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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622화 (1,379/2,000)

1622화. 기우는 형세

*

말을 하는 사이 진한 안개 속으로 몸을 감춘 중란은 바람이 불어 안개가 걷힌 뒤에 감쪽같이 사라졌다.

진작 의식을 퍼트려둔 한립도 안개 속에 중란이 몸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팟!

다음 순간 한립의 등 뒤에서 검은 안개가 응결한 채 모양을 갖추기도 전에 검은 장도가 뻗어 나왔다. 한립의 조종에 중수진륜이 번득 뒤로 이동했다.

쨍!

검은 장도의 날카로운 칼날이 중수진륜의 투각 문양과 부딪쳐서 듣기 거슬리는 마찰음을 냈고 중란은 검은 안개 속에서 서서히 떠올라 냉소했다.

검은 안개는 아주 세밀한 바늘로 뭉쳐져 도신을 따라 중수진륜의 투각 문양을 통해 한립에게 쏘아져 나갔다.

일촉즉발의 순간, 한립은 동전 크기의 금색 비늘들을 겹겹이 세워 전신을 감쌌다.

채채채채채앵!

검은 바늘들은 한립이 금색 비늘에 충돌해 안개로 돌아갔다.

한립이 맹렬히 몸을 돌려 장검에서 푸른빛을 내뿜어 일격에 중란의 허리를 두 동강 내려 했다. 하지만 상대는 흐흐 웃으면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흠칫 놀란 한립은 둔광을 일으켜 수천 장 밖으로 벗어났지만 독사의 축축한 혀가 등에 닿은 듯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는 등의 물체를 떼어내려 서둘러 법결을 맺어 보호막의 빛을 강화했지만 검은 안개가 마치 애벌레들처럼 미친 듯이 꿈틀거리면서 그의 체내로 파고들려 했다.

푸른 거대 손을 응결해 검은 안개를 막고 보니 그 안에 함유된 미약한 법칙의 힘을 감지할 수 있었다.

너무 미세해서 어떤 종류의 법칙의 힘인지는 구분하기 어려웠으나 금색 비늘이 버티고 있어 몸속으로 스며드는 것은 막아냈다.

그때 검은 안개 주변 허공에서 중란이 나타났다.

훅!

검은 복면을 벗어 던진 그는 한립을 향해 입에서 검은 실을 뿜었다. 이에 한립은 푸른 장검으로 검은 실을 잘라내고 허공을 박차고 뒤쪽으로 피했다.

검은 실들이 다시 응결해 그가 원래 서 있던 곳을 공격하고 있었다.

“같은 수법이군요. 아까도 안 통했지만 지금도 통하지 않을 겁니다.”

한립의 말이 끝나고 이변이 발생했다.

검은 실이 뜻밖에도 그의 푸른 장검과 연결되어 있다가 검신을 타고 그의 손바닥으로 쏘아져 들어온 것이다. 손바닥이 뜨끔해 급히 체내를 살폈지만 몸에 다른 이상은 없었다.

그렇다고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바로 그 순간 몇몇 기운들이 이곳으로 날아오는 것을 느꼈는데 십방루 사람인지 아니면 성괴문 제자인지 알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한립은 손짓을 해서 푸른 장검과 중수진륜을 숨겼다. 다가오는 이들이 십방루 사람이든 성괴문 제자이든 일단 떠날 작정이었다.

누런 얼굴 거한의 신통이 심상치 않아서 모두가 지켜보는 곳에서 제 실력을 숨기다가는 크게 당할 것이다.

콰릉!

수결을 맺은 그의 손끝에서 은색 뇌전이 튀어나와 뇌전 진법을 이루고 그를 감쌌다. 한립이 번득 사라지자 그 자리에는 희미하게 타는 냄새만 남았다.

“흐흐, 재미있구나! 어디 한 번 놀아보자!”

입꼬리를 끌어올린 중란도 검은 안개에 둘러싸여 사라졌다.

* * *

본섬 광장.

성괴문의 거의 모든 괴뢰가 파괴당하고 참혹한 전투로 살아남은 제자의 수가 확 줄어서 포위망이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감탄할 만한 점은 성괴문 제자들이 한 명도 포기하거나 달아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초췌한 그들의 얼굴에 목숨을 걸고 종문을 지키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보였다.

그들은 핵심 제자들이 철수하고 종문과 존망을 함께 하겠다는 마음으로 남은 이들이었고, 둘째로 그들의 후인이나 가솔들이 철수한 인원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인과 가솔들은 무사할 테니 아무 걱정 없이 싸울 수 있었다.

반대로 십방루 수사들은 승기를 잡고 있으면서도 강렬한 저항으로 사상자가 많이 나오자 냉염 노조처럼 먼저 자리를 떠나는 이들이 나타났다.

이제 광장에 남은 수사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고 빽빽한 청갑 두병들 틈에 간간이 두세 명씩 보일 따름이었다.

십방루가 모집한 전투에 참여한 산수들도 죽음 직전에 몰리면 쥐라도 고양이를 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대치 상태가 이어지더라도 무리해서 진격하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흉터 사내가 던져 놓은 두병들이 성괴문 잔여 전력을 상대하는 주요 전력이 되어 선두에 서고 있었다.

