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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642화 (1,399/2,000)

1642화. 거대 머리

*

붉은 장검이 변한 난새는 고걸의 가슴에 구멍을 뚫고도 만족하지 못했는지 휙! 하고 방향을 틀어 다시 날아들었다.

불덩이가 된 고걸이 두 손을 합장하며 괴성을 터트리자 푸른 갑옷에서 진한 녹색빛이 물처럼 흘러 불길을 잡아갔다.

되돌아온 화염 난새도 고걸을 다시 꿰뚫으려다 튕겨 나가야 했다. 호언 도인의 손짓에 난새가 장검으로 변해 돌아갔다.

치지직.

고걸의 몸에서는 불길이 꺼지면서 하얀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피부가 새까맣게 타고 갈라져 그 사이로 핏기가 보였다.

두병과 싸우고 있던 선궁 수사들이 놀라 호언 도인을 향해 경계심 어린 눈길을 보냈다.

“껄껄껄껄!”

고걸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괴상하게 웃더니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그를 보호하던 녹색 빛이 서서히 피부로 흘러들더니 갈라지고 타 들어간 피부의 상처가 회복된 것이다.

그러나 호언 도인은 놀랍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금선경에 이른 수사의 육신을 멸하는 것은 원래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구양도주, 이 일을 조속히 마무리 지어야 촉룡도가 말려드는 일이 없을 겁니다.”

노월은 고개를 돌려 구양규산을 보고 서늘히 경고했다. 그 말에 침음한 구양규산은 은빛으로 변해 광장으로 들어섰다.

그가 가담하자 안 그래도 절반 이상이 제거된 두병들이 썩은 나무 부서지듯 신속히 처리되었다.

선궁 금선 수사 넷이 광장을 빠져나와 불바다 주변에 뇌전을 소환하는 진법을 펼쳐 수십 가닥의 자줏빛 뇌전 기둥으로 나머지 두병들을 박살을 냈다.

두병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면 호언 도인과 운예는 더 위험해질 것이다.

그 모습에 광장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있던 촉룡도 수사들의 얼굴에 복잡한 심경이 떠올랐다. 그 안에는 몇몇 금선 도주들과 부도주들도 있었다.

제1도주 백리염은 자주 출관하지 않았지만 8번의 설법대화를 통해 수많은 제자들의 수련에 도움을 주었다.

그 존재만으로 촉룡도가 이제껏 북한선역, 창류궁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천정의 이름을 빌려 제1도주를 제거하려 하는 북한선궁의 손속이 음험하고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내부의 도주들과 결탁해 배신을 부추기고, 백리염과 달리 선궁 수사들은 촉룡도 저계 제자들의 안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고 행동했다.

안타까운 일은 12 금선 중에서 겨우 호언 도인과 운예만 북한선궁과 대항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까지 꺾이면 백리염은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처지가 될 것이다.

한립도 탄식했다. 뭔가 있을 거라 짐작했지만 호언 도인이 오늘 보인 실력은 대단했다. 거의 홀로 북한선궁 금선 열 명을 상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촉룡도에 내분이 일어난 것이 안타깝구나.’

금선도주들이 백리염과 합심해서 선궁에 대항했으면 이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창류궁 궁주가 본격적으로 돕지 않은 것도 그 점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살피던 한립은 호언 도인과 운예를 포위한 선궁 수사들 속에서 화려한 복색의 청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들었다.

* * *

하늘 깊은 곳, 백리염이 붉은 화염의 몸으로 변해 떠 있었다. 붉은 화염 바깥으로 일곱 빛깔 빛이 일렁이면서 거센 열기로 허공을 왜곡시켰다.

그와 멀리서 대치 중인 소진한은 얼음 가시들이 다닥다닥 박혀있는 장검을 들고 등 뒤로는 얼음 고리까지 띄우고 있었다.

그리고 설앵을 포함한 십여 명의 선궁 수사들이 얼음 고리의 음산한 한기에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멀찍이 거리를 두고 흩어져 있었다.

“백리염, 아직도 투항하지 않을 생각입니까? 순순히 따라가겠다면 천정에서 다시 충심을 다할 기회를 줄지도 모릅니다.”

“기회? 웃기는 소리! 천정이 윤회전 인물에게 한 번이라도 자비를 베푼 적이 있습니까? 혼백을 뽑아다 제련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지요.”

백리염은 소진한의 회유에 어이없다는 듯 답하며 화염 장검을 휘둘렀다. 불의 물결이 하늘을 뒤덮고 소진한을 향해 날아가는 동안 눈동자가 붉게 물든 그는 난해한 주문을 읊조렸다.

댕!

종명산맥 아래에서 귀청을 때리는 굉음이 울렸다.

백옥봉을 중심으로 반경 만 리의 산봉우리와 지면이 들썩이면서 무수히 많은 산 짐승들이 불안감에 포효하고 새들이 날아올랐다.

댕!

