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4화. 살기법칙(煞氣法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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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기 수사, 굳이 싸움을 계속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만 가시지요.”
혈한은 검을 찬 사내에게 전음을 보냈다.
“한 뼘이지만 이미 검을 뽑았습니다. 제가 검을 뽑고서 그냥 가는 일은 없지요.”
육기는 단호하게 거절하고는 시원하게 장검을 뽑아 새하얀 거대 검기를 만들어냈다.
“으하하! 그래, 와라!”
호언 도인 등 뒤로 봉황울음 소리와 붉은 장검이 함께 떠올라 거대 검 허상을 만들었다. 그러자 검 허상 양쪽에 적홍색 화염이 날개처럼 자라나 펼쳐졌다.
이에 성괴문 본섬의 온도가 급상승했고 천여 명의 흑의 두병들은 들고 있던 검은 도끼에서 불길을 일으켜 청갑 졸병들을 콱콱 찍어댔다.
죽다 살아난 성괴문 제자들은 다시 타오르는 희망의 불씨에 어깨를 쫙 펴고 십방루 수사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흉터 사내가 한숨을 내쉬며 육기 쪽으로 날아가려 했으나 운예와 백봉의가 미리 날아올라 그의 앞길을 막아섰다.
* * *
뇌폭해양, 성괴문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해역.
소머리 가면을 쓴 한립과 중란이 멀리서 마주 보고 있었다. 그가 뇌진을 이용해 도망갈 때마다 중란은 거머리처럼 따라붙었다.
“한립, 네 놈은 이미 내 손바닥 안에 있다.”
“고작 살기법칙(煞氣法則)을 좀 깨우친 것으로 그리 기고만장하시다니, 쓸모없다는 사제 분과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중란이 겁을 주었지만 한립은 당당히 받아쳤다.
“살기법칙을 알아보았다고? 내 너를 정말 만만히 보았어.”
“하하, 저를 여기까지 쫓아와 기척 없이 몇 번이나 기습한 것도 살기를 이용한 것 아니셨습니까?”
“그래, 네 녀석이 아무리 멀리 달아나도 소용없다는 소리다.”
중란의 대답에 한립은 내심 흥미가 생겼다.
사실 그도 살기법칙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았는데 보기 드문 법칙인 만큼 확실히 특이했다.
중란이 그의 체내에 투입한 검은 수정실은 살기법칙의 실로 그걸 이용해 시시각각 위치를 파악한 다음 신체를 허상화해 따라오는 듯했다.
그밖에 아직은 몸에 무리가 없지만 희미하게 체내에 흉살의 기운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흉살의 기운이 넘쳐 억누를 수 없을 때 거한은 그를 향해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것이다.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속전속결로 해치워야 했다.
마음을 정한 한립은 검은 중수진륜을 불러내 중란에게 보냈다.
상대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피하지 않고 기다리다가 중수진륜과 충돌하려는 순간, 검은 안개로 변해 고리를 통과했다.
수결을 맺은 한립이 나지막하게 외쳤다.
“가라.”
중수진륜의 물의 도문들이 빛을 발하자 쾌속으로 회전하는 고리의 흡입력에 바다에 거대한 소용돌이 물기둥이 솟구쳤다.
중란은 검은 안개로 변하기 전에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보이지 않았다. 한립은 방심하지 않고 빠르게 회전하는 중순진륜을 돌아오게 해 앞쪽에 띄웠다.
동력을 잃은 소용돌이 물기둥이 촤악! 퍼져 바다로 떨어졌지만 그 안에 중란은 없었다.
한립의 마음에 악한 기운이 어리더니 가면 미간에 검은 안개 실들이 스멀스멀 몰려들었다.
이때 바닷속에서 돌연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 주변 해역을 새까맣게 오염시켰다.
촤앗! 촤앗!
거대한 물결이 주위에서 밀려들어 식인화(食人花)처럼 꽃잎을 벌리고 한립을 삼키려 들었다.
이에 한립은 피하려 했지만 갑자기 의식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지며 뻣뻣하게 굳어 중수진륜과 검은 물결에 휘말리고 말았다.
두 눈에 밝은 남색빛을 일렁여도 검은 안개로 가득 찬 공간을 투시할 수 없었다. 의식이 많은 제약을 받아서 그가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사방의 살기뿐이었다.
그는 길게 호흡을 내뱉고는 중수진륜을 전방으로 날렸다.
퍽!
물의 장벽에 부딪힌 중수진륜을 검은 안개가 겹겹이 둘러싸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더 많은 선령력을 불어넣어도 검은 안개는 더욱 꽉 조여들어 중수진륜을 조밀하게 에워쌌다.
