불안하게 깜빡거렸다.

    한립은 원합오극산이 뇌전의 힘을 제압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검원을 흡수해 곡문정금 등 진귀한 재료들을 융합해 위력이 대폭 향상된 비검들에 영향을 미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보아하니 상대가 다시 제련하는 과정에서 불가사의한 신통을 얻게 된 듯싶었다.

    한립은 재빨리 머리를 굴리면서도 손을 놀리지 않고 수결을 맺었다.

    우우웅!

    푸른빛이 강해진 비검들이 푸른 실로 변해 종횡무진 잿빛 기운을 갈라 그들만의 공간을 확보하고, 잿빛 기운이 다시 밀려들기 전에 한립에게로 돌아가려 했다.

    “하계에서 올라온 녀석이 좋은 물건을 많이도 지니고 있구나. 예전에도 눈여겨보았지만 비검들이 썩 괜찮아. 오늘 이 몸이 거둬가야겠다.”

    청년이 잔잔히 미소를 짓고는 한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웅!

    잿빛 산꼭대기에서 짙은 빛의 고리들이 방출되어 청죽봉운검들을 막았다. 비검들은 마치 그물 속의 물고기들 같아 보였다.

    미미하게 안색이 달라진 한립이 급히 수결을 맺었지만 비검들은 동분서주할 뿐 달아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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