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632화 (1,389/2,000)
  • 1632화. 기량의 초대

    *

    한립이 상점 안으로 걸음을 딛자마자 붉은 깃털 장포를 걸친 청년 시종이 다가와서 말을 붙였다.

    “선배님, 어떤 재료를 찾으시는지요? 저희 역동루(易東樓)에는 없는 물건이 없습니다. 가격도 다른 곳에 비해…….”

    “소삼, 너는 다른 손님들을 모시거라. 이분은 내가 직접 안내해 드릴 것이다.”

    시종이 말을 마치기 전에 장궤로 보이는 깃털 장포 노인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움찔한 시종은 눈치 있게 빠져주었다.

    “장로 대인께서 찾아주셨군요! 어린아이라 보는 눈이 없어 무례를 범했더라도 용서해 주십시오. 어떤 재료를 보고 계십니까? 저는 극서지역에서 대대로 재료상을 해온 역 씨 가문 사람으로, 말씀만 해주시면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하겠습니다.”

    노인의 공손한 말에 한립은 말없이 옥간을 꺼내 건네주었다.

    도단을 제련하는데 필요한 재료 중 아직 구하지 못한 것과 만륜단 주재료 중 나머지 두 가지가 적혀 있었다.

    “아……. 송구합니다, 대인. 이 재료들은 너무 진귀한 것들이라 저희 같은 작은 상점에서는 구하기 어렵습니다.”

    “어디를 가야 이런 재료들을 볼 수 있겠느냐?”

    “이 늙은이도 경전에서나 보았을 뿐 다른 곳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깃털 장포 노인은 겸연쩍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노인의 배웅을 받으며 그곳을 나선 한립은 다른 규모가 큰 재료 상점도 몇 군데나 둘러봤지만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없었다.

    * * *

    성 중심부의 대형 재료 상점에서 한립이 걸어 나왔다. 태연한 얼굴 뒤에는 울적한 심사가 숨겨져 있었다.

    반나절 동안 재료 상점이란 상점들은 전부 돌아봤지만 결국 재료를 구하지 못했다. 게다가 관련 정보도 일절 듣지 못했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떼려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호오, 려 형 아닙니까?”

    한립이 몸을 돌리자 하얀 장포를 걸친 각진 얼굴의 사내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바로 촉룡도 장로 기량이었다.

    “기 형,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한립도 웃으며 그를 반겼다.

    촉룡도에 들어와 대부분 시간은 폐관 수련을 하며 보냈고, 나머지는 외부에서 여러 임무를 수행하느라 기량을 못 본 지도 3백여 년째였다.

    그가 입문할 당시 선원석을 갈취해간 것은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기량이 무슨 말을 하려다 말문이 턱 막혀서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아니, 려 형의 기운이! 설마 12 선규를 다 뚫어서 진선경 중기에 이르신 것입니까?”

    “운도 좋았고 수련에 매진하다 보니 얼마 전에 12번째 선규를 뚫었습니다.”

    한립은 미소를 머금고 대수롭지 않은 듯 이야기했다.

    “복도 많으십니다. 정말 부럽군요!”

    “그보다, 기 형께서는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하, 이곳저곳 쏘다닌 지 벌써 닷새가 넘었습니다. 려 형께서는 이제 도착하셨나 봅니다? 구경할 것이 많았는데 조금 더 일찍 오시지 않고요.”

    “보아하니 돌아다니시면서 원하던 물건을 꽤 구하셨나 보군요. 저는 마침 일이 생겨서 아쉽게도 지체하게 되었습니다.”

    “에이, 아닙니다. 원래 귀한 물건들은 마지막 날이나 되어야 등장하지 않습니까. 저는 동급 수사들이 참석하는 교환회에 가던 길이었는데 관심이 있으시면 같이 가보시겠습니까?”

    “동급 수사들이 참석하는 교환회요? 좋습니다.”

    “려 형께서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요 앞에서 열릴 예정이니 만남 김에 이야기나 나누면서 함께 가시지요.”

    웃음을 지은 기량이 바로 앞장섰다.

    “그런데 종문 안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아, 뭔가 오해를 하셨군요. 입문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모르셨을 텐데, 백옥봉과 백옥성은 평소에는 개방이 되지 않는 구역입니다. 설법대회가 열릴 때만 이렇게 떠들썩하지요.”

    “아, 그랬군요.”

    둘은 이야기를 하면서 걷다가 널따란 길로 방향을 틀었다.

    양쪽에 건설된 누각들은 높고 세공이 정교할 뿐 아니라 따로따로 금제가 처져 있어 보호막이 반짝였다.

    길을 오가는 수사들은 그런 누각들을 경외심 어린 눈빛으로 올려다보곤 했다.

    “여깁니다.”

    기량은 한립을 데리고 3층 누각 앞에서 멈추었다. 하얀 금제로 가려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는 누각은 퍽 신비해 보였다.