검결을 맺은 한립의 소매에서 푸른 장검이 날아올라 72자루의 청죽봉운검으로 변해 사방을 갈랐다.
날카로운 검날이 바르르 떨리며 푸른 검 그림자로 갈라져 수천 자루의 비검이 검은 물의 장벽을 가르는 것처럼 보였다.
이때 누군가 검은 공간 바깥에 있었다면, 먹물이 가득 들어있는 새까만 거대 구슬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새까만 구슬 표면이 수시로 뾰족뾰족하게 튀어나왔고, 멀지 않은 곳에는 검은 강철 깃털이 가득한 머리에 황금 벼슬이 난 검은 두루미가 떠 있었다.
검은 두루미 등에는 검은 피풍의를 걸친 누런 얼굴 거한이 앉아 양손으로 검은 장도를 쥐고 새까만 구슬을 주시했다.
검은 장도에 새겨진 괴이한 문양들이 깜빡거리면서 주변의 검은 기운에서 귀곡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인님, 저놈이 아주 끈질기게 버티고 있습니다.”
검은 거대 두루미가 기다란 목을 돌리며 말했다.
“흐흐, 상관없다. 격렬하게 발버둥 칠수록 살기의 침식이 빨라질 것이다.”
“감추고 있는 비밀을 알아낼 생각이 아니셨다면 그냥 흑제도선인으로 죽여 버렸으면 되었을 텐데요.”
“방반 녀석이 몇 백 년 동안이나 입을 다물고 있던 비밀이 뭘지 궁금했지. 그걸 알아낼 수만 있다면 그동안 들인 시간과 힘이 아깝지 않을 거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새까만 구슬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었지만 반대로 검은빛은 더욱 짙어졌다.
“다 되어가는 것 같은데…….”
중란이 검은 두루미 등에서 일어나 장도를 들고 구슬로 손을 뻗었다. 구슬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락 소용돌이치면서 중란의 체내로 흡수되었다.
구슬의 면적이 점점 줄어들면서 한립이 노출되었다. 눈을 감고 뻣뻣하게 굳어 있는 그의 미간에는 새까맣게 살(煞)이란 글자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의 주변에서 72자루의 청죽봉운검들과 중수진륜만이 얇은 검은 수정에 둘러싸여 벗어나려고 몸을 떨었다.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인 중란이 비밀을 알아내려 미간의 ‘살’ 자로 손을 뻗는데 이변이 발생했다.
번쩍 눈을 뜬 한립의 두 눈동자가 남색으로 빛나더니 미간에서 수정실 한 줄기가 튀어나와 ‘살’자를 바스라뜨리고 중란을 향해 쇄도했다.
그가 깨어날 것을 예상치 못한 중란은 수정 실이 바늘처럼 그의 이마를 향해 날아드는 것을 보았다.
크앙!
이마의 청동 머리띠가 푸른빛을 터트리고 눈이 네 개 달린 호랑이 요수 허상이 빠져나와 수정실을 삼켰다.
그걸 본 한립은 금빛 비늘을 일으키고 단단한 주먹을 중란의 가슴으로 뻗었다. 이에 중란은 서둘러 장도를 들어 올리고 다른 손으로는 도신을 받쳐 한립의 주먹을 막았다.
쾅!
금빛 불똥이 튕기자 중란은 운석이라도 맞은 듯 바다로 튕겨 나가 물보라를 만들었다. 한립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빠르게 검결을 맺어 청죽봉운검을 움직였다.
우웅!
검은 수정막을 찢어버린 청죽봉운검들이 호선을 그리면서 중란을 따라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도문에 빛이 들어온 중수진륜이 쾌속으로 회전해 구속에서 벗어나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모든 일이 너무 순식간에 일어나 검은 두루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날개를 펄럭였다.
거대한 검은 화염 두 개가 중수진륜을 향해 떨어졌다.
쿠쿵!
검은 불길에 둘러싸인 중수진륜이 바다 표면을 따라 미끄러지듯 날아가다 한립에게 돌아왔다. 힐끗 커다란 검은 두루미를 본 한립은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심해에서 검은 그림자가 불쑥 올라와 그의 등 뒤에서 장도를 휘둘렀다. 검은 장도에서 연달아 도 그림자들이 빠져나와 바다를 갈랐고 마침 솟아오른 푸른 비검들과 부딪쳤다.
채채챙…….
검은 도 그림자들이 흩어져가며 푸른 비검들도 기세가 약해졌다. 중란은 검은 두루미 등 위에 올라타 한립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살기침식을 파훼할 줄이야! 의식의 힘이 동급 수사를 월등하게 초월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지. 설마……. 금지된 술법인 연신술이라도 익힌 것이냐!”
