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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637화 (1,394/2,000)

1637화. 연화

*

얼마 뒤 한립은 백옥성의 어느 한적한 길을 걷고 있었다.

“한 수사, 바로 진법을 펼쳐 뇌백정을 연화시켜야겠습니다.”

머릿속에 해 도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무엇을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그의 질문에 진법을 펼치는 법과 필요한 재료 목록이 떠올랐다.

“……알겠습니다. 조속히 준비해 적하봉에 수사를 위한 밀실을 마련해 두겠습니다.”

목록이 상당해서 구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뻔했으나 고운대륙 수사들이 몰려든 백옥성에 있어 다행이었다.

진법은 조금 복잡해 보여도 그의 실력에 별 것 아니었다.

“객잔 방에서도 충분합니다. 괴뢰에 대해 충분히 연구해놔서 며칠이면 될 테니까요.”

해 도인의 말에 한립이 바로 근처의 재료 상점으로 향했다.

그날 밤, 객잔으로 돌아온 한립은 진법 깃발들을 잔뜩 꺼내서 이리저리 날려 보냈다.

우웅!

주술 소리와 함께 다섯 겹의 얇기가 다른 빛의 장막들이 떠올라 철통처럼 방안을 가려주었다.

“가만…….”

푸른빛으로 방안의 탁자와 침상 같은 가구들을 구석으로 옮기고 구뢰목과 다채로운 재료들을 꺼내던 한립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행동을 멈췄다.

그는 저물탁에서 은색 문양이 빼곡하게 그려진 보라색 부적을 꺼내 들었다. 무상맹 임무에서 만난 감구진이 준 청풍쇄선부(靑風鎖仙符)였다.

‘혹시 복면 홍의 여인이 감구진?’

감구진의 기운과 홍의 여인의 기운은 약간 달랐지만 그 정도 변화는 진선경 수사라면 누구나 감출 수 있었다.

“감구진에 인구 그리고 인삼까지……. 무상맹 고계 회원들이 촉룡도에 이리 많았다니.”

한립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선부를 넣어두고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정신을 집중한 그는 바닥에 문양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바삐 움직인 지 두세 시진이 지나 해가 뜰 무렵 텅 비어 있던 방안에는 원형의 진법이 완성되어 있었다.

빼곡하게 문양이 가득한 진법 사방에는 구뢰목이 꽂혀 뇌전을 치직거렸다.

한립은 저물대에서 진법 중간으로 해 도인의 새로운 육체를 불러냈다. 진법을 살핀 해 도인은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호법을 서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혼자서도 할 수 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해 도인의 완곡한 거절에 한립도 수긍했다. 제1 도주의 설법까지 며칠이 남아 있어 도단 재료를 찾아 더 돌아보고 싶었다.

해 도인은 곧장 수결을 맺고 중얼중얼 주문을 외고 있었다.

파치칫! 파칫!

금빛 뇌전들이 가슴에서 일어나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지면의 진법에서도 금빛 뇌전들이 오묘한 주술문자를 이루고 괴뢰의 뇌전과 호응하면서 서서히 회전했다.

별안간 해 도인을 중심으로 뇌전 구슬이 형성되어 수시로 굵직한 뇌전을 사방으로 날렸다.

미리 펼쳐 둔 다섯 겹의 금제가 뇌전이 새어나가지 않게 막기는 했지만 한립은 성급히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잠시 구석에 서서 지켜보았다.

해 도인의 머리에서 뇌전 뱀들이 보랏빛을 머금고 나타났다. 그 안에 흐릿하게 뇌백정 허상이 보였다.

콰르릉!

노란빛 뇌전은 해 도인의 몸을 뒤덮으면서 괴뢰를 관통했다.

여기까지 본 한립이 몸을 돌려 나가려는데 해 도인 머리 위의 뇌백정 허상이 튀어 나가 바깥의 금색 뇌전 구슬과 합쳐졌다.

매끄러운 표면을 지녔던 금색 뇌전 구슬이 불룩해지더니 펑! 하고 금빛과 보랏빛이 섞인 뇌전들이 방 가장 안쪽의 푸른 금제를 강타했다.

치직!

푸른 금제는 겨우 한두 호흡을 버티다 찢겨나갔고, 남은 뇌전들이 두 번째 누런 금제를 때렸다.

어둑해진 누런 금제는 금방 터져나갈 듯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금색 뇌전 구슬이 두 번째로 불룩하게 솟아올라 다시 터지려 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변고에 한립이 걸음을 멈추었다.

크앙!

그의 등 뒤에서 현무, 뇌붕, 거원, 신룡 네 개의 거대 성수 허상들이 떠올라 입을 쩍 벌리고 각각 검은색, 은색, 노란색, 붉은색의 빛을 나머지 네 개의 금제 속으로 날려 보냈다.

