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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618화 (1,375/2,000)

1618화. 도움

*

잠시 기력을 회복한 한립은 눈을 뜨고 마른 노인의 시체를 뒤적거렸다. 의복 안쪽에서 기다란 청록색 옥함과 푸른 호랑이머리 가면이 나왔다.

금색과 보라색 부적들을 떼어내고 옥함을 열어보니 보라색 꽃이 뿌리까지 온전하게 담겨 있었다.

“역시 도령화였군! 아직 부족하긴 하지만 금방 키울 수 있겠어.”

도령화는 법칙의 힘을 품은 귀한 물건이라서 꽃은커녕 종자를 구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런데 임무 중에 우연히 구할 수 있어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이것만 아니었으면 성괴문 수호 임무 중에 적이 달아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옥함을 닫아 봉인 부적을 원래대로 붙여 놓고 따로 금색 부적 두 장을 더 꺼내 봉해 품에 넣었다.

푸른 호랑이 머리 가면에는 십일(十一)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백소원과 숫자가 같은 것으로 보아 고운대륙 인근 수사는 아닌 듯했다.

그는 가면을 부숴버리려다 입꼬리를 들썩이고는 그냥 챙겨두었다. 마른 노인의 저물탁과 살구빛 깃발까지 거둔 그는 섬 쪽으로 날아갔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섬 주변의 전투는 아직도 한창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십방루에서 대승기 수사 십여 명이 더 지원을 나와 성괴문 제자들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멀리서 그걸 보고 있던 한립은 곧장 전장으로 뛰어들어 십여 명의 대승기 수사들을 격살해 나머지 적들이 정신없이 달아나도록 만들었다.

종문을 위해 싸우다 죽는 줄 알았던 성괴문 제자들은 한립이 적을 싹 쓸어버리자 기뻐하며 더욱 용감하게 십방루 수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무사 괴뢰 머리 위로 돌아간 한립은 두리번거리다 인구가 돌아오는 길에 십방루 수사 몇 명을 참살하고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의복이 너덜너덜한 게 쫓아간 홍의 여인과의 전투가 쉽지 않았던 것 같았다.

“아주 신통이 다채로운 여자라, 한참 싸우고도 육신만 없애고 원영은 달아나게 두고 말았습니다.”

인구가 한숨을 푹 쉬고 아쉽다는 표정을 했다.

“하하, 신통이 다채로운 만큼 지닌 보물도 상당했을 테지요. 한몫 단단히 챙기셨겠습니다.”

“뭐 이것저것 챙기기는 했는데 그리 값나가는 물건은 없었습니다.”

한립의 웃음기 띤 물음에 인구도 마주 웃음 지었다. 그들이 잠시 이야기를 하는 사이 동쪽 해역에서 쿵! 하는 굉음이 전해졌다.

본섬 쪽 다색 보호막이 흔들거리다가 빛으로 흩어졌고 그들의 밑에 눈부신 하얀빛을 방출하던 원탑도 빛이 어둑해졌다.

“십방루가 준비를 단단히 하고 쳐들어 왔습니다. 이곳은 지켰지만 다른 섬들이 당했군요.”

“확실히 형세가 그리 좋지는 않아 보입니다.”

인구의 말에 한립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인구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면서 말을 하다 말았다.

“우리가 맡은 임무는 이곳을 지키는 것이고, 아직 다른 지침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허허,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야 고용되어 일하는 것뿐이니 시키는 대로만 하면 그만이지요. 여기서 상황이 어찌 돌아가나 지켜나 보지요.”

한립의 담담한 말에 인구가 웃음을 터트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본섬 다색 금제가 흩어지자 십방루 수사들이 전의를 불태우며 삼삼오오 모여 본섬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성괴문의 기반이 되는 본섬에 먼저 도착해야 이득을 선점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짧은 적막이 지나고 본섬은 함성과 교전 소리로 가득 찼다.

