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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611화 (1,368/2,000)

1611화. 싹이 난 모두(母豆)

*

끝까지 기록을 잃어나가며 묵묵히 마음에 새겨두던 한립은 마지막 한 단락의 한 구절을 보고 눈썹을 끌어올렸다.

‘도단은 하늘이 만들어낸다고 하지만, 보조 약재를 기초로 단약의 품질이 결정되고 주 약재로 인해 단약의 법칙이 달라진다. 기초는 변할 수 없어 품질은 달라질 수 없지만, 주재료를 대체해서 만 가지 법칙을 담을 수 있다.’

“기초는 변하지 않지만 주재료는 바꿀 수 있다!”

도단의 약방은 보조재료만 변동이 없으면 법칙의 힘을 함유한 주재료를 바꾸어서 단약의 법칙 속성을 정할 수 있는 듯했다.

간단히 말해 뇌지금액 대신 물속성 법칙의 힘을 품은 중수를 넣으면 물 속성 도단이, 시간의 힘을 품은 수정 알갱이를 넣으면 시간 속성 도단이 만들어질 거란 이야기였다.

하지만 뒤쪽에 이어진 내용처럼 연단술은 배합을 중시하는 분야로 법칙속성이 다른 주재료를 넣으면 연단의 성공률이 확연히 달라진다.

한립은 연단 성공률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진언보륜을 통해서도 시간법칙을 깨우치는 데 성공하지 못했으니 시간도문을 제련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는 환희에 찬 표정을 숨기고 진언보륜과 옥판을 회수한 뒤 푸른 소머리 가면을 꺼내 썼다.

약방에 적힌 재료들을 하루 이틀 내로 찾을 수는 없었으니 무상맹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있나 살펴보고 나머지는 임무를 등록해 천천히 수집할 계획이었다.

영석은 거의 바닥났지만 선원석은 약간 있어서 종자나 어린 영약이라도 품종만 일치하면 구매할 생각이었다.

며칠 뒤, 동부 안 약재밭에 못 보던 영약 몇 가지가 늘어났다.

대부분 10년이 채 안 된 어린 싹이었고, 아직 싹도 나지 않은 종자도 두 가지나 있었다.

* * *

반나절 후, 금빛이 가득한 밀실 안.

한립이 앉아 있지 않고 긴장된 얼굴로 방석 옆에 서 있었다. 그의 뒤로는 진언보륜이 급속도로 회전하면서 고리 가운데 금색 눈에서 금빛을 쏘고 있었다.

시간도문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안 한립은 당시 빛의 장벽을 통해 보았던 귀 큰 승려가 생각났다.

상대에게 몰래 엿듣는 것을 들켰지만 상대의 능력이 뛰어나도 화면 너머로는 자신을 어쩌지는 못할 것 같았다.

가슴팍에서 암녹색 작은 병을 꺼낸 한립은 금빛 속에 내려놓았다. 암녹색 병은 저절로 떠올라 눈부신 녹색빛을 발산하더니 무형의 강력한 힘을 방출했다.

그는 이번에는 미리 알고 양팔로 힘에 저항하면서 약간만 밀려나다 멈추었다. 108 도문을 밝게 빛낸 진언보륜은 스스로 장천병 앞으로 날아가 태양처럼 밝은 빛을 뿜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실안의 금빛과 암녹색 작은 병의 녹색 빛기둥이 허공을 찢어 구멍을 만들어냈다.

수정빛이 틈을 따라 줄줄 쏟아져 밀실 안에 금방 빛의 장벽을 세워 한립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흐릿한 장벽 위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한립은 차분히 시간도문이 하나씩 꺼지기를 기다렸다.

화면이 또렷해질수록 그의 호흡이 가빠지다 멍하니 얼굴이 굳었다. 빛의 장벽에 떠오른 광경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그곳은 모든 곳이 붉은빛으로 이뤄진 거대 화산이었다.

하늘 절반을 짙은 먹구름이 가리고 붉은빛을 번쩍였고, 그 아래로는 높다란 화산들이 폭발하고 있었다.

작열하는 용암이 용솟음쳐 강처럼 흐르다가 산 아래에서 합쳐져 거대한 용암호수를 이루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쿠르릉!

화면에는 굉음이 터지고 지진이 일어난 땅이 갈라지면서 지렁이를 닮은 새빨간 요수들이 그 사이사이로 솟아올라 미친 듯이 다시 땅속으로 돌아가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지렁이 요수들은 생명력이 왕성한지 지반 붕괴로 몸이 찢어져도 거침없이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주변의 용암이 지반 틈으로 흘러들어서 지렁이 요수들이 매몰되고 있었다.

만황세계의 종말 같은 모습에 한립은 자기도 모르게 꽉 쥔 두 손에 땀이 배어있었다.

펑!

진언보륜의 시간도문 하나가 또 팍! 빛이 튀더니 잿빛으로 변했다. 도문 중 절반 이상이 빛을 잃고 있었다.

그제야 빛의 장벽을 불러낸 목적을 상기한 한립은 이전과 같은 곳을 살펴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다른 걸 시험해 봐야겠군.”

한립은 허리춤의 영수대에서 늑대 요수 한 마리를 불러냈다.

깨갱!

요수는 영수대를 벗어나자마자 달아나려 했지만 한립이 목덜미를 잡아 냅다 빛의 장벽으로 던져버렸다. 늑대 요수는 빛의 장벽을 그대로 통과해서 갈라진 대지에 떨어졌다.

휙! 하고 몸을 돌려 일어난 늑대 요수가 낮게 엎드려 한립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역시!”

