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3화. 등장
*
운예와 백봉의가 광장으로 내려오자 무상맹의 나머지 수사들이 다가왔다.
“인삼 수사께서 이번 임무의 책임자라 해도 이런 상황에서 우릴 붙들진 못 하시겠지요? 우리더러 이곳에서 성괴문과 같이 죽기라도 하란 것입니까!”
그중 한 명이 소리쳤다. 그러자 그 소리가 주위 수사들의 귀에도 또렷하게 들렸다.
“지금까지 싸웠으면 우리도 할 만큼 한 것입니다.”
“그렇지요! 맹에서 감찰사가 나와도 우리의 의견에 힘을 실어줄 테고요.”
다른 무상맹 수사들도 목소리를 높였다. 운예는 백봉의 곁에 선 백소원을 살피고는 무상맹 수사들을 일일이 훑었다.
“이번 임무는 끝났다. 알아서 갈 길을 가도 좋다.”
말을 마친 그녀는 저물 반지를 수사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보수를 확인한 무상맹 수사들은 백소원과 인구만 빼고 기쁜 얼굴로 날아올랐다.
십방루 수사들과 청갑 졸병들도 웬일인지 그들을 막지 않았다. 인구가 운예와 백소원을 향해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자네도 가도 좋네.”
탄식하듯 그를 향해 말하는 운예를 보고서야 인구는 침묵하다 포권을 하고 날아올랐다.
* * *
성괴문 본섬과 멀리 떨어진 뇌폭해양 위.
콰릉!
천둥소리가 들리고 굵은 뇌전 기둥이 바다에 떨어졌다. 뇌전 빛 속에 나타나 바다 위에 선 것은 푸른 소머리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한립이었다.
넓게 의식을 퍼트린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날 쫓지 않을 리가 없을 텐데…….”
곧 그와 백 리 떨어진 허공에 파문이 일고 검은 안개 속에서 중란의 신영이 나타났다.
그걸 본 한립은 미세하게 입꼬리를 꿈틀하고 수결을 맺어 다시 뇌전 진법을 통해 사라졌다. 중란 역시 비웃는 얼굴로 다시 허상화 되어 사라졌다.
* * *
광장에 남은 천여 명의 성괴문 수사들은 살아나갈 희망을 버렸다. 이미 본섬과 같이 바다로 가라앉을 마음의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스승님께서도 소원이를 데리고 가시지요.”
“노조님…….”
백소원이 백봉의의 말을 듣고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스승님을 따라 열심히 수련하거라. 수행이 높아지기 전에 복수는 꿈도 꾸지 말고.”
백봉의는 자신의 저물탁을 풀러 그녀의 팔에 채워주며 당부했다.
“……노조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두겠습니다.”
백소원이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우리와 같이 가지 않을 셈이냐? 만년 수행을 소모하더라도 너희 둘을 데리고 떠나는 날 막지는 못할 것이야.”
운예가 미간을 좁히고 백봉의에게 전음을 보내 설득했다. 그러나 미소를 머금은 백봉의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제자가 마음을 굳힌 듯하자 운예는 백소원을 데리고 둔광을 일으키려 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수사는 남으셔야 합니다.”
그때 누군가 우렁차게 외쳤다. 흠칫 놀란 운예는 고개를 들어 검을 찬 사내가 흉터 사내와 십방루 수사들 뒤쪽에서 걸어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날 막을 수 있을 것 같나요?”
운예가 검을 찬 사내를 향해 조소했다.
“오늘 보니 당신과 성괴문은 깊은 인연이 있더군요. 오늘 당신을 놓아주면 반드시 후환이 될 것입니다.”
검을 찬 사내는 표정 변화 없이 담담히 답했다.
흉터 사내는 금선과 생사를 걸고 싸우는 것에 찬성하지 않았지만 육기의 말을 들으니 운예를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이 협공해도 동급 금선을 쉽게 죽일 수 없겠으나 앞으로 시시각각 원한을 품은 금선을 경계하면서 살아가는 것보다는 나았다.
“저를 그리 간절하게 붙드시고, 벌써 정이 깊어지셨나 봅니다. 하하, 안타까워서 어찌해야 할까요? 저는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서 오늘 반드시 이곳을 떠나야 하는데요.”
갑자기 눈웃음을 치기 시작한 운예는 고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자 청갑 두병 속에 틈틈이 섞여 있던 십방루 수사들이 멍하니 눈이 풀렸다.
“쯧! 지금이 어느 때라고 매혹술을 사용하려 하십니까!”
