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1화. 제1도주
*
종명산맥 중부, 호호봉.
산봉우리의 금색 대전 앞에 한립이 내려섰다.
선약각이라 적힌 대전 안으로 들어서자 이전에 통성명을 한 엽남풍이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엽남풍과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은 한립은 안으로 들어가 선반을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긴 수염 장로에게 필요한 물건을 찾아준 엽남풍이 거래를 마치고 걸어왔다.
“허허허! 려 장로, 이거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에 찾았더니 선약각 약재들이 꽤 다채로워졌습니다.”
약재 선반에서 시선을 거둔 한립이 그를 돌아보았다.
“말하자면 그게 다 목 도주님 덕분입니다.”
“비우봉(飛羽峰) 목 도주님이요?”
“하하, 본종에 제2의 목 도주님을 제외하고 다른 분이 또 계십니까?”
“목 도주님이라면 십만 년 전에 폐관 수련에 들어가셨다고 들었는데요. 최근 출관을 하셨나 봅니다.”
“아아, 려 장로께서도 폐관 수련을 하다 오셨군요. 어쩐지 기운이 한층 강하게 느껴진다 했습니다. 백 년쯤 전인가 목 도주께서 갑자기 출관을 선언하고 진전제자 몇을 데리고 상아대륙에 다녀오시면서 여러 재료를 갖고 오셨습니다.”
“그랬군요. 이건 제가 구하려는 재료들인데 있는지 봐주시지요.”
엽남풍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화제를 돌려 준비한 옥간을 건네주었다.
“허허, 이렇게 매번 대량 구매를 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선약각이 다른 것은 몰라도 영약 재료로는 고운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곳입…….”
웃으며 옥간을 받아든 엽남풍은 목록을 확인하고 점점 미소가 사라졌다.
“려 장로께서 구하고자 하는 재료는 제가 알기로는 이곳에 한 가지도 없군요.”
“찾기 어려운 재료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괜찮습니다. 그래도 다른 수사분들과 교류도 많고 해박한 분이시니 엽 장로께서 재료와 관련한 소식을 아실지 모르겠군요? 좋은 정보가 있다면 꼭 후하게 사례하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 재료들은 하나같이 평생 한 번 마주치기도 어려운 것들입니다. 오래전에 고대 서적에서 지나가듯 본 것이 많고요. 앞으로 이런 재료에 관한 소식이 있는지 관심 있게 살피다 무엇이든 알게 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한립의 요청에 엽남풍은 멋쩍은 얼굴로 답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한립은 공손히 공수했다. 아직 구하지 못한 도단 재료들을 여러 경로로 알아보고 있는데 소득이 없었다.
“너무 낙심하지는 마세요. 지금은 이런 재료들을 구하기 어려워도 나중에도 그러리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엽남풍이 슬며시 귀띔을 해주었다.
“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직 소문이 퍼지지는 않았는데 제가 들은 정보로는 몇 년 내로 본종의 백리 도주께서 출관하실 거랍니다.”
흥미를 보이는 한립에게 엽남풍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제1도주께서요?”
한립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백리 도주 ‘백리염’은 촉룡도 제1도주라는 칭호로 유명한 태을옥선을 한 걸음 앞두었다는 금선경 최고봉의 수사였다.
대도를 깨우치려 거의 폐관 수련에 매진해서 종문 내에서도 그를 직접 본 제자가 손에 꼽혔다.
“려 장로께서는 본종에 입문한 지 천년이 되지 않아 모르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백리 도주께서 지난번 출관하셨을 때가 수만 년 전이니까요.
관례대로면 백리 어르신이 출관하시면 설법대회를 열어 종문의 장로들은 물론 북한선역의 수사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지요. 설법대회 전에는 보통 경매회라든가 교환회 등의 활동이 열리는 편이니 그곳에 원하는 재료가 등장할 수도 있습니다.”
엽남풍의 말투에 숨길 수 없는 흥분이 깃들어 있었다.
“본종에서 그런 성대한 설법대회가 열리는 줄은 모르고 있습니다. 엽 장로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허허, 어차피 머지않아 소문이 돌 텐데요, 뭘. 그리 예의 차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립은 미소를 짓고는 곧 다른 옥간을 꺼냈다.
“아까 보여드린 것 외에 이런 약재는 있는 지요?”
옥간에 적힌 것은 만륜단(万輪丹) 재료였다.
