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3화. 촉룡(燭龍)
*
망원봉 위.
한립은 새까만 용을 보고 고서에서 보았던 만황 고대 짐승 촉룡의 묘사를 떠올렸다.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짐승은 그 특징에 거의 부합했다.
고서에서 촉룡을 사람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비늘 갑옷을 덮고 있다고 표현했는데 지금 보니 촉룡의 얼굴이 제1도주 백리염의 모습과 얼추 비슷했다.
‘혹시 저 짐승이 백리 도주의 진짜 정체?’
한립은 그 생각을 빠르게 지웠다. 저 인면룡(人面龍)의 두 눈알은 전체가 검은빛으로 물들어 있어 지능이 높은 존재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백리도주와 연관이 있다면 분신일 가능성이 더 컸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거대 촉룡의 기운에 강한 거부감이 들었다.
새까만 용이 두른 검은 화염에 진득한 흉살기가 전해졌다. 이렇게 강렬한 흉살기는 처음이었다.
* * *
같은 시각, 백옥봉에서 수천 리 떨어진 허공의 거대 남색꽃.
낙청해 뒤로 침착함을 잃지 않던 창류궁 수사들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황금용 의자에서 일어선 낙청해도 거대 용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오쇠의 겁을 늦추기 위해 폐관하는 줄 알았더니,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었을 줄이야! 애석하구나, 애석해……. 만년의 시간만 더 주어졌다면 저까짓 북한선궁이 어찌 백리염을 건들 수 있었겠는가.”
“스승님, 저희는 어찌하면…….”
안타까운 얼굴로 혼잣말을 하는 낙청해 뒤로 청수하게 생긴 사내가 다가와 물었다.
“만년에 한 번 마주치기도 어려운 기연을 마주한 셈이니 다들 잘 봐두거라. 설령 선궁이 이번에는 원하는 바를 얻을지라도…….”
나지막하게 웃음을 흘린 낙청해는 고개를 들어 멀리 고공 어딘가를 응시했다.
그곳에는 일곱 빛깔 광채를 두른 백리염이 적홍색 선검과 새빨간 팔각 거울을 들고 소진한과 대치 중이었다.
주위로 광활한 반구형 금제가 쳐져서 눈꽃 모양의 주술문자를 번득였다.
설앵을 위주로 십여 명의 선궁 수사들이 흩어져서 하얀 옥조각을 하나씩 들고 선령력을 주입해 음산한 한기가 가득한 금제를 유지했다.
10명 중 절반이 금선경 수사에 나머지도 진선경 후기였건만 백리염을 가두고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었다.
“백리염, 천정이 당신을 엄청난 우환거리로 생각하는 이유가 다 있었습니다?”
검을 든 소진한도 하늘로 떠오른 촉룡을 힐끗 보고 백리염을 향해 말했다.
“우리 정도 수행을 지닌 수사 중에 비밀이 없는 이가 있던가요?”
“지금 거사를 시행한 것이 옳은 선택이었단 말로 알아듣겠습니다. 만 년 후였다면 거꾸로 당신이 우리 북한선궁을 쳐들어 왔을지 모를 일이지요! 그때 가서 태을옥선을 상대할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어디 지금은 상대할 수 있는지 봅시다.”
백리염은 감정의 고조 없이 답했다.
* * *
백옥봉 상공.
크하아앙!
촉룡이 거대한 몸을 꿈틀거리면서 백리염을 향해 날아올랐다. 방대한 육체가 구름을 뚫고 올라가려 할 때, 폐허가 된 대지 위로 거대한 진법 허상이 나타나 요란한 금빛을 머금었다.
촉룡 주위에서 황금 용 조각이 새겨진 8개의 기둥이 나타났다. 각 기둥 위에는 선궁 금선이 한 명씩 서서 수결을 맺고 주술을 외워 거대 진법을 발동하고 있었다.
호언 도인의 일검에 가슴이 뚫린 고걸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이와 동시에 촉룡의 머리 위로 분홍 궁장 여인이 번득 이동해 새하얀 칠현금을 튕겼다.
“일어나라!”
8개의 황금 기둥에서 불경소리 같은 것이 들리고 조각된 금빛 용들이 꿈틀거리며 살아났다.
크앙!
여덟 마리 용들이 용맹하게 날아가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새까만 화염을 물어뜯고 할퀴어 댔다.
검은 화염 속으로 진입한 금빛용들은 촉룡의 몸을 휘감고 매섭게 깨물었지만 새까만 비늘 갑옷을 뚫을 수가 없었다.
크하아앙!
촉룡이 맹렬히 포효했다.
거대한 몸뚱이가 금빛 용들을 털어내려고 요동치면서 황금 기둥에 부딪쳤지만 기둥들은 허공에 박힌 듯 요지부동이었다.
기둥이 함유한 속박의 힘이 이전에 백리염을 가두었던 금린쇄룡진 이상이라 촉룡은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노월은 신중한 눈빛으로 허공을 박차 고공으로 쏘아져 나갔다.