그러자 금제의 보호막 층이 두꺼워졌다. 어둑했던 누런 금제도 희미하게 거원 허상을 품고 원래 빛을 회복하고 있었다.

파치칫…….

굵직한 뇌전들이 금제를 때리자 금강석이 버티고 있는 것처럼 채챙! 튕겨 나갔다.

누런 보호막이 깜빡거리다 거원 허상이 흐릿해질 무렵 한립은 주문을 외고 수결을 맺었다.

우웅!

금제 보호막들이 네 가지 색의 빛의 고리들을 내뿜어 사방팔방을 뒤덮었다.

반짝이는 빛 속에서 네 개의 층이 하나가 되어서 사람 절반만 한 두께를 이루었다.

이제 뇌전이 아무리 튀어도 보호막에 흠집조차 가지 않았다. 그제야 한립은 표정을 풀고 수결을 맺은 채 기다렸다.

그러나 해 도인은 시종일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눈을 감고 뇌전 속에 버티고 앉아 있었다. 그걸 본 한립은 할 말을 잃었다.

그가 나서지 않았으면 뇌전의 힘은 나머지 네 금제를 찢어버리고 객잔 전체를 허물어 버렸을 지도 모른다.

한립이 잠시 고민하다 괜찮은지 전음으로 물어보았지만 해 도인은 듣지 못하는 듯했다. 한립은 어쩔 수 없이 나가려던 마음을 고쳐먹고 두세 시진을 더 머물렀다.

해 도인 머리 위의 보랏빛 뇌전이 줄어들 기미 없이 더욱 밝은 빛을 머금고 있었다. 방구석에서 수결을 맺고 선 한립은 굳은 표정으로 보호막 층을 유지했다.

‘이래서야 나갈 수가 있나!’

사흘 뒤, 가부좌를 틀고 앉은 한립은 여전히 수결을 맺고 있었다.

진법 중앙의 해 도인은 전신이 보랏빛 뇌전으로 뒤덮여서 언뜻 보면 보라색 갑옷을 입고 있는 듯 보였다.

진법이 형성한 금색 뇌전 구슬도 크기가 상당히 커져서 거의 방 절반을 채우고 있었다.

한립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오늘 설법대회가 시작될 텐데 이러다가는 늦고 말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해 도인을 데리고 적하봉으로 데려가 오랜 세월 그가 겹겹이 금제를 쳐놓은 밀실에 넣어두고 올 것을 후회가 되었다.

이때, 이변이 발생했다.

수없이 많은 뇌전이 곳곳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한립도 눈을 뜨고 서둘러 진법을 살폈다.

연달아 파치칙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보랏빛 뇌전과 진법 위의 금색 뇌전구슬이 앞 다투어 해 도인의 체내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진법 중앙에서 해 도인은 노란색, 금색, 보라색이 섞인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세 가지 색깔의 문양이 피부 위에서 꿈틀꿈틀 움직여 진법들을 만들어냈는데 방출하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금선급 위력이 이전과 달리 제약 없이 뿜어져 나왔다. 한립은 손을 분주히 움직여서 방 안의 금제로 금선의 영기의 압력을 꽁꽁 감췄다.

그때 해 도인이 번쩍 눈을 뜨더니 두 눈동자에 감히 직시할 수 없는 빛을 품고 있었다.

슁! 슁!

날카로운 두 줄기의 빛이 두꺼운 보호막에 두 개의 구멍을 남기고 객잔 벽을 통과해 하늘 높이 사라졌다.

다행히 하늘을 향해 있어 사상자가 나오지는 않겠지만, 한립은 기겁해서 술법을 펼쳤다.

우웅!

쿠콰콰앙!

번쩍번쩍 빛난 사색 보호막이 순식간에 구멍을 채워 기운을 가린 후, 하늘 위에서 두 빛줄기가 맹렬히 폭발했다.

천지영기가 사납게 출렁이면서 모골이 송연한 영기의 압력과 함께 노란색, 금색, 보라색의 삼색 돌풍이 몰아쳤다.

돌풍 속에 쩌렁쩌렁하게 뇌전 소리가 울려서 백옥성 수사들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안색이 급변했다.

“이런 무시무시한 위력이라니, 절대 진선경 수사가 펼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도주 중 누군가가 백옥성에 오신 걸까요?”

수사들이 모인 곳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의식으로 외부 상황을 살핀 한립은 급히 수결을 맺어 해 도인의 기운이 더는 새어나가지 않게 조치했다.

두 줄기 빛은 순식간에 종적을 감추었고 설법대회 당일이라 수사들은 대부분 백옥성을 떠나 알아챈 이는 없는 듯했다.