빛의 장벽을 넘나들 수 있다는 사실에 한립은 눈을 반짝였다.

그런데 늑대 요수의 검푸른 털이 갑자기 회백색으로 변하면서 윤기가 사라져갔다. 갑자기 천 년은 나이가 들어버린 것 같았다.

이어서 피부가 쭈글쭈글하게 삭아서 백골이 드러난 요수는 재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펑!

진언보륜에서 시간도문 하나가 더 암담해졌다. 한립은 늑대 요수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면서 침음했다.

잠시 후 그의 손에는 손바닥 크기의 푸른색과 붉은색이 섞인 수화경(水火鏡)이 나타났다.

거울은 그리 품계가 높지 못한 법기에 불과했지만 물결과 화염을 뿜어낼 수 있는 두 가지 속성을 지닌 물건이라 팔지 않고 갖고 있었다.

수화경은 늑대 요수와 마찬가지로 빛의 장벽을 넘어 화면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눈을 가늘게 뜬 한립은 눈동자 깊은 곳에 남색 빛을 머금고 상황을 주시했다.

건너편 세계에 이른 수화경은 누가 발동하지도 않았는데 밝은 빛을 품고 물결과 화염을 절반씩 분출하려 했다.

그러다 퍽! 하고 수화경이 깨져버렸다.

한립을 놀라게 한 점은 깨진 거울이 파편이 되어 흩어진 게 아니라 다채로운 빛깔의 안개로 변해 십여 종류의 광석과 재료로 응집한 다음 바닥으로 떨어졌다는 사실이었다.

대부분이 새빨간 염령석(焰靈石)과 푸른빛의 원수석(元水石)이었다.

두 재료는 놀랍게도 수화경의 주재료였고 나머지 재료들은 법기 제련에 필요한 보조재료였다.

“원래 재료로 돌아간다고?”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분해가 시작된 광석과 재료들도 투명하게 변해 사라졌다. 동시에 진언보륜의 도문도 어두워졌다.

한립은 그 후로도 영석, 선원석 같은 물건들을 장벽 너머로 던져 넣어 대지와 동화되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진언보륜에서 시간도문이 빛을 잃는 간격이 좁아져서 수시로 펑! 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립은 미간을 좁히고 빛의 장벽 너머를 응시하다가 푸른 장검을 꺼내 손을 들었다. 그는 약간 거리를 벌리고 장검을 높이 쳐들어 장벽을 갈랐다.

후우웅!

장검에서 물길처럼 기다란 검기가 흘러나와 장벽을 향해 날아갔다. 검을 휘두른 직후에 한립은 무릎을 살짝 굽히고 검을 횡으로 들었다.

수결을 맺은 손끝에 금색 뇌전들이 타닥타닥 일어나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했다.

휘이잉.

가벼운 바람 소리와 함께 검기가 빛의 장벽에 떨어졌다.

상상했던 것처럼 검기가 사방으로 튀지 않고 빛의 장벽 표면에 약간의 파문이 일다 형체도 없이 소실되었다.

펑! 펑! 펑!

동시에 진언보륜에서 연달아 나지막한 폭음이 들려왔다. 빛의 장벽 표면이 평정을 되찾았을 때 한립 머리 위 보륜의 마지막 도문이 꺼졌다.

빛의 장벽이 흩어지고 공간균열이 봉합되었다.

시간도문이 전부 빛을 잃자 진언보륜도 어두워져 서서히 한립의 체내로 돌아갔고 허공의 장천병도 빛을 거두고 데굴데굴 돌며 떨어졌다.

한립은 병을 받아 다시 목에 걸고 옷을 단정하게 했다. 밀실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고요했다.

방석에 주저앉은 한립은 노란 단약을 꺼내 삼키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진언보륜과 진실안을 발동하느라 막대한 선령력을 소모해서 단전이 텅 빈 느낌이었지만 처음 시도했을 때보다는 훨씬 나았다.

얼마 후 눈을 뜬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전에 얻은 이득은 엄청난 운이 따라줬던 것이로구나! 그런 행운이 다시 찾아오리란 법은 없지. 연단할 영약을 모으면서 도문이나 회복을 해야겠다.”

그는 툭툭 털고 일어나 밀실을 나와 동부 바깥으로 향했다.

* * *

몇 년 후, 어느 날.

고운대륙 북쪽 희뿌옇게 얼어붙은 해역 위에 눈보라가 치고 있었다.

휘이잉!

눈덩이를 품은 차가운 바람이 어찌나 사납게 부는지 하늘과 땅을 다 집어삼킬 기세였다.

하늘에 뜬 잿빛 구름 위에 큰 키에 푸른 장포를 걸치고 소머리 가면을 쓴 한립이 서 있었다.

“여기가 맞을 것인데…….”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바람 소리에 금방 묻혀 사라졌다.

그의 손에서 푸른 장검이 떨어져 해수면의 얼음으로 내리꽂혔고 푸른 한립의 신형이 그 뒤를 따랐다.

쩡!

경쾌한 소리와 함께 푸른 장검이 두꺼운 얼음에 구멍을 뚫고 바닷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덕에 세찬 바람 소리를 뚫고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천 리를 퍼져나갔다.

한립은 물을 밀어내는 술법을 펼치고는 남색 보호막의 비호를 받으면서 해저로 신속하게 내려가고 있었다.

일각 후 그는 해저 화산 입구에 멈춰 서서 푸른 장검이 박혀서 남색으로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잿빛 화산 입구로 보아 화산 활동을 하지 않는 사화산이거나 오랫동안 폭발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챙!

장검을 뽑아내자 쪼개진 