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5화. 영살정사(靈煞晶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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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은 빠르게 해역을 훑었다.
부글부글 핏빛 기포가 올라오는 바다 밑에서 커다란 백여 개의 그림자들이 서서히 떠오르는 중이었다.
그림자들이 해수면에 가까워질수록 피비린내가 짙어졌다.
비술을 이용해 의식을 보호하면서 눈동자에 남색빛을 일으킨 한립은 검을 쥔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하나둘 떠오른 것은 기이한 모습을 한 해저 요수들로 말발굽 대신 지느러미가 달린 말이라던가, 등딱지에 날카로운 가시가 수북하게 솟은 거북, 온순해 보이는 거대 고래 등이었다.
경전에서 본 적 있는 해저 요수들은 수행의 고하가 가지각색으로 가장 강한 것은 진선경에 가까웠다. 그러나 모두 배를 위로 향한 채 둥둥 떠서 죽어 있었다.
그들의 가슴에는 동그란 구멍이 뚫려 바다로 줄줄 피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한립은 죽은 요수들의 상처를 보고는 외부에서 공격당한 것이 아니라 기이하게도 체내에서 살이 터져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으르렁!
짐승 같은 포효가 울리더니, 바다 깊은 곳에서 물보라가 솟아올랐다.
촤앗.
핏빛 거대 손이 물보라를 뚫고 나와 한립을 낚아채려 했다.
흠칫 놀란 한립은 허공을 박차 거대 손을 피했지만 그가 물러난 방향에서 똑같이 생긴 핏빛 거대 손이 더 나타나 퇴로를 막았다.
앞뒤에서 가까워지는 거대 손을 보고 한립은 방향을 틀어 둔광을 일으켰다. 하지만 거대 핏빛 손이 합장하듯이 맞닿아 그가 달아나는 것보다 빨랐다.
부글부글.
격렬하게 파도가 친 바닷속에서 산봉우리처럼 거대한 신영이 일어나 전신을 드러냈다.
핏빛으로 몸에 울룩불룩 근육이 자리 잡은 허리에 암청색 가죽 갑옷을 두른 거인은 중란의 얼굴을 닮아 있었다.
핏빛 거인의 두 팔 아래 삐져나온 또 다른 두 개의 팔이 지금 한립을 손바닥 사이에 끼고 힘을 주는 중이었다.
타탁! 우드득!
한립의 튼튼한 몸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크게 기합을 지르며 금빛 비늘이 떠오른 두 팔로 힘껏 핏빛 거대 손을 밀어냈다.
크기와 무게가 엄청난 거대 손들이 맹렬한 힘에 서서히 틈이 벌어졌다. 그걸 보고 포효한 핏빛 거인이 두 팔에 더욱 힘을 주어 겨우 벌어지기 시작한 손을 다시 합장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한립은 거칠게 힘을 내쉬면서 급격하게 커져 산봉우리 크기의 금털 거원으로 변신했다.
동시에 그의 가슴과 배에 7개의 남색 별 무늬가 떠올라 반짝반짝 빛나면서 피부의 금빛과 어우러졌다.
크아앙!
거원은 금색 눈동자로 핏빛 거인을 노려보면서 상대의 거대 손에 깍지를 껴 꺾어 버렸다. 핏빛 거인의 두 팔이 접히지 말아야 할 방향으로 뒤집히며 근육이 터져나가는 파열음이 울렸다.
크학!
핏빛 거인이 어깨 위의 두 팔을 뻗어 거원의 팔을 붙들고 거대한 종소리가 울리 듯 웅웅거리는 목소리로 주문을 외워댔다.
손바닥에서 주문 소리에 맞춰 뱀 같은 혈홍색 문양이 스르륵 빠져나와 거원의 두 팔을 휘감았다.
불타는 듯한 통증을 느낀 한립은 즉시 핏빛 거인의 두 손을 놓아주고 뒤로 열댓 걸음을 물러나야 했다.
