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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619화 (1,376/2,000)

1619화. 의혹을 풀다

*

잠시 여유를 되찾은 백소원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성괴문 장로와 제자들 대부분이 중상을 입거나 전사해서 이대로 가다가는 광장에 있는 수사들은 전멸할 것이었다.

백소원은 어두운 얼굴로 꿋꿋하게 쥐고 있던 부적에 법력을 불어넣었다.

파아앗.

찰나의 순간 금빛에 휩싸인 그녀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윽!”

그런데 거의 동시에 멀지 않은 곳에서 쾅! 하는 폭음과 함께 금색 보호막에 든 백소원이 튕겨 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에 닿자마자 재빨리 몸을 돌려 일어나 금실이 수놓아진 하얀 천으로 몸을 감싼 그녀는 경악한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십방루 수사들조차 광장 절반을 가로막은 빛의 장막을 보고 놀라고 있었다.

‘대체 누가 언제 이런 장막을 펼쳐 두었단 말인가?’

“으하하……. 어린놈들이 미인을 귀히 대할 줄 모르는구나! 저 여인은 노부의 것이니 손끝 하나 대지 말거라!”

듣기 싫은 웃음소리의 주인은 검은 피풍의를 두르고 얼굴에 눈이 하나뿐인 노인이었다.

진선경 수사의 등장에 수사들은 식겁해 물러났다. 기껏해야 대승기 밖에 안 된 자들이 진선과 경쟁할 수는 없었다.

“월화지체라, 보기 드문 체질이지! 노부와 쌍수 공법을 익히기 딱 좋은 체질이기도 하고 말이야…….”

노인은 턱을 쓸면서 음흉한 눈빛으로 백소원을 아래위로 훑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진 백소원은 바르르 떨면서도 하얀 천을 단단히 붙들고 놓지 않았다.

“호오, 반항이라도 해보겠다? 그것도 재미있겠는데?”

혀로 입술을 할짝거린 노인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회색 부적이 날아가 백소원의 이마에 딱 달라붙자 그녀는 뻣뻣하게 굳어 꼼짝하지 못했다.

콰릉!

뜻밖의 수확에 외눈 노인이 즐겁게 백소원의 옷깃을 잡아채려는데 고공에서 돌연 천둥소리가 들리고 금빛 찬란한 비검이 내리꽂혔다.

쾅!

노인이 겹겹이 펼쳐놓은 금제가 비검에 뚫려 깨져나갔다.

“누구냐!”

깜짝 놀라 손을 거둔 외눈 노인은 십방루 수사 십여 명과 청갑 졸병 십여 명과 충돌하면서 뒤로 밀려나다 겨우 멈추었다.

쩡!

바닥에 검신 아홉 개가 박혀 반짝였고, 그 위로 별똥별처럼 인구와 한립이 떨어져 내려 백소원 앞에 섰다.

노인은 자신과 엇비슷한 수행의 진선경 수사가 둘이나 나타나자 흠칫 놀라 둔광을 일으켜 달아났다.

“흥, 빨리도 도망가는구나!”

구성금검을 뽑아 올린 인구는 코웃음을 치면서도 외눈 노인을 쫓지는 않았다.

운예는 육기와 고공에서 싸우면서도 본섬 상황에 촉각을 세우다 광장이 위기에 처하자 비술로 인구에게 전음을 보내 인십칠을 보호하라 통지했다.

안 그래도 한립과 본섬으로 오던 인구는 그 소리에 인십칠의 신분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날아와 그녀를 구했다.

한립은 진작 백소원을 알아보았고 인삼이 촉룡도 13금선 도주 운예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백소원이 빈약한 수행으로 이곳에 온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쓸자 푸른빛이 흘러 은색 부적이 떨어졌다. 백소원은 몸을 떨며 휘청이다 몸을 가누고 두 사람을 향해 예를 취했다.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

한립과 인구는 담담히 손을 젓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십방루 수사들은 진선인 그들에게 달려들지 않았지만 청갑 졸병들은 두병이라 분별없이 몰려들었다. 이에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청갑 졸병들과 싸워야 했다.

성괴문 수사들을 제거한 백여 명의 청갑 졸병들이 한립과 인구를 에워싸고 검, 창, 도끼 등을 열심히 휘둘렀다.

두 손에 금빛 비늘을 일으킨 한립은 미끄러지듯 청갑 졸병들 사이를 쏘다니면서 퍼퍼퍼퍽! 주먹질했다.

청갑 졸병들이 아무리 병장기를 날려도 그의 몸에는 작은 상처 하나 남지 않았다. 그러나 금색 주먹 허상에 닿은 졸병들은 팍팍 잘도 터져나갔다.

