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0화. 금선 괴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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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맹 수사들은 듣게! 아무 상관도 없는 성괴문을 위해 지금까지 싸웠으면 할 도리를 다한 것 같은데, 설마 목숨까지 내주고야 말 텐가? 지금이라도 스스로 떠나는 자는 절대 막거나 공격하지 않겠네!”
흉터 사내의 목소리가 본섬 전역에 울렸다.
그 소리에 백봉의의 안색이 변했고, 남아 있던 무상맹 수사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고민에 들어갔다.
처음 약속대로 그들은 본섬 주위의 작은 섬들을 지키라는 임무를 수행하긴 했지만 어찌할 수 없는 요인으로 인해 실패했다.
함께 왔던 일행 중 일부가 달아난 것인지 적에게 당한 것인지 모르는 때에 계속 남아서 성괴문을 지키다가는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
성괴문이 약속한 보수가 적지 않지만 목숨보다 중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갈팡질팡할 때 머릿속에 운예의 목소리가 울렸다.
“성괴문이 지급하기로 한 보수는 내 저물탁 속에 있네. 원래 보상의 무려 두 배이지! 남아서 계속 성괴문을 지키는 것을 돕는다면 이 보상이 모두 수사들의 것일세.”
몇몇 무상맹 수사들은 욕심으로 눈빛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리고 운예에게 전음을 보냈다.
“인삼 대인, 보수가 아무리 많아도 살아 있어야 누릴 것 아닙니까?”
“조급해 말게. 나도 자네들이 이곳에서 전사하게 두고 보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때가 되면 퇴각명령을 내릴 테지만, 그 전에 임의로 전장을 이탈한다면 후에 어떤 처분이 떨어질지는 잘 알고 있을 테지?”
운예는 차갑게 경고했다. 명백한 당근과 채찍에 무상맹 수사들은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쿠르르…….
그 순간 성괴문 광장 대전 뒤로 땅이 꺼질 듯한 진동이 울리고 새하얀 빛기둥이 치솟았다.
“으하하, 중란 수사가 성공했나 봅니다.”
흉터 사내가 웃음을 흘렸고 육기도 희색을 드러냈다. 성괴문 수사들은 안색이 급변해서 눈을 부릅떴다.
“이런 낭패가! 금지에 일이 생겼습니다. 장로를 다섯 명이나 남겨두었건만…….”
백봉의도 표정이 확 달라져서 중얼거렸다.
“문중의 보물들은 거의 옮겨 두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금지에 무엇이 있었던 것이냐.”
“금지에는, 성괴문 최고의 보물인 금선급 선괴뢰가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뭐라? 그런 보물이 있었으면 어찌 진작 발동하지 않고!”
“아주 오래전부터 성괴문에 전해 내려오던 이 선괴뢰는 적당한 핵심을 구하지 못해 온전하지가 못합니다. 문주와 융합해야 금선 중기의 힘을 발휘해서 사용하지 않을 때는 금지의 샘에서 보양하곤 했지요.”
백봉의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광장 대전 뒤쪽으로 일고여덟 개의 새하얀 빛기둥이 동시에 치솟았다.
“큰일입니다! 금지를 지키는 진법 금제가 곧 파훼될 것입니다!”
다급하게 외친 백봉의는 둔광을 일으키려다 운예에게 붙들렸다.
“차분하게 생각하거라! 너는 광장에 남아 지휘를 해야지. 네가 가버리면 성괴문 수사들의 사기가 꺾여 단 한 번의 공격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운예의 충고에 마음을 가라앉힌 백봉의가 몸을 돌려 성괴문 장로들에게 분부를 내렸다.
“우 장로, 부 장로, 서 장로. 세 분께서 속히 금지로 가서 지원을 해주셔야 하겠습니다.”
운예는 한립과 웅산을 번갈아 보다가 한 명을 선택했다.
“교십오, 자네가 가서 도움을 주게.”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고 성괴문 장로 셋과 함께 날아올랐다.
“인구, 자네는 백 부문주를 도와서 최선을 다해 흉터 사내를 막아주게. 나는 비술을 사용해 나머지 한 명을 맡지.”
운예는 웅산에게도 명령을 내렸다.
“흐흐……. 육기 수사, 슬슬 마무리를 지어도 되겠습니다.”
광장에서 진선 네 명이 떠나는 것을 본 흉터 사내가 허공에서 검을 찬 사내에게 말을 건넨 후, 십방루 수사들과 집결한 청갑 졸병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승리가 코앞에 있다! 전부 죽여라!”
금선의 명령에 광장 바깥에서 엄청난 함성과 함께 십방루 전력이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 * *
광장 대전 뒤쪽의 산골짜기 안에서 쾅쾅 굉음이 연달아 울렸다.
한립 등 네 명의 수사들은 멀리서 여덟 줄기의 새하얀 빛기둥이 하늘을 뚫고 올라가 소용돌이치는 것을 보았다.
“제길, 금지의 진법이 뚫렸습니다. 적들이 이미 안으로 들어갔을지도 모릅니다.”