흉터 사내의 혀를 차는 소리가 십방루 수사들의 귀에 파고들어 정신을 차리게 했고, 그들은 겁먹은 표정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제때 도움을 받지 못했으면 여인의 조종을 받아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말았을 것이다.
“어쩔 수 없지요. 그쪽 인원수가 너무 많으니 어떻게든 손을 빌리려 했을 뿐입니다.”
운예는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겉으로는 여유로워 보였지만 속으로는 강력한 비술을 격발하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스승님, 저희가 시간을 벌어보겠습니다. 개의치 마시고 떠나세요.”
백봉의가 입을 열었다.
“하하하! 너희 같은 패잔병들이 시간을 끌 수나 있을 것 같으냐? 주제넘은 것!”
흉터 사내가 우스갯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네 놈! 어디 한 번 그들을 건드리기만 해봐라…….”
먼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그 목소리에 흉터 사내와 육기는 움찔하곤 섣불리 운예 무리를 공격하지 못했다. 그때 놀란 대중의 눈빛을 받으면서 은빛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가 왔어!’
은빛을 보는 운예의 눈에 뭐라 말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백봉의는 의외라는 기색이었다.
먹구름 속에서 나무토막처럼 큰 은색 호리병박이 떠올랐다.
허리에 상사결(想思結)이라 불리는 매듭이 달린 붉은 줄이 묶여 줄의 양 끝이 바람에 휘날렸다.
나이가 반백 살에 가까워 보이는 노인이 호리병박 위에 서서 깔끔한 달빛 도포를 펄럭이며 검을 찬 사내와 시선을 마주쳤다.
한립이 보았다면 은색 호리병박 위의 수사가 다른 이도 아니고 맨날 술에 빠져 해롱대던 호언 도인이라는 사실에 입을 쩍 벌렸을 것이다.
추레한 몰골로 다니던 평소 모습과 달리 지금의 호언 도인은 회백색 머리를 정갈하게 빗어 자금색 연꽃관으로 올림머리를 하고 있었다.
세월이 느껴지는 노인의 얼굴도 수염을 정리해서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드러났고, 특히 술에 취해 게슴츠레하게 뜨고 다니던 눈은 형형하게 빛나 천하를 오시하는 범상치 않은 의식이 드러났다.
걸친 도포도 먼지 한 점 묻지 않은 새것인 데다 허리에 걸린 주홍색 호리병박마저 새것처럼 반짝였다.
육기는 호언 도인을 보고 칼집에 넣어둔 장검을 챙! 하고 뽑아내려 했다.
“잠깐, 누군지 알겠습니다. 촉룡도 금선 도주 중 한 명인 호언 도인일 텐데 왜 여기에…….”
흉터 사내가 그런 육기를 말리면서 상대의 신분을 알려주었다.
호언 도인은 술과 연단 그리고 괴뢰술에 심취해 어릴 적에는 자주 종문을 떠나 유람을 다녔지만, 최근에는 고운대륙을 떠나는 일이 없어 육기는 알지 못했다.
그가 신경 쓰는 것은 호언도인의 신분은 아니었다.
십방루는 촉룡도 금선 도주들의 내력, 공법, 수행 심지어 성품과 기호까지 파악해서 상세하게 기록해두었는데, 호언 도인이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많으면서도 전력에 대해서는 두 글자가 다였다.
‘불명(不明)!’
초대형 세력인 십방루가 ‘불명’이라는 두 글자로 평가한 이는 북한선역 전체에 10명을 넘지 않았다. 어떻게 보아도 평범한 수사는 아니라는 소리였다.
“금선이 나타나 한마디 했다고 움츠린다면, 오늘부터 십방루 명패는 내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를 쏘아본 육기가 서늘하게 비꼬았다.
“성급하게 행동하지 마시지요. 홀로 나타난 것을 보면 어떤 준비를 해왔을지 모릅니다. 상황을 지켜보다 상대가 곱게 물러나지 않는다면 우리 둘이 호언 도인의 실력을 알아보면 될 일입니다.”
흉터 사내는 나지막하게 전음을 보내 호언도인에 대한 십방루 내의 평가에 대해 알려주었다. 정보를 듣고도 육기는 상관없다는 표정이었으나 함부로 나서지는 않았다.
광장의 십방루 수사들도 강대한 기운을 노출하면서 등장한 호언 도인이 성괴문 편인 것을 알아차리고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아무리 십방루가 승기를 잡고 있다 해도 진정한 승부는 최고 전력들의 싸움에서 결론이 나기 마련이었다.
