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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628화 (1,385/2,000)
  • 1628화. 꽃 두 송이

    *

    한 달 후.

    동부 밖 저택 대청에 한립이 차를 마시면서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데 바깥에서 몽천천이 걸어 들어왔다.

    “려 장로님.”

    “그래, 오늘 부른 것은 네게 맡길 중요한 일이 있어서이다.”

    한립이 찻잔을 내려놓고 진지하게 말문을 열었다.

    “말씀해 주시지요.”

    “그리 심각한 일은 아니고.”

    몽천천이 움찔해 가슴을 펴고 귀를 기울이자 한립은 미소로 분위기를 풀었다. 곧 그가 내준 저물대를 받고 전음으로 몇 마디를 들은 몽천천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문제라도 있느냐?”

    “아닙니다. 분골쇄신해서 소임을 다할 것이니 믿고 맡기셔도 됩니다.”

    “좋다. 항상 조심하고, 이 일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게 해서는 안 될 것이야.”

    “예.”

    예를 올린 몽천천이 아쉬운 마음을 품고 몸을 돌려 나갔다.

    한립은 그녀의 붉은 둔광이 멀어지는 것을 보다가 자신도 푸른 둔광으로 날아올라 종문 방향으로 향했다.

    두 달이 지나서야 적하봉으로 돌아온 그는 성괴문에서 구한 대량의 재료와 영약을 선원석으로 바꾸고 연단에 필요한 재료들을 사들였다.

    준비를 마친 그는 익숙하게 금제를 펼쳐 두고 약재밭으로 걸어갔다. 구석에는 심어둔 모두(母豆)의 새싹이 이전보다 손가락 몇 마디 만큼 자라있었다.

    그걸 본 한립은 신기하게 생각했다.

    백 년이 지나서야 겨우 싹을 틔우더니 그 후로는 생각보다 성장 속도가 빨랐다. 게다가 연두색 이파리 위에 암금색 무늬도 가면 갈수록 짙어지고 있었다.

    호언 도인이 말한 변이가 좋은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성괴문에서 도병의 힘을 직접 보고 나니까 자신의 도병에게도 기대감이 높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한립은 장천병을 꺼내서 약재밭을 지키는 원숭이 형태의 괴뢰에게 넘겨주고 빠르게 밀실로 돌아갔다.

    연단에 집중하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은 거의 마무리를 해두었다.

    그는 은색 연단로를 밀실 가운데 꺼내두고 소매를 펄럭여 은색 소인을 불러냈다.

    검은 두루미 요수의 원영을 집어삼킨 정염불새는 기운이 이전보다 강성한 것은 물론 표정과 움직임도 훨씬 생동감이 돌았다.

    화르륵!

    은염 꼬마는 한립이 자신을 불러낸 이유를 안다는 듯 화로를 빙글 돌다 볼을 빵빵하게 부풀려 화염을 분출했다.

    한립은 필요한 재료들을 꺼내서 옆에 정리해 두고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 * *

    몇 해가 흐르고 드디어 화로의 불길이 꺼졌다.

    은염 꼬마는 깡충깡충 뛰어 한립의 어깨에 타서는 얌전히 기다렸다. 피로한 기색이 가득한 한립이 은색 화로 뚜껑을 열자 밀실 안에 진한 약 향이 감돌았다.

    흡족한 기색으로 꺼낸 열댓 개의 하얀 단약은 상서로운 하얀 안개가 둘러싸고 있었다. 그는 단약들을 미리 준비해둔 옥병에 담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 뒤로 그런 옥병들이 백여 개는 쌓여 있었다.

    “이만하면 되겠어.”

    은색 연단로와 은염 소인을 회수한 한립은 눈을 감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시간은 또 무심하게 흘러 2백 년이 넘게 지나갔다.

    그동안 적하봉 동부의 대문은 열린 적이 없었다.

    근 오백 년 만의 대설이 몇 달간 내린 촉룡도는 종명산맥 전역이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고 적하봉도 모두 눈으로 가득했다.

    그러다 펑펑 내리던 눈이 드디어 멈추고 맑게 갠 하늘에서 햇살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시종들이 동그란 얼굴의 몽웅을 따라 저택 주변의 눈을 치우고 있었다.

    원래 드나드는 이가 드물고 특히 몽천천이 없으니 눈 덮인 산이 고즈넉하기 그지없었다.

    시종들은 저택 바깥의 눈을 치우고 바로 약재밭으로 가 약재가 눈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청소를 했다.

    쿠릉!

    바로 그때, 적하봉이 흔들리면서 금색 빛기둥이 동부 위로 치솟았다. 반경 만 리의 천지영기가 격동하고 먹구름들이 적하봉 위로 밀려들어 광풍이 몰아쳤다.

