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9화. 오쇠(五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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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 하나가 탈 시간이 지났을 때, 구양규산이 곁의 금선 도주들과 속삭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수사들을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백리 도주를 맞이하겠습니다.”
차분한 목소리가 그 많은 이들의 귓가에 또렷이 울려 퍼졌다. 다음 순간, 제단을 포함한 광장과 산 아래 수사들이 전부 일어났다.
“백리 도주를 뵙습니다.”
촉룡도 장로와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소리가 산에 메아리쳤다.
출렁…….
맑은 하늘에 기이한 파문이 떠올라 적홍색 화염을 내뿜더니 붉은빛이 금빛으로 변하면서 점점 눈을 찌를 듯 밝아졌다.
동시에 압도적인 영기의 압력이 백옥봉에 강림해 모두를 침묵하게 했다.
빛 속에서 성큼 걸어 나와 제단에 선 이는 3, 40대로 보이는 피부가 홍옥(紅玉)처럼 붉으면서 윤기가 도는 인물이었다.
곧은 자세에 단정한 표정을 한 사내는 곧게 뻗은 검미(劍眉) 아래 위엄 어린 맹수의 눈빛을 반짝였다.
그는 진주가 달린 금관을 이용해 적홍색 머리카락을 올렸고, 불타오르는 듯한 붉은 장포에는 이무기를 본뜬 수가 가득 놓여 있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촉룡도 제1도주, 백리염, 전설 속의 태을경을 한 걸음 앞두고 있다는 존재였다.
“낙 형, 장청해(藏靑海)에서 뵙고 10만 년 만입니다.”
백리염은 창류궁 쪽을 보고 밝게 웃음 지었다.
“백리 형께서 폐관 수련에만 매진하지 않으셨다면 종종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을요…….”
그 말에 낙청해가 비꼬듯 말했다.
“설앵 부궁주께서도 와주셨군요!”
백리염은 그냥 웃어넘기고 몸을 돌려 선궁 쪽에도 인사를 했다.
“백리 도주의 영준한 자태는 여전하십니다. 이번 폐관 수련으로 태을경에 더 가까워지셨겠지요? 미리 축하의 말씀 드리겠습니다.”
부인은 작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허허, 아닙니다. 태을경이 어디 쉽게 논할 수 있는 경지던가요? 그랬으면 이리 오랫동안 폐관 수련할 필요도 없었겠지요.”
백리염의 말에 아름다운 부인은 잔잔히 미소를 짓고 더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이 자리에 참석한 것만으로도 수사들은 나 백리염과 인연이 닿았다 할 수 있네. 오늘 수련을 하면서 얻은 깨달음을 모두와 함께 나누려 하니 모두 마음속의 의혹을 풀고 역천의 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시기를 기원하겠네.”
말을 하는 백리염의 눈길은 산봉우리에 모인 수사들을 넘어 촉룡도 전역을 둘러보고 있는 듯했다.
그는 몸을 돌려 제단 중앙 보라색 탁자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수십 명의 촉룡도 금선 도주 및 부도주들 그리고 다른 종문의 수사들은 그의 좌우에 엄숙하게 앉아 있어 속세의 절에서 불상을 지키는 나한들처럼 보였다.
댕! 댕! 댕!
세 번의 종소리가 산맥 전체에 유유히 퍼져나갔다. 한립은 마음의 호수에 잔물결이 일고 정신이 평안해졌다.
“하늘은 위에 있어 그 빛이 검고 땅은 아래 있어 그 빛이 누런데, 하늘과 땅 사이는 넓고 커서 끝이 없다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모든 시작은 도(道)가 아니지만 모든 곳에 도가 있어서, 해와 달 그리고 별의 움직임부터 만물이 성장하고 시들어감에 도가 있느니라…….”
백리염은 아무것도 없는 전방을 주시하면서 느긋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목소리 자체가 기이한 힘을 담고 있어서 어떤 때는 아주 아득하게 들려오는 것 같다가 또 어떤 때는 바로 옆에서 쩌렁쩌렁 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수사들의 마음을 쿵쿵 울리고 있었다.
그 안에서 깨달음을 얻은 이들은 체내 법력의 흐름이 가벼워지며 수행의 고비가 말랑말랑해지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한립은 설법의 내용을 이해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처럼 큰 도움은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의식의 힘이 동급 수사를 월등히 초월하는 그는 겨우 촉룡도 금선 도주의 설법을 들었다고 다른 이들처럼 마음이 요동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진실안과 장천병이 응결해낸 수정벽에서 들은 귀 큰 승려의 설법에 더욱 정도(正道)가 담겨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한립은 조금 실망했지만 눈을 감고 계속해서 설법에 집중했다. 어쨌든 태을경에 발을 걸친 인물이 이야기하는 대도에 대해 들어두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시간이 흘러 해가 중천에 떴다.
