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0화. 윤회전(輪回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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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단 옆에 있는 거대 남색 꽃의 창류궁 대궁주도 금색 의자에서 일어나 미간을 좁히고 서 있었다.
“대궁주, 저희도…….”
그 뒤에 있던 여인만큼 청수한 외모의 청년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급할 것 없으니 상황을 더 지켜보자. 촉룡도 내부의 일이라면 우리 같은 외부인은 끼어들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창류궁 궁주는 고개를 젓다가 순간적으로 안색이 달라져 고공을 올려다보았다.
기다란 금색 실들이 나풀나풀 떨어져 2, 30명의 사람으로 변하고 있었다.
앞장선 이는 네모난 얼굴에 길고 가느다란 눈 그리고 높은 코를 지녔는데 입술 위로 두 가닥의 은색 염소수염을 기르고 마른 몸에 금빛 구름무늬가 수놓아진 새하얀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그 뒤로 선 2, 30명의 남녀 모두 새하얀 장포를 걸쳤으나 차고 있는 장신구는 같지 않았다.
기운이 남다른 이들이 몰려드니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
은색 수염 사내의 출현에 백옥봉 정상의 호언 도인과 운예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들을 제외한 다른 내문 장로들과 직전제자들은 새롭게 나타난 은색 수염 사내의 신분과 그들의 등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한립은 뭔가 재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머리를 굴렸다.
경험상 은색 수염 사내의 신분은 백리염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만큼 대단할 것이다.
구양규산 등 열 명의 촉룡도 금선 도주들이 감히 백리염을 향해 돌발행동을 한 것도 아마 그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백리염은 촉룡도 제1도주지만 늘 폐관 수련을 해서 종문의 일에 관여하지 않았고 모든 이권과 자원은 다른 도주들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었다.
외부 인사의 개입이 없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기 어려웠다. 어찌 되었든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고, 물이 말라가는 호수에 남아 죽은 물고기가 될 수는 없었다.
한립은 고공의 인물들을 면밀하게 관찰해 더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없는지 살폈다.
‘윽!’
그의 시선이 은색 수염 사내 뒤쪽의 수사들 중 부채를 쥔 청년에 다다랐을 때 뇌리에 예기치 못한 충격이 전해지며 통증이 밀려왔다.
한립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태양혈을 문질렀다.
준수한 용모의 청년은 꽃과 물고기, 새, 곤충 등이 화려하게 수놓아진 은색 경장 차림을 하고 부채를 팔랑이면서 아래쪽 수사들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한참동안 혈을 눌러 통증을 완화한 한립은 성급히 고개를 들지 않고 화가 난 눈빛을 숨겼다.
“설앵이 궁주를 뵙습니다.”
강경대 반대편의 설앵이 은색 수염 사내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그 소리에 광장이 떠들썩해 졌다.
북한선궁 부궁주가 궁주라 칭할 사람은 ‘소진한’ 밖에 없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소진한은 금색 우리에 갇힌 백리염과 시선을 마주쳤다.
소진한은 입가에 냉소가 어렸고 백리염은 눈빛이 차가워졌다. 옥양자와 묵부자가 시선을 마주치고 분분히 걸음을 옮겨 분쟁지역에서 멀리 떨어졌다.
다른 이들도 그들처럼 뒤로 물러나 제단 중앙은 텅 비었다.
“소 궁주, 저도 처음에는 촉룡도 내부의 갈등이라 생각해서 끼어들지 않았습니다. 허나 지금 보니 북한선궁이 관여되어 있는 듯하군요. 이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답을 주시지요?”
창류궁 궁주 낙청해가 선궁 수사들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백리염은 천정(天庭)이 쫓고 있는 윤회전(輪回殿)의 인물입니다. 본궁이 천정의 명을 받아 잡아가는 것이라면 이해되시겠습니까?”
소진한이 냉랭히 답했다.
그 말과 함께 펼쳐진 금빛 두루마리에는 큰 글씨로 백리염을 추포한다는 추포령이 적혀 있었다.
윤회전이란 이름에 촉룡도 제자들은 물론 옥양자도 아연한 기색이었는데, 묵부자와 낙청해만 뭔가를 아는 눈치였다.
묵부자는 전음으로 호언 도인에게 미안하다는 짧은 말을 남기고 아예 강경대에서 날아올랐다. 소매를 펄럭여 거대 벼루를 불러낸 그는 이런 시비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듯 멀리 떠나갔다.
옥양자 등 다른 인사들도 영리한 이들이었기에 눈치껏 둔광을 일으켜 빠져주었고, 호기심 강한 소수만이 수백 리 밖에 남아서 구경을 했다.
“구양규산, 정말 나를 배신할 셈입니까?”