중란이 무슨 말을 하든 한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손짓에 청죽봉운검들이 날아올라 푸른 장검으로 합쳐져 돌아왔다.
“방반이 오랫동안 쫓아다닐 만한 녀석이로구나. 하하, 감춰둔 비밀이 한두 가지가 아닌 듯하니 원영을 잡아다 하나씩 밝혀주마!”
“말이 너무 많으십니다.”
담담하게 말을 마친 한립의 체내에서 진언보륜이 역전해서 40개의 도문에 빛이 들어왔다.
신영이 순식간에 사라진 그는 잔영도 남기지 않고 검은 두루미 등 위에 나타나 푸른 장검으로 중란의 왼쪽 가슴을 푹! 찔렀다.
눈을 부릅뜬 중란은 믿기지 않는 얼굴로 가슴에서 검은 핏물이 줄줄 흘러나와 의복을 적시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주인님!”
검은 두루미의 날카로운 외침을 듣고 한립은 장검을 뽑아 뒤로 물러났다. 그가 떠나자마자 가슴이 뚫린 중란은 검은 연기로 변해 흩어지기 시작했다.
뜻밖에도 살기로 응결한 임시 대역에 불과했다. 하늘 다른 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중란의 눈에는 한립을 무시하는 기색이 싹 사라졌다.
그러나 한립은 회심의 일격이 실패한 것에 울적해졌다. 진언보륜의 도문 108개를 전부 회복하지 못해 신통의 위력이 많이 떨어진 것이다.
“내 너를 아직도 얕보고 있었구나. 방반처럼 속도 법칙을 익힌 것도 모르고 말이야!”
“당신이 이번 공격을 피한 것도 방반과 관련이 있겠군요?”
한립은 상대의 오해를 풀지 않고 반문했다.
“그렇다. 이건 방반을 대비해서 만들어 둔 한 수였지. 별 볼 일 없는 놈이라도 스승님이 중시하는 제자였으니까.”
중란은 대답을 하면서 등 뒤로 몰래 수결을 맺고 있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괴상한 핏빛 문양이 일어나 피풍의로 가려진 피부를 붉게 물들였다.
검은 두루미가 그걸 보고 두려워하며 날개에 검은빛을 머금었다. 제일 먼저 멀리 물러날 준비를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한립은 그걸 눈치채고도 내색하지 않고 중수진륜을 방패처럼 앞에 띄우고 푸른 장검을 들지 않은 손에 몰래 중수문뢰 두 개를 쥐었다.
중란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변하면서 실낱같은 붉은 안개들이 떠올라 검은 장도로 스며들었다.
누런 얼굴 거한은 발산하는 기운이 확 달라져서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흉포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제 끝이다.”
핏빛 그림자로 변해 사라진 중란은 한립의 오른쪽 아래에서 튀어나와 장도로 옆구리를 베었다.
기습하리라 예측하고 있던 한립은 푸른 장검으로 챙! 하고 장도를 막으며 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그 틈에 중수문뢰가 소리 없이 중란 앞으로 떨어져 보라색 뇌전 문양을 번득였다.
콰르릉 콰쾅!
사나운 보라색 뇌전들이 주변 수백 장을 집어삼켰다. 폭음이 가시기 전에 또 다른 중수문뢰가 이번에는 금빛을 발산했다.
쿠르릉!
마치 바다 위에 금빛과 보랏빛 뇌전을 머금은 태양 두 개가 떠오른 것 같았다.
중란의 신영은 진작 보이지 않고, 치지직 증발하는 바다 위로 공간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내뺄 준비를 하고 있던 검은 두루미만 고공으로 날아올라 놀란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벽사신뢰의 위력이 그래도 더 강한 것 같군.”
아직 폭발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바다를 보면서 한립은 혼잣말을 했다.
두 중수문뢰는 뇌폭해양에서 보라색 수정 구슬의 힘을 빌려 제련한 것과 청죽봉운검을 다시 제련하고 벽사신뢰를 이용해 제련한 것이었다.
전자는 무상맹의 각종 임무를 수행하면서 거의 다 써버리고 후자는 제련이 쉽지 않아 처음부터 많지 않았다.
오늘 두 알이나 써보니 벽사신뢰를 융합한 중수문뢰의 위력이 더 강했다. 파도가 가라앉자 바다에는 찢겨나간 피풍의 조각들과 붉은 핏물의 흔적이 보였다.
한립의 표정이 신중해졌다.
드넓은 해역에 누런 거한의 기운이 분산되어있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괴이하게도 핏빛으로 물든 바다에 사발 크기의 붉은 기포가 부글부글 올라와 수백 리를 뒤덮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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