한립은 청갑 두병들을 마구잡이로 죽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연구 중이었다. 실력은 이전에 보았던 황건 두병들보다 못해도 훨씬 빠르고 행동이 민첩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심지어 다른 두병이 터져 날아간 파편들을 대부분 피해내고 있었다. 생명력도 강해서 청갑 졸병들은 완전히 부서지거나 목이 베이지 않으면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두병들을 제거하면서 의식을 퍼트린 한립은 모두(母豆) 두병이 보이지 않는 것에 아쉬워졌다.

약 한 시진 뒤, 광장의 인원은 오히려 늘어있었다. 본섬 전역에서 아군 적군할 것 없이 전부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쿵쿵쿵…….

커다란 무사 괴뢰가 청갑 졸병들을 짓밟으면서 본섬을 가로질러 광장으로 달려왔다. 오는 길이 그리 평탄하지 않았는지 거대한 꼭두각시의 몸에 구멍과 상처가 상당했다.

대형 괴뢰의 출현에 백여 명의 청갑 졸병들이 몰려들어서 번뜩이는 병장기들을 힘껏 휘둘렀다.

파삭!

그리 강력한 공격들은 아니었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힘이 다한 무사 괴뢰의 허벅지가 버티지 못하고 절단되었다.

방대한 무사 괴뢰가 쓰러지면서 커다란 머리가 데굴데굴 떨어져나와 광장을 덮치자 수사들이 둔광을 일으켜 양옆으로 날아올랐다.

운이 좋은 이들은 제때 피했으나 나머지는 깔리고 말아 선혈이 낭자했다.

괴뢰 머리가 멈출 생각도 하지 않고 계속 굴러오자 한립은 몸을 날려 소매 속에서 하얀빛을 쏘았다.

쿵!

아무도 멈추지 못하던 커다란 머리가 광장 깊숙이 박혔다. 괴뢰 머리 위의 원탑에서 숨이 끊긴 지 오래인 성괴문 수사들과 괴뢰들이 굴러 떨어졌다.

빠르게 시체들을 훑던 한립은 재빨리 무너진 원탑 잔해에서 제형을 끄집어냈다.

종잇장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린 제형은 구멍이란 구멍에서 전부 피를 흘렸으나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대형 무사 괴뢰를 조종하느라 과도하게 법력을 소모해서 이런 참혹한 꼴이 된 듯했다. 한립은 누런 단약을 그의 입속에 넣어주고 푸른빛을 일으킨 손바닥으로 가슴을 탁탁 쳐서 약성이 빠르게 돌도록 도왔다.

그가 제형을 내려놓자 성괴문 장로들과 제자 몇이 다가와 그를 둘러싸고 ‘제 장로’를 외쳐댔다.

한립을 고개를 돌려 인구와 약속이라도 한 듯 본섬의 전황을 살폈다.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을 만큼 대세는 기울어 있었다.

십방루 수사들은 대량의 두병 덕에 수적으로 우세했고, 성괴문 대형 괴뢰 여덟 마리도 거의 끝장이라고 봐야 했다.

성괴문 진선 수사들은 부상을 입거나 죽은 자가 반수가 넘었고, 무상맹에서 지원을 나온 수사들은 벌써 몇 명이 내뺐는지 보이지 않았다.

달리 말해, 성괴문이 아직 숨겨둔 한 수가 있거나 아니면 고공에서 벌어지는 금선끼리의 전투에서 승기를 잡지 못하면 패배한다는 뜻이었다.

쿠아아앙!

이때 고공에서 황토색 광채가 터져 강풍과 함께 수백 리를 휩쓸었다. 하얀 신영이 고공에서 수직으로 추락해 광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뒤로 물빛 신영이 바짝 따라붙어 안타까운 얼굴로 하얀 신영을 구해냈다.

하얀 신영은 백봉의와 함께 싸우던 괴뢰 도사였고, 조금 전 그녀 대신 흉터 사내의 치명적인 일격을 맞고 떨어져 내린 것이었다.

한립이 보니, 괴뢰 도사는 가슴이 뻥 뚫려 더는 어떤 영력 흐름도 감지되지 않았다. 눈빛이 어두워진 백봉의가 마음을 추스르고 백소원 쪽으로 다가갔다.

머뭇거리던 백소원도 그녀를 향해 가고 있었다. 한립은 그걸 보고 둘 사이에 무언가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다치진 않았느냐?”

“맹의 두 수사께서 구해주셔서 괜찮습니다.”

백봉의의 물음에 백소원이 인구와 한립 방향을 눈짓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 말에 백봉의가 한립과 인구를 보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립은 이제 백소원과 성괴문 부문주가 깊게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려비우…….”

바로 그 순간 한립의 머리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다.

흠칫 놀란 그는 소리 없이 고개를 돌려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 앉은 제형을 발견했다.