처음보다 더 크고 우렁찬 소리가 종명산맥 전역을 진동했다. 각지에 흩어져서 상황을 지켜보던 촉룡도 수사들도 어찌 된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쿠르르르.

대지가 솟아오르면서 흙이 쏟아져 내리고 강이 끊겼고, 수십 개의 산봉우리가 치솟았다가 자욱한 먼지와 암석 덩어리를 떨구면서 무너져 내렸다.

광장의 노월 등은 다들 구양규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양도주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노월의 물음에 구양규산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들에게 포위당해 있던 호언 도인만이 쓱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어서 자양살진(紫陽殺陣)을!”

심상치 않은 상황에 노월이 과감히 소리쳤다.

그의 명에 뇌전 소환 진법을 발동 중이던 네 명의 금선 수사들이 호언 도인 양쪽에 둘씩 이동해 금빛 글자가 적힌 보라색 부적을 던졌다.

파파파팟!

네 장의 부적이 바닥으로 떨어져 타오르며 네모난 불길의 울타리를 쳤다.

우웅.

울타리 위로 보라색 보호막이 타고 올라와 호언 도인과 운예를 가두려 했다.

보라색 보호막 자체에는 불길이 보이지 않았으나 그 온도는 호언 도인의 적란검이 일으킨 불길보다 뜨거웠다.

“갑시다.”

호언 도인이 두말할 것 없이 운예의 손을 잡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러나 미리 대비하고 있던 노월 등이 은빛 뇌전 기둥과 거대 금빛 검기 등을 날려서 호언과 운예가 나오지 못하게 막았고, 보라색 보호막이 점점 축소되어 그들이 견뎌야 할 온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펄럭!

호언 도인은 눈처럼 새하얀 장포를 불러내 운예에게 걸쳐주고 비취색 종을 꺼내 머리 위로 던졌다.

거대한 비취색 종 허상이 나타나 그들을 감싸고 보라색 보호막을 밀어냈다.

대지의 떨림이 더욱 심해지면서 비취색 종 허상에 의해 보라색 보호막도 위태롭게 흔들렸다.

“어서!”

노월의 외침에 진법을 유지하는 네 수사가 혀끝을 깨물어 보호막에 선혈을 스며들게 했다.

보랏빛이 왕성해진 자양살진이 급속도로 작아져 비취색 종 허상을 압축하기 시작했고 다른 이들은 부단히 위쪽에서 호언과 운예에게 공격을 날렸다.

이에 호언 도인은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복잡한 수결을 맺어 체내의 선령력을 폭발적으로 종에 불어넣었다.

비취색 종이 무너지기 전에 이변이 발생했다.

크하항!

땅속에서 터진 괴성은 더 이상 종소리처럼 들리지 않았다. 누가 들어도 명백히 사나운 괴수의 울부짖음이었다.

쿠르르르.

백옥봉 사방에서 흙먼지가 일더니 산봉우리가 땅으로 쑥 꺼져 무너지기 시작했다.

종명 산맥 전역의 뿌연 흙먼지와 굉음 그리고 괴수의 괴성까지 마치 세상의 종말을 보는 듯했다.

광장에서 싸우던 이들은 산체와 같이 추락하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날아올랐다. 그 틈에 호언 도인과 운예가 탈출해 낙석과 흙먼지가 가득한 백옥봉 아래로 몸을 숨겼다.

“호언 도인을 놓쳐선 안 됩니다.”

노월이 앞장서 금빛 거검을 타고 백옥봉 잔해로 떨어져 내렸다.

“…….”

다른 선궁 수사들도 그 뒤를 쫓아 아래로 내려가는데 구양규산은 머뭇거리며 고공에 머물렀다.

뿌연 흙먼지로 뛰어든 노월 등은 뒤늦게 작열하는 열기와 무시무시한 기운을 느끼고 깜짝 놀랐다.

“이런, 뭔가 있습니다.”

노월의 외침에 동걸 등이 즉시 방향을 틀어 무너져 내린 백옥봉에서 멀어졌다.

쿠르릉!

흙먼지 속에서 급작스레 쾅! 하고 용암 기둥이 터져 나와 천장 고공까지 치솟았다가 용암 비를 뿌렸다.

그걸 본 창류궁 궁주 낙청해가 팔을 저어 거대 남색 꽃으로 모든 창류궁 수사들을 보호해 북쪽으로 날아갔다.

백옥봉 서쪽 수천 리 밖 허공에 웅산과 십여 명의 부도주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구양규산의 명을 받아 저계 제자들을 안전한 지역으로 대피시키며 외문제자들도 떠나도록 안내했다.

촉룡도에 이런 변고가 발생한 것이 자랑할 일은 아니었기에 그들이 구경하도록 놔둘 수 없었다.

임무를 마친 이들은 백옥봉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가 멀리서 대지의 진동을 느끼고 백옥봉 방향을 쳐다보았다.