투박한 검은 소뿔 대궁(大弓)을 불러낸 그는 촉룡을 주시하며 서서히 궁의 시위를 잡아당겼다. 울룩불룩한 팔뚝의 근육과 미세한 떨림이 온 힘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스슷.
활시위가 휘면서 얼굴에 가까워질수록 은빛이 모여들어 화살을 만들었다. 화살촉이 정확히 촉룡의 머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노월의 손가락이 활시위에 베여 피가 흘러나오는데도 대궁이 핏물을 흡수해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화살 끝에는 법칙 파동을 품은 쌀알 크기의 은빛 입자가 맺혀 있었다.
난폭하게 움직여도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촉룡은 분노가 극에 달해서 휙! 고개를 돌려 입에서 검은 화염을 분출했다.
화르륵.
검은 화염이 삽시간에 금빛 용들을 잠식했다. 촉룡을 휘감은 검은 화염보다 입에서 뿜은 화염의 열기와 흉살기가 더욱 강했다.
8마리 금빛 용들이 빛이 암담해져서 마치 녹아내릴 듯 피부가 쪼글쪼글해지기 시작했다. 황금 기둥 위의 금선들은 불에 생으로 구워지고 있는 것처럼 괴로워했다.
푸학!
결국 금선 초기 수사 한 명이 선혈을 뿜었고, 곧이어 그 옆의 고걸도 피를 뿜었다. 두 사람의 기운이 흐트러지자 진법 전체가 위기에 처했다.
황금 기둥들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을 안 곱슬 수염 거한 동걸이 흐릿하게 이동해 검은빛 속에서 체형을 거대하게 키웠다.
하늘도 가를 듯 거대한 도끼를 높이 치켜든 동걸은 촉룡의 목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도끼날의 주술문양들이 강렬한 힘을 머금어 허공이 진동했다.
쇄액!
검은 도끼가 촉룡의 목에 닿으려는 순간, 뭔가가 끼어들었다. 촉룡 머리 위에서 번개처럼 날아든 적홍색 거검이 도끼날을 가른 것이다.
까가가가강!
고공에 눈을 찌를 듯한 붉은 태양이 터져서 거대 도끼날을 쳐냈다.
쩡!
그 힘을 이기지 못한 도끼날은 결국 부러져 버렸는데, 적홍색 거검은 그대로 날아가 동걸의 가슴을 갈랐다.
동걸의 가슴에 생긴 기다란 상처는 피를 뿜을 새도 없이 거검에서 옮겨붙은 불로 타들어 갔다.
동걸은 추락하면서 체구가 원래대로 작아졌고 적홍 거검은 촉룡의 머리 위로 되돌아갔다. 거검 속에서 호언 도인의 신영이 비틀거리면서 빠져나왔다.
창백한 얼굴의 노인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조금 전 그는 체내의 정혈을 태워 적란검과 신검합일(身劍合一)을 했기에 곱슬 수염 거한에게 중상을 입힐 수 있었다.
그는 단약을 꺼내 삼킬 새도 없이 고개를 번쩍 쳐들고 분홍 궁장 여인을 올려다보았다. 그 뒤로 흐릿하게 운예의 신영이 나타나 버드나무 가지로 궁장 여인의 등을 후려치고 있었다.
파파파팟!
수많은 버들잎 모양의 칼날들이 뿜어져 나왔다.
궁장여인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진법을 안정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는지 뒤늦게 기습을 알아차렸고, 어쩔 수 없이 입고 있던 궁장 자락이 빛을 머금고 버들가지를 막으러 날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착잡한 표정의 구양규산이 금색 장검을 들고 측면에서 날아들어 공격 중인 운예의 심장을 노렸다.
운예도 그것을 알아차렸지만 결연한 마음으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살을 내주고서라도 적의 뼈를 깎아내겠다는 뜻이었다.
채채챙!
칼날들이 밀집한 버들가지가 궁장 자락을 뚫고 선궁 금선 여인의 보호막을 깨트렸다. 등에 타격을 당한 궁장 여인이 왈칵 피를 쏟아내자 칠현금이 피로 흥건하게 적셔졌다.
그런데 구양규산은 칼끝을 털어 운예의 가슴이 아닌 어깨를 찔렀다.
“그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그의 눈빛에 언뜻 슬픔이 스쳤다. 말없이 미소를 지은 운예의 신영이 하얀 꽃잎들로 흩어졌다.
다음 순간, 운예는 호언 도인 옆에 서 있었다.
크하아앙!
검은 화염이 몇 배로 늘어난 촉룡이 반대로 몸을 비틀어 금빛 용들을 휘감고 힘을 주었다. 안 그래도 균형을 잃고 있던 황금 기둥들이 쓰러지면서 금빛 용들도 퍼퍼퍽 터져나갔다.
쿠쿠쿵!
기둥들이 폭발해 금빛들이 사방으로 튀고 분홍 궁장 여인을 포함한 선궁 금선들이 반서를 당해 미친 듯이 피를 토하며 추락했다.
