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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627화 (1,384/2,000)
  • 1627화. 개조

    *

    봄이 가고 겨울이 지나, 1년이 흐른 어느 날.

    적하봉에 푸른 둔광이 떨어졌다. 그가 내려오자 시종들과 몽천천 등이 저택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인사를 올렸다.

    몽운귀와 손부정은 보이지 않았다.

    “천천, 너는 언제 돌아왔느냐?”

    “돌아온 지 한 달쯤 됩니다. 아, 이것은 오라버니와 손 오라버니가 구해온 영초의 종자들인데 려 장로님께서 돌아오시면 전해드리라 하였습니다.”

    몽천천은 저물대를 꺼내서 바쳤다.

    “그래, 그들을 보게 되면 이 영석과 단약을 전해주거라. 이 단약들은 따로 네가 대신해서 나눠주고.”

    한립은 저물대를 챙기고 따로 작은 주머니 3개를 꺼내 주었다.

    “예!”

    “내가 떠나 있는 동안 적하봉에 문제는 없었느냐? 종문은 안녕하고?”

    “적하봉은 괜찮았습니다. 종문에 큰일은 없었고, 금선 도주 한 분이 최근 출관해 날을 잡아 광찰봉(廣刹峰)에서 설법을 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인원수가 제한되어 보통 진전제자들만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몽천천은 동경의 눈빛으로 대답을 했다. 그리고 몽웅 등 다른 시종들도 설렘과 함께 아쉬운 얼굴이었다.

    금선의 대도에 대한 설법을 들으면 수행이 크게 도움이 될 테지만 진선의 시종에 불과한 그들에게 기회가 돌아올 리 없었다.

    “실력자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은 일종의 기연이겠지만, 각각의 수사마다 가는 길이 다르다. 앞사람의 전철을 그대로 밟는다고 해서 그가 간 곳에 이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대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야 하는 법이지. 다들 알아듣겠느냐?”

    한립은 그들의 표정을 보고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몽천천이 두 눈을 반짝이고 다른 이들도 실망한 기색을 지웠다.

    “다른 일이 없다면 이만 물러 가거라.”

    한립은 모두를 돌려보내고 홀로 동부로 들어가 금제를 발동하고 밀실에 가서 앉았다.

    그가 손을 젓자 세 개의 저물 법기가 나타났다. 성괴문 일전에서 중란 등 세 명의 진선들에게 얻은 물건이었다.

    일부러 빙빙 돌아서 오느라 전리품을 정리할 시간이 없었는데 이제는 어떤 수확이 있었는지 확인할 때였다.

    투툭.

    한립은 저물탁을 들어 그 안의 물건을 쏟아냈다.

    처음 그와 단독으로 싸우기를 자청했던 우람한 사내는 지닌 것이 거의 없었다. 재료와 영약 약간 그리고 보통 품질의 영보와 선원석 열댓 개, 영석들이 다였다.

    가난하고 궁색한 저물탁이 십방루를 위해 목숨을 팔아 싸움에 뛰어든 이유를 말해 주었다.

    내심 운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모기의 살이라도 살점은 살점이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물건을 분류해 자신의 저물탁에 넣은 그는 마른 노인의 저물법기를 들어 바닥에 쏟아냈다.

    재료들 대부분이 품질이 좋고 특히 사람 머리통만 한 적홍색 수정돌 몇 개는 달군 쇠처럼 뜨겁게 빛나며 은은하게 불 속성 법칙의 기운을 발산했다.

    ‘법칙의 힘을 함유한 재료!’

    그밖에 열댓 점의 영보급 법보와 약병 몇 개, 오백여 개의 선원석 그리고 대량의 영석도 들어 있었다.

    일일이 물건들을 챙긴 그는 마지막으로 중란의 저물탁을 쏟았다. 예상대로 각종 보물들이 수북하게 쌓여 기쁨을 주었다.

    재료와 영약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그중에 몇 가지는 법칙의 힘을 함유한 재료도 섞여 있었다. 단약과 경전류는 잠시 밀어놓고라도 선원석만 5, 6천 개였다.