핏빛 거인과 거리를 벌리고 팔을 내려다보자 나선형의 핏빛 인장이 두 팔에 찍혀 있는 것이 보였다.
“혈살인(血煞印)에 당했으니 넌 죽은 목숨이다.”
핏빛 거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고 그의 몸에서 커다란 혈홍색 주술문자들이 떠올랐다.
한립은 두 팔에서 전해지는 불타는 고통이 극심해지는 것을 느끼며 몸을 바다에 담가 열기를 가라앉히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전신의 정혈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난동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정혈이 이런 속도로 끓어오르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혈관이 터지고 그는 폭사할 것이다.
현선으로 오장단원공 등의 비술을 수련해 와서 아직 멀쩡한 것뿐이었다. 한립은 누런 얼굴 거한의 살기법칙의 힘에 경악했다.
처음에는 흉살기로 자신의 의식을 좌지우지하더니 이제는 그의 정혈이 날뛰게 했다. 그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선령력으로 정혈을 억누르려 했으나 실패했다.
산악거원, 진룡, 천봉 등 강력한 진령의 피가 융합된 그의 혈맥은 보통 진선들보다 강대한 힘을 품고 있어 선령력 만으로 제압하기 어려웠다.
크항!
용울음 소리가 그의 몸에서 터져 나오고 거원 등 뒤로 오조금룡 허상이 떠올라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금룡법상이 나타난 뒤, 거원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진령 혈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냐! 좋구나, 하늘이 나를 돕고 있어……!”
중란이 변신한 핏빛 거인의 목소리가 허공을 웅웅 울렸다. 제 팔을 가슴 앞에 포개고 기괴한 법결을 맺은 그의 몸에 구불구불한 문양을 따라 황금색 빛이 타고 흘렀다.
이어서 맑은 봉황의 울음소리와 함께 한립이 변신한 거원 등 뒤로 채봉 허상이 금룡 옆에 떠올랐다.
멀리 떨어져서 지켜보던 검은 두루미의 얼굴에도 반가운 기색이 느껴졌다.
“놀랍게도 진령 혈맥이 한 종류가 아니었어! 하하, 평소에는 여러 진령 정혈을 지니고 있어 득이 되었겠으나 오늘 주인님을 만난 것이 네 불행이다. 어디 체내의 정혈과 진령 혈맥이 동시에 발작하는데 얼마나 버티는지 두고 보자!”
검은 두루미는 사람처럼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금룡(金龍), 채봉(彩鳳) 다음으로도 푸른빛과 함께 청란(靑鸞) 허상이 떠오르고 은색 뇌전이 번쩍인 뒤에는 뇌붕(雷鵬) 허상이 나타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오색공작(五色孔雀) 허상이, 다른 진령 법상들 아래로 거대한 현구(玄龜)까지 뒤따랐다.
“어, 어떻게 저렇게 많은 진령 혈맥이…….”
검은 두루미는 눈을 부릅떴다.
두 손이 있었다면 자신의 눈을 비벼서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허약한 인족 따위가 어떻게 저렇게 많은 진령 혈맥을 한 몸에 융합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크앙!
고통스럽게 울부짖은 산악거원 등 뒤로 진령 법상들이 격렬하게 발버둥 치다 청란과 채봉이 좌우로 금룡과 현무는 상하로 움직이며 중간의 뇌붕과 혼란스럽게 뒤엉켰다.
거원 팔뚝의 혈홍색 인장 자국이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 하면서 정혈의 난동이 심해져 혈관을 뚫고 나오기 직전이었다.
속에서부터 몸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은 뼈를 조각조각 부수고 근육을 뽑아내는 고통에 맞먹었다. 한립은 언제라도 정혈이 몸을 뚫고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그도 바다에 배를 까뒤집고 둥둥 뜬 해저 요수들과 다를 바 없는 꼴이 될 게 분명했다.