    다채로운 빛깔의 빛 알갱이들이 삽시간에 적하봉을 뒤덮었다가 사라졌다.

    “자자, 다들 일들 합시다. 어서 일을 마쳐야 다시 수련에 집중하지요! 려 장로님께서 이렇게 좋은 수련 환경을 마련해 주셨는데 낭비할 수 있겠습니까?”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다른 시종들을 향해 몽웅이 소리를 높였다. 그 말을 들은 시종들은 열심히 할 일에 매진했다.

    이런 일이 종종 있어 익숙해졌다지만 그래도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진선이 수련을 하면서 일으키는 천기 현상이 아닌가.

    동부 밀실 안.

    은은한 금빛에 휩싸여 가슴과 배에 24개의 금빛을 반짝인 한립의 기운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지금 그는 명실상부한 진선경 후기 수사였다.

    2백 년 넘는 세월 동안 미리 마련해둔 지계 단약을 먹어가며 하루도 빠짐없이 고된 수련한 결과 남은 4개의 선규를 뚫을 수 있다.

    다른 동급 수사들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지만 이전에 비하면 느려진 것이었다. 앞서 세 개의 선규를 뚫는데 장장 백 년을 쓰고 마지막 한 개를 뚫는 데는 그보다도 더 걸렸다.

    그가 금빛을 점점 체내로 흡수해 밀실이 어두워졌다.

    후우우.

    길게 숨을 내쉰 한립의 등 뒤로 금색 고리가 떠올라 전부 회복한 시간도문을 자랑했다.

    “역시 달라지지 않았어.”

    한립은 시간도문이 여전히 108개인 것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 4개의 선규를 다 뚫어도 보륜 상의 시간도문은 늘지 않았다.

    경전에 따르면 4개의 선규를 뚫으면 확률상 두 개의 시간도문이 응결되어야 했다. 하지만 진실안을 이용해 장천병의 수정 알갱이로 너무 많은 시간도문을 응결해 두어서 진언보륜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에 이른 듯했다.

    체내에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충만한 선령력을 느끼며 한립의 입꼬리가 휘었다. 그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수행이 크게 늘어난 것이 아무리 기뻐도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한립은 손바닥을 뒤집어 외눈박이 거인의 눈알인 잿빛 돌 구슬을 꺼냈다.

    그러자 동시에 바깥에서 쿵쿵 거원 괴뢰가 걸어 들어와서 녹색 액체를 응결한 장천병을 내려놓고 갔다.

    한립은 심호흡을 하며 그것을 들어 주저 없이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다시 시간법칙을 깨닫기 위해 도전하려는 것이었다.

    체내의 선령력들이 묵묵히 돌고, 등 뒤의 진언보륜이 서서히 회전하면서 108 시간도문이 반짝였다.

    금색 파문이 퍼져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천지원기의 파동이 밀실을 자욱하게 채웠다. 공기의 흐름이 느릿하게 변하고 바람 소리며 허공을 떠다니는 먼지 빛의 흐림까지 모든 것이 거의 멈추었다.

    시간이 흘러 한립의 몸에서 금빛이 출렁여 밀실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했다.

    금빛에 둘러싸인 그의 몸은 선혈이 낭자했지만 표정만은 평온했다.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다 눈을 뜬 그의 눈동자에서 사발 굵기의 금빛이 뻗어 나갔다. 빠르게 수결을 맺어 두 손을 모은 한립 뒤로 진언보륜의 108 시간도문이 밝게 빛났다.

    그의 두 손에서 쇠털처럼 가느다란 금색 수정실이 서서히 자라나 손톱을 통해 뻗어 나갔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빠져나가던 실은 펑! 하고 터져 금색 빛 알갱이로 흩어졌다. 금빛을 거둔 한립은 피로 얼룩진 얼굴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전보다는 나아도 여전히 뭔가 부족해서 시간법칙의 실을 응결할 수 없었다.

    “참천조화로(參天造化露)를 직접 복용한다고 해도 3대 지존법칙 중 하나인 시간법칙을 깨우칠 순 없겠어! 도단을 복용해봐야겠구나.”

    선계에서 도단이 왜 그리 추앙을 받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이건 그냥 약재를 씹어 먹는 것과 연단을 거친 단약을 먹는 것과의 차이와 비슷했다.

    운 좋게 그는 시간법칙을 함유한 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었기에 여러 번 시도한 것이지 다른 이들은 이마저도 기대할 수 없었다.

    한립은 탄식하며 단약을 삼키고 일렁이는 금빛 속에 눈을 감았다.

    십여 일 뒤, 밀실을 나선 그는 약재밭으로 향했다.