평요자에게서 얻은 약방 중 유일하게 진선 후기 수사가 복용하기 좋은 단약이었다.
이미 진선 후기에 이른 그는 새로운 단약이 필요했는데 만륜단은 진선 후기 수사가 복용하는 단약답게 필요한 재료도 평범하지 않았다.
수백 년 전에 몽운귀 등에게 대가에 상관없이 구해오라 일렀는데도 겨우 서너 가지를 구하고 3가지 주재료는 본 적도 없었다.
“하아, 만만치 않군요! 수사의 지단사 친구가 요구한 재료겠지요? 만륜과(万輪果), 낙영화(落英花), 혈정우(血晶藕) 이 세 가지 주재료는 정말 희귀한 것들인데요. 나머지 보조 재료들은 구해드릴 수 있는데 주재료 중에서는 낙영화 밖에 보유하고 있지 못합니다.”
옥간에 의식을 불어 넣은 엽남풍이 쓴웃음을 지었다.
선약각에 각종 영약 재료가 있다고 자랑을 하자마자 이렇게 좌절의 연속이라니!
“예, 그 친구가 고대 약방을 얻었는데 재료를 구하기 어렵다며 제게 부탁하더군요. 일부라도 구했으니 다행입니다.”
한립은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반 시진 후 선약각을 나오는 한립은 속이 쓰렸다.
만륜단에 필요한 재료가 어찌나 귀한지 보조 재료들을 구하는 데도 선원석이 꽤 들었고, 낙영화는 겨우 1천 년 된 한 뿌리를 사는데 선원석 15개가 필요했다.
그나마 가져다가 작은 병으로 키우고 번식을 시킬 수 있으니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한립은 더이상 돌아다니지 않고 적하봉으로 돌아갔다.
엽남풍이 준 소식에 따르면 제1도주의 출관까지 아직 몇 년이 남았고 그때가 되면 재료를 구할 기회가 생겨도 그 가격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몇 년간 단약을 제련하느라 선원석을 소비해서 아직 많이 남아 있긴해도 안심할 만큼은 아니었다.
파앗.
밀실에 앉아 고심하던 그는 저물대 속에서 몇 가지 물건들을 꺼내 바닥에 늘어놓았다. 성괴문에서 죽인 중란 등 세 수사의 물건들로 이전에 팔고 남은 것들이었다.
다른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으니 이것들을 팔아 선원석을 벌 작정이었다.
호랑이 가면을 쓴 그는 진법 원반을 불러내 물건들을 올리고 가격을 시가보다 약간 낮게 책정했다.
등록을 마친 그는 약재밭으로 가서 옥갑에 담긴 자흑색 꽃을 꺼내 보았다.
세 개의 꽃잎이 달린 기이한 향기를 풍기는 꽃은 바로 낙영화로 3만 년 이상 되어야 과실을 얻어 종자를 취할 수 있다고 했다.
약재밭에 새로운 구역을 개척해 조심스럽게 낙영화를 심은 한립은 진귀한 영초들이 가득한 내부를 내려다보며 감회가 새로워졌다.
그가 오랜 세월 하나씩 모아 정성 들여 키운 결과 지금의 약재밭이 된 것이었다. 이 약재밭이 영약들을 부단히 제공해 주어 그가 진선경 경지에 이렇게 빨리 이른 것이기도 했다.
잠시 후 밀실로 돌아간 그는 공법 수련을 하진 않았다. 새로운 고계 단약의 보조 없이 수련은 거의 진척이 없어서였다.
그럴 바에야 여덟 구절을 계속 연구해 보는 것이 나았다.
그가 폐관 수련을 하는 동안 제1도주가 곧 출관해서 설법대회를 개최할 거라는 소식이 촉룡도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종문에서 정식으로 설법대회가 열릴 거라 선포한 때는 그 뒤로 7년 뒤였다. 곧바로 촉룡도가 시끌벅적해졌다.
백리 도주는 총 8번의 설법대회를 개최했고, 이번이 9번째였다.
북한선역 전역의 성대한 대회나 마찬가지인 설법대회는 특이하게도 참가자의 신분에 제약이 없었다.
달리 말해 촉룡도 제자이기만 하면 외문제자라도 설법을 들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수행은 높아도 오랫동안 고비에서 멈춰있던 내문장로들 및 진전제자들은 더욱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태을옥선에 절반쯤 발을 걸쳐둔 고계 선인이 직접 설법하는 자리에 참가할 수 있다는 소리에 대승기에 이르지 못한 제자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 * *
7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다.
