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612화 (1,369/2,000)

1612화. 두병의 변이

*

한 시진 뒤, 푸른빛이 어느 산봉우리로 떨어졌다.

한립은 웅장한 필체로 ‘백주산장’이라 적힌 주홍색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이름 그대로 술 냄새가 진동했다. 그가 대문을 향해 발을 떼려는데 마침 대문이 열리고 하얀 치마를 입은 풍만한 절색의 미인이 걸어 나왔다.

새까만 머리카락을 올려 묶은 젊은 부인의 얼굴은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백소원의 스승이자 13금선 도주 중 한 명인 운예였다.

그녀는 노기를 띠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빠져나왔고 곧이어 그 뒤로 회백색 도포를 입고 허리에 호리병박 두 개를 매단 호운 노인이 쫓아 나왔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난처한 기색이 가득했다.

노인은 돌계단 아래 한립을 발견하고 민망한 표정을 짓더니 더 이상 운예를 쫓지 않았다. 뾰로통한 얼굴로 한립을 지나친 운예는 그대로 날아올라 멀리 사라져버렸다.

한립은 계단 위의 호언 노인이 넋을 잃고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자 헛기침을 두 번 했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노인은 재빨리 저택 쪽으로 몸을 돌리면서 근본 없는 변명을 해댔다.

“크흠, 요새 종문 일이 워낙 바빠야 말이지…….”

“하하, 호언 장로님께서 종문 업무로 바쁘신 것은 다들 아는 사실이지요.”

한립은 그의 말을 받아주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까지 온 것이냐? 미리 말해두지만 나눠줄 술은 없으니 기대하지 말거라.”

“며칠 전 외부로 임무를 나갔다가 우연히 구한 귀한 술이 있습니다. 67 가지의 진귀한 영약을 이용해 담은 술이라는데 호언 선배님이 생각나지 무엇입니까?”

씩 미소를 지은 한립이 붉은 술동이를 꺼내 건네었다.

“오, 양심은 있는 녀석이로구나! 어서 맛을……. 아니지, 이곳은 복잡하니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꾸나.”

대번에 얼굴이 밝아진 노인은 좌우를 살피고는 자중하며 말했다.

한립은 호언 노인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가 정당 안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젊은 시종이 나타나서 두 사람 앞에 차를 내주었다.

맑은 찻물을 힐끗 본 노인은 손을 저어 유리 술잔을 꺼내 붉은 술동이의 술을 따라 마셨다.

“홍모주(紅毛酒)가 마실 만 하구나!”

“이 술을 아십니까?”

“흐흐, 노부가 천하를 돌아다닐 때 만황대륙 북부에서 마셔본 적이 있는 술이다. 다른 선주와는 달리 여러 요수의 뼈와 정혈을 섞여 백 년 이상 봉해 두어야 맛이 들지. 워낙 취기가 강해서 범인들은 마실 수 없고, 수사도 화신기가 못된 저계 수사들이 마시면 죽은 목숨인 독주이다.”

“하하! 선배님의 술에 대한 지식은 감탄스러울 따름입니다.”

“괜히 알랑방귀 뀌지 말고 왜 왔는 지나 말해 보거라. 홍모주를 가지고 온 정성을 봐서 과분한 청이 아니면 들어주마.”

탁자에 술동이를 탁! 내려놓은 추레한 노인네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 약재밭에 가보니 이전에 심어둔 도병이 싹이 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싹의 모습이 선배님께서 주신 기록과 일치하지 않아 조언을 구하려고 찾아뵈었습니다.”

“응? 다르다고?”

“제 도병 새싹에는 기이한 암금색 무늬가 있었습니다.”

“어떤 무늬더냐? 당장 가서 보자꾸나!”

“제가 따로 그려온 그림입니다. 이걸로 보시지요.”

호언 도인이 당장 일어날 기세를 보이자 한립이 얼른 종이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것을 받아 살펴본 호언 도인이 웃음을 흘렸다.

“운도 좋은 녀석이로다. 네 두병은 변이를 한 것이다.”

“어째서 변이를 했단 말씀입니까?”

“두병 변이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너무 많아서 정확한 이유를 꼽기 어렵다. 심어놓은 토양과 그 아래를 흐르는 수맥 그리고 때때로 주는 영액 및 두병 종자 자체의 품질 등이 대표적이지. 원인을 알고 싶다면 구체적인 조건들을 일일이 조사해 보아야 할 것이야.”