핏빛 거인은 한립이 터지기 직전인 것을 보고 잔인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직도 터지지 않고 뭐 하는 것이냐!”
거인의 포효에 한립의 고통은 몇 배로 심해져서 피와 살은 물론 뼈 구석구석까지 수많은 바늘이 뚫고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쳐들고 괴성을 지른 그는 선령력으로 더는 진령 정혈을 억누를 수 없음을 알고 범성진마공을 극성으로 발동했다.
그러자 피부에 겹겹이 자금색 비늘이 돋아났고 똑같은 색깔의 네 개의 팔과 머리 두 개가 자라났다. 여섯 개의 눈을 번쩍 뜬 삼두육비 거원의 머리 이마에 은색 짧은 뿔이 보였다.
그가 삼열변신을 마치자 다행히 거의 분리되었던 진령 허상들이 둥지로 돌아가듯 번득이며 귀환했다.
이제 한립이 변신한 거원은 핏빛 거인보다도 머리 하나가 더 컸다. 멀리서 중란이 진작 수결을 풀고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한립이 자신의 혈살인에서 벗어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데다 삼두육비의 괴물로 변신을 하고 나서는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 한립은 범성진마공으로 진령 정혈들을 안정시킬 수 있을 거라 확신하지는 못했다.
그저 혼란스럽게 발버둥 치는 진령 정혈에게 길을 인도해서 혈살인의 힘에 영향을 미칠 생각이었는데 예상보다 잘 통했다.
세 개의 머리가 동시에 씩! 입꼬리를 끌어당기고 여섯 팔뚝이 흐릿하게 변했다.
휘이이잉!
수많은 주먹 허상들이 날아가며 해역이 요동쳤다.
하늘을 뒤덮은 주먹 허상들은 빼곡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져 핏빛 거인 주변에서 겹겹이 층을 이루고 마구 떨어졌다.
네 개의 팔을 들어 마구 휘두르는 핏빛 거인이 주먹 허상에 묻힌 것은 순식간이었다.
쿠쿠쿠쿵!
강력한 폭음과 진동이 계속되었다. 금빛과 핏빛이 분분히 터지며 방대한 신영이 펄쩍 뛰어올라 태산처럼 떨어져 내렸다.
자신의 머리 위로 푸른 장검이 꽂히는 것을 본 핏빛 거인은 두 손으로 허공을 쥐어 핏빛 장도를 불러냈다.
쿠아앙!
푸른 거검이 내리치는 기세에 핏빛 거인이 한쪽 무릎이 꺾이고 핏빛 장도가 뒤로 밀려 거인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그 여파로 인근 해역의 파도가 어찌나 거세게 치는지 수많은 어류와 바다 요수들이 휘말려 부상을 입고 죽어 나갔다.
일격으로 상대를 절반쯤 무릎 꿇게 한 한립은 거대한 발을 들어 핏빛 거인의 가슴을 걷어찼다.
이에 핏빛 거인의 가슴이 느닷없이 쩍 갈라지면서 그 안에서 음산한 빛의 날카로운 이빨들이 나타나 거꾸로 거원의 다리를 물어뜯으려 들었다.
그러나 눈앞이 뿌옇게 변한 핏빛 거인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하기 전에 가슴에서 극통이 밀려들었다. 가슴이 다 벌어지기도 전에 거원이 냅다 걷어차 이빨 수십 개를 깨부쉈기 때문이었다.
그뿐 아니라 발차기에 실린 힘이 어찌나 강한지 가슴뼈가 주저앉아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쿨럭!
피를 토해낸 핏빛 거인은 두 손에 쥔 장도를 들어 올리면서 나머지 두 손으로 거원을 붙들려 했다.
그러나 거원도 물러나지 않고 두 손으로는 거검을 들고, 나머지 네 손으로는 주먹을 뻗어 근접전을 이어나갔다.
