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6화. 전력을 다하다
*
끙!
한립은 핏물에 잠식당한 두 주먹에 힘을 주었으나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핏빛 도기는 바람처럼 날아들어서 그의 머리를 쪼개려 들었다.
바로 그때, 핏빛 도기가 그를 몇 장 앞두고 강인한 금빛 실타래에 감긴 듯 속도가 확 줄었다.
한립 머리 뒤로 금빛 고리가 떠올라 40개의 도문을 반짝이면서 주변을 금빛 파문으로 물들였기 때문이다.
멀리서 진언보륜의 파동을 본 중란은 자신이 아무리 힘을 실어도 핏빛 도기의 움직임을 빠르게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설마……. 시간법칙의 힘? 어서, 저놈을 태워 죽여!”
중란은 안색이 급변해서 소리쳤다.
지금까지는 한립의 숨만 끊어놓고 혼백은 유지해서 추혼술을 펼칠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싸우면 싸울수록 그가 마음대로 갖고 놀 상대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휘익!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검은 두루미가 날아들어서 두 날개를 펼쳤다. 광풍을 차고 두 덩이의 검은 화염이 날아가 한립을 덮쳤다.
그러나 검은 화염은 금색 파문의 범위에 이르자 달팽이처럼 느릿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팟.
한립의 어깨 위로 빼어난 이목구비를 지닌 은색 소인이 나타나서 검은 화염을 올려다보고 배를 통통 두드렸다.
“가 보거라.”
한립은 입맛을 다시는 소인을 보고는 말했다. 이에 은색 소인은 찬란한 은빛 불새로 변해 빠르게 검은 화염으로 쇄도했다.
화륵! 불길을 일으킨 은색 화염은 검은 화염과 교전했지만 불새 본체는 검은 두루미를 향해 돌진했다. 불새와 검은 거대 새가 쫓고 쫓기며 점점 멀어져갔다.
그 모습에 중란은 난색을 보이며 장도를 쥐지 않은 손으로 법결을 맺어 아래쪽의 핏물로 집어넣었다.
손바닥에 원형의 문양들이 떠올라 퍼지자, 핏물이 거대한 파도로 변해 한립을 집어삼키려 들었다.
핏물도 예외 없이 진언보륜의 금색 파문을 일으킨 범위에서 속도가 확 줄었기 때문에 한립은 핏물 파도가 높은 벽처럼 치솟은 가운데 갇힌 셈이 되었다.
남이 보기에는 여유로워 보여도 그는 있는 힘을 다 끌어다 쓰고 있었다. 이번 전투로 선령력 소모가 과도했는데 진언보륜까지 발동했으니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검결을 맺은 그의 주문 소리에 핏물에 잠긴 손에서 대량의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72자루의 청죽봉운검들이 핏물 속에서 힘겹게 뭉쳐 푸르스름한 대형 빛구슬을 만들었다.
“가라!”
한립의 일갈은 용울음 소리처럼 하늘을 울렸고 대형 빛구슬이 갈라지면서 몸을 말고 있던 청룡(靑龍)이 깨어나 날카로운 발톱을 휘두르며 고공으로 치솟았다.
청룡 머리 위에 선 한립은 그 기세를 빌려 핏물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진언보륜은 더는 파문을 일으키지 못하고 급속도로 작아져 몸속으로 되돌아갔다.
한립은 태연한 얼굴로 아래쪽의 중란을 주시하면서 푸른 단약을 꺼내 삼키고 선원석을 들지 않은 다른 손으로 허공을 쥐었다.
쉭!
청룡이 흩어지고 72자루의 푸른 비검들이 거대 장검으로 뭉쳐 그의 손에 들렸다.
중란은 한립이 더는 진언보륜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양손으로 핏물을 쳐서 파도를 일으켰다.
다음으로는 그의 입에서 핏빛 수정 실이 빠져나가 손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손바닥에서 피와 살이 흐물흐물하게 떨어져 나가 장도와 하나가 되었는데 그걸 보는 중란의 얼굴이 좋지 않았다.
잠시 후, 핏빛 장도 표면에 푸른 근육처럼 볼록하게 문양이 일어나 꿈틀거렸다.
핏물과 융합된 중란은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피부에 금색 거미줄 같은 무늬가 나타나 핏물과 연결되었다.
핏빛 장도 표면의 푸른 근육 문양이 수축했다 부풀었다 하면서 핏물의 정순한 혈살기를 금색 거미줄 무늬를 따라 빨아들이고 있었다.
핏빛 장도가 배를 채울수록 중란은 서서히 쪼그라들어 뺨이 움푹 들어가고 눈이 퀭해졌다.
“죽어라!”