    이렇게 많은 선원석을 모아놓으니 밀실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이것에 자신이 모아 둔 것을 더하면 앞으로 수백 년 간 수련용 단약은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립은 곧 다른 물건들을 살폈다.

    “격원보록(隔元寶錄)?”

    한립은 하얀 옥간을 들어 의식을 불어 놓고 내용에 집중했다. 그러자 한 시지진이 훌쩍 지나갔다.

    가장 처음 기록된 것은 <격원음마공(隔元陰魔功)>이란 마도 진선공법이었다. 수련해 태을경까지 이를 수 있는 극히 귀한 공법으로 그가 수련한 <진언화륜경> 만큼 가치 있는 보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공법이라도 진언화륜경을 버리고 마공으로 갈아탈 생각은 없었다.

    그가 흥미를 보인 것은 옥간 뒤쪽에 기록된 몇몇 비술 중 하나로, 스스로를 봉인해서 기운을 감추는 비술이었다.

    익히면 쓰임이 많을 비술이나 구결이 워낙 난해해서 당장 이해할 수는 없었다.

    “어, 이건?”

    한립은 옥간을 잘 챙겨 넣고 보물 더미에서 황토색 구슬을 발견했다. 팔뚝 절반만 한 크기에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구슬은 퍽 신비해 보였다.

    원래는 다른 재료들에 깔려 있어서 눈에 띄지 않았는데 구슬 표면에 봉인용 하얀 부적이 여러 장 붙어 있었다.

    구슬을 들어 가까이에서 자세히 살펴보아도 뭔가를 알아낼 수는 없었다.

    웅!

    의식으로 구슬 표면을 건드리자 뜻밖에도 부적들이 눈부신 하얀빛을 방출하면서 숨겨진 진법을 일으켜 침투를 막았다.

    한립은 더욱 흥미롭다는 얼굴로 부적을 훑었다. 비범한 부적들이지만 분명 누군가 별로 시간이 없는 상황에서 임시방편으로 붙여 놓은 것이었다.

    한립이 수결을 맺어 법결을 연달아 날리면서 입에서 푸른 화염을 불러냈다.

    팟! 팟! 팟!

    그러자 하얀 부적들은 하얀 화염에 잘게 찢겨 잡아먹혔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황토색 구슬 표면의 문양이 태양처럼 찬란한 빛을 머금었다.

    밀실 주위에 펼쳐진 금제가 자극을 받아 푸른 주술문자가 가득한 보호막으로 막으려 했으나 노란빛은 만개의 바늘이라도 된 듯 금제의 층을 뚫고 나갔다.

    흠칫 놀란 한립은 서둘러 수결을 맺었다.

    금방 동부 주위의 다른 금제들이 발동되어 각양각색의 보호막들이 겹겹이 둘러쌌다. 노란빛은 몇 개의 금제를 뚫고 나가다 결국에는 막히고 말았다.

    차칵!

    황토색 구슬은 표면이 울퉁불퉁해지다가 어느새 노란 장포를 입은 중년 사내로 변했다.

    서른 살 정도로 보이는 각진 턱과 가느다란 눈썹을 지닌 상대는 위엄이 느껴졌다.

    “이건……선괴뢰?”

    한립은 마음속 흥분을 억누르며 눈앞의 괴뢰가 입은 황색 장포를 관찰했다. 황포에 수놓아진 문양이 성괴문에서 보았던 다른 괴뢰들과 비슷했다.

    ‘설마 성괴문의 것이란 말인가!’

    성괴문 금지에 중란이 쳐들어간 것을 떠올리자 상황이 대충 이해가 되었다. 이걸 훔치기 위해 중란은 금지로 들어간 것이다.

    안 그래도 괴뢰술에 관심이 많았는데 황포 사내 선괴뢰는 딱 보아도 비범했다. 진선급 괴뢰라도 되면 그는 이번 임무에서 엄청난 이득을 본 셈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한립은 황포 사내의 체내에 법결을 던져 넣었다.

    우웅!