백리염은 우리 밖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금선 8명을 둘러보았다. 뜨거운 화염이 무서운 열기로 사슬을 태웠지만 녹아내린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구양규산 등도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혀 금빛 우리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백리 수사, 아무리 촉룡도라도 선궁과 맞설 수는 없습니다. 그들 배후에는 천정이 있어요. 촉룡도를 지키려는 우리의 의지를 배신이라 부를 수는 없지요. 아니면 가만히 앉아서 촉룡도 전체가 당신과 함께 망하는 것을 지켜보란 말입니까?”
구양규산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같은 생각인 것이냐?”
백리염은 그들 뒤의 36명의 부도주들을 향해 물었다. 부도주들은 고개를 조아리고 그와 시선을 마주치길 꺼렸다.
이제 제단 계단에 앉은 천여 명의 수사들은 아주 난감한 상황에 놓였다.
선궁 궁주가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도 그간의 경험을 통해 촉룡도에 사달이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에 당장 떠나고 싶어도 선궁 무리의 눈치가 보여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립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수시로 고공의 선궁 무리를 힐끔거렸고, 기량은 침묵을 지켰다.
“구양규산, 아직도 공격하지 않고 뭐 하는 겝니까!”
소진한의 말에는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구양규산 등 금선 도주들은 대답 없이 한 손으로 금색 사슬 끝을 쥐고 다른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강렬한 파동이 금선들의 몸에서 흘러나와 주변 백리 허공이 파문으로 가득 차 흐릿하게 보였다.
금색 우리는 파동 속에서 가느다란 금빛 실을 응결해 백리염을 향해 마수를 뻗쳤다. 바로 그 순간, 금색 사슬을 통제하는 회포(灰袍) 노인 뒤로 거대 설련화 허상이 날아들었다.
구양규산이 그걸 보고 놀라 소리쳤다.
“운예 수사, 안 됩니다…….”
그가 말을 마치기 전 설련화 허상 속에서 새하얀 거대 손이 튀어나와 들고 있던 구슬을 던졌다.
콰쾅!
구슬이 터지면서 광풍과 눈을 찌르는 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회포 노인은 진법과 연결된 사슬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던 데다 금발 사내와 검은 천을 두른 여인이 호언 도인을 막고 있어 갑자기 운예가 이런 일을 벌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시간이 없어 겨우 보호막만을 방출한 노인은 변변찮은 방어 보물도 없이 일격을 맞았다.
푸학!
노인은 선혈을 토하며 끈 떨어진 연처럼 힘없이 날아가 백리염을 둘러싼 금색 우리에 쾅 하고 부딪쳤다.
금색 사슬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지만 다른 손의 수결은 풀린 지 오래였다. 그 모습에 백리염은 광소를 터트리며 두 눈에서 실체화된 붉은 빛을 쏘아 보냈다.
동시에 그의 기운이 급격히 강해지고 있었다.
고공에서 소진한이 코웃음을 치며 소매 속에서 찬란한 금빛 부적을 화살처럼 날렸다. 법칙 파동이 넘실거리는 금전문 부적이었다.
호언 도인은 곧장 주술문자가 깨알같이 적힌 푸른 구슬을 꺼내 혀끝을 깨물어 그 안에 정혈을 흡수시켰다.
그를 막고 있던 금발 사내도 수결을 맺어 등 뒤의 금색 고리가 회전하며 날아오르게 했고, 검은 면사 여인도 그림자로 변해 운예가 있는 곳으로 쇄도했다.
“가라!”
두 눈을 부릅뜬 호언 도인이 입을 열었다.
그의 피를 머금은 푸른 구슬은 흐릿하게 사라졌고, 금발 청년이 발동한 금색 고리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쉭!
푸른 구슬은 돌연 금색 부적 가까이에 나타나 주술문자들을 반짝이며 터져버렸다.
퍼엉!
거대한 푸른 안개 덩어리가 기운의 파도를 만들어 사방팔방을 휩쓸었다. 그런데 안개가 흩어지기도 전에 아래쪽에서 금빛이 쑥 빠져나갔다.
그러나 금색 부적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고 금빛 우리로 떨어졌다.
부적이 우리에 닿기 직전, 허공에 불현듯 보일 듯 말 듯 투명한 검빛 하나가 날아들었다.
팟.
누군가 알아차리기 전에 물과 같은 검빛은 스스로 흩어지고, 충돌로 미묘하게 경로가 어긋난 부적은 우리에 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
이런 심란한 일들이 벌어지는 동안 제단의 계단과 광장에는 정적이 흘렀다.
저계 수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계단에 앉은 천여 명의 촉룡도 진선 수사들도 불똥이 튀지는 않을까 겁을 먹고 있었다.
한립은 남색 빛이 어린 눈으로 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꿰뚫어 보았다
북한선궁 궁주 소진한이 방출한 금색 부적은 호언 도인의 위력적인 일격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는데 창류궁 궁주 낙청해가 암암리에 투명한 검빛을 날려 해결해 주었다.