심지어 몇몇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눈치를 보아 먼저 자리를 뜰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광장 중앙에 붉은 여우 가면을 쓴 운예는 도포를 펄럭이며 고고하게 떠 있는 호언 노인을 아련하게 바라보다 온화하게 웃음 지었다.
“어쨌든 이제라도 와주었군요…….”
환희 속에 약간의 원망도 섞여 있었다. 그녀의 눈에 은색 호리병박 위의 호언 도인이 차차 흐릿해져 기억 속의 한 사람으로 변했다.
젊은 시절의 호언 도인이었다.
아직 음주에 깊이 빠져 있지 않던 그는 허리에 은색 호리병박과 붉은 장검을 차고 도인이라기보다는 풍류가 넘치는 검선처럼 하고 다녔다.
나중에는 주홍색 술병을 차고 다니고 붉은 장검은 대충 매고 다니게 되었지만 말이다.
감정 문제에 능하지 않던 그는 삼각관계에서 고뇌하다 백봉의가 사라지고 그도 회피하면서 운예만을 남겨두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혼자 기다리게 하다가 오늘은 피하지 않고 나타난 것이다. 옆에서 백봉의가 고공의 신영을 올려다보다 곁의 운예의 표정을 보고 미소를 머금었다.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감정의 매듭이 홀연히 풀린 기분이었다.
“호언 도주, 촉룡도가 십방루와 적으로 돌아서는 것을 감수하면서 이 일에 끼어든 것이라 여겨도 되겠습니까?”
검을 찬 사내는 앞으로 나서서 낭랑히 물었다.
“음지에서 음험한 짓거리나 하는 녀석들이 주제넘게 촉룡도를 언급하는 것이냐? 이 일에 끼어드는 것은 촉룡도가 아니라 노부 혼자서도 충분하다.”
호언 도인은 흉터 사내를 멸시하듯 바라보며 말했다.
흉터 사내가 백봉의 등을 협박하며 ‘주제넘은 것’이라 욕하는 소리를 들은 게 분명했다.
말을 마친 그는 허리의 술병을 풀어 입에 쏟아붓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시선이 백봉의에게 닿은 그는 눈썹을 끌어올리면서 의문이라는 듯 투덜거렸다.
“기억 속에는 더 컸던 것 같은데…….”
운예는 호언이 말하는 바를 짐작하고 얼굴을 굳히면서 코웃음 쳤다.
백봉의는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은 것이 불편한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고, 세 사람의 표정을 살핀 백소원은 영리한 소녀답게 뭔가를 짐작했다.
스승과 노조가 배신자, 겁쟁이라고 틈날 때마다 욕하던 자가 바로 호언 장로였던 것이다.
“나이는 좀 들어 보여도 그 새까만 사내 보다는 잘생기셨네……. 엇, 내가 왜 그 사람 생각을!”
백소원이 조그만 입으로 중얼거리다 갑자기 붉어진 뺨을 감쌌다.
“네가 저들더러 떠나지 못한다고 했느냐?”
호언 도인이 육기를 향해 서늘히 물었다. 그리고 거대 은색 호리병박이 급속도로 줄어들어 그의 손에 들렸다.
“싸우려거든 어서 덤빌 것이지, 무슨 말이 그리 많으냐!”
육기도 지지 않고 훌쩍 몸을 날려 호언 도인과 천여 장 거리를 두고 대치했다.
“허허, 급할 것 없다. 머릿수를 믿고 잘도 저들을 괴롭히던데, 노부에게도 햇볕 쐬기를 좋아하는 콩알들이 많아서 말이야.”
호언 노인은 수결을 맺으며 은색 호리병박을 뒤집었다. 그러자 누에콩 모양의 검은콩 알갱이들이 그 안에서 쏟아져 나와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촤아아악.
거의 천여 개쯤 되는 검은콩들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져 건장한 흑의 두병으로 변신했다.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큰 체격에 얼굴에 화염 문양이 새겨진 두병들은 전부 같은 색깔의 거대 도끼를 번쩍 들어 올렸다.
흉터 사내가 풀어 놓은 청갑졸병들 보다 호언도인의 흑의 두병들이 수는 적어도 발산하는 기운이 강하고 표정이 살아 있었다.
깜짝 놀란 흉터 사내는 바로 물러나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자신의 도병들은 흑의 두병에 비해 품질이 떨어졌을 뿐 아니라 이전의 전투로 손상을 입은 것들이 많았다.
게다가 금선이 두 명이라 우위를 점하던 것도 호언 도인의 합류로 의미가 없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