그는 사납게 외치며 핏빛 장도를 붕! 하고 돌려 공간이 덜덜 떨리게 만드는 도 그림자들을 내뿜었다.
신중한 눈빛의 한립은 푸른 장검을 쥐고 이때까지 어떤 동작도 취하지 않았다.
“천번지복(天翻地覆)!”
단 네 글자의 주술에 삽시간에 하늘과 땅이 뒤집혔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머리 위로 가 하늘을 대신하고 짙은 구름이 껴있던 하늘이 발아래로 향한 것이다.
공간의 급격한 변화에 중란은 어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전력을 담은 일격이 한립이 있는 곳이 아닌 바다 방향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밖에는 알지 못했다.
깜짝 놀란 그가 이를 악물고 핏빛 장도의 방향을 틀어 다시 한립에게 도 그림자들이 쏟아지게 했다.
도 그림자들은 금빛과 혈살기를 머금고 한립의 신형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쿠콰콰콰쾅!
그 후로도 도 그림자는 멈추지 않고 떨어져 300번을 가르고서야 힘을 잃었다.
“어디 이래도 무사한가 보자!”
중란은 까만색으로 돌아간 장도를 들고 비틀거리면서도 광소를 터트렸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손짓하는 기척과 함께 하늘과 땅의 위치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하늘은 여전히 먹구름이 가득한데 아래쪽 해역은 수백 리에 달하는 깊은 구덩이가 파여서 혈홍색 살기들이 출렁여 바닷물을 밀어내고 있었다.
경직된 중란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한립이 멀쩡하게 서서 그를 향해 잔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럴 수가…….”
“그렇습니다. 수사가 본 것은 전부 환상에 불과했습니다.”
중란이 남아 있던 선령력과 혈살기를 모조리 쏟아 부어 딴 곳을 공격하는 동안 그는 단약과 선원석을 이용해 적잖은 선령력을 회복했다.
이 전투의 승패는 정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의기양양해 말거라!”
중란은 지독한 분노가 어린 눈빛으로 까만 장도를 날렸다. 한립이 푸른 장검으로 호선을 그려 검은 장도를 쳐낸 순간 도신에 돌연 가느다란 금이 갔다.
‘이런!’
불길한 직감을 했을 때는 이미 늦고 말았다.
콰르르.
해수면 위에 커다란 핏빛 태양이 떠올라 그 파동으로 천지를 뒤흔들었다. 해역에는 산만한 파도가 물의 벽을 이루고 사방으로 밀려났다.
본명법보까지 터트린 중란은 울컥 피를 토하는 동시에 손에 쥐고 있던 검은 옥패를 바스라뜨렸다.
퍽!
옥패에서 흘러나온 검은 연기가 그를 감싸고 사라졌다.
* * *
그 시각, 수만 리 밖 고공에서는 검은 두루미가 날카롭게 울어 음파에 검은 화염을 실어 비슷한 크기의 은색 불새와 싸우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멀리 희미한 핏빛 태양의 폭발을 본 검은 새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은색 불새에게 쫓겨 멀리 벗어나 있었기에 무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맹렬하게 날개를 퍼덕여 빛구슬을 날리는 은색 불새를 보면서 검은 두루미는 조금 위축되었지만 겉으로는 조소를 날렸다.
“꼬마 녀석아, 네 주인은 이미 죽었다.”
은색 불새는 잠시 움찔하다가 곧바로 은색 화염을 더욱 증폭시켜 커다란 불구슬로 검은 화염을 흩어 흡입했다.
검은 두루미는 더는 싸울 의지를 잃은 듯 검은 화염이 상대를 저지하는 동안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검은 새는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어딘가로 향했다.
털썩!
수천 장 밖 허공에서 검은 연기가 뭉쳐 중란이 비틀거리면서 검은 두루미 등 위로 떨어졌다.
“어서 달아나야 한다. 여기서 벗어나야 해…….”
다급한 중란의 명에 검은 두루미도 지체 없이 양 날개를 활짝 폈다.
콰릉!
그 순간, 전방에 금색 뇌전들이 교차하면서 뇌진이 떠올랐다. 천둥소리와 함께 등장한 한립은 푸른 장검으로 중란을 공격했다.
“한립!”
중란은 화가 나 소리쳤지만 눈동자 깊은 곳에는 절망감이 어려 있었다. 본명법보마저 폭파한 마당에 더는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방법이 없었다.
혈홍색 원형 수정 방패로 앞을 막은 그는 아직 남은 혈살기를 응결해 갑옷을 걸쳤다. 갑옷이 제대로 완성되기도 전에 금빛 뇌전을 품은 푸른 장검이 떨어졌다.
쿠르릉!