핏빛 거인의 두 팔은 거원의 날리는 주먹질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제압당했다.
뻐뻑! 뻑! 뻑!
연달아 들린 타격음 뒤에 핏빛 거인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때 한립이 두 팔로 핏빛 거인이 장도를 쥔 손을 붙들고 푸른 거검으로 힘차게 베었다.
서걱!
핏빛 거인은 대경실색해 벗어나려 했지만 푸른 장검에 머리 절반을 베이고야 말았다. 머리가 잘려나간 핏빛 거인의 팔이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주인님!”
멀리서 검은 두루미의 외침이 들려왔다.
두루미는 중란을 따른 지 오래지만 그가 이렇게 낭패를 당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거원은 손바닥을 활짝 펴서 핏빛 거인의 머리를 내리치려 했다.
그 순간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
추르륵!
머리가 갈라진 핏빛 거인이 돌연 끈적끈적한 핏물로 녹은 것이다.
거원의 세 손과 팔 한쪽이 핏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 빠져나오지 못했고, 괴이한 금빛 실들이 장어 떼처럼 꿈틀꿈틀 헤엄쳐 몰려들었다.
금색 실에서 법칙의 기운을 느낀 한립은 선령력을 전력으로 운용해 손과 발을 빼려다가 겨우 한 장 정도 움직이고 멈추고 말았다.
금털 거원의 팔과 다리는 자금색 비늘로 빈틈없이 가려져 있었지만 날카로운 금실들은 그것을 막힘없이 뚫고 들어갔다.
금실들이 체내로 들어오자 한립은 온몸에 힘이 풀리고 선령력이 유실되려는 것을 느꼈다. 격렬하게 발버둥 치던 거원은 선령력이 핏물로 빠져나가자 점점 빛을 잃고 체형도 줄어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봉우리 크기의 산악거원이 평범한 사람의 크기로 변해 있었다.
삼두육비의 거대한 신체가 사라지고 몸 절반이 핏물에 빠져들어 있었지만 다행이 체내에서 선령력을 빨아가던 금실 들은 종적을 감춘 뒤였다.
거원으로 변신할 때 쓰고 있던 소머리 가면을 거둔 상태였기에 한립은 창백해진 얼굴을 드러냈다.
그와 얼마간 거리를 두고 핏물 한 줄기가 뭉쳐지더니 빠르게 누런 거한 상반신을 만들었다. 허리 아래는 핏물과 융합되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 너를 잘못 보아도 한참 잘못 보았다. 수만 년간 힘들게 모아온 영살정사(靈煞晶絲)까지 쓰게 하다니! 네 놈이 꽁꽁 감추고 있는 비밀을 알아내지 못한다면 오늘 손해가 막심하겠구나.”
차갑게 한립을 노려본 중란도 안색이 별로였다. 강제로 뺏어간 선령력이 그의 체내로 흡수된 건 아닌 듯했다.
“대체 누구의 지시를 받았기에 저를 못 죽여 안달이 난 것입니까?”
한립은 냉랭히 질문하면서 핏물에 가려진 손에 선원석을 움켜쥐고 선령력을 취했다.
“하하, 방반이 누구의 지시를 받아 움직인 것인지는 나도 모른다. 그러지 말고 네가 내게 말을 해보거라. 방반 무리가 어째서 너를 그리 쫓았던 것이지? 나중에 내게 추혼술을 당하는 것보다는 지금 실토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중란이 힐끗 한립을 보며 떠보았다.
“그런가요? 제가 추혼술에 흥미가 많아서 말입니다. 어디 수사의 추혼술은 얼마나 대단한지 기대가 되는군요.”
“혼이 나봐야 정신을 차릴 놈이로구나!”
한립의 비웃음에 중란이 노기를 드러내며 핏빛 장도를 불러냈다. 파도를 타듯 몸을 날린 중란의 손에서 핏빛 장도가 쳐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밝은 핏빛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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