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4화. 백가 노조
*
탑 입구에는 반투명한 보호막이 있어서 노인이 성괴문 영패를 꺼내 흰빛을 비추고서야 지나갈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내부가 바깥에서 보는 것보다 넓다는 느낌을 받았다.
속이 텅 빈 탑의 벽에는 십여 개의 물방울 모양 주술문자가 새겨져 있었고 각각의 문자마다 남색 빛을 강하게 발산하는 영석이 박혀 있었다.
벽의 모든 문양은 바닥을 타고 내려와 허리까지 오는 네모난 제단의 진법으로 이어졌다.
제단 둘레로 8개의 더 낮은 제단들이 둘러싸고 있었고 그 위에 대승기 수사들이 한 명씩 눈을 감고 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무꾼같이 수더분하게 생긴 대승기 청년이 미간을 좁히고 제단 옆에 서서 진법을 살피다가 흰 수염 노인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말을 붙였다.
“저 장로, 뒷산 금제는 어쩌고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제 장로, 부문주께서 청하신 분들을 모시고 왔습니다. 앞으로 이곳에서 머무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수더분한 제 장로의 대답을 듣고 흰 수염 노인이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저는 제형이라 합니다. 선배님들을 어찌 불러드려야 할지요?”
“인구.”
인구가 자신의 가면 미간을 가리켰다.
“교십오일세.”
한립은 제형을 보면서 어딘가 익숙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디서 본 것 같았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세 사람 다 잡담을 늘어놓는 성격은 아니라서 제형의 간단한 설명을 끝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호숫가에 임시 동부가 있으니 선배님들께서는 그곳에서 머무시면 되겠습니다. 머무시는 동안 섬에서 자유롭게 활동을 하시되 금제만 건들지 않으시면 되고요. 저는 이곳을 살펴야 하니 직접 가보시지요.”
한립과 인구는 원탑을 나와서 호숫가로 가보았다. 그들은 각각 아주 멀리 떨어진 서쪽과 동쪽 동부를 선택했다.
인근에 수풀이 있는 동쪽 동부로 향한 한립은 주홍색 담에 검은 기와를 얹은 저택 앞에 서서 대문에 각인된 주술문양을 살펴보았다.
제형이 아무 제한 없이 돌아다닐 수 있다는 말을 떠올리고는 가만히 문을 밀었다.
끼익!
예상대로 대문이 안쪽으로 열렸고 속세의 저택과 큰 차이 없는 뜰과 방들이 보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곳곳에 소형 진법이 펼쳐져 있다는 정도였다.
예를 들어, 뜰 중앙의 돌 탁자 아래에 먼지를 쓸어내는 소형 진법이 있어 정기적으로 낙엽이나 먼지를 흡수해 청소했다.
정당에는 젊고 보기 좋게 생긴 남녀 시종이 있었는데 한립은 한눈에 그들이 꼭두각시인 것을 알아보았다. 그가 익힌 괴뢰술은 영계에서 익힌 것이 다라서 이곳의 괴뢰술과는 재료와 제련법에서 차이가 컸다.
해 도인을 회복시켜 주려면 그가 알고 있는 괴뢰술로는 부족했기에 더 연구해볼 필요가 있었다.
* * *
금방 2년이 지나갔다.
성괴문은 적의 침입은커녕 시끄러운 사건도 없이 조용하기만 했는데, 종문 안은 늘 전쟁을 앞둔 것처럼 방비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
이날 호숫가 오솔길을 따라 한립과 인구가 나란히 걸어 야트막한 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교십오 수사, 벌써 2년이 넘게 흘렀는데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러다가 기간이 끝나면 보수만 받아 떠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밝은 목소리의 인구는 아주 느긋해 보였다.
“남은 기간도 이렇게 조용히 보낼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요.”
한립도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웃으며 답했다. 그는 작은 산들을 여러 번 둘러보면서 숨겨진 진법이며 꼭두각시들을 꼼꼼하게 찾아 자세히 연구했다.
후에는 수시로 원탑으로 가서 내부에 새겨진 주술문자들을 살피다 제형과 친해져서 간혹 괴뢰술에 대해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제형이 수행은 높지 않아도 괴뢰술에 대해서는 박식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재미가 있었지만 종문의 비술이나 비사에 관해서는 입을 꼭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 * *
그 시각, 성괴문 본섬의 어느 밀실.
물빛의 남색 궁장 차림을 한 부문주가 돌탁자에 앉아서 면사를 걷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옆에 앉은 것은 토끼 가면을 벗고 얼굴을 내놓은 백소원이었다.
