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1화. 적란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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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 대궁주, 괜히 흐린 물에 발을 담가 북한선궁과 척을 지는 일은 없으시겠지요?”
허공에서 설앵이 뜬금없이 말문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 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설 선자? 우리는 이번에 초대를 받아 제자 몇 명을 데리고 참관을 왔을 뿐입니다. 분쟁이 일어나든 말든 우리 창류궁과는 무관한 일이에요.”
낙청해가 여인을 응시하며 태연하게 답했다.
“노월, 동걸 수사 등은 가서 호언 도인을 지켜봐 주시지요.”
그 말을 들은 설앵은 곁에선 길쭉한 검을 부리는 수사와 곱슬 수염을 기른 거한에게 명을 내렸다.
“예!”
노월이 대표로 대답을 한 뒤 몇 명의 수사들이 은백색 어가를 떠나 어딘가로 향했다.
“낙 대궁주, 그럼 저는 먼저 가봐야겠습니다.”
은백색 어가를 회수한 설앵은 하얀 빛줄기로 변해 소진한이 백리염을 쫓아간 쪽으로 사라졌다.
* * *
백옥봉 주변은 보이는 곳마다 엉망진창이었고 잘려나간 시체 일부가 널려 있었다.
호언 도인이 고공에서 교전 중인 백리염과 소진한에게 다가가는데 운예가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따라붙었다.
이때 거대한 검은 도끼 허상이 하늘에서 떨어져 허공을 왜곡하며 무서운 힘을 드러냈다.
이미 예상했다는 듯 허공을 박찬 호언 도인은 운예를 잡아끌어 번득하고 그곳을 벗어났다. 도끼 허상은 그대로 지면으로 떨어져 엄청난 진동을 일으켰다.
먼지가 가라앉고 나타난 깊이가 천장 가까이 되는 골짜기로 보아 미처 피하지 못한 저계 수사들은 꼼짝없이 죽어 나갔을 것이다.
이어서 동걸이라는 이름의 곱슬 수염 거한이 산만한 도끼를 어깨에 척 걸치고 나타났다.
검을 탄 사내 노월을 포함한 일곱 명의 선궁 수사들도 호언 도인과 운예를 포위하고 둥글게 나타났다.
여덟 명의 수사들은 숨기고 있던 수행을 드러내 금선경의 기운을 노출했고, 노월과 동걸은 그중에서도 금선경 중기였다.
그들은 아직 피하지 못한 산 아래 제자들이 죽든 말든 법보를 불러내 두 사람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하늘과 땅이 정신없이 들썩이면서 신음과 비명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나오고 있는 것인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구양규산이 산 아래 광장의 끔찍한 상황을 보고 복잡한 눈빛으로 다른 금선 도주들을 돌아보았다.
“종문 제자들을 인도해서 그들이 더는 피해를 보지 않게 해야겠습니다.”
백리염을 가두려다 실패해서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그들의 수행에 큰 무리는 없었다.
구양규산의 말을 들은 도주들이 흩어져 아직 멀리 가지 못한 부도주와 진선 장로들 중 그들을 따르는 이들을 소집해 다양한 수단으로 촉룡도 제자들을 전투 지역 밖으로 이동시켰다.
산 아래 광장 중앙에는 운예가 설련화 허상을 불러내서 호언 도인과 자신을 보호하고 있었다.
바람의 칼날, 뇌전빛, 불구슬, 검기 등이 끝도 없이 쏟아지는 통에 설련화 허상도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주문을 마친 호언 도인이 검은 보탑을 꺼내 급격히 키웠다. 거대한 보탑은 그들과 설련화까지 충분히 가리고도 남았다.
외부에서 공격이 쏟아져 보탑이 울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나는 반드시 백리 도주를 따라야 하는 이유가 있어 돕는 겁니다. 당신은 이유도 모르면서 어찌 이 일에 끼어든 겁니까?”
호언 도인은 고생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는 눈빛으로 운예를 보고 있었다.
“윤회전 말인가요? 그래요, 전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게 중요한가요? 당신과 함께할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걸요. 소원이도 봉의와 같이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고요.”
운예는 빙그레 웃음 지었다.
“으허허, 좋습니다. 당신이 그렇다면 어디 우리 둘이서 선궁 잡졸들을 상대해 봅시다.”
그 말을 들은 호언 도인도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쿠쿵.
호언 도인의 말이 끝나자 위에서 굉음이 울렸다. 금빛 검 그림자가 검은 보탑 허상 위로 수직 낙하해 일부를 잘라낸 것이다.
동시에 호언 도인이 들고 있던 검은 보탑 지붕에 금이 갔다.
금빛을 휘감은 노월이 고공에 떠서 거대한 검 그림자들을 몇 개 띄워놓고 검은 보탑 허상을 계속해서 갈라댔다.