    두 눈에 빛이 들어오자 황포 사내의 몸이 불현듯 노란 수정처럼 반짝였고 웅장한 기운이 폭발적으로 발산되었다.

    공간이 삐거덕대고 그의 동부 전체가 흔들릴 만한 힘이었다.

    한립은 평온하게 지켜보다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이 모든 현상은 순식간에 그쳐서 황포 사내의 빛과 기운은 바로 사라졌다. 기운 폭발의 순간 그는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으로서는 구체적인 실력을 알 수 없지만 진선경을 훨씬 초월한 기운이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다시 법결을 던져 넣자 황포 사내 모습의 괴뢰는 더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한립은 의식을 불어넣었다.

    눈을 뜬 그의 표정이 약간 어두웠다.

    진정한 선괴뢰를 본 적은 없어도 괴뢰술에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었기에 괴뢰의 핵심 중추가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거기다 괴뢰는 힘이 바닥나 있었다. 괴뢰를 정상적으로 운용하려면 적잖은 수의 선원석이 들어갈 듯했다.

    팟.

    곰곰이 생각하던 그의 손에 금색 구슬과 해 도인의 핵심이 들려 있었다.

    그가 법결을 던져 넣자 손바닥 크기의 금색 게가 머리를 두 집게발로 안고 흔들거리면서 일어났다.

    “한 수사, 어쩐 일로…….”

    작은 눈으로 한립을 보는 황금 게는 깊은 잠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듯 웅얼거리다 휙! 하고 몸을 돌려 황포 사내를 보았다.

    “엇, 저건 선괴뢰! 그것도 보기 힘든 연협괴뢰(連協傀儡)라니.”

    해 도인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황포 사내 위로 날아가 이리저리 기어 다니면서 집게발로 곳곳을 만져보았다.

    한립은 묵묵히 서서 그를 말리지 않았다.

    잠시 후 해 도인은 몸을 돌려 한립을 바라보았다.

    “한 수사, 이런 품질 좋은 선괴뢰를 어디서 구한 것입니까?”

    흥분이 어린 어투였다.

    “말하자면 길지만, 성괴문이라는 종문과 연관된 선괴뢰인 듯합니다.”

    “성괴문……. 처음 들어보는군요.”

    해 도인은 다시 고개를 돌려 괴뢰를 쳐다보았다.

    “해 형, 연협괴뢰는 무엇을 이르는 것입니까?”

    “연협괴뢰란 어떻게 보면 특수한 종류의 괴뢰라 볼 수 있습니다. 보통 괴뢰는 제련을 마친 후에는 실력을 상승하기 어려운데 연협괴뢰는 조종하는 사람의 의식의 힘과 부합도에 따라 발휘할 수 있는 전력이 달라지니까요. 간단히 말해서 법보의 특성을 지닌 괴뢰입니다.”

    “그렇군요. 이 괴뢰에 관심이 있어 보이는데 해 형께 잘 맞겠습니까?”

    “그건, 아직 모르겠습니다. 괴뢰가 흙 속성을 지녀 같은 공법을 익힌 자와 부합도가 높을 테니 말입니다. 잘 맞기만 하면 금선 중기의 실력은 낼 수 있을 겁니다.”

    “해 형은 뇌전 속성의 신통을 발휘하니, 그 말은…….”

    “그렇습니다. 저와는 맞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한립의 말에 해 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흙 속성 공법이 그리 능하지 않은 한립도 실망했다.

    “……적절한 환경과 자원만 주어진다면 희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든 말해 보시지요.”

    “우선 뇌전 진법을 설치해야 합니다. 뇌진 자체는 복잡하지 않으나 뇌전의 힘을 제공할 천지영물을 찾는 것이 개조의 관건이지요. 다음으로 개조 과정에서 끊임없이 대량의 선원석과 극품 뇌전 영석이 필요합니다.”

    해 도인은 입에서 금색 옥간을 꺼내 날려 보냈다. 옥간을 확인해 보자 그리 복잡하지 않은 뇌전 진법을 펼치는 법이 기록되어 있었다.

    뇌진을 유지하는데 선원석 천 개와 대량의 뇌전 극품영석이 필요했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구하기 어려운 양이 아니었다.