호언 도인의 설명에 한립은 고개를 숙이고 영향을 미칠 만한 조건을 생각해 보았다. 녹색 액체 때문일 수도 있고 약재밭 아래 지하 화맥이 영향을 미친 것일 수도 있었다.

“너무 좋아할 것도 없다. 두병의 변이는 제멋대로라 더 좋게 변할 수도 있고 더 나쁘게 변할 수도 있으니까.”

호언 도인이 술동이를 기울여 잔을 채우고는 덧붙였다.

한립은 상대가 연달아 술잔을 비워나가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쓰이는 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길게 떠들지 않았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가거라. 나는 자작이나 해야겠다.”

예를 올리는 그를 보고 호언 도인이 손을 저었다.

이틀 뒤, 동부 밀실 안.

소머리 가면을 쓴 한립은 밀실 벽에 푸른 진법 원반을 띄웠다. 두병의 변화가 손쓸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무상맹 임무를 계속 이어나가기로 한 것이다.

좌측 임무란에 새로운 임무들이 떠오를 때마다 간단한 것들은 금방 사라지고 특수하거나 복잡한 것들만 주로 남았다.

임무란 중간에 눈에 띄는 임무가 보였다.

다른 임무들은 세부사항은 공개하지 않고 모집이 끝난 다음 공개하는 반면 이것은 임무 내용과 조건이 전부 적혀 있었다.

성괴문(聖傀門) 극비 지역에 가서 적의 침입을 방어하라는 내용이었다.

뇌폭해양 서북쪽 해역에 있는 종문으로 고운대륙과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각종 괴뢰를 제련해 팔아서 인근 해역에서는 꽤 명성이 있는 중형 종문이었다.

규모에서는 촉룡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지만 다른 선가와의 괴뢰 거래로 상당한 부를 쌓아서 동급 종문들과는 차원이 다른 곳이었다.

임무에 참여할 수 있는 수사는 무상맹에서 푸른 가면 이상의 등급을 지닌 회원이어야 했다. 상당히 위험한 임무가 될 거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영석이 시급한 한립은 성괴문이 내건 보상이 비슷한 다른 임무에 10배 이상이라 망설임 없이 임무를 수락했다.

아직 모집 일까지 시간이 있어 모아놓은 재료로 단약을 제련해 둘 생각이었다.

* * *

몇 달 후.

고운대륙 서남쪽 ‘망풍(望風)’이란 이름의 바다와 인접한 작은 성.

뇌폭해양에서 가까워 기운이 온화한 덕에 고운대륙에서 몇 안 되는 사계절을 지닌 지역이었다.

성의 남쪽 통로에서 뻗어 나간 관도가 구불구불하게 느릅나무와 버드나무가 가득한 숲속으로 이어졌다.

숲속에는 몇 리마다 목재로 만들어진 정자가 있어서 오가는 사람들의 쉴 곳이 되어주었다.

숲속 세 번째 정자 주변으로 짙은 안개가 내려앉아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이지 않았다.

안개의 영향을 받지 않고 세 번째 정자로 모여든 십여 명의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푸른 야수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중 정자 계단 아래 선 호리호리한 여인만이 다른 이들과 달리 적홍색 여우 가면을 쓰고 신비롭고 매혹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리고 그녀와 멀지 않은 곳에 분홍색 연꽃무늬가 수놓아진 치마를 입은 여인이 푸른 토끼 머리 가면을 쓰고 서 있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기운을 감추었는데도 두 여인에게서 남다른 분위기가 느껴져 적잖은 이들이 힐끔힐끔 그쪽을 쳐다보았다.

수풀 속에서 금빛이 날아들어 정자 바깥에서 멈추었다. 덩치가 큰 사내는 검은 피풍의를 걸치고 푸른 사슴 머리 가면을 쓴 인구였다.

그는 지면에 착지하자마자 호리호리한 부인을 향해 예를 올렸다. 이어서 푸른 빛이 안개 속으로 떨어졌다.

소머리 가면을 쓴 청포 사내는 교십오, 한립이었다. 두 사람의 등장에 대부분이 교십오에게 시선을 보냈다.

인근 지역에서 교십오의 명성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한립은 아무렇지 않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다가 미간에 ‘십일(十一)’이라 적힌 푸른 토끼 가면을 발견하고 내심 놀랐다.

그 가면을 쓸만한 여인이라면 백소원이 분명했다. 기운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월화선체를 지닌 그녀라면 최소한 대승기 경지에는 이르렀을 것이다.