동걸이 데려온 선궁 수사들이 검은 보탑 주변에서 공격을 날리는 동안 선궁 궁주 소진한이 데려온 선궁 수사 십여 명도 금선 중기 여수사를 선두로 급하강하고 있었다.
이에 호언 도인은 코웃음을 치며 허리춤을 찰싹 때렸다. 그러자 은색 호리병박이 설련화 허상을 뚫고 날아올라 집채만 하게 커졌다.
솨아아.
누에콩 모양의 검은 콩알들이 쏟아져 내려 바닥에 닿기도 전에 도끼를 든 검은 옷의 두병으로 변했다.
별안간 수많은 흑의 두병들이 도끼를 휘두르면서 선궁 수사들을 향해 밀려들었다. 이제 백옥봉 광장은 촉룡도 제자들 대신 두병들로 채워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곱슬 수염 거한 동걸이 냅다 자신의 도끼를 휘드르며 두병들에게 뛰어들었고 그 뒤로 몇 명의 수사들이 뒤따랐다.
“예상했던 대로 호언 도언을 처리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술법을 펼칠 테니, 수사들은 가서 노 장로를 도와주세요.”
분홍빛의 궁장 여인이 명을 내리고 허공에서 하얀 칠현금을 불러냈다. 백옥 같은 손가락이 현을 튕기자 아름다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수백 장 거리에 있던 흑의 두병 한 무리가 비틀거리다 머리가 터져 전력을 상실했다. 아득하게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선율은 사람의 기혈과 법력을 들끓게 해서 흑의 두병들은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그 사이 십여 명의 선궁 수사들도 두병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 * *
수백 리 밖, 한립과 기량을 포함한 수십 명의 진선들은 산 정상에 있었다. 한립은 은색 호리병박을 발동한 호언 도인을 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촉룡도에 입문한 지 수백 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저 노인네와 교류가 가장 많아 이제는 스승 같기도 하고 벗 같기도 한 존재라 여기고 있었다.
그런 호언 도인이 위험한 상황에 처한 것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목숨을 걸고 그를 구하러 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일단, 그의 실력으로 저렇게 많은 금선경 수사들 면전에 나타났다가는 도움도 되지 못하고 괜히 목숨만 잃을 것이고, 또 아까 발견한 화려한 복색의 청년에게서 불길한 느낌을 받아서 몸을 사려야 했다.
퍼퍼펑!
이때 광장 쪽에서 극심한 진동이 느껴졌다.
호언 도인과 운예 위쪽에서 은빛이 새어 나오더니 두병들을 담는 용도로 쓰이는 줄로만 알았던 호리병박이 터졌다.
십만 마리의 흑의 두병들을 전부 방출한 호리병박에는 대량의 푸른 영액만이 담겨 있었는데 폭발로 인해 단내를 풍기는 푸른 물들이 두병들 위로 쏟아졌다.
그러자 두병들은 신형이 두 배로 불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투사처럼 동걸 등을 향해 돌진했다.
두병들이 아무리 강해도 스무 명이 넘는 금선경, 진선경 수사들이 두병들을 소탕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저 수가 아주 많아서 동걸 쪽 수사들을 대부분 붙들어 두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립은 분홍 궁장 여인이 칠현금 공격으로 두병들을 대량 살상한 덕에 선궁 수사 세 명이 두병들을 뚫고 호언 도인과 운예를 공격하는 노월 무리에 합류하는 것을 보았다.
그중에 한 명이 그를 불편하게 만드는 화려한 복장의 청년이었다. 그는 일행들과 달리 호언과 운예를 공격하는 데 그리 열성적이지 않았다.
구양규산은 다른 금선 도주들에게 촉룡도 저계 제자들의 철수를 명한 다음 자신은 떠나지 않고 백옥봉과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호언 도인과 운예를 포위 공격하는 선궁 수사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쿠쿵.
이에 노월이 두 손으로 검결을 맺어 금색 검빛을 보탑 허상 위로 떨구었다.
위태롭게 떨리던 탑 허상이 층층이 무너져 내리다 검은빛으로 흩어졌고, 금색 검빛도 힘을 다해 설련화 허상을 공격하기 전에 사라졌다.
강력한 공격의 결과로 안색이 창백해진 노월은 급히 단약을 꺼내 삼켰다. 적잖은 힘을 소모한 듯했다.
공격에 합류한 선궁 수사 둘은 그 모습을 보고 노월 앞으로 이동했는데, 화려한 복색의 청년만은 주변을 맴돌면서 설련화 허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호언 도인의 검은 보탑은 균열은 심했지만 아직은 완전히 깨져나가지는 않았다.
“이 선궁의 사냥개 같은 놈들!”
노인은 노호성을 내지르며 검은 탑을 넣어두고, 허리춤의 적홍색 호리병박을 붙들고 다른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촤릉!
손가락 세 마디 길이의 붉은 검이 호리병 입구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적란(赤鸞)을 다시 칼집에서 뽑을 날이 올 줄이야!”