    금선급 괴뢰를 조력자로 둘 기회니 선원석을 아까워할 때도 아니었다.

    “충분히 준비할 수 있습니다. 최대 7일 내로 수사를 위해 준비를 마치겠습니다.”

    “선계로 온 후 적잖은 기연을 만났나 봅니다. 그럼 저는 좋은 소식만 기다리고 있지요.”

    한립의 말에 해 도인은 차분하게 답했다.

    * * *

    며칠 후.

    밀실 바닥에 보라색 문양들이 원형의 대형 진법을 이루고, 황포 사내 모습의 선괴뢰가 그 위에 앉아 8개의 금색 목재와 구뢰목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구뢰목에 새겨진 문양에서 수시로 보랏빛 뇌전이 타닥거렸다. 그리고 뇌진 중간에 움푹 파인 곳에는 보라색 수정돌이 박혀 있었다.

    뇌폭해양을 건너면서 우연히 마주친 뇌전의 힘을 삼키던 조개 요수의 진주였다.

    밀실 입구에 선 한립 어깨에 해 도인이 변한 황금 게가 앉아 있었다. 양손으로 수결을 맺어 진법 중앙의 보랏빛 진주에 연달아 법결을 던져 넣자 천둥소리가 울렸다.

    지면의 뇌진에서 수많은 보랏빛 뇌전들이 뱀처럼 밀실을 채웠다.

    “해 형이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과연 한 수사답습니다. 저를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특히 진안으로 쓰인 수정돌이 대단해 보입니다. 꽤 많은 뇌전의 힘을 축적하고 있겠지요?”

    해 도인은 집게발을 들어 보랏빛 진주를 가리키며 물었고 한립은 숨김없이 사실 그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원래는 3할 정도 성공 가능성을 봤었는데, 이제 보니 5할은 되겠습니다.”

    해 도인은 이렇게 말하며 금빛으로 변해 뇌진 속으로 들어갔다.

    파칙!

    대량의 뇌전 뱀들이 사방에서 나타나 해 도인이 변한 금빛으로 흘러들었다. 황금 게는 뇌전의 힘을 두르고 둥글게 뇌전 구슬로 변해 황포 사내의 가슴에 안착해 사라졌다.

    웅!

    부르르 몸을 떤 황포 사내의 가슴에 뇌전 빛이 어른거렸다.

    콰릉 콰쾅!

    뇌진이 본격적으로 작동해 보랏빛 뇌전들이 물밀 듯이 괴뢰의 가슴으로 모여 녹아들었고, 가슴에서 시작된 변화는 점점 황포 사내의 전신으로 퍼져갔다.

    밀실 문 앞에 서서 과정을 지켜보는 한립은 내심 기대를 품고 있었다. 해 도인의 말에 따르면 이 융합과정은 짧게는 수십 년에서 길게는 백 년도 걸릴 수 있다고 했다.

    진주가 가진 뇌전의 힘이 충만한 것은 당연했고 그에 맞춰 선원석과 극품영석도 부족함 없이 배치해 두었다.

    “일이 잘 풀려야 할 것인데.”

    한립은 밀실을 나와 문을 닫고 금제를 펼쳐 두었다. 해 도인의 일을 일단락 지었으나 이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할 차례였다.

    그는 다른 밀실로 들어가 가부좌를 틀고 고민에 빠졌다. 성괴문에서 중란을 마주치고 걱정이 커졌다.

    상대를 격살했고, 검은 두루미의 기억을 뒤졌지만 아직도 결론을 맺지 못하고 있었다.

    중란이 한 말을 되짚어 보면, 성괴문에서 우연히 마주치지 않았어도 고운대륙으로 그를 찾아왔을 거라 했다.

    그것은 촉룡도에 머문다고 절대 안전이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소리였다. 방반과 중란의 스승, 혹은 방반의 배후 인물이 찾아든다면 어찌 대응해야 한단 말인가?

    팟.

    생각에 빠져있던 한립은 손을 저어 남은 구뢰목을 허공에 띄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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