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629화 (1,386/2,000)
  • 1629화. 선괴뢰(仙傀儡)

    *

    한립은 약재밭을 천천히 살피고 얼마 뒤 또 다른 밀실 앞에 서서 손바닥을 펼쳤다.

    쿠쿵.

    석문의 문양이 빛을 머금고 미끄러지듯 옆으로 밀려 나가 사람이 지나다닐만한 통로를 드러냈다.

    안에서는 자금색 빛이 치직치직거렸다. 내부의 뇌진은 여전히 빛이 어려 있었지만, 사방에 꽂힌 구뢰목은 뇌전의 힘을 다한 듯 어두워져 있었다.

    진법 중앙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황포 선괴뢰 위로 보랏빛 뇌전이 쉼 없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한립은 미간을 좁혔다.

    뇌진 중앙의 움푹 파인 지면은 텅 비어 보랏빛 돌 구슬이 사라지고 없었다.

    “해 수사.”

    한립은 의식으로 해 도인에게 전음을 보냈고, 눈을 꼭 감은 황포 사내는 반응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한립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한참 뒤 황포 사내 가슴에서 치직거리던 뇌전이 사라지고 진법이 완전히 운용을 멈추었다. 그리고 황포 사내 가슴에서 손바닥 크기의 황금 게가 천천히 기어 나와 그를 향해 날아올랐다.

    한립은 손을 펼쳐 황금 게를 받아들고 물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해 도인은 이전보다 기운이 많이 안정되었고 8개의 가느다란 다리에는 세밀한 보라색 무늬가 티 안 나게 생겨나 있었다.

    “선괴뢰의 구조가 제가 예상하던 것보다 복잡하더군요. 뇌진의 힘으로 구조를 강제로 변경할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한번 시도나 해보자는 것이었으니까요! 기회가 되는대로 수사께 더 적합한 괴뢰를 찾아드리겠습니다.”

    “그것도 좋겠지요. 2백 년간 내부에서 연구를 해두어서, 원하신다면 한 수사가 천년 정도 흙 속성 공법을 수련해 조종하게 도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 위력의 6할 밖에 내지 못해도 금선 초기 수사보다는 강할 거예요.”

    “이전에 선괴뢰였던 수사의 말씀이야 당연히 믿을 만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그럴 시간이 있을지 두고 봐야겠군요.”

    해 도인의 제안에 한립은 확답을 하지 않았다. 금선 초기 실력을 지닌 선괴뢰가 생기면 당연히 좋겠지만 정말 시간이 없었다.

    일단 다른 촉룡도 선인들처럼 걱정 없이 천년만년 폐관 수련할 처지도 아니고, 진언화륜경과 대주천성원공이라는 더 잘 맞는 공법을 익혀 실력을 높이기에도 바빴다.

    “드릴 말씀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융합과정에서 쓰인 진주에 뇌전 속성의 본원이 힘이 담겨 있기에 연화하였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제게 그리 필요한 물건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럼 이제 이 진법은 필요 없겠군요?”

    한립은 해 도인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손을 저어 진법을 해체했다. 두 집게발을 교차한 황금 게가 황포 괴뢰를 향해 보랏빛 뇌전을 날렸다.

    차칵!

    황포 괴뢰가 노란 구슬로 돌아가 황금 구슬이 된 해 도인과 함께 한립의 수중에 떨어졌다.

    * * *

    태현전 인근 산봉우리에 푸른빛이 날아올라 백석 광장으로 떨어졌다.

    한립이 선 광장 끝에는 백주산장이라는 네 글자가 호방한 필체로 적힌 주홍색 대문이 있었다.

    올 때마다 편액을 보면 웃음이 나는 곳이었다.

    끼익.

    그가 산장 문 앞에 이르기 전에 대문이 열리고, 푸른 의복을 걸친 시종 두 명이 검은 항아리를 들고 나왔다.

    “려 장로님을 뵙습니다.”

    한립을 알아본 그들은 항아리를 내려놓고 예를 올렸다.

    “무엇을 가져가는 것이냐?”

    검은 항아리에서는 약간 시큼한 냄새가 풍겼다.

    “잘못 빚은 술입니다. 호언 장로님께서 산 중턱 계곡에 부어버리라 명하셨습니다.”

    푸른 의복의 시종 중 한 명이 공손히 답했다.

    그들을 지나 안으로 들어간 한립은 익숙하게 회랑을 지나 정당으로 가다 걸어 나오는 호언 도인과 마주쳤다.

    ‘응?’

    한립은 노인의 모습에 움찔했다. 노인은 머리를 정갈하게 빗어 넘겼을 뿐만 아니라 의복도 더없이 정갈했고 걸음걸이도 힘이 넘쳤다.