호언 도인은 고개를 뒤로 젖혀 목구멍으로 술을 들이붓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동의를 구하듯 운예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순간, 호언 도인의 기운이 갑자기 날카롭게 변하며 바람 소리만 남기고 설련화 허상을 지나 노월에게 쏘아져 나갔다.
그가 손에 든 장검에는 새빨간 주술문자들이 떠올라 이전보다 확연히 강해진 기운을 드러냈다. 적란이란 이름의 검을 든 것만으로도 아주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노월 앞을 막고 있던 선궁의 진선경 후기 수사들은 미처 방어하기도 전에 붉은 빛에 몸이 반으로 잘려나갔다. 그리고 원영조차 달아나지 못하고 화륵 불타올라 사라졌다.
그 모습에 금선경 수사인 분홍 궁장 여인이 칠현금을 맹렬히 튕겨 강력한 무형의 파동을 쏘아 보냈다.
운예가 두 손을 춤추듯 움직여 설련화 허상에서 거대한 꽃잎 하나를 분리해 무형의 파동과 충돌하게 했다.
쿠앙!
칠현금의 음파와 설련화의 꽃잎이 부딪쳐 상쇄되었다.
“당신은 내가 상대하지요.”
운예가 나서서 선전포고하자 분홍 궁장 여인은 피식 웃으며 다시 칠현금을 튕기기 시작했다.
번개처럼 진선경 후기 수사 둘을 죽인 호언 도인의 장검에서 거대한 화염 난새 허상이 빠져나가 번득 노월의 등 뒤로 이동했다.
호언 도인의 주문 소리와 함께 화염 난새가 맑게 울며 날개를 펼쳤다.
쉬익!
장검에서 분출된 적홍색 화염과 화염 난새의 허상이 이어져 일대가 거대한 불바다로 변해 노월을 덮쳤다.
이에 노월이 눈을 번득이며 검신에 손을 가져다 대고 거세게 휘둘렀다. 찬란한 금빛이 검에서 쏘아져 나가 금색 벽을 이루고 밀려드는 불바다를 막아냈다.
그러나 금빛 벽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불바다에게 자리를 내주며 사라지고 말았다.
“으하하하, 그렇지!”
검을 든 채 불바다 한가운데에서 광소를 터트리는 호언 도인의 모습은 정말 멋졌다.
그러나 노월은 콧방귀를 뀌며 금색 방패를 날리고 그 위로 펄쩍 뛰어올라 불길의 파도를 타고 호언 도인에게 접근했다.
붉은 화염 속에서 날카롭게 두 검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쩡쩡 울려 퍼졌다.
호언 도인과 달리 운예의 싸움은 순조롭게 풀리지 않고 있었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설련화 허상의 꽃잎들이 대부분 시들어 보였다.
그녀가 어느새 부드러운 버들가지를 꺼내 들어 손을 놀릴 때마다 버들잎 모양의 빛의 칼날들이 날아가 촘촘한 그물을 이루고 궁장 여인이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슁!
이때 그녀의 머리 위에서 불쑥 푸른 거검이 떨어졌다. 그녀가 인상을 굳히자 주위의 꽃잎 몇 개가 겹쳐졌다.
설련화 꽃잎들이 터지듯 찢겨나간 뒤 운예 수백 장 앞 허공에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다.
“흐흐! 운 도주 아직 저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상대는 운예를 향해 음산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예기치 못한 일격에 얼굴이 창백해진 운예가 고개를 들었다.
예스러운 금색 문양 푸른 갑옷을 입은 사내는 다름 아니라 고걸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복수하려고 이를 갈고 있었는지 지금까지 얼굴을 드러내지 않다가 몰래 공격한 것이다.
호언 도인은 운예에게 변고가 있음을 알고 빠르게 수결을 맺어 불길의 파도가 노월을 덮치게 한 다음 서둘러 운예 옆으로 내려왔다.
“괜찮습니까?”
미간을 찌푸린 그의 물음에 운예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단약을 꺼내 삼켰다. 그 모습에 호언 도인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며 고걸을 보는 눈빛에 살기가 그득해졌다.
‘뭐, 뭐야!’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진 고걸은 자기도 몰래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네가 정녕 죽고 싶구나.”
호언 도인은 장검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갈라 선혈을 적란검에 흡수시켰다. 그러자 검신의 주술문자들이 더없이 밝은 빛을 터트리며 눈 깜짝할 사이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심장이 철렁한 고걸은 다급히 보호막을 일으킨 채 멀리 피하려 했지만 수백 장을 벗어나지 못해 붉은빛에 따라 잡히고 말았다.
끼아악!
날카로운 새소리와 함께 붉은 장검이 푸른 갑옷을 걸친 등을 거침없이 뚫고 들어왔다. 맹렬한 화염을 불사르며 고걸의 가슴 앞으로 빠져나간 것은 화염 난새였다.
가슴이 관통당한 고걸은 전신이 불길에 뒤덮여 비명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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