수염과 머리가 모두 하얗게 센 성괴문 장로가 근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서두르시죠! 우리도 어서 골짜기 안으로 진입해야 합니다.”
연이어 또 다른 청포 노인이 급히 외치자 네 사람은 몸을 날려 골짜기로 향했다.
바위가 무너지고 물길이 끊긴 사이사이로 부러진 나무와 흙더미 속에 성괴문 제자들과 장로들의 시체가 파묻혀 있었다.
“노 장로……!”
선두에서 날아가던 청포 노인이 지인의 시체를 발견하고 절절하게 외쳤다. 풍채 좋고 인자하게 생긴 노인이 누군가의 은색 장검에 꽂혀 절벽 바위에 매달려 있었다.
청포 노인과는 오랜 세월 친분이 두터웠던 벗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멈추지 않고 빛기둥이 솟아오르는 곳으로 날아갔다.
잠시 후 골짜기 끝에 다다른 그들 앞에 은색 폭포가 시야를 가렸다. 폭포에서 튀는 물방울들이 햇빛을 받아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들어냈다.
폭포 아래 형성된 꽤 넓은 암녹색 호수 중앙에는 팔각형 백석(白石) 제단이 우뚝 솟아 위로 여덟 줄기의 빛기둥을 쏘아 올리고 있었다.
호수 주변 땅에서 피범벅이 된 키 큰 노인과 팔이 여덟 개 달린 흑갑(黑甲) 괴뢰가 십방루 수사 셋의 포위 공격을 받으면서 아슬아슬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들 주위로 십여 구의 성괴문 수사들의 시체와 괴뢰들의 잔해가 쌓여있어 참혹하기 짝이 없었다.
십방루 수사 중 우람한 체구의 사내가 진선경 수행을 지닌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둘은 대승기 밖에 되지 않았다.
그들은 성괴문에서 진선 네 명이 날아오자 화들짝 놀라 힐끗 고공의 소용돌이를 살폈다. 청포 장로가 분노로 눈을 치켜뜨고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상대는 핏빛 창으로 청포 장로의 목을 베어 들어가면서 기괴한 수결을 맺어 전신에서 둔광을 일으켰다.
“어딜 달아나려고! 꿈 깨거라!”
노호성을 터트린 청포 장로가 장검으로 창을 쳐내고 적의 머리를 노렸다.
장검이 목을 벤 순간, 청포 노인이 다른 손으로 불길을 내뿜어 원영도 달아나지 못하게 불살랐다.
이에 나머지 두 십방루 수사도 지체하지 않고 둔광을 일으켜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대승기 수사는 백 장을 못 가서 새하얀 거대 사자 괴뢰에게 깔렸지만 유일한 진선인 사내는 어스름한 하얀빛으로 몸을 감싸고 주먹으로 달려드는 성괴문 장로를 쳐낸 다음 산골짜기 밖으로 빠져나갔다.
모두 그 뒤를 쫓으려는데 힘겹게 버티고 있던 키 큰 노인이 비틀거리면서 쓰러졌다. 번득 이동해서 노인을 부축한 한립은 우람한 진선 사내가 달아난 방향을 묘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키 큰 노인은 전신에 상처를 입었고 계속해서 피를 흘렸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돌볼 새도 없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고공의 소용돌이를 가리키며 외쳤다.
“어, 어서 가서 막아야 합니다……! 금지 안에 한 명이 더 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성괴문 장로 셋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청포 노인은 성큼성큼 걸어가 거대 사자 괴뢰가 붙들고 있는 적의 머리를 검으로 베어버리고 원영조차 산산조각낸 후에 키 큰 노인에게 돌아와 단약을 먹여 주었다.
단약을 삼킨 키 큰 노인은 의식을 잃고 축 늘어졌고 만신창이가 된 팔비(八臂) 흑갑 괴뢰도 털썩 그 옆에 쓰러져 사지가 분해되었다.
“무상맹 수사께서 수고스럽지만 달아난 자를 추격해 주셔야겠습니다. 꼭 죽여주실 필요는 없고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만 해주시면 됩니다.”
청포 노인이 머뭇거리다 한립에게 말했다. 성괴문 장로들이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안 한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보물이 있는 금지에 외부인을 들이는 것을 꺼리는 것이 분명했다.
“알겠습니다.”
한립은 대답을 마치고 곧장 휙! 하고 사라졌다.
“방 장로를 지키게 설사자(雪獅子) 괴뢰를 남겨두고 우리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청포 노인은 진중한 얼굴로 다른 두 장로에게 말하고 펄쩍 뛰어올랐다. 성괴문 세 장로가 고공의 소용돌이로 진입할 때, 한립은 골짜기 밖으로 나서자마자 멈춰 섰다.
