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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635화 (1,392/2,000)

1635화. 공생문(共生紋)

*

한립은 대답 없이 머리를 굴렸다.

경매는 뒤로 갈수록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면 점점 가격이 오르고 있었다.

혈정우가 진귀하기는 해도 지금 경매 되는 것들과 비교해도 가치가 떨어지는데 더 나중에 등장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촉천성도 비슷한 생각인지 좌불안석이었다.

혈정우가 경매품으로 나오지 않으면 그도 한립에게서 원하는 물건을 얻을 수 없었고 괜히 동급 수사에게 신뢰만 잃게 된다.

이때 무대에 새로운 경매품이 올랐다.

불 속성 진선 요수의 요핵으로 주먹 크기에다 화염과 같은 붉은 빛이 일렁였다.

“금린홍정교(金鱗紅晶蛟) 요핵입니다. 진선 후기 최고봉에 이른 금선경을 한 발 앞둔 요수였지요. 요핵이 지닌 강력한 불 속성 법칙의 힘이 유실되지 않고 남아 있기에 불 속성 공법을 수련하는 수사분들에게는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보물일 겁니다. 최저가 선원석 60개로 시작합니다.”

키 작은 인영의 말에 한립이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핵에서는 무시무시한 실력처럼 강력한 법칙의 힘이 진동했는데 중란의 검은 두루미 요핵보다 훨씬 좋은 재료였다.

하지만 물건이 좋으면 값도 높은 법이었다.

“선원석 60개!”

바로 옆에서 첫 번째 목소리가 들렸다. 촉천성이었다.

“80개!”

다음으로 가격을 부른 여인의 목소리는 한립을 중심으로 반대편에서 들렸다. 가장 늦게 도착해 은근히 서늘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어 기억에 남는 수사였다.

“선원석 90개!”

경매장 오른쪽에서 또 다른 키 큰 수사가 가격을 불렀다.

“전 선원석 100개를 내놓겠습니다.”

연이어 촉천성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120개!”

여 수사 역시 망설이지 않고 선원석을 20개나 올려 불렀다. 고민하던 촉천성은 가격이 너무 많이 올랐다고 여기고 자리에 앉았다.

“선원석 130개!”

“140개!”

그 키 큰 수사가 콧방귀를 뀌며 가격을 올리자마자 여 수사가 물러서지 않고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걸 본 한립은 고개를 저었다.

진선 후기 요수의 요핵일 뿐인데 가격이 너무 과했다. 선원석 100개는 진선경 중기 수사들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수량이 아니었다.

“……145개!”

“150개!”

잠시 침묵하던 키 큰 수사가 겨우 가격을 올리자 여 수사가 성가시다는 듯 냉랭히 따라붙었다. 이번에는 키 큰 수사는 물론 대청 안의 그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적잖은 이들이 여 수사 쪽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는데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무대 위의 키 작은 신영이 즐겁게 요핵의 귀속을 선언했다.

“진선 요수의 요핵도 진귀하지만, 다음으로 소개해 드릴 물건의 가치는 더 대단하니 다들 기대해 주시지요!”

그가 손짓하자 혈홍색 옥 상자가 무대에 나타나 미세하게 달콤한 향기를 풍겼다.

옥 상자 안에는 팔뚝 굵기의 핏빛 연근이 담겨 있었다.

세 부분으로 나뉜 연근은 보존 상태가 아주 훌륭해서 잔뿌리조차 전혀 잘려나가지 않고 붙어 있었고, 핏빛 옥을 가져다 조각을 한 듯 투명하게 반짝였다.

짙은 단내와 그 위로 번지는 핏빛 무지개를 본 진선경 중기 수사들이 눈을 번득였다.

몸을 떤 촉천성은 크게 기뻐했고, 한립도 의외라는 눈빛으로 표정을 풀었다. 그가 너무 편협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했다.

연신이 5년 이하인 혈정우야 앞서 무대에 오른 경매품보다 못했지만 눈앞의 것은 못 해도 10만 년 이상 된 영약이었다.

그런데 핏빛 연근을 자세히 살피던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연근에 손톱 크기의 어두운 얼룩 같은 게 보여서였다.

“혈정우입니다. 혈정우 자체는 절정의 영약이라 보기에는 부족하지만 이건 무려 15만 년 이상 자란 녀석이지요. 보기 드문 천지영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몇몇 분들은 이미 발견하셨겠지만, 여기 보이는 회색 음영은 공생문(共生紋)입니다.”