    2백여 년 못 본 사이에 성정이 바뀌기라도 했단 말인가?

    “허허, 녀석이 아주 개코구만! 노부가 막 백화양(白花釀) 몇 동이를 마시려던 것을 어찌 알고 찾아왔느냐.”

    호언 도인이 낭랑하게 웃으면서 다가왔다.

    “최근에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한립의 말에 호언 도인이 당장 움찔해 소리쳤다.

    “고얀 놈이 버릇없이! 노부가 뭐 좋은 일이라도 없으면 술 한 잔 권하지 않을 만큼 좀생이라는 것이냐?”

    그 소리에 한립은 그저 미소만 지었다.

    “자자, 앉아서 이야기하자.”

    잠시 후, 두 사람은 호언 도인이 꺼내 놓은 은색 무늬의 백옥 항아리와 모란 모양의 술잔을 가운데 두고 앉아 있었다.

    냉큼 술동이를 기울여 은은한 푸른빛 술을 술잔에 따르니 그윽한 향기가 퍼졌다.

    “마셔 보거라.”

    눈을 반짝이는 한립을 보고 노인이 웃으며 술을 권했다.

    “좋은 술입니다.”

    입가에 감도는 달짝지근한 맛과 부드러운 목 넘김에 한립은 진심을 담아 칭찬했다. 한립의 칭찬에 자연히 노인의 얼굴에도 득의양양한 미소가 걸렸다.

    “허나 이전에 즐기시던 홍상주(紅桑酒)나 화연주(火涎酒)에 비해 독하지 않군요. 이전과 입맛이 달라지셨는지요?”

    한립은 눈썹을 끌어올리며 예리하게 물었다.

    “하하, 이 술은 내가 빚은 게 아니라 누가 보내온 것이다.”

    “오, 운 도주님께서 말입니까?”

    “이 녀석이! 좋은 술로도 네 놈의 그 입은 막지 못하겠구나.”

    한립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호언 도인이 얼굴을 굳히고 술동이를 거두었다. 한립이 미소를 띠고 있자니 노인네가 먼저 표정을 풀고 물었다.

    “방금 전에는 몰라보았는데 기운이 남달라졌어. 그동안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닌 모양인 게지?”

    “운과 인연이 따라서 폐관 수련을 하며 성취를 쌓았습니다. 출관하자마자 선배님을 찾아뵌 것이고요.”

    “허허, 겨우 몇백 년 만에 이렇게 변하다니 평범한 기연은 아니었겠구나? 허나 내 알 바는 아니지. 이제 말해 보거라! 네 녀석이 아무 일도 없이 여기까지 올 인물은 아니지. 또 무슨 일이냐?”

    “궁금한 것이 있어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제가 심은 두병에 어쩐 일인지 두 송이의 꽃이 피었습니다. 선배님이 주신 책자와는 다른 것 같아 그 일에 대해 여쭙고자 합니다.”

    “두 송이가?”

    눈을 크게 뜬 노인은 생각이 많아진 얼굴을 했다.

    “큰 문제라도 되는 것인지요?”

    “문제? 너무 운이 좋은 것이 문제라면 문제겠지! 두병수(豆兵樹)가 두병을 맺어도 모두화(母豆花)를 피울 확률은 반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두 송이가 피었다니 운수대통인 게지. 네 녀석이 운이 너무 좋아 노부가 다 질투가 날 지경이다.”

    호언 도인은 의자에 몸을 기대더니 술병을 끌러서 입에 대고 콸콸 부었다. 확답을 들으니 한립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그가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십중팔구 녹색 액체 덕이었다.

    “도병수에서 모두화가 피어나지 않으면 그렇게 맥이 끊기는 것입니까?”

    “물론이지. 모두를 얻기가 어디 쉬운 줄 아느냐? 도병을 익히면서 두병사(豆兵師)를 가장 골치 아프게 하는 문제가 그 지속성이다. 에이, 너는 내가 말해 줘도 이해 못 한다.”

    한립의 또 다른 질문에 콧방귀를 흥흥 뀐 호언 도인이 투덜댔다.

    “그렇다면, 정말 좋은 일이었군요. 하하하…….”

    웃음을 터트리는 한립을 보며 호언이 술만 홀짝홀짝 삼켰다.

    “두 개의 모두를 얻게 되면 그걸 심어 다시 2, 3백 년 후에 두 두병들을 얻을 수 있겠습니다.”

    “노부라면 그리 아깝게 모두(母豆)를 날리지는 않을 것이다.”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너처럼 운 좋은 녀석이면 하나만 심어도 두병은 잘 자라겠지! 나머지 하나는 보관해두었다가 고계 괴뢰를 얻게 되면 그 안에 심거라.”

    머리를 문지르던 호언 도인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괴뢰의 몸 안에 모두를요?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겠습니까?”