범인들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수사들은 눈을 감고 정좌에 들어갔다 눈을 뜨면 지나는 세월이었다.
쿠릉!
적하봉 동부 대문이 활짝 열리고 한립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폐관하는 동안에도 종내 소식에 귀를 기울여 제1도주 백리염의 설법대회가 7일 뒤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원래 며칠 전에 출관하려 했으나 연구 중이던 여덟 구절이 은연중에 격원음마공에 기재된 봉인은신술과 통하는 바가 있어서 그것을 깨우치느라 이제야 나오게 되었다.
중얼거리는 그의 몸 위로 찰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슬 허상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진선경 기운이 싹 사라졌고 아무런 티도 나지 않았다.
이제 평범한 금선이라면 그의 은신술을 파악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립은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푸른빛으로 변해 날아올랐다.
* * *
종명산맥 중심부의 모처, 수십만 리가 빙설이 녹아 파릇파릇한 녹음이 가득했다.
쪽빛 하늘에 상서로운 구름이 둥실 떠서 그 사이로 일곱 빛깔 무지개가 연결되어 있었고, 수십만 마리의 학들이 구름 속을 날아다니면서 맑게 지저귀었다.
선경 속에 우뚝 솟은 산봉우리는 굴곡이 거의 없이 매끄러워 거대한 백옥 기둥처럼 보였다.
하얀 산봉우리 중턱이 누군가 장도로 찍어 놓은 것처럼 평평하게 베여 거대한 광장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 중간에 높이가 천장에 달하는 백옥 제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수많은 주술문자가 반짝거리는 제단은 아래에서부터 꼭대기까지 계단으로 이어져 있었고, 그 위로 둥근 방석들이 빼곡하게 놓여 수천 개는 되는 듯했다.
이곳이 바로 촉룡도 제1도주가 설법할 장소인 백옥봉(白玉峰) 강경대(講經臺)였다.
아직 설법대회전이라 백옥봉 광장이 텅 비어 있어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백옥봉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산간에는 화려한 누각들과 탑들이 잔뜩 모여 천 리에 달하는 성을 이루고 있었다.
백옥봉과는 달리 무척 시끌벅적한 성안은 대낮인데도 다채로운 빛깔의 빛덩이가 반짝였다.
사방팔방에서 둔광이 모여들자 한립도 성 주변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는 멀리 백옥봉을 힐끗 보고는 성을 지키는 푸른 보호막으로 다가갔다.
그가 도착하기 전에 촉룡도 청년 제자가 서둘러 뛰어왔다.
“장로님을 뵙습니다. 종문 규정에 따라 백옥성으로 진입하시려면 신분 검사를 받으셔야 하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장로 복색을 한 한립을 보고 청년 제자가 예를 올리며 공손히 말했다.
“상관없다.”
한립이 장로 신분을 증명하는 영패를 꺼내자 청년 제자가 옥으로 된 부적으로 빛을 비추었다.
파앗.
옥부(玉符)에서 빠져나온 빛이 떠오르더니 한립의 모습과 정보를 보여주었다.
“려 장로님이셨군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바로 금제를 열어 드리겠습니다.”
신분을 확인한 제자가 또 다른 푸른 영패를 꺼내 보호막에 비추자 한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통로가 생겼다.
빠르게 성안으로 진입한 한립은 안쪽으로 걸어가면서 의아한 얼굴을 했다.
화려한 건물들과 아름다운 누각이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뻗어 있어 마치 거대성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수련하지 않을 때는 그도 종명산맥을 둘러볼 만큼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다.
길 양옆 상점에서 판매하는 각종 도구, 재료, 단약, 법보 등은 품질이 제법이라 촉룡도 종문 시장과 비교해도 그리 떨어지지 않았다.
적잖은 상점 주인장들이 촉룡도 제자들로 대회 기간에 종문을 대표해서 각지의 산물을 매매하고 있었다.
한참을 걷던 한립은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 재료 상점 앞이었는데 문밖에서도 수십 개의 진열장이 있는 것이 보였다. 진열장마다 신기하거나 귀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안에서 구경하는 이들이 꽤 보이는 것이 장사도 잘되는 곳 같았다. 한립은 잠시 멈칫하다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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