제1도주의 음성은 아직도 산봉우리에 유유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천인의 오쇠(五衰), 진선의 삼쇠(三衰)라 함은…….”
백리염의 설법이 이 부분에 이르렀을 때, 백옥 제단의 모든 진선들이 바짝 귀를 기울이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심지어 금선 중에도 몇이 자세를 고쳐 앉아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한립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답답해하다가 백리염이 잠시 말을 멈춘 틈을 타 기량에게 전음을 보냈다.
“……기 수사, 송구스럽지만 삼쇠와 오쇠가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니, 려 장로! 진선이 삼쇠의 화를 지녔다는 것을 모르고 계셨습니까?”
한 글자도 놓치지 않겠다는 기세로 듣고 있던 기량이 깜짝 놀라 전음으로 답했다.
“가르침을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런, 이런……. 도겁에 성공해 비선을 하면 진선경에 이르게 되지 않습니까? 대승기 이하의 수사들이 볼 때는 공덕을 채워 선인이 된 것이라 볼 수도 있겠지요. 허나 우리는 진선경이 그저 막 선인의 문턱에 이른 수준밖에 되지 않음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선인이라는 칭호가 체면은 서지만, 무한한 수명을 지녔다고 해서 꼭 천지와 수명을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 원인이 바로 삼쇠의 겁에 있습니다.”
기량은 백리염의 설법을 들으면서 틈틈이 설명해주었다.
“삼쇠의 겁도 대승기 때의 비승 도겁과 비슷한 것입니까? 어떻게 막을 수 있습니까?”
한립은 미간을 좁히고 물었다.
“삼쇠가 겁이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비승의 겁이나 이전에 겪었던 천겁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진선경 수사가 길고 긴 삶 속에서 맞닥뜨리는 세 가지 재앙을 뜻하는데, 첫 번째 쇠락은 선쇠(仙衰)로 체내의 선령력이 아무 이유 없이 유실되어 수행이 크게 줄거나 심하면 경지가 떨어지기도 합니다…….
두 번째 쇠락은 구쇠(軀衰)로 몸이 썩어 문드러지고 체력과 기백이 떨어져 더이상 방대한 선령력을 담을 수 없게 되면 몸이 터져 사망하게 되지요…….
세 번째 쇠락은, 규쇠(竅衰)로 선규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이 세 가지 겁에 대항할 방법은 다양하게 전해지나 개인의 상황에 따라 효과가 각기 다르지요. 그래도 법칙의 힘에 매진해서 어느 정도 성취를 쌓으면 쇠겁에 저항하는 데 확실히 큰 도움이 된다고는 하더군요.”
“그랬군요. 진선경 수사들과 종문이 법칙의 힘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가 그저 실력을 쌓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어요. 삼쇠는 언제 도래하며 어떤 조건을 충족해야 촉발되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한립은 겉으로는 차분하게 질문을 하고 있었으나 내심 가슴이 철렁했다. 기억을 잃어서인지 이런 내용에 대해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오늘 기량의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진선경 수행을 지녔으니 아무 걱정이 없다고 여겼는데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쇠겁의 강림은 사람에 따라 달라서 그냥 하늘의 뜻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운이 좋으면 수백만 년 동안 쇠겁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지만 운이 나쁘면 수만 년 만에도 변을 당하지요. 전공전에 있던 방전 장로를 기억하실 테지요? 그분도 진선경 중기 수사였으나 어쩐 일인지 느닷없이 선쇠가 도래해서 대승기 경지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기량의 목소리에 동병상련의 감정이 느껴졌다.
“기 형, 첫 번째와 두 번째 쇠락의 강림이 무작위라면 수련 속도가 무척 빨라서 그 전에 금선의 경지에 이른 자는 화를 피해갈 수도 있겠군요?”
“허허, 말은 되는 소립니다. 만 년 내로 금선경에 이르면 그 전에 두 쇠겁과 만날 가능성은 극히 적으니까요. 허나 선계에서 그게 가능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만 년 내에 진선경 중기에만 이르러도 천운이 따랐다고 하는 판에요. 게다가 진선으로 수련하는 내내 두 쇠겁을 운 좋게 피한다고 해도, 금선경에 도달하려면 세 번째 쇠락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한립의 질문에 기량은 씁쓸하게 웃음 지었다.