    “예전에 말했다시피 도병이나 괴뢰나 본질적으로 한 가지에서 뻗어 나온 것들이다. 모두를 융합하면 괴뢰는 두병의 속성을 지닐 수 있지! 예를 들어 잘려나간 팔이 다시 생긴다든지, 수행을 회복한다든지 해서 핵심이 파괴되지 않는 한 불사가 되는 것이야. 거기다 모두를 제련할 때 각인하는 주술문자 덕에 괴뢰를 다른 이는 조종하지 못하게 되는 효과도 있다.”

    “그게 사실입니까? 선배님, 그 융합 방법을 제게 가르쳐 주실 수 있겠는지요?”

    한립은 해 도인이 융합에 실패한 선괴뢰를 떠올리고 관심을 보였다.

    “뭐야? 선괴뢰 같은 괴이한 것도 감춰두고 있었던 것이냐?”

    눈썹을 홱 끌어올린 호언 도인이 탐탁지 않게 물었다.

    “선배님께도 귀한 물건을 제가 어찌 갖고 있겠습니까? 그저 배워두면 다 쓸데가 있으려니 하는 것이지요.”

    한립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꾸했다.

    “아주 머리를 잘 굴리는 구나……. 보기 드문 방법이기는 해도 비밀도 아니니 전수를 해줄 수는 있다. 그런데 말이야, 이렇게 맨입으로 알아가겠다는 것이냐?”

    “그럴 리가요. 제가 우연히 구한 물건이 있는데 선배님의 눈에 찰지 모르겠습니다.”

    노인의 눈짓에 미소를 지은 한립은 얇은 금색 종이를 불러냈다.

    “약방? 허허, 노부의 눈에 들려면 적어도 지계 단약의 약방은 돼야 할 것인데?”

    말을 이렇게 하면서도 호언 도인은 금색 종이를 불러들여 손에 쥐었다.

    “승울단? 흠, 진선경 중후기 수사에게나 적합한 지계 단약이지만……. 그럭저럭 지니고 있을 만은 하겠어.”

    호언 도인은 종이를 챙겨 넣고, 하얀 돌조각을 꺼내 건네주었다.

    “필요한 진법을 어찌 설치하면 되고 재료는 무엇인지 상세히 적혀 있다. 재료만 갖추면 설치는 어렵지 않을 것이야! 사용할 일이 생기면 반드시 충분한 영석을 준비해 진법을 보조해야 중간에 망쳐서 모두가 훼손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석판을 이마에 대고 내용을 확인한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다른 볼 일이 없으면 가 보거라! 노부는 맞이할 다른 손님이 있다.”

    호언 도인은 거침없이 축객령을 내렸고 한립은 인사를 하고 백주산장을 나와 빛줄기로 변해 사라졌다. 그가 막 산봉우리를 벗어났을 때 다른 둔광이 백주산장으로 날아들었다.

    백소원의 스승이자 촉룡도 13 도주 중 한 명인 운예였다.

    성괴문 광장에서 백소원이 인삼을 스승님이라 불렀기에 그녀의 신분을 아는 한립은 당연히 인삼의 정체가 운예라는 것도 알았다.

    돌아가는 길에 성괴문 전투 막바지에 조력자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호언 도인과 백봉의, 백소원 등의 관계를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노인네 앞에서는 모르는 척했다.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성괴문에서 사라진 선괴뢰의 행방을 추적할까 걱정해서였다.

    적하봉으로 돌아간 그는 바로 밀실로 돌아가 호언 도인에게 받은 옥간에 의식을 불어넣었다.

    옥간에 기록된 도병 각인 진법은 해 도인의 융합 진법과 비슷하면서도 세부적인 구성과 필요한 재료가 달랐다.

    모두 속성에 따라 금속, 나무, 물, 불, 흙 다섯 가지 속성에 맞는 재료들이 적혀 있었다.

    선괴뢰가 흙 속성이고 원래 황건(黃巾) 도병이었던 모두의 속성도 같을 가능성이 높았기에 자연스레 흙 속성 재료로 눈이 갔다.

    “무량사(無量沙)? 이런 걸 쓸 날이 오다니.”

    한참 후, 눈을 뜬 그는 소머리 가면과 호랑이 머리 가면을 불러냈다. 잠시 두 가면을 번갈아 보던 한립은 결국 호랑이 가면을 얼굴로 가져갔다.

    ‘교십오’라는 신분을 계속 쓰는 것은 이제 위험했다.

    호랑이 가면에는 너구리를 뜻하는 문자인 맥(貉) 십일(十一)이 적혀 있었다.

    그는 임무란에 무량사를 찾는다는 내용을 등록한 뒤 소머리 가면으로 발표했던 도단 재료 관련 임무도 새로 등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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