“소원아, 그간 가문을 모른 척 한 것은 그만한 사정이 있어서였다. 촉룡도를 나와 고운대륙을 떠난 뒤로 모든 인연을 끊고 한 번도 돌아간 적이 없었지.”
궁장 여인은 미안함을 담아 말했다.
“인연을 끊으셨다면서 저는 어째서 찾으신 것입니까?”
무표정한 얼굴의 백소원은 냉담하게 물었다.
눈앞의 여인이 자신의 선조인 백봉의란 것을 알았지만 조부가 그녀를 찾으러 떠났다가 천마에게 참혹한 꼴을 당하고 죽은 것을 떠올리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백봉의가 갑자기 실종되지 않고 가문을 돌봐주었으면 조부도 목숨을 잃지 않고 그녀도 고초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봉의를 탓할 일이 아니다. 당시 벌어진 일은 스승이었던 내 책임이 크다.”
두 사람 뒤에 있던 인삼이 한숨을 쉬면서 끼어들었다. 여우 가면을 벗고 오밀조밀한 매혹적인 이목구비를 드러낸 인삼은 촉룡도 13금선 도주 중 한 명인 운예였다.
“스승님.”
“스승님…….”
백봉의와 백소원이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어리석은 것! 네가 그렇게 떠나면 우리 둘이 맺어질 줄 알았겠지만, 그 작자가 박정하고 담이 콩알만 한 것은 몰랐더냐. 이번에도 같이 너를 도우러 가자고 하니 어찌 너를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오지 않더구나.”
“딱 그다운 행동이네요.”
운예가 쓴웃음을 흘리며 하는 소리에 백봉의가 가볍게 웃음 지었다.
“스승님, 대체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백소원이 무슨 소린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전에는 눈처럼 새하얀 의복을 입고 다니던 준수한 선인이었지만 이제는 구질구질한 늙은이가 된 주정뱅이 이야기다. 됐다, 이야기 해봤자 나만 화가 치밀지…….”
운예는 상대를 욕하면서도 언뜻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겉으로는 화난 척을 하지만 그분을 언급하기만 해도 눈매가 부드러워지십니다. 스승님께서도 전혀 변하지 않으셨네요.”
“……그보다 2년이나 흘렀는데 아직 아무런 움직임이 없구나. 앞으로 어찌 될 것 같으냐?”
백봉의의 탄식 섞인 말에 운예가 화제를 돌렸다.
“수집한 정보가 틀렸을 리 없습니다. 상대가 시간을 끌수록 다가올 위험도 커지겠지요!”
“그들이 1년 후에 침략하면 무상맹의 힘도 빌릴 수 없을 것인데 대책이 있는 것이야?”
“그때쯤이면 문주께서 돌아오실 테니 그분의 수행과 선괴뢰의 힘이 더해지면 위기를 넘길 수 있을 겁니다.”
백봉의의 말에 운예가 무어라 말하려다 안색이 달라졌다.
쿠콰앙!
바깥에서 굉음을 동반한 진동이 전해졌다.
시선을 마주친 운예와 백봉의는 여우 가면과 면사로 얼굴을 가렸고, 백소원도 얼른 토끼 가면을 썼다.
성괴문 본섬을 중심으로 주변 만 리 고공에 갑자기 먹구름이 모여들어 빛을 가렸다. 어두컴컴해진 해역은 거세게 바람이 불어 당장이라도 폭풍이 불어닥칠 것 같았다.
운예 등 세 사람은 밀실 밖 광장으로 나와 뇌전 빛이 반짝이는 먹구름 속에서 수십 척의 거대 선박들을 발견했다.
금색과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선박들은 아주 튼튼해 보였고 그 위에 가득 사람들을 태운 채였다.
이전에 보았던 비행 선박들과는 달리 각종 무늬가 새겨진 거목 크기의 검은 제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걸 본 백봉의는 돌판으로 된 진법 원반을 불러내서 명을 내렸다.
“명을 전하라. 지금부터 금제를 전부 개방하고 전투에 대비한다.”
명이 떨어지자마자 성괴문 본섬과 외곽의 여덟 개의 섬에서 동시에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울렸다.
우우웅! 우우웅!
섬 곳곳에 설치된 회백색 돌기둥의 주술문자들이 빛을 발해 여러 건물에 새겨진 진법이 발동되기 시작했다.
쿠르릉…….