저공에서 의식을 퍼트린 그는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리고 방향을 틀어 숲 어딘가로 날아갔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수풀 공터에 착지한 한립은 수백 장 밖의 거목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서 기다리다 금지에서 승부가 나면 몰래 돌아가 쓸 만한 것들을 챙겨갈 생각이셨나 봅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거목 뒤에서 우람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허허, 맞습니다. 그렇다고 수사 홀로 저를 쫓아오시다니 어리석으십니다.”
사내의 두 주먹에서 광채가 번득이자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그의 체구가 거대해졌다.
“제가 홀로 쫓아오지 않았다면 당신이 이렇게 쉽게 모습을 드러냈을까요?”
한립도 씩 미소를 짓고는 주먹을 쥐고 상대를 주시했다.
“어디 한번 붙어 봅시다!”
우람한 사내는 화살처럼 튀어나와서 주먹으로 허공을 갈겼다.
가슴과 배에 일곱 개의 남색 별 무늬가 반짝반짝 빛나고 팔뚝이 두 배로 커져 주먹이 일으킨 파문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였다.
슬쩍 눈썹을 끌어올린 한립은 금색 비늘이 일어난 주먹을 뻗었다.
쿠앙!
두 사람 사이에 폭발적으로 돌풍이 퍼져나가 커다란 거목들이 힘없이 꺾이고 말았다.
열댓 걸음을 물러나고서야 겨우 멈춘 우람한 사내는 놀란 눈빛으로 꿈쩍도 하지 않고 서 있는 한립을 바라보았다.
“당신도 현선이었단 말입니까!”
“하하, 그게 이상한가요?”
“어쩐지 여유롭게 육탄전에 응한다 했습니다. 제가 방심했군요.”
우람한 사내의 눈빛이 흔들렸다. 현선은 동급 수사와 싸울 때 확실히 유리했지만 똑같은 현선 수사라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주먹에 힘을 다 실은 것 같지 않던데 어디 최선을 다해보시지요?”
“원하신다면 그래 보겠습니다.”
한립의 도발에도 우람한 사내는 이전보다 누그러진 말투로 답했다.
그의 가슴과 배에 7개의 남색 별 무늬가 반짝이고 두 어깨와 팔뚝 그리고 등허리 등에 더 많은 남색 빛이 들어왔다. 얼핏 봐도 앞쪽에서 남색 빛이 열여덟 군데 이상에서 반짝였다.
이제 한립이 놀랄 차례였다.
미간을 좁힌 그는 이번에는 앞으로 성큼 나서면서 먼저 금빛 비늘을 일으켜 자신의 남색 별빛 7개가 떠오르게 했다.
“저건 소북두성원공…….”
우람한 사내는 그 즉시 한립이 수련한 공법을 알아보고 주먹을 뻗었다.
쿠르릉!
두 주먹이 맞닿았을 뿐인데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강력한 기파의 흐름으로 수풀의 나무들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한립과 우람한 사내는 뒤로 튕겨 나가면서 지면에 깊은 발자국을 남겼다.
“계속 싸우시겠습니까?”
한립은 펄쩍 뛰어올라 허공에서 우람한 사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람한 사내는 어느새 눈앞에 떠서 무시무시한 법칙 파동을 방출하는 검은 고리를 지켜보느라 꼼짝도 하지 못했다.
천천히 고개를 든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주먹을 거두었다.
“대체 누구십니까? 어떻게 소북두성원공을 수련한 것이지요?”
“하하, 제게 먼저 답을 주시지요. 당신의 소북두성원공은 어떻게 그렇게 많은 현규를 뚫을 수 있는 것입니까?”
“……저를 어찌하실 생각이신지요.”
우람한 사내는 한립과 똑같이 바로 답하지 않고 질문을 했다.
“제가 어찌했으면 좋겠습니까, 냉염 수사?”
웃음기를 거둔 한립이 전음으로 물었다. 몸을 떤 우람한 사내는 불가사의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한참 쳐다보다 떠보듯 전음을 보냈다.
“한립 수사?”
“제 신분을 이렇게 빨리 짐작해내시고 역시 냉염 수사십니다.”
“하아,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소북두성원공은 제가 선역의 상고 유적에서 운 좋게 구한 것이라 다른 수사가 이것을 익혔을 가능성은 극히 드뭅니다. 게다가 어쩐지 수사에게 익숙한 느낌이 들더군요. 그나저나 비승한 뒤로 벌써 진선 중기에 이르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수련 속도입니다.”
“뭐, 행운과 인연이 따르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다른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제 질문에 답을 주셨으면 좋겠군요. 냉염 수사께서는 현규를 어찌 그리 많이 응결하신 겁니까?”
한립은 여기서 냉염과 옛이야기를 하며 회포를 풀 생각이 없었기에 다시 궁금한 점을 물었다. 안색이 미미하게 달라진 냉염노조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영리하신 분이 잘못된 선택을 하지는 않으리라 믿습니다. 예전에 이미 제 의식의 힘이 얼마나 강대한지 아셨을 텐데, 제가 추혼술을 펼치기 위해 싸움을 계속하게 만들지 마시지요.”
한립은 무표정한 얼굴로 협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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