본섬 상공에서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충돌음이 들리고 곳곳에서 오색찬란한 빛이 터져 섬이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전력이 고르게 분포된 것이 아니라 십방루 수사들이 몰려든 지역은 방어선이 뚫려 적들이 분분히 본섬으로 내려섰다.

숲 곳곳에서 퍼펑! 하는 소리가 울리고, 숨겨진 기관이 발동해 맹수 형태의 괴수들이 튀어나와 침입자들과 격전을 펼쳤다.

먹구름 속의 검은 전함도 아래쪽으로 하강하는 중이었다.

그들과 맞붙은 기관 선박들은 방어력이 비교적 약하고 공격 수단도 하나뿐이라 겨우 검은 전함 두 대를 추락시키고 망가지고 말았다.

촤랑!

두 대의 검은 전함이 본섬 근처로 내려왔을 때 아래로 콸콸 흘러내리던 물길에서 십여 개의 더없이 굵은 검은 사슬이 튀어나와 전함을 공격했다.

전함의 보호막을 묵직하게 관통한 사슬은 전함으로 파고들었다.

쿠콰쾅!

남색 빛을 반짝이는 사슬에서 조밀하게 주술문자들이 일어나 거대한 강과 일체가 되어 전함을 조각냈다.

그와 멀지 않은 곳에서 자라와 거북 괴뢰들이 떠올라 박살 난 선박에서 빠져나온 십방루 수사들을 향해 남색 빛기둥을 분출했다.

본섬 전역은 혼전으로 접어들었고 고공에서 교전하던 성괴문 수사들까지 분분히 내려와 전투에 합류했다.

광장에서는 수십 명의 십방루 수사들이 진선경 수사들의 지휘를 받아 성괴문 수사들과 근접전을 펼치고 있었다.

수행이 낮은 백소원은 후방에 숨어 은백색 장검과 스승 운예가 준 부적을 쥐고 수시로 주변을 살폈다.

본섬에 남아있던 성괴문 수사들과 기관, 꼭두각시가 더해져 인원수에서 십방루 수사들을 월등히 초월했기에 승기는 다시 본토 세력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 * *

만장 고공, 쌍방 최고 전력들의 전투도 진행 중이었다.

허리에 검을 찬 사내는 의복을 펄럭이면서 허공에 떠서 주변 천장을 검빛이 가득한 검기의 늪으로 만들었고, 그 멀리에는 새하얀 설련화 허상들이 결집해서 진한 향기를 풍겼다.

검기가 난리를 치고 꽃 그림자들이 나부끼는 속에 바람 소리와 천둥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검을 찬 사내와 여우머리 가면 여인은 각자의 영역에서 엄청난 선령력을 쏟아붓고 있었다. 한쪽이라도 선령력이 고갈되면 적의 영역에 집어 삼켜질 것이다.

“수사께서는 성괴문 사람도 아니면서 이렇게 열심히 싸울 필요가 있습니까? 성괴문에서 얼마를 불렀는지 몰라도 우리 쪽에서 충분히 배상해드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만두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치고 따로 보수도 챙겨드리지요.”

사내는 한 손으로 검을 쥐고 검진을 단단히 유지하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하하, 검선께서 잘생기기만 한 게 아니라 기도와 풍류도 대단하시군요! 다른 보수는 필요 없고, 저와 좋은 시간을 보내시겠다면 성괴문이고 뭐고 개의치 않지요.”

운예는 가면을 쓰고서도 매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웃음을 흘렸다. 유혹하는 듯한 말을 하면서도 온 힘을 다해 설련화 허상을 지탱하는 중이었다.

“호의를 거절하겠다면 우리 둘 중 하나는 여기서 죽어야겠습니다.”

목소리가 차가워진 사내는 수결을 맺어 검기의 늪에서 검빛들이 용울음 소리와 같은 진동을 일으키게 했다.

채채채챙!