본섬 전역이 흔들리면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본섬의 가장 높은 산봉우리를 감싼 안개가 걷히고, 그제야 드러난 산등성이 동굴에서 황금색 무늬로 뒤덮인 수백 척의 기관 선박이 떠올라 전열을 갖추었다.
강이 굽이치며 흐르던 곳에 느닷없이 구멍이 뚫려 물길이 다른 곳으로 흐르고, 강바닥에서 자라와 거북을 닮은 거대 괴뢰 요수들이 나타나 짙은 물 속성 영력 파동을 발산했다.
섬 2층의 수풀에서는 호랑이와 표범의 형상을 한 괴뢰 요수들이 거목들을 부러트리면서 달려 나와 고공을 향해 으러렁거렸다.
진선급 장로 몇 명이 수십 명의 제자와 수백 구의 인형(人形) 괴뢰들을 이끌고 광장으로 몰려들었고, 섬 곳곳의 요충지로도 제자들과 괴뢰 대군을 대동한 진선경 장로가 등장해 삼엄하게 주변을 경계했다.
긴박한 분위기 속에 본섬 인근 해역이 격렬하게 요동쳐 여덟 외곽 섬들을 휘도는 거대한 바닷물 소용돌이를 형성하고 있었다.
소용돌이 속에서 각 섬의 하얀 원탑들이 밝게 빛나서 해역을 밝혔다. 이미 원탑이 있는 광장에 이른 한립과 인구는 섬을 지키는 성괴문 수사들과 합류했다.
명청령안을 발동한 한립은 고공의 먹구름 속에 등장한 인영들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검은 복면을 쓰고 새까만 피풍의로 전신을 가린 적들의 소매와 옷깃에 금색 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가슴에 새겨진 수는 명확한 십(十)자 도안이었다. 평요자에게서 찾아낸 십방루 영패에서 보았던 표식이었다.
“적이 십방루 수사들일 줄이야!”
“엄격히 말해 십방루 수사들이 아니라 ‘십방멸살령(十方滅殺令)’에 의해 소집된 자들일 겁니다.”
“아는 바가 있으십니까, 인구 수사?”
“북한선역의 거대 암중 세력 중 하나인 십방루의 성격은 무상맹과 비슷합니다. 정보 거래와 암살을 주업으로 현상령(懸賞令), 교살령(絞殺令) 등을 발표하지요. 임무 등록과 수령이 구성원끼리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개방되어 있다는 점이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인데, 제값을 치를 수 있거나 임무를 완수할 실력이 되면 기본적으로 십방루의 초급 회원과 같습니다. 무상맹처럼 조직이 긴밀하지 않고 내부 인물들 간에도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꼬여 있지요.”
“그렇다면 무상맹 사람도 십방루에서 발표한 임무를 맡을 수 있다는 말이겠군요. 그렇다면 이곳에 모인 이들도 십방멸살령이란 것 때문에 모여든 것이겠습니다.”
“맞습니다. 십방루에서 발표하는 멸문 학살 명령의 일종이라서 거의 선역 전체에서 수사들이 몰려듭니다. 참가하는 이들은 멸문 과정에서 얻은 모든 것을 가져갈 수 있고, 일이 끝난 뒤에는 쫓길 염려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지요.”
설명하는 인구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한립도 십방루의 십방멸살령의 무서움을 이해했다. 산수 무리에게 뒤탈 없이 약탈할 기회는 아주 매혹적이었다.
특히 수련 자원이 부족해서 수명이 줄어드는 것을 알면서도 고비에 걸려 있는 대승기 이하 수사들은 목숨을 걸고 달려들었다.
이렇게 모인 산수들은 더 많은 수도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서 또 그간 수도 종문에 쌓인 한을 풀기 위해서 잔인하게 종문이나 수도 가문을 도륙했다.
거기다 뛰어난 괴뢰술로 부를 축적해온 성괴문은 살점이 덕지덕지 붙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지면이 미친 듯이 떨리면서 바닥에 움푹 파인 곳에 은빛이 흘러들었다.
쿠쿠쿵.
광장의 지면이 큼지막한 조각으로 갈라져 하얀 탑과 분리되고 있었다.
분리된 구역은 빠르게 솟구쳤고, 하늘로 날아올라 광장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이 거대한 석재 괴뢰로 변했다.
무사의 모습을 한 하얀 옥돌 괴뢰는 은색 도끼를 쥐고 험악한 기세를 내뿜었다.
다른 외곽 섬에서도 원숭이, 늑대, 거인 등의 모습을 한 산만한 괴뢰가 떠올라 표면에 다양한 색깔과 다양한 형태의 문양을 번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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