“그건 또 무슨 이야기입니까?”
“제가 아는 건, 금선경에 도전할 때 반드시 세 번째 쇠락이 도래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지만 그게 금선경 수사들이 현저히 적은 이유라더군요.”
“……방금 전 백리 도주께서는 천인에게 오쇠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나머지 두 가지 쇠락은 무엇인지요?”
“금선이 되면 그 후에 겪게 되는 두 가지 쇠락이 있다고 하여, 천인오쇠(天人五衰)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도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저는 알 도리가 없군요. 어찌 되었든 선인의 길은 까마득하게 멀다는 소립니다…….”
기량이 아직 말을 마치지 않았는데 백옥 제단 위에서 변고가 발생했다.
청동 솥 왼쪽에 앉아 있던 촉룡도 금선 도주 중 여덟 명이 튀어 오르듯 일어나 손목을 털었다.
촤르릉.
사슬들이 진동하는 소리가 울렸다.
구양규산을 포함한 여덟 금선의 소매 속에서 어린아이 팔뚝 굵기의 금색 사슬이 뱀처럼 날아가 설법을 하는 백리염을 노렸다.
백리염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저 말을 멈추고 전신에서 적홍색 빛을 일으켜 보호막을 둘렀다.
채채챙!
사슬과 보호막이 마찰하면서 극심한 소음이 울렸으나 사슬들은 결국엔 백리염에 도달하지 못했다.
쿵!
백리염이 백옥 제단을 박차고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구양규산 등이 그것을 보고 신중한 얼굴로 수결을 맺으며 동시에 멈추라는 주문을 외웠다.
여덟 개의 금색 사슬이 맹렬히 빛을 발하더니 백리염과 그의 적홍색 보호막을 통째로 꽁꽁 옭아맸다.
휙 끌려 제단으로 돌아온 백리염은 두 손에 붉은빛을 일으켜서 금색 사슬로 뻗었다.
치지직!
사슬도 가만히 당하지 않고 금색 뇌전빛을 튕겨 수백 마리 금색 뇌전 뱀이 그의 두 팔을 휘감고 말았다.
두 팔이 저릿해진 백리염이 잠시 멈칫한 사이, 금색 사슬들에서 튕겨 나온 뇌전빛이 서로 연결되어 실체화된 우리를 만들어냈다.
백리염은 금방 마비에서 풀려났으나 그 찰나의 지체로 쉽게 이곳을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우리의 금빛 창살마다 비늘 문양과 주술문자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어 그를 가두기 위해 전문적으로 제작된 고계 선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일이 번갯불이 튀듯 한순간에 벌어져 광장을 둘러싼 만여 명의 제자들도 상확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제단 위 36명의 부도주들은 기함해서 서로의 눈치를 살폈는데 다들 아무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청동 솥 우측에 앉아 참관하러 온 옥양자 등도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누군가 입을 열고 무슨 일인지 질문을 하려 해도 분위기가 험악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상을 감지한 한립도 주변의 다른 수사들처럼 방석에 앉은 채 의아한 눈빛으로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요?”
얼굴을 찡그린 기량이 의문을 표했다.
제단 위에서 호언 도인이 어두운 얼굴로 앞으로 나서려 하자 금발 사내와 검은 천을 두른 여인이 번득 이동해 그의 앞을 막았다.
“다들 뭐 하는 짓들입니까! 이건 반역입니다.”
호언 도인의 질책에 몇몇은 부끄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렸으나 아무도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운예도 노기를 띠고 일어나 다른 도주들과 거리를 벌렸다.
12명의 도주 중에서 그녀와 호언 도인만 까맣게 아무것도 모르는 듯 보였다. 우리 속의 백리염이 찬찬히 그들을 둘러보더니 두 팔에서 적홍색 빛을 뿜었다.
화륵!
작렬하는 화염이 치솟아 그를 둘러싼 금색 사슬들을 불살랐고, 그 속에서 홍옥 같은 그의 피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금린쇄룡진(金鱗鎖龍陣)으로 날 오랫동안 가둬두진 못할 겁니다. 준비한 다른 방법이 있다면 펼쳐보시지요?”
백리염이 서늘하게 물었다.
구양규산 등 금선 도주들은 미리 충분히 상의하고 왔는지 다들 입을 꾹 다물고 어떤 정보도 주지 않았다.
광장의 내외문 수사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친분이 있는 이의 귓가에 속닥거리면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참관하러 온 외부 문파의 장로들도 당황스럽기는 매한가지였으나 복잡한 사정이 있을 거라 여기고 제자리로 돌아가 끼어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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