검빛들이 서로 응결해 다양한 색깔의 검기 교룡이 되어 운예를 향해 날아들었다.

솨하아아!

벌써 수결을 바꾼 운예의 설련화 허상들도 꽃잎을 바르르 떨면서 홍수처럼 검기 교룡을 향해 흘러들고 있었다.

그곳에서 만 리는 떨어진 곳, 검은 피풍의를 걸친 흉터 사내가 낄낄 웃어대면서 소매 속에서 노란 고리들을 분출했다.

회백색 도포를 입은 괴뢰 도사가 손에 든 불진으로 만 가닥에 이르는 새하얀 수정실을 쏘아 보내 노란 고리들을 막고 허리춤의 은색 호리병박을 풀어 높이 던졌다.

집채만 하게 커진 호리병박 표면의 무늬가 빛을 발한 뒤 안에서 은색 뇌전들이 빠져나와 흉터 사내를 향해 떨어졌다.

이때 도사 괴뢰 뒤로 백봉의의 남색 신형이 스치면서 두 소매 속에서 물빛의 장막을 뿜어 좌우에서 흉터 사내를 중앙으로 몰아넣었다.

흉터 사내는 긴장한 기색 없이 여유롭게 노란 구슬을 터트려 황토빛으로 커다란 보호막을 펼쳤다.

이에 물빛 장막과 은색 뇌전들이 황토빛에 막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때 백봉의의 안색은 약간 창백해 보였다. 흉터 사내의 실력은 그녀와 도사 괴뢰보다 강해 협공해서 공격을 쏟아부어도 이길 수가 없었다.

아래쪽 본섬 전투에서 다행히 성괴문 쪽이 우세해 자신과 스승이 금선 두 명을 붙들고 있기만 하면 시간을 끌 수 있을 듯했다.

“크큭, 어떻게 해서라도 우릴 붙들고 있을 생각이라면 안 통할 것이다.”

황토빛 속에서 흉터 사내가 유유히 외치고는 검푸른 마대 자루를 꺼냈다. 녹색실로 복(福)이라는 글자가 고어체로 새겨진 작은 마대 자루는 극히 평범해 보였다.

흉터 사내의 주문 외는 소리에 맞춰 마대 자루가 부풀어 올라 둥그렇게 변했고, 이상한 느낌을 받은 백봉의는 그를 막으려 서둘러 물빛 장막으로 공격을 가했다.

“가라!”

마대 자루 속에서 푸른 콩알들이 펑! 튀어나와 성괴문 본섬으로 쏟아져 내렸다.

콩알들은 바람을 타고 청갑(靑甲) 졸병들로 변해 멍한 얼굴로 도, 창, 도끼 같은 병기를 들고 있었다. 사람과 비슷한 체구에 용모가 똑같이 생긴 졸병들은 전신에 나무테 같은 무늬가 잔뜩있었다.

본섬 전장 곳곳에 수천 명의 청갑 졸병들이 뛰어들어 성괴문 제자들과 싸움을 벌였다. 콩알 졸병들은 빠르고 평범한 꼭두각시들보다도 움직임이 자연스러웠다.

성괴문 제자들은 갑자기 늘어난 적에 우왕좌왕하는 동안 십방루 수사들은 청갑 졸병들과 힘을 합쳐 그들을 몰아냈다.

전세가 역전되어서 이제는 성괴문 쪽이 밀리고 있었다.

“도병을 동원할 줄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성괴문이 이번에는 버티기 힘들겠습니다.”

한립의 중얼거림에 인구도 회의적으로 답했다.

팟!

원탑에 제형이 번득 나타나 심각한 얼굴로 포권을 했다.

“선배님들, 이곳은 더는 지킬 필요가 없으니 본섬 전투에 참여하시라는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그는 말을 하면서 의아한 눈빛으로 티 나지 않게 한립을 훑고 있었다. 한립은 눈치채지 못한 듯 인구와 시선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상맹 규정대로 고용주가 원하면 당연히 가서 싸워야 했다. 둔광을 일으킨 두 사람은 본섬으로 날아들었다.