거기다 누군가 알아챘다고 해도 금선 수사라 오인해 접근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삼색 돌풍마저 흩어지고 나자 딱히 성안에 피해를 입힌 것도 아니라 소란이 가라앉았다.

진법 중앙에서 해 도인이 일어나 몸을 움직여 보더니 위용을 부리던 기운을 싹 감추었다.

“오늘에서야 그간의 노력이 빛을 봅니다.”

“해 수사, 호법이 필요 없을 거라더니 어찌 된 일입니까? 혹시 몰라 남아 있지 않았다면 불필요한 시선을 끌었을 겁니다.”

3일 동안 꼬박 금제를 지키느라 경매며 교환회를 다 놓치고 말았다. 그 시간이면 도단 재료 한두 개를 구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도 뇌백정이 이렇게 방대하고 정순한 뇌전의 힘을 품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해 도인이 그의 어투에서 불만을 읽어내고 해명했다.

“됐습니다. 어찌 되었든 융합에 성공하셨으니 축하드릴 일이지요. 드디어 원하던 바를 이루셨으니 감축드립니다.”

한립은 미소를 지으며 해 도인의 경사를 축하했다.

“한 수사께서 저를 위해 선괴뢰를 찾아주시고 며칠간 호법을 서주신 덕입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기운이 노출되었으니 이곳에 더는 머물 수 없겠습니다. 설법대회도 곧 시작될 테니 가면서 이야기하시지요.”

한립의 말에 해 도인은 노란빛으로 변해 저물탁 속으로 돌아갔다. 손을 저어 노란빛으로 객잔 벽에 뚫린 구멍을 막은 한립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려던 그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복도 반대편을 쳐다보았다. 의식을 펼쳐 확인하니 감구진은 방에 없었다.

“비운화정을 팔라고 한 이유를 괴뢰의 몸을 융합한 후에 알려주신다고 하셨지요. 어째서였습니까?”

시선을 거두고 계단을 내려가면서 한립은 의식으로 해 도인과 대화를 나누었다.

“한 수사, 이 금선괴뢰를 움직이려면 어떤 힘이 필요할 것 같습니까?”

“…….”

“모든 선괴뢰는 선원석을 이용해 움직이고 이 육체도 예외는 아닙니다. 특히 실력이 금선경에 이르는 선괴뢰를 움직이는 데는 막대한 선원석이 들어서, 수사가 지닌 선원석 정도로는 충분치 않았습니다.”

“해 수사께서 움직이는 데는 선원석이 얼마나 들겠습니까?”

“제대로 힘을 발휘하려면 한 호흡에 선원석 10개는 필요할 겁니다.”

“뭐라고요? 한 호흡에 10개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충격이었다.

“그리 높은 수준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선괴뢰는 일반적으로 방대한 선령력으로 움직여야 해서, 한 호흡에 수십 개 혹은 수백 개의 선원석을 소모하는 존재도 있으니까요.”

“그런 괴뢰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뇌백정을 융합하던 중에 봉인된 기억 중 일부가 떠올랐을 뿐입니다.”

“오, 전 주인에 대해서도 무언가 떠오른 것이 있으신지요?”

한립은 죽었다는 해 도인의 전 주인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지켜봐야 알겠지만!

“파편적인 기억들이고, 대부분이 선괴뢰에 관한 자료라……. 한 수사께서 비운화정을 팔아 구한 선원석 3천여 개면 제가 몇 번은 나설 수 있을 겁니다.”

“이해했습니다. 가시죠.”

객잔을 나선 한립은 고개를 들어 백옥봉을 올려다보았다.

* * *

햇살이 드리운 백옥봉은 청명하기 그지없었다.

쪽빛 하늘에 하얀 구름이 둥실둥실 떠다니고, 그 사이를 일곱 빛깔 무지개가 가로지르니 선경이 따로 없었다.

고공에는 용의 머리에 말의 몸을 한 날개 달린 용마(龍馬)들을 탄 금갑 병사들이 은색 창을 들고 순찰했다.

백옥봉 상공의 은은한 금빛 금제는 진선경 이상의 수사들은 무난하게 날아 통과할 수 있었고 대승기 이하 수사들은 막혀 진입하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촉룡도 제자들은 백옥봉 아래까지 와서, 두 발로 걸어서 산봉우리 광장으로 올라야 했다.

오늘 백석 광장은 사람들로 들끓었다.

십 만여 명의 촉룡도 제자 및 부속 종문의 핵심 장로들이 거의 모든 방석을 차지하고 앉았는데도 끊임없이 새로운 수사들이 광장으로 들어섰다.

일부는 산봉우리가 복잡하다는 것을 알고 산 중턱 공터에 알아서 자리를 잡고 설법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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