성괴문 수사 중에는 하얀 의복이 핏빛으로 물들고 아름다운 얼굴에 핏물이 튄 백소원도 서 있었다.

그녀가 묻힌 핏물들은 대부분 십방루 수사의 것이거나 곁에서 부상을 당한 성괴문 제자들의 것이었지만 오른 팔뚝의 상처는 진짜였다.

십방루 수사 중 한 명에게 기습을 당해 찔린 상처였다. 원래 그녀의 심장을 노린 일격을 백봉의가 그녀에게 준 부적의 힘으로 피해서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마지막 법력 회복용 단약을 꺼내서 삼킨 백소원은 오히려 처음보다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조부인 백송석을 가장한 천마가 쫓는다거나 촉룡도 진급 시험에서 요수들과 싸운 경험은 정말 피와 살이 튀기는 이번 전투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천부적인 자질을 갖고 태어났고, 가문에서 대접을 받고 자란 백소원은 목숨을 건 이번 전투가 그간 그녀를 답답하게 했던 수련의 고비를 타파할 좋은 기회였다.

이번 위기만 넘기면 십여 년 내로 다음 경지로 넘어갈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문제는 살아남을 수 있느냐 였지만!

그녀의 시선이 고공으로 향했다.

만장 고공을 뒤덮은 먹구름에 드넓은 구멍이 나 있고, 그 안에 검기들이 헤집고 다니면서 귀청이 떨어질 듯한 폭음을 일으켰다.

구멍을 통해 불완전한 설련화가 서서히 돌면서 이파리마다 하얀빛을 별처럼 응결하는 것이 보였다.

거대하기 짝이 없는 검 그림자가 하얀 별빛과 부딪쳐 날카로운 소음을 냈다.

운예는 한 송이 연꽃처럼 첩첩이 쌓인 꽃 그림자 중앙에 서서 듣기만 해도 취할 것 같은 목소리로 주문을 위고 있었다.

수결을 맺은 그녀의 눈동자가 분홍빛으로 물들어갔다.

운예의 주문 외우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동안 설련화의 꽃술에서 맨발의 여인들이 수없이 날아올랐다.

구름 위에는 수백 명의 맨발 여인들이 아름다운 의복을 나풀거리면서 춤을 추거나 비파를 연주하는 그림이 펼쳐져 있었다.

범인이 그림을 보았다면 혼백이 몸을 떠나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 맨발 여인들의 자양분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펼쳐진 그림 전방에는 육기가 검 한 자루를 들고 서 있었다.

티끌 하나 묻지 않은 그의 의복과 날이 날카롭게 벼려진 검이 어우러져 신선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육기는 아름다운 운예의 얼굴을 보면서도 표정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곳에서 수천 리 떨어진 해역 위에는 산봉우리 크기의 구성금검이 휘황찬란하게 빛나며 흉터 사내를 향해 금빛 검 허상을 날리고 있었다.

“겨우 진선 두 명이 나를 이리 오래 붙들어 두다니 입만 산 자들은 아니었구나. 허나 이제 장난을 끝낼 때가 되었다.”

의복이 구겨진 흉터 사내가 비웃음을 날리며 커다란 검은 깃발을 불러냈다. 약간 찢어진 깃발에는 금실로 소용돌이 문양들이 수놓아져 있었고 둘레에는 고풍스러운 주술문자가 적혀 있었다.

촤라라라.

깃발이 맹렬히 흔들리며 펄럭였다.

주술문자에서 눈을 찌를 듯한 금빛이 쏟아져 나와 소용돌이를 형성하고 광풍을 유발했다. 구성금검의 검 허상들이 소용돌이에 끌려가 잡아먹히고 있었다.

인구는 기세가 약해진 거검을 불러들이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습니까?”

그가 뒤쪽을 향해 물었다.

“그럭저럭 버틸 만합니다. 수사께서도 휴식을 취하시지요.”

백봉의가 약간 창백한 얼굴로 가부좌를 풀었다.

그녀는 인구와 짜고 흉터 사내에게 고의로 허점을 보였다가 진짜로 금색 고리 법보에 왼쪽 어깨를 다쳤다. 부상이 심각하지는 않아도 선령력이 흩어져서 잠시 휴식을 취해야 했다.

다행히 인구가 호법을 서주어서 급히 단약을 복용하고 한숨을 돌릴 여유가 생겼다.

이때 그녀의 왼쪽 소매는 물론 가슴 위쪽까지 가루가 되어서 뽀얀 살결이 노출되었다.

인구와 자리를 바꾼 백봉의는 그가 단약을 두 개나 꺼내 삼키고 약효를 받아들이는 동안 흉터 사내와 대치했다.

코웃음을 치고 달려들려던 흉터 사내가 훽! 하고 고개를 돌려 성괴문 본섬을 쳐다보았다. 멈칫한 그는 검은 깃발을 회수해서 둔광을 일으켜 날아가 버렸다.

“쫓아야 합니다.”