키 작은 인영이 낭랑하게 소개를 했다. 그 말에 친분이 있는 이들이 속닥이기 시작했다.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공생문이란 두 영약이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자라면 서로의 영력이 영향을 받아 우연히 생기는 무늬입니다.”

“저는 공생문이 생긴다고 꼭 좋은 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약효가 혼잡해지거나 약해지기도 한다던데요?”

키 작은 경매관의 말에 넙데데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보호막에 가려져 있어도 굉장히 뚱뚱한 체형을 지녔을 거라 짐작되었다.

“허허, 박식하신 분이군요! 맞습니다, 공생문이 영약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미지수지요. 허나 저희 영초 재배의 대사에게 감정한 결과, 이 공생문은 좋은 영향을 미쳐서 혈정우의 약효는 정순하기 그지없다고 하더군요. 아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키 작은 경매관이 뚱뚱한 신영을 향해 답을 주었다. 무대 아래에서 또 한 차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경매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시작가 선원석 80개! 선원석 5개씩 가격을 올리실 수 있습니다.”

“선원석 80개!”

“90!”

“100개!”

논의를 거치면서 수사들의 관심은 더욱 뜨거워져서 한립이 나서기도 전에 가격이 상당히 올랐다.

기혈을 보하는데 좋은 영약이고, 특히 연체공법을 익힌 이들은 자나 깨나 바라는 보물이었다.

자리에 앉은 한립은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혈정우는 반드시 손에 넣어야 했으나 급히 나서기보다는 마지막에 경쟁에 뛰어드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촉천성을 보았다.

“과연 혈정우가 나왔군요. 약조대로 이것은 수사에게 넘겨 드리겠습니다.”

주먹 크기의 비운화정이 한립의 손에서 촉천성에게로 넘어갔다.

외진 자리에 있었고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다른 이들은 크게 신경 쓸 필요 없었는데 불 속성 요핵을 낙찰받은 여 수사가 무심결에 그것을 보고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이거 감사합니다.”

촉천성은 바라던 물건을 들고 무척 좋아했다. 몇몇 수사들이 돌아가며 가격을 부르다 혈정우 가격이 선원석 150개까지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가격을 부른 이는 그 뚱뚱한 신영이었다. 더는 그와 경쟁하던 이들은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160개!”

그때 한립이 손을 들고 가격을 제시했다.

“170개!”

고개를 돌려 코웃음을 친 뚱뚱한 신영이 바로 더 높은 가격을 외쳤다.

“190개!”

평온한 어투의 한립은 반드시 낙찰받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200개!”

이에 뚱뚱한 신영은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가격을 높였다. 그러나 한립은 계속해서 찔끔찔끔 경쟁할 생각이 없었다.

“250개!”

단번에 선원석 50개를 올려 불러 엄청난 가격이 되었다. 촉천성이 놀라 한립을 쳐다보았고, 장내의 다른 수사들도 그를 눈여겨보았다.

15만 년 된 혈정우가 아무리 귀해도 선원석 250개는 너무 높았다. 한립은 주변에서 쳐다보든 말든 무대 위의 혈정우를 보다 힐끗 뚱뚱한 신영을 살폈다.

상대는 주저하다 더는 가격을 부르지 않았다.

키 작은 경매관은 무척 흡족한 얼굴로 두 번 정도 더 가격을 올릴 사람이 없는지 묻고 혈정우의 귀속을 선포했다.

그제야 마음을 놓은 한립은 뛸 듯이 기뻤다. 드디어 만륜단 재료를 다 모은 것이다.

그가 생각에 잠긴 사이 다음 물건이 무대에 올랐다. 산과 강 그리고 궁전이 그려진 한 폭의 그림이었다.

남색 두루마리 그림은 한기를 발산하는 법보로 법칙 파동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비범한 선기가 틀림없었다.

다만 두루마리 구석이 약간 찢겨나간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선기 명한산하도(冥寒山河圖)입니다. 강대한 현명한기(玄冥寒氣)를 품고 있어 강력한 공격력을 자랑하지만 아쉽게도 약간 손상되었지요. 시작가 선원석 65개 입니다.”

한립이 두루마리를 보고 눈을 반짝였다.

이전에 낙찰된 남색 선검보다 법칙의 힘을 더 많이 함유한 데다 두루마리 그림 형태의 선기는 선검보다 제련하기 어려웠다.

구석이 약간 찢기긴 했지만 괜찮은 보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많은지 경매가 시작되자마자 가격이 선원석 90개로 올랐다.

“95개!”