드디어 풀려난 촉룡은 단번에 운해를 뚫고 고공의 또 다른 전장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거대한 하얀 장막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 안은 사나운 눈보라가 휘날려 구름조차 각양각색으로 얼어붙어 얼음 세계나 마찬가지였다.
“이건 소진한의 금선영역!”
“백리도주가…….”
호언 도인의 말에 운예가 빛의 장막 어딘가를 가리켰다.
치유용 단약을 복용하고 어깨의 부상도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그녀의 안색은 좋지 못했다. 그녀의 손끝에는 보랏빛 한기로 번들거리는 거대한 얼음 비석이 떠 있었다.
그 거대한 비석 속에 위엄 넘치는 붉은 머리 중년인 백리염이 갇혀 있었다.
일곱 빛깔 광채로 몸을 보호한 그는 전력을 다해 냉기의 침식에 저항하다 구름을 뚫고 다가오는 검은 촉룡을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얼음 비석 위에는 새하얀 장포를 입은 소진한이 검결을 맺고 있었다. 그의 뒤에서 거대한 얼음 고리가 쉼 없이 은색 주술문자들을 방출했다.
주술문자들이 그의 장검을 따라 거대 비석으로 떨어질 때마다 보랏빛 음산한 한기가 한층 강해졌다.
촉룡을 본 소진한이 열 받은 얼굴로 수결을 바꾸자 등 뒤 얼음 고리가 빛을 방출해 빙룡(氷龍)을 만들어냈다.
비슷한 크기의 빙룡과 촉룡이 얼음과 불의 기운을 품고 충돌했다.
콰릉!
빙룡을 얼음 분말로 만들어 버린 검은 촉룡이 하얀빛의 장막으로 뛰어들었다.
슉!
촉룡의 두 뿔이 빛의 장막에 닿았을 때 화살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월이 안간힘을 써서 쏘아 보낸 은색 화살이었다.
화살촉 끝에는 은빛 소용돌이가 쾌속으로 돌면서 천지영기를 빨아들이는 중이었다. 급속도로 크기가 커진 화살은 운해에 산만한 구멍을 뚫으며 날아들었다.
콰쾅!
촉룡의 몸과 얼굴이 연결된 부분에 창문이 열린 듯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그 속에서 은색 소용돌이가 아직도 천지원기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걸 본 호언 도인은 당장 운예의 손을 잡고 붉은 빛줄기로 변해 자리를 피했다.
그들이 천여 장을 벗어나지 못했을 때 뒤에서 또 한 번 폭음이 들려왔다.
쿠콰쾅!
은색 소용돌이가 터져 사방팔방으로 천지원기를 품은 강풍이 몰아쳤다. 호언 도인과 운예는 웅대한 힘에 휩쓸려 동시에 입에서 피를 뿜고 태풍 속의 돛단배처럼 떠밀려갔다.
촉룡의 거대 머리도 은색 소용돌이의 폭발을 이겨내지 못하고 조금씩 부서져 검은 안개로 변했다.
기이한 일은 지금부터였다.
짙은 검은 안개가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얀빛의 장막 속으로 빨려 들어가 바람처럼 얼음 비석 안에서 결집했다.
쿠쾅!
거대 얼음 비석이 폭발해 얼음 파편이 비수처럼 튀었다.
소진한은 재빨리 위쪽으로 이동했고, 포위하고 있던 설앵 등도 보호막을 일으켰지만 다들 폭발의 여파에 날아갔다.
얼음 비석이 있던 자리에 단단한 검은 안개층을 두른 백리염이 떠올랐다. 어깨에 검은 화염이 이글거리고 붉던 머리카락이 새까맣게 물든 그는 미간에 검은 불꽃 문신이 생겨나 있었다.
분위기가 이전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기운이 몇 배로 증폭된 백리염의 작은 움직임에도 후웅 후웅 하는 바람 소리가 뒤따라 선인이 아니라 마왕(魔王)이 강림한 듯했다.
“본좌가 그 오랜 시간을 들여 겨우 분리해낸 업화(業火)가 돌아왔구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백리염이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이게 바로 천정에서 추포령을 내린 진정한 살선(煞仙) 백리염의 모습인가 보군요. 이렇게 되면 다섯 번째 겁을 피하지 못하시겠습니다.”
소진한은 먼저 움직이지 않고 상대를 떠보았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업화를 한 번 제대로 불살라 봐야겠습니다.”
눈빛이 서늘해진 백리염이 검은 안개로 거대한 벽을 만들어 소진한의 퇴로를 차단하고 검은 영역으로 상대의 하얀 빛의 장막을 잠식해갔다.
그가 얼어붙은 구름을 한 걸음 한 걸음 밟아 소진한에게 다가갈수록 엄청난 위압감이 전해졌다.
“업화가 돌아가고 말았구나……. 하아, 우리도 이만 가는 게 좋겠구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낙청해가 손짓을 해 창류궁 수사들을 태우고 북쪽 하늘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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