그걸 본 백봉의가 인구를 기다릴 새도 없이 빠르게 그 뒤를 쫓았다. 그녀가 흉터 사내를 붙들어 두지 못하면 검을 찬 사내와 협공해 스승인 운예를 몰아붙일 것이 분명했다.

진선인 백봉의의 둔술은 금선에 비해 부족해서 흉터 사내가 먼저 검을 찬 사내 곁에 도착했다.

그는 하늘빛이 달라진 것에 경계의 눈빛을 보내며 검을 찬 사내의 눈빛이 심상치 않자 질책하듯 혀를 찼다.

쯧!

그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검을 찬 사내의 머리를 울렸다.

왼쪽 눈동자에 차차 스며들던 분홍빛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사내는 맑아진 눈으로 장검을 휘둘러 새하얀 검기를 날렸다.

강력한 공격을 준비하느라 방심한 사이 운예의 비술에 걸려 머금고 있던 검기는 지연된 시간만큼 더욱 강렬하게 발산되었다.

쿠아앙!

산봉우리가 통째로 날아올라 쇄도하는 것처럼 거대한 검기의 용이 운예를 향해 날아들었다. 설련화 허상 속의 운예는 내심 탄식했다.

평범한 금선경 수사였으면 그녀의 환녀비천도(幻女飛天圖)에 쥐도 새도 모르게 홀려서 지금쯤 목각인형처럼 굳어 있어야 했는데 상대의 의지가 너무 굳건했다.

검을 찬 사내는 비술에 걸려든 것을 깨닫자 가장 먼저 자신의 시각, 청각, 후각 등을 마비시켜서 의식을 보호했다.

그러던 중 흉터 사내가 나타나 구속을 풀어버렸으니 이제 불리한 것은 운예였다.

노랫말처럼 주문을 외는 운예의 앞으로 새하얀 검기의 용이 날아들었다.

그녀의 주변이 금빛으로 물들 때, 고공의 거대 그림 속 여인들이 다채로운 빛깔의 의복을 휘날리면서 금빛 갑옷으로 변하고, 연주하던 거문고와 비파 같은 악기들도 호리병이나 지팡이 같은 법기로 바뀌었다.

스스스슷.

불경 소리와 같은 웅장한 소리가 들리고 그림 속에서 찬란한 금빛이 터져 나왔다.

“법녀상천(法女翔天)! 참살만령(斬殺万靈)!”

눈동자가 짙은 금빛으로 물든 운예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금갑 여인들이 그림 속에서 날아올라 금빛 기류가 형성한 거대 진법 위에서 커다란 천녀 법상으로 응결했다.

운예와 비슷하게 생긴 천녀의 얼굴에는 매혹적인 인상이 부족했다. 손을 뻗어 금색 법검(法劍)을 만들어낸 천녀가 검을 찬 사내의 검기 용을 베었다.

휘이익!

금색 법검과 새하얀 검기들이 충돌해 먹구름은 은은한 금빛과 하얀빛으로 채워지고 사방팔방으로 미친 듯이 바람이 퍼져나갔다.

광장의 수사들은 하늘에서 벌어지는 굉장한 싸움에 속속들이 싸움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 위를 바라보았다.

잠시 대치하더니 새하얀 용은 금빛 법검을 뚫고 천녀 법상으로 달려들었다.

쿠르르릉.

뇌성이 울리고 천년 법상이 새하얀 용과 함께 부서져 내렸을 때 고공의 두루마리 그림도 부욱! 찢겨나가 양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운예는 목구멍에서 피가 넘어오는 것을 참고 찢어진 그림을 회수했다. 이때 백봉의가 그녀 곁에 도착해 걱정 어린 눈길을 보냈다.

“스승님, 괜찮으신지요?”

“난 괜찮다.”

쓴웃음을 짓는 운예의 말을 듣고 백봉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스승이 최선을 다한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성괴문은 정말 희망이 없었다.

차라리 결론이 나자 마음이 편해진 그녀는 입가의 잔잔한 미소를 띠고 스승을 응시했다.

“스승님, 소원이를 데리고 떠나주세요. ……제자 평생에 스승님 같은 분을 만난 것은 천운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아무 여한이 없습니다.”

운예가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달싹이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와 같이 광장으로 내려섰다. 고공의 검을 찬 사내는 다행이라는 얼굴로 흉터 사내를 돌아보았다.

“고맙습니다.”

“육기 수사, 중란은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것인지 갑자기 본섬을 떠났습니다. 벌써 제 의식 감응 범위를 벗어났군요.”

대수롭지 않게 손을 저은 흉터 사내가 화제를 돌렸다.

“그자는 수사가 데려온 것 아닙니까. 설마 마음을 달리 먹고 불완전한 선괴뢰를 훔쳐 달아난 것은 아니겠지요?”

“그건 아닐 겁니다. 대대로 괴뢰술에는 흥미가 없는 일맥에서 수련한 자니까요. 아마 딴 일에 정신이 팔렸을 겁니다. 어쨌든 일이 끝난 뒤에 제가 연락을 취해 선괴뢰는 돌려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성괴문부터 깨끗하게 쓸어버리고 계속 이야기하십시다.”

흉터 사내의 말에 육기가 냉담하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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