    녹음이 푸르고 영기가 자욱한 약재밭은 생기로 넘쳐났다. 거원 괴뢰가 푸른 나무 물동이를 들고 푸른빛이 흐르는 영액을 밭에 쏟아 붓고 있었다.

    호언 도인이 내준 작은 책자에 적힌 대로 배합한 영약을 도병 뿐 아니라 다른 약재에도 쓰는 중이었다.

    밭 구석을 본 한립의 표정이 밝아졌다.

    모두의 싹은 어느덧 보이지 않고, 그 대신 황금색 식물의 줄기가 사람 키만큼 자라있었다.

    황토색 나무의 이파리는 은은한 금색이었고, 금색 무늬가 겹겹이 나타나 가지와 줄기까지 퍼져있었다.

    울창한 금빛 이파리 사이로 손가락 길이의 푸른 콩꼬투리들이 드문드문 보였는데 알알이 콩을 품고 있어 동그랗게 솟아 있었다.

    재빨리 다가가 도병 나무를 한 바퀴 돌아본 한립은 수확을 앞둔 농부의 심정으로 꼼꼼하게 콩꼬투리의 수를 세어보았다.

    총 75개의 콩꼬투리마다 7개의 콩알이 담겨 있다고 치면 오백여 개의 콩알이 있다는 소리였다. 이대로 잘 자란다면 위력적인 두병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콩은 다 자라지 않았다.

    호언 도인의 심득이 적힌 서책에는 두병이 익어감에 따라 이파리는 양분을 잃고 말라간다고 했다.

    그러다 적기에 콩꼬투리가 커지면서 콩알들이 튀어나왔다. 아직 콩알에서 특수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한립은 나쁜 방향으로 변이한 것은 아닐 거라 예상했다.

    두병의 변이는 작은 병의 녹색 액체와 관련이 있을 확률이 높았으니 그 결과도 나쁠 리 없었다.

    한립은 한참을 둘러보다 도병 나무 끝에 두 송이의 노란 꽃이 피어난 것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콩꼬투리가 더 생길 모양이었다.

    걸음을 멈춘 한립은 의아한 얼굴로 호언 도인이 준 책자를 꺼내 마지막 장을 잃었다.

    “여기에는 분명 한 송이씩 피어난다고 적혀 있는데, 어째서 두 송이가……. 이것도 변이 때문인 건가?”

    그렇다면 반가운 소식이었다.

    꽃이 두 송이씩 피면 그만큼 콩꼬투리도 늘어날 것이다. 그래도 확실히 하려면 호언 노인네에게 확인하는 게 나았다.

    이에 한립은 다른 쪽의 약재밭으로 걸어갔다.

    수는 많지 않아도 가지각색의 영약들이 독특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이곳은 한립이 그간 모은 도단 제련용 영약을 키우는 밭이었다.

    그중 얼음처럼 차가워 보이는 남색빛 식물 수십 그루가 가장 오래되었는데 난초의 모습을 하고 이파리가 빛나는 이 식물은 부산 비경에서 가져다 심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무엇인지 모르다가 여러 자료를 참고해서 도단 약방에 언급된 유무초(幽霧草)라는 것을 알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게다가 부산 비경의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오랫동안 자라서 구할 때부터 도단 제련에 적합한 십만 년 이상 된 유무초였다. 유무초와 머지않은 소형 진법 구역 안에는 십여 개의 새싹이 보였다.

    입사규(入沙葵)라 불리는 영초도 도단 약방에 이름을 올린 재료로 백여 년 전에 몽운귀가 구해다 주었다.

    겉으로는 새싹만 올라온 녀석이 땅속의 뿌리는 어찌나 왕성하게 자라는지 진법으로 둘러두지 않았으면 약재밭 전체로 퍼져 다른 영약이 살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도단 약방의 재료들은 주재료가 아닌 보조재료라도 구하기가 극히 어려웠다.

    몽운귀가 이것을 얻은 것도 큰 운이 따라서였고, 영초를 두고 다른 수사와 싸움에 휘말려 일찍이 한립이 내준 방어 보물이 아니었다면 무사히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한립에게 상을 받고 적하봉에서 10년 동안 수련하다 다시 재료를 구하러 떠났다.

    지난 이백여 년간 몽운귀 말고 몽천천, 손부정도 한 번씩 다녀갔지만 한립이 선규를 뚫는 중요한 시점이라 그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몽천천은 한립의 출관을 기다리며 염우와 쌍두사응수와 오랜만에 만나 노느라 적하봉에서 오래 머물렀다.

    손부정과 몽천천은 몽운귀처럼 인연이 닿지 않아 지계 단약 약방의 재료 종자와 어린 묘목만 구해왔다.

    한립은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도령화예 같은 도단 재료들은 무상맹에다 구한다는 임무를 올려놓고 보상을 계속 높여도 아무도 소식이 없는 영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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