한립이 가격을 불렀다. 흥미로운 선기라서 가격이 너무 높아지지만 않으면 낙찰받아볼 요량이었다.

“선원석 100개!”

멀지 않은 곳에서 여 수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핵을 낙찰받은 여인이었다. 그 뒤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뒤따랐다.

“선원석 150개.”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 소리에 한립은 고개를 저으며 과감히 경쟁을 포기했고 두루마리를 노리던 다른 수사들도 침묵했다.

“200!”

다른 이들의 예상과 달린 요핵을 낙찰받은 여 수사는 포기하지 않고 무려 선원석 50개를 올렸다.

그 말에 적잖은 이들이 이상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그냥 선원석 200개가 엄청난 액수라서는 아니었다.

선원석은 소모한 선령력을 쾌속으로 회복시켜 주었고 수련 속도를 높여 선규를 뚫을 때도 필요해서 진선경 수사들은 항상 선원석이 아쉬웠다.

그런 선원석 200개를 온전하지도 못한 선기를 위해 쓴다는 것은 의아한 일이었다. 그런데 쌍방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230개!”

“250개!”

“300!”

“350!”

둘 다 그림 두루마리가 꼭 필요한지 가격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치솟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는 다른 수사들도 엉덩이가 들썩들썩했다.

부서진 선기에 이렇게 목을 매는 것을 보면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 것인가 싶어서였다.

그들이 고민하는 동안에도 경쟁은 이어져서 가격이 선원석 800개까지 올랐다.

눈동자에 남색빛을 일렁인 한립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열심히 살펴봐도 유일하게 특이한 점은 현명한기를 함유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현명한기 그 자체는 그리 특별하지 않았는데 자세히 여러 번 살피니 무언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정확히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정염불새와 닮은 느낌이었다.

한립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시선을 거두었다. 살 것도 아닌데 머리 아프게 생각해 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선원석 천 개!”

날카로운 목소리에는 처음의 태연함을 버리고 이를 악물고 외치고 있었다.

“천 2백 개!”

이에 반해 여 수사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했다.

“……처, 천 5백 개!”

이번에는 날카로운 목소리도 고민한 티가 났다.

무대에서 키 작은 신영이 낙찰을 선포하기 전 ‘둘’까지 외쳤을 때에서야 가격을 부른 것이다.

“2천!”

여 수사도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상상을 초월하는 천문학적인 액수를 불렀다. 장내의 수사들이 이게 깜짝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가격이면 웬만한 선기 열 점은 구할 수 있었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아주 통도 크십니다. 어쩔 수 없이 명한산하도를 넘겨 드리지요.”

말을 마친 그는 뜻밖에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한립은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혀를 찼다.

미리 밖으로 나가서 다른 방법으로 보물을 강탈할 준비를 하려는 것은 아닐지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힐끗 여 수사 쪽을 보자 그녀는 아무 걱정 없다는 듯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키 작은 경매관도 얼떨떨한 얼굴로 명한산하도의 귀속을 선포했다. 진귀한 구경을 한 수사들은 시끌시끌했다.

이어진 경매에서는 더욱 진귀한 물품들이 나왔지만, 그가 필요로 하는 도단 재료는 없었다. 아무리 귀한 보물이라도 지금은 연단 재료를 구하는 것보다 중하지 않았다.

다시 반 시진이 흘러 마지막 경매품이 낙찰되고 경매가 종료되었다.

“오늘 경매는 여기까지입니다. 이제는 자유 거래 시간이니 진귀한 보물을 선보이고 싶으신 분들은 차례대로 무대에 올라주시면 되겠습니다. 모두 원하는 물건을 거래하시기를 기원하지요.”

키 작은 경매관은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다른 두 사람과 같이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 하얀빛이 무대로 날아들었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막 무대에 오르려던 다른 이들은 안타까운 얼굴로 걸음을 돌려야 했다.

“허허, 부족하지만 제가 먼저 무대를 차지했습니다.”

무대 위에서 그들을 향해 공수한 인물은 목소리가 굉장히 노쇠했다. 그 말에 다들 자리로 돌아가 앉는데 빼빼 마른 키 큰 신영만이 허허 웃음을 흘렸다.

“악 형의 정양광파공(正陽光波功) 둔술의 속도야 누가 따라잡을 수 있겠습니까! 함께 이런 자리에 참석할 때마다 가장 먼저 무대에 오르십니다.”

“아, 누구신가 했더니 부 형께서도 와계셨군요! 실례했습니다. 급히 처리해야 할 보물이 있어서 말입니다.”

악 노인이 무대 위에서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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