그들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뒤쪽에서 쿠쿵! 하는 소리가 들리고 무사 괴뢰가 성큼 걸음을 뗐다.

바다로 뛰어든 거대 꼭두각시는 물속을 쿵쿵 걸어 본섬으로 향했다.

본섬 광장은 수백 명의 청갑 졸병들과 수십 명의 십방루 수사들이 수십 명의 성괴문 수사 그리고 은갑 괴뢰들과 열댓 무리로 뭉쳐 공격을 주고받았다.

광장의 건물들이 전부 무너진 것은 물론 심심치 않게 시체들도 발견되었다.

백소원도 성괴문 장로 및 십여 명의 제자들과 백여 명의 십방루 수사들에게 포위당해 광장 구석으로 몰려 있었다.

한 손에는 은색 장검을 쥐고 옥팔찌를 찬 다른 손으로 부적을 든 그녀는 위급한 순간 바로 최후의 방법을 사용할 수 있게 집중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틈틈이 고공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손목에서 하얀 옥팔찌가 보호막을 형성했고, 입고 있는 하얀 장삼 위로 흰색 의복이 하나 더 나타나 은빛을 반짝거렸다.

의복 옷깃에 네모난 푸른 무늬가 눈에 띄었다.

대부분 스승 운예가 준 것이었지만 의복은 백봉의가 그녀를 보자마자 준 선물이었다.

극강의 방어력을 지닌 보물로 딱 한 번이었지만 진선경 초기 수사의 전력이 담긴 일격을 막아줄 수 있었다.

“흐흐, 저 가면 쓴 여인이 두르고 있는 것을 좀 보십시오. 저것들만 챙겨도 여기 온 보람이 있겠습니다.”

거구의 십방루 수사가 백소원을 눈독 들였다.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탐욕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노리는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죽여라!”

누군지 모를 사내의 외침에 십방루 수사들이 일시에 쇄도했다.

백소원은 자신을 향해 몰려드는 십방루 수사들을 보며 검결을 맺었다.

촤랏!

검 끝에서 은색 실들이 교차해 날아가 꽃잎처럼 사방팔방으로 흩날렸다.

채채채채챙!

금속성 충돌음과 함께 달려들던 십방루 수사들은 날카로운 은실에 막혀 더는 접근하지 못했다.

이때 흐릿한 그림자가 시꺼먼 장창을 들고 백소원의 정수리를 전광석화처럼 찔러 들어갔다. 발산하는 기운으로 보아 대승기 수사였다.

백소원도 늦지 않게 반응해서 검 끝의 방향을 틀었지만 충돌하기 직전, 시꺼먼 창이 기이하게도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려 은색 장검을 타고 백소원의 어깨를 향해 흘러들었다.

화들짝 놀란 백소원은 장검에 붙은 검은 액체를 털어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눈을 반짝인 그녀는 과감히 장검을 놓아버리고 백여 장 밖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 순간 황토색 빛이 땅속에서 솟아올라 굵직한 덩굴로 변해서 그녀의 두 다리를 타고 몸을 붙들려 했다.

화아앗!

덧입은 흰 의복이 빛을 발해 덩굴을 차단하자 백소원은 손목을 털어 하얀 비단을 펼쳤다. 금실로 초승달 문양이 수놓아진 하얀 비단은 덩굴을 단단히 감아 봉쇄했다.

바스스.

비단의 금색 초승달에서 은은하게 광채가 번지자 덩굴은 석화가 되어 흩날렸다.

그 모습에 대승기 수사는 속도를 줄였고, 다른 십방루 수사들도 열기가 더 강해진 눈빛으로 거리를 두고 따라붙었다.

치명적인 한 수를 지닌 백소원을 먼저 공격하기보다는 다른 이가 먼저 움직이길 기다려 보물만 챙길 심산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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