“제가 전음을 보낸 것이 맞으니 그리 볼 것 없습니다.”

“……나를 압니까?”

한립도 전음으로 물었다.

“당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위력적인 검은 고리 법보는 알아보겠더군요. 현빙산맥에서 그것 때문에 곤욕을 치른 적이 있으니까요. 당신에게 육신이 훼멸 당해 원영으로 도망친 사람이 접니다.”

“아, 어쩐지 낯설지 않다고 했더니 당신이었군요! 그날의 복수라도 하고자 하십니까?”

“그런 일을 당했으면 당연히 갚아줘야겠지만……. 우리 성괴문을 도와 적을 막아주고 있고, 제 목숨까지 구해준 상대를 어찌 원수로 치부할 수 있겠습니까! 더는 수사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지금 제 수행에 당신을 상대로 복수가 가당키나 하겠는지요.”

제형은 쓴웃음을 흘렸다.

“내가 성괴문을 지키는 것은 보수를 받기 위해 임무를 수행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나중이라도 복수하고 싶다면 찾아오십시오. 그런데 그때는 왜 촉룡도 제자를 납치하려 한 것입니까?”

“아……. 그건 정말로 오해십니다. 그 여제자는 우리 부문주님의 직계 후손으로 저는 명을 받아 그녀를 성괴문으로 데려가려 했을 뿐입니다. 그러다 그만…….”

“그랬으면 광명정대하게 그녀를 초대했으면 될 일이지 왜 수상하게 일을 꾸며 오해를 산 것입니까?”

“부문주께서 은밀히 데려와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셨기에 그리 한 것이고 정확한 연유는 저도 모릅니다.”

제형의 해명을 들은 한립은 할 말을 잃었다. 겨우 사소한 오해 때문에 자신이 제형의 육신을 멸했다니 황당한 일이었다.

“귀 문의 부문주께서 백 가란 말입니까? 그렇다면 이름이…….”

“백봉의.”

제형의 전음에 모든 의혹이 해소된 한립은 남색 궁장 여인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그녀가 백 가의 선조이자 촉룡도에서 실종된 지 오래인 천재 제자 백봉의였다.

콰쾅!

고공에서 굉음이 울리고 빛줄기가 떨어져 광장에 내려섰다. 빛 속에서 나타난 운예는 한쪽 어깨의 의복이 찢겨나가 새하얀 피부가 드러나 있었다.

백봉의과 백소원이 그녀를 보고 서둘러 다가갔다.

“스승님, 괜찮으십니까?”

백소원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스승의 안부를 살폈다.

“괜찮다. 또 다른 자가 끼어들어 기습을 당했을 뿐 크게 다친 것은 아니야.”

“전부 제자의 탓입니다. 그자를 붙들고 있지도 못하다니…….”

운예의 말에 백봉의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본섬의 국면이 이리되었으니 우리 두 사람이 저들을 붙들고 시간을 끌어봐야 의미 없는 일이다.”

“성괴문 본섬 자체가 거대한 기관진법입니다. 되돌릴 수 없는 지경이 되면 기관을 발동해 본섬 전체가 바다로 가라앉는 한이 있더라도 저 사악한 자들이 어떤 이득도 취할 수 없게 할 것입니다.”

얼굴을 굳힌 백봉의는 서늘하게 다짐했다.

“하아……. 그 겁쟁이가 나와 같이 와주기만 했어도 우리가 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말 바보 멍청이지. 그 나이를 먹도록 뱃속에 겁만 가득차 아직도 옛일에 연연해서는.”

운예의 원망 어린 말에 뜻밖에도 백봉의가 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에 스승님께서 속내를 드러내시니 기쁩니다. 제가 떠나면 스승님과 그분 간의 서먹함이 해소되리라 여겼는데 아직까지 이러실 줄은…….”

“결코, 네 잘못이 아닌 일을 너 홀로 감당하게 했구나. 오늘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 너희 두 사람을 안전하게 지켜낼 것이다.”

운예가 단호하게 선언했다.

“오랜 세월 성괴문에 입은 은혜가 산처럼 쌓였고, 문주께서 저를 돌봐주신 것을 생각하면 이런 때에 홀로 떠날 수는 없습니다. 스승님께서 소원이를 데리고 가주시지요. 늦었지만 아이를 만나보았으니 저는 여한이 없습니다.”

“노조님…….”

백봉의의 말을 듣고 백소원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융기와 흉터 사내가 고공에서 내려와 허공에서 냉랭하게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쌍방의 최고전력들이 등장하자 치열하게 싸우던 수사들이 공격을 멈추었다.

남은 성괴문 수사들은 백봉의를 중심으로 몰려들었고, 십방루 수사들도 청갑 졸병들과 합류해 광장을 겹겹이 포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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