이번 임무는 그녀에게 벅찰 텐데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립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한눈에 보기에도 책임자로 보이는 여우 가면 부인에게 예를 취한 다음, 인구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하고 한쪽에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백소원 쪽으로는 일부러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이전에 그가 가면으로 변신한 모습만 보고 소머리 가면을 쓴 것을 본 적이 없어서 한립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임무 광이라는 소리를 들었는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눈길을 주었다.

일각이 흘러 두 명이 더 도착하자 인삼이 정자를 빙 둘러보았다.

“인원이 모두 모였다. 시간이 여유롭지 않으니 바로 출발해 성괴문으로 향한다. 가는 동안 상세한 임무 내용을 전달하도록 하지.”

그녀의 말에 무상맹 회원들이 모여들었고 한립은 인구 외에도 이전에 임무를 같이 한 적 있는 수사들을 발견하고 목례를 주고받았다.

인삼의 손짓에 은빛 수정 가루가 흩어져 초승달 모양의 선박이 떠올랐다. 번쩍번쩍 은빛을 발산하는 선박에는 복잡한 주술문자가 가득 새겨져 있었고 은빛 광채가 휘감고 있었다.

인구가 선박으로 올라서자 다른 수사들도 날아올랐다.

같은 무상맹 회원이라도 고계 회원이 맡은 임무에 참여할 기회가 많은 것은 아니라서 이런 귀한 비행 보물도 흔히 볼 수 없었다.

은백색 초승달 선박 위에는 얼음으로 조각한 듯한 아름다운 3층 누각이 건설되어 있었다.

각 층마다 아름다운 꽃, 새, 물고기, 곤충 등의 도안이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 있었고 그 틈틈이 주술문자가 반짝였다.

“누각 1층에 방이 마련되어 있으니 각자 원하는 곳을 골라 휴식을 취하면 된다. 3일 뒤에 다시 모이면 간략하게 임무를 설명해주겠지만 나도 자세한 사정은 몰라 성괴문에 도착해야 알게 될 것이다.”

인삼은 간단히 명을 내리고 표표히 날아올라 3층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밭 끝에서 설연화(雪蓮花) 허상이 겹겹이 나타나 계단처럼 그녀를 떠받쳐 올렸다.

한립은 의문이 가득한 심정으로 3층을 올려다보았다.

인삼이 적홍색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은 무상맹에서 푸른 가면보다 더 높은 계층의 존재임을 의미했다.

수행을 파악할 수 없어도 금선경 수사일 가능성이 농후했고, 그만큼 이번 임무의 예상 위험도도 급격히 상승했다.

덩치 큰 인구가 다가와 말을 붙였다.

“허허, 교십오 수사께서도 이번 임무를 수락하셨을 줄 몰랐습니다. 우리가 인연은 인연인가 봅니다.”

“보상이 이렇게 후한데 수락을 안 할 수가 있어야지요.”

한립도 미소를 머금고 답했다.

“이번 임무가 퍽 특수한 것은 눈치채셨겠지요.”

“다른 임무와는 확실히 다르더군요.”

“그렇습니다. 최상의 품질을 가진 괴뢰를 제련하는 성괴문은 적잖은 세력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듣기로는 영상종(靈嘗宗) 종주 그리고 복갑산(伏甲山) 산주와 성괴문 문주는 호형호제하는 사이라더군요! 그런데 적의 침략을 방어하는데 굳이 무상맹을 찾았다니요.”

“그런 중소세력들로는 감당이 안 될 만한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지요. 우리야 정해진 보상만 받아 챙기면 되니 신경 쓸 연유가 없고요.”

“그건 그렇습니다. 어찌 되었든 성괴문이 부유한 것은 사실인가 봅니다. 저도 요즘 선원석이 궁해서 보상만 제대로 지급되면야 뭐, 하하.”

두 사람은 서로의 신분을 짐작하면서도 드러내지 않고 한담을 나누었다. 심지어 위험천만했던 지난번 임무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잠시 후 초승달 선박이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면서 고운대륙 해안을 따라 서남쪽으로 출발했다. 선박에 탄 수사들은 누각 1층으로 가서 각자 방에 자리를 잡고 문을 닫아걸었다.

인구마저 누각으로 들어가고 홀로 갑판에 남은 한립은 난간에 기대 먼 곳을 조망했다. 해안을 따라 넘실거리는 파도가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