수십 가닥의 금빛 뇌전이 혈홍색 방패를 박살내고 채찍처럼 허공에 몰아쳤다.
촤르르.
푸른 장검이 쇄도하는 도중 중란의 이마에서 청동 머리띠가 빛을 발했다.
“비켜라!”
금빛 비늘이 돋은 두 팔로 장검에 선령력을 불어넣으니 검신의 주술문양이 밝게 빛났다.
“안 돼!”
외마디 비명과 함께 청동 보호대가 차칵! 부서지자 중란은 머리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 아래 검은 두루미는 괴력을 이기지 못해 아래로 추락했다.
해수면에 다다라 날개를 펼쳐 달아나는 검은 두루미를 정염불새가 따라붙었다. 중란의 옷깃을 붙들어 시체가 떨어지지 않게 한 한립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핏빛 태양이 폭발할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간담이 서늘했다.
도저히 버틸 방법이 없던 그는 일촉즉발의 순간 진언보륜의 시간의 힘을 다시 소환해 폭발 여파를 잠시 늦추고 그 틈에 역전진륜을 이용해 자리를 벗어났다.
의식으로 중란의 위치를 찾아 청죽봉운검 속의 벽사신뢰로 뇌전 둔술을 펼친 것은 익숙한 한수였다.
중란 시체 우측 소매에서 새까만 원영 소인이 의복을 찢고 빠져나가 번쩍 사라졌다.
펑!
그러나 작은 폭음이 울리고 중란의 원영은 겁에 질린 얼굴로 튀어나와 무표정하게 그를 지켜보는 한립과 마주쳐야 했다.
“파멸법목…….”
중란의 원영이 힘없이 중얼거릴 때 한립의 검이 떨어졌다.
한립은 명청령안으로 검은빛으로 흩어진 원영까지 꼼꼼하게 살핀 후, 저물탁 등을 챙겨서 검은 두루미가 달아난 방향으로 향했다.
은색 불새가 진작 화염으로 검은 새를 에워싸고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님,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저는 만황 조류로 태생적으로 불 속성 법칙에 눈을 떠서 할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살려만 주시면 선배님을 주인으로 모시겠습니다. 아, 중란의 비밀도 아는 것이 많…….”
검은 두루미는 한립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다급히 사정했다. 그러나 한립은 끝까지 듣지도 않고 푸른 장검으로 영수를 찔러 버렸다.
촤악!
거대 검기에 머리를 뚫린 검은 두루미는 비명을 남기고 추락했고, 한립은 그 안에서 원영만을 끌어들여 손에 쥐었다.
작은 새가 그의 손을 빠져나가려 버둥거리고 있었다. 이에 정염불새는 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가 한립의 어깨에 앉더니 군침을 삼켰다.
“급할 게 무엇이냐.”
한립은 그런 아이를 향해 웃음 지었다. 다섯 손가락으로 작은 새의 머리를 쥐고 눈을 감은 그는 다시 눈을 떴을 때 복잡한 얼굴이었다.
검은 두루미의 기억 속에 확실히 방반에 대한 소식은 많지 않았다. 중란이 말한 대로 방반이 누구의 지시로 그를 노렸는지에 대해서도 실마리가 없었다.
검은 두루미는 모래사막 속의 황토 궁전 안에 검은 사슬이 가득한 장면을 기억했는데 한립은 의식 속에서도 그게 격원법련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새까맣고 커다란 의자에 새하얀 외투를 걸친 인물은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잠시 침묵하던 한립은 원영을 은염(銀焰) 꼬마에게 던져주고 자신은 검은 두루미와 중란이 남긴 저물탁 등을 거두었다.
한입에 검은 두루미의 원영을 삼킨 꼬마는 기분 좋게 배를 두드리면서 전신의 불길을 키웠다.
검은 두루미 본체에서 요핵까지 꺼낸 한립은 술에 취한 것처럼 헤롱거리는 아이를 보았지만 의식 연계를 통해 큰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안심했다.
그는 정염불새까지 회수하고는 성괴문 방향을 보면서 머리를 굴렸다. 성괴문은 회생할 희망이 크지 않았으니 돌아가 보았자 위험만 자초하게 될 것이었다.
무상맹 회원으로 보상을 위해 싸웠지만 그렇다고 성괴문의 안위를 위해 목숨을 걸 수는 없었다.
거기다 중란이 어째서 성괴문 금지에 들어갔는지 모르니 그를 죽인 자신에게 무슨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길지도 몰랐다.
‘이번 보수는 안 받아도 그만이다.’
진선을 여럿 죽여 그 전리품만으로도 보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립은 성괴문 방향을 힐끔 보고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그곳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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