    기량은 앞으로 몇 걸음 나서서 전갈이 새겨진 하얀 영패를 꺼내 금제 속으로 빛을 비추었다.

    촤륵!

    누각 금제가 갈라지더니 한립과 기량이 안으로 들어가고서야 빠르게 아물었다. 안으로 들어간 한립은 새하얀 백옥을 깎아서 만들어진 아름다운 누각의 모습을 제대로 살필 수 있었다.

    대문에는 천갈각(天蝎閣)이라 적힌 명패가 붙어 있었는데 그 가장자리에 그려진 전갈 무늬가 기량이 꺼낸 영패의 것과 비슷했다.

    “이번 교환회는 본종의 하부 세력인 천갈파(天蝎派)에서 여는 것입니다. 천갈파의 세력이 크지는 않지만 금제와 도병 제련술에서 특유의 성취가 있어 만만히 볼 곳은 아닙니다.”

    기량이 소리를 낮추어 설명해주었고 한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각으로 들어가자 바닥에 주홍색 양탄자가 깔려있고, 눈처럼 하얀 벽에는 고풍스런 그림과 아름다운 풍경이 그려진 병풍들이 놓여 있어 속세의 부유한 가문에 들어온 것 같았다.

    붉은 장삼을 걸친 시녀들이 곳곳에 서 있다가 두 사람이 들어오자 곧바로 예를 올렸다. 시녀들은 보기 힘든 미색을 갖추었지만 심장이 뛰지 않는 도병이었다.

    게다가 각각이 합체기 수사에 맞먹는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한립이 자세히 살펴도 동작이 민첩하고 눈빛이 초롱초롱해서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스스로 도병을 제련했으니 이 방면으로 안목이 상당하다 할 수 있었는데, 천갈파에서 어떻게 시녀 도병들을 제련한 것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그의 뇌갑 도병들은 강인하고 동작이 빨라 이 소녀 도병들보다 전투력에서는 강하겠지만 섬세한 작업에는 능하지 않았다.

    이때 안에서 젊은 부인이 빠른 걸음으로 나와 공손히 예를 취했다.

    “선배님들을 뵙습니다.”

    “교환회가 진행될 대청으로 안내하거라.”

    “예, 이리로 가시지요.”

    기량의 분부에 시녀는 그들을 옆쪽 계단으로 안내해 금방 3층의 대청으로 이끌었다.

    넓은 대청에는 탁자와 의자만 놓여 있고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방 중앙의 거대한 병풍에는 먹으로 그린 산수도가 걸려 있었다.

    한립의 시선이 병풍으로 향했을 때, 젊은 부인이 주문을 외우며 병풍에 하얀빛을 날렸다.

    웅!

    그러자 병풍의 그림이 살아 움직이듯 떠오르더니 먹물의 검은 빛과 하얀빛이 융합되어 여닫이문을 만들어냈다.

    여인의 주문은 계속되었고 병풍 위의 검은 문이 검은빛을 더욱 밝게 발했다.

    달칵.

    검은 문이 바깥으로 활짝 열리면서 기다란 통로를 드러냈다.

    “이 안으로 가시면 대청입니다.”

    술법을 멈춘 젊은 부인이 한 손을 펼쳐 통로를 가리켰다. 기량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말없이 손을 저어 그녀를 물러가게 했다.

    “가시죠!”

    기량이 먼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고, 한립은 따라가면서 신기하다는 눈으로 통로를 살펴보았다. 수미공간과 비슷한 공간류 금제가 분명했는데 수법이 무척 고명해서 무척 안정적이었다.

    “천갈파는 공간 금제에도 능해서 허공에 이공간을 뚫는 것이 특기라더군요. 듣기로는 종문 내의 비경도 전부 천갈파의 솜씨라 합니다.”

    기량은 한립을 보며 아는 바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런데 교환회를 이렇게까지 숨어서 할 필요가 있습니까? 참가인원이 너무 많아 바깥의 대청이 좁아서는 아닌 듯한데요.”

    “허허, 참가인원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천갈파가 이런 장소에서 교환회를 여는 것은 진선 수사들의 모임이니 그만큼 신경 쓰는 것이기도 하고, 자신들의 솜씨를 뽐내려는 의도도 있습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설법대회가 열리기 전까지 천갈파 교환회는 매일 한 번씩 진행이 되니까 이따가 천갈령을 하나 받아다 드리겠습니다. 앞으로는 언제든 참가하실 수 있게요.”

    “수고를 끼치는군요.”

    “수고랄 것도 없습니다. 려 형의 수행이 높으니 저들도 어떻게든 친분을 쌓으려 들 겁니다.”

    미소를 머금은 한립의 말에 기량이 손을 저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두 사람은 통로의 끝에 이르러 편전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곳에는 혈색이 좋아 보이는 청포 노인이 그들을 보며 웃고 있었다.