선궁이 명의상 북한선역의 최대 세력이라고 하지만 창류궁과 미묘한 긴장감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고공에서 담담히 낙청해 쪽을 바라본 소진한은 아무런 내색하지 않고 제단 위로 훌쩍 뛰어내렸다.
이에 낙청해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소매 속에 가려진 오른손을 천천히 풀어 황금용 무늬의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십여 명의 남포 수사들을 태운 거대 남색 꽃은 여전히 허공에 떠서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크르릉…….
소진한의 두 발이 제단에 닿기 전, 용울음 소리가 크게 울렸다.
우리 속의 백리염이 두 눈에서 화염을 분출하며 다섯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만들어 금빛 우리를 내리치고 있었다.
그의 손에서 적금색 화염이 뭉실뭉실 올라와 흉악한 용 머리를 이루었다.
쿠쿵!
굉음에 하늘이 떨리고, 화염 용머리가 한입에 금빛 우리의 철창 중 하나를 뜯어냈다. 철창의 주술문자들이 왜곡되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철창이 무너지자 금빛 우리가 붕괴해 폭삭 주저앉았다.
강경대 위에서 더없이 눈부신 금빛이 용머리 허상 수십 개를 머금고 터져나가 사방을 자욱하게 뒤덮었다.
충격으로 제단 절반이 무너지고 금제를 조종하던 여덟 금선들은 심각한 의식의 타격을 입어 보호막을 두른 채 폭발에 튕겨 나갔다.
그들 중 공교롭게도 용머리 허상과 직접 부딪친 이들은 보호막이 부서져 선혈을 토하면서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호언 도인이 검은 면사 여인과 대치 중인 운예 옆으로 번득 이동해서 붉은 안개로 들이닥치는 용머리 허상을 막아주고 그녀와 함께 강경대를 날아 내려왔다.
부도주들도 전방의 십여 명의 금선 도주들이 대부분의 충격을 막았으나 잔여 여파에 이리저리 휩쓸리다 그 틈을 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둔술을 펼쳐 날아갔다.
제단을 따라 빙 둘러있는 계단에 앉아 있던 진선경 수사들은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듯 각기 다른 수단을 펼쳐 형형색색의 둔광을 일으켰다.
그전에는 고공의 선궁 수사들을 경계해서 함부로 도망가지 못했는데 이런 혼란이 벌어졌으니 내빼기에는 이만한 기회가 없었다.
한립과 기량도 그런 무리에 섞여 같은 방향을 택해 쏘아져 나갔다. 무너지는 제단 파편에 광장의 십만여 저계 수사들도 대경실색해 각종 보물을 불러낸 뒤 흩어지고 있었다.
백옥봉에서 수천, 수만 개의 다채로운 빛줄기가 날아올라 장관을 이루었다.
낙청해는 한 손으로 수결을 맺어 남색 거대 꽃의 보호막을 발동해 강풍으로부터 무리를 보호했고, 선궁의 부궁주 설앵도 소매를 펄럭여 은백색 어가를 반투명한 보호막으로 둘러쌌다.
설앵이 낙청해를 보는 눈빛이 곱지 않았으나, 낙청해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자리만 지켰다.
아래로 날아들던 소진한은 속도도 줄이지 않은 채 떨어졌다.
쿠쾅!
전신에서 음산한 한기를 피워 올린 소진한 주위로 하얀 빙산(氷山)이 응결해 백옥 제단을 강타했고, 이미 절반 정도 무너진 강경대가 더 버티지 못하고 완전히 바스러져 백옥봉 전체가 진동했다.
사람들을 따라 멀리 날아가고 있던 한립이 뒤를 돌아보았다.
얼음과 백옥 파편이 난무하는 백옥봉은 거의 폐허가 되어 있었고 그 잔해 아래에서 붉은빛이 솟아올랐다.
쩡!
팔뚝 굵기의 붉은 화염 기둥과 함께 백리염이 빙산을 두 쪽으로 가르며 날아올라 호언 도인과 운예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소진한은 백사(白蛇) 모습을 한 안개가 휘감고 있는 수정 장검을 불러내 백리염이 날아가는 곳을 향해 장검을 휘둘렀다.
냉기가 응결한 수백 마리의 흰 구렁이들이 꿈틀꿈틀 백리염의 머리 위로 몰려들었다.
“소진한! 날 잡고 싶다면 제대로 해야 할 겁니다.”
그의 공격에 백리염도 붉은 화염이 감도는 장검을 불러내 횡으로 갈랐다. 수백 개의 화염 기둥이 나타나 흰 구렁이들을 공격했다.
쿠콰콰콰쾅.
붉은 화염과 얼음 결정체가 맞부딪쳐 연달아 천둥이 치는 듯한 폭음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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