* * *

그 시각, 백옥봉 동쪽 만 리 밖의 망원봉 정상.

한립과 수십 명의 진선경 장로들이 모여서 백옥봉만 바라보고 있었다.

“완전히 난리가 났군요. 백리도주께서는 어쩌고 계신지…….”

수염이 희끗희끗하고 이마가 넓은 장로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탄식했다.

“백리도주께서 이 고비를 넘기시든 넘기지 못하시든, 이후의 촉룡도는 이전의 촉룡도와는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

또 다른 장로가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평소에는 세상 정의로운 척하던 북한성궁 위선자들이 하는 짓을 보십시오! 이건 완전 강도 떼가 아닙니까! 저럴 바엔 그냥…….”

“축 장로,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집이 있어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한 장로가 씩씩대며 불평을 하는데 그 옆의 장로가 말렸다.

곳곳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오다 침묵이 이어졌다.

한립은 떠나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백옥봉 방향을 주시했다. 붉은빛이 하늘과 땅을 물들이고 용암이 넘쳐흘러서 온 산을 불사르고 있었다.

불길은 바람을 타고 신속하게 번져서 바닥은 불바다, 하늘은 출렁이는 검은 연기의 바다가 되었다.

그때 백옥봉 연기와 불의 바닷속에서 돌연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등장했다.

“저게 무슨…….”

기량이 깜짝 놀라 중얼거렸고, 나머지 수사들도 놀란 기색이 다분했다. 불바다 속에 산봉우리를 감싸고도 남을 기다란 검은 그림자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한립은 눈동자의 남색 빛을 더욱 밝혔다.

검은 그림자에 거대한 마름모꼴 비늘이 퍼져있는 것으로 보아 교룡이나 이무기류의 짐승으로 판단되었다.

갑자기 쿵! 하는 굉음이 터졌다.

진선 장로들 발아래 망원봉도 무너질 듯 흔들려서 적잖은 이들이 둔광을 일으켜 떠올랐다.

다행히 진동이 그칠 때까지 망원봉은 버텼지만 무너진 백옥봉 잔해가 다시 폭발하면서 수십 줄기의 용암들이 구불구불 붉은 강을 이루고 산맥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치지지직!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노월 등 선궁 수사들도 더는 호언 도인과 운예를 수색하지 못하고 멀리 물러나 떨어지는 암석 파편이나 용암 비를 피했다.

백옥봉 주변 수십 리가 적홍색 용암으로 가득 차서 부글부글 끓는 용암 호수를 이루었다.

“평범한 용암이 아닌 듯합니다. 호언 도인이 안에 숨어 있으니 무턱대고 접근하기보다는 그들을 끌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의식을 방출해 용암을 살피던 노월의 말에 동걸이 나섰다. 검은 수정돌을 용암 호수로 던진 동걸의 주술 소리가 웅얼웅얼 들려왔다.

우웅.

수정돌이 커다란 검은 돌산으로 변해서 호수 중심으로 떨어졌다.

쿠아앙!

높이가 천장에 이르는 돌산이 절반 이상 잠기자 적홍색 용암이 사방으로 튀면서 출렁였다.

크하아앙!

분노한 짐승의 울부짖음이 용암 호수 속에서 들려오며 수면이 요동치고 있었다.

다음 순간 커다란 돌산이 퍽! 하고 용암 호수에서 튕겨 나오면서 그보다 더 커다란 검은 머리통이 떠올랐다.

거대한 머리를 시작으로 기다란 검은 그림자가 하늘을 들이받을 기세로 쑥 올라왔다. 멀리서 연기의 바다를 휘감고 다니던 검은 그림자가 드디어 진면목을 드러낸 것이다.

용암 호수에서 떠올라 완전히 승천한 것은 길이가 만장에 달하는 검은 화염을 휘감은 새까만 용이었다.

머리에 두 개의 굽은 뿔이 난 새까만 용의 등장에 백옥봉이 어두워졌다. 놀랍게도 거대한 용의 머리는 인족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서쪽 수천 리 밖에서 지켜보던 웅산 등 십여 부도주들의 안색이 일시에 달라졌다.

십만 년 이상 촉룡도에 머문 그들이 백옥봉 아래 저런 전설의 흉수가 사는 것을 어찌 몰랐단 말인가?

“……저게 바로 촉룡(燭龍)?”

웅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거대한 용의 정체를 추측했다.

“가끔 산맥 전체를 진동하던 종소리의 원인이 저것이었단 말입니까?”

또 다른 부도주도 놀라 의문을 드러냈다.

“아마 그럴 겁니다. 오래전에 지하 화맥의 적염화정(赤炎火精)을 취하다가 기이한 기운을 느낀 적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저 짐승의 기운과 일치합니다.”

또 다른 마르고 키 큰 노인 장로가 손뼉을 탁! 치며 말했다.

“그런데 저 얼굴이 어째…….”

“백리 도주님의 얼굴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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