    “환영합니다, 기 수사! 오, 이분은 누구십니까?”

    청포 노인이 반갑게 다가오다 기량 뒤의 한립을 보았다.

    “제 벗인 본문의 려 장로십니다. 평소에는 늘 수련 중이라 아는 이가 드물지요. 려 형, 이쪽은 천갈파의 상학 수사로, 이번 교환회를 주관하는 분입니다.”

    “상학진인의 명성은 오래 들어왔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려 수사.”

    한립이 청포 노인을 향해 포권을 하자 노인도 그를 향해 예를 취했다.

    “상학 수사, 려 형이 이곳이 처음이라 천갈령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환영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려 수사 같은 귀빈이야 언제나 환영입니다. 려 수사, 이것이 본문의 천갈령입니다. 앞으로 며칠 동안 교환회가 열릴 예정이니까 언제든 찾아주십시오.”

    웃으며 말하는 기량을 보고 상학 노인은 하얀 영패를 꺼내 한립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영패를 받아든 한립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자, 두 분께서는 저와 같이 가시지요. 교환회가 곧 시작할 예정입니다.”

    상학 노인은 그들을 데리고 편전을 나와 또 다른 회랑을 돌아 원형의 대청으로 향했다.

    녹송옥(綠松玉)이라 불리는 비싼 재료로 바닥을 깔고 벽에는 보석들이 박혀 반짝이는 휘황찬란한 대청이었다.

    네 귀퉁이에는 고풍스러운 양식의 작은 향로가 놓여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노란 연기를 피워 올렸고 중앙에는 스물 몇 개의 의자가 놓인 동그란 탁자가 놓여 있었다.

    동그란 탁자조차 청량한 기운을 내뿜는 남색 옥석을 깎아 만든 귀한 보물이었다. 의자에 앉은 열댓 명의 진선경 남녀가 세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시선을 보냈다.

    그중 몇 명은 기량을 알아보고 눈짓했지만 한립을 알은체하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한립은 개의치 않고 자리를 잡고는 차분히 모인 이들을 살펴보았다.

    수사들 중 절반은 촉룡도 장로라 그중 두세 명은 낯이 익었는데 나머지는 다양한 복색을 한 외부인이었다.

    인맥이 넓은 기량이 대청에 모인 이들과 한담을 주고받고 상학 노인이 그것을 거들자 대청의 분위기가 금방 화기애애해졌다.

    한립은 묵묵히 앉아 의식으로 가볍게 수사들의 수행을 파악했다. 열댓 명의 진선경 수사 중 대부분이 진선 초기에 두 명만 진선 중기였다.

    한 명은 복스럽게 생긴 중년 사내로 촉룡도 장로 복색을 하고 입가에 염소수염을 기른 채 두 눈을 기민하게 움직여 커다란 늙은 쥐 같은 인상을 풍겼다.

    다른 한 명은 외부 수사인 백포 노인으로 냉랭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앉아 다른 이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늙은 쥐를 닮은 촉룡도 중년 사내가 한립의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자 눈이 마주쳤다. 한립을 향해 슬쩍 웃음 짓는 중년 사내의 염소수염이 무척 익살스럽게 보였다.

    그러나 한립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돌리려 했다. 바로 그 순간, 복스러운 중년 사내의 검은 눈동자에서 빛이 회전하며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기이한 힘이 시선을 타고 한립에게 전해졌다.

    ‘……!’

    갑자기 대청과 수사들이 사라지고 한립 홀로 하얀 안개 세상에 머물게 되었다.

    스스슷.

    하얀 안개가 출렁이더니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얇은 옷을 걸친 묘령의 여인들로 변해 그를 향해 도발적인 몸짓과 눈빛을 보내왔다.

    “환술…….”

    한립은 주위를 둘러보다 냉소했다. 그러자 여인과 안개가 쩍쩍 갈라지면서 사라져 다시 대청의 풍경으로 돌아갔다.

    팟.

    이에 중년 사내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고 눈에서 소용돌이가 흩어졌다. 표정을 보니 놀란 것이 틀림없었다.

    “…….”

    한립이 서늘한 시선으로 지긋이 쳐다보자 상대는 걱정스런 얼굴로 그를 향해 연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에 주변의 진선경 수사들은 그들의 암투를 눈치채고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진선경 중기의 수행으로 환술 신통에 능해서 본문에서 꽤 알려진 장로입니다. 이름은 촉천성이라 하고요. 나쁜 사람은 아닌데, 워낙 환술로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니 악의는 없었을 겁니다.”

    그때 기량의 전음이 머릿속에 울렸다. 그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확실히 환술에서 공격성은 느껴지지 않았었기에 한립도 시선을 거두었다.

    그 모습에 안심한 촉천성은 얌전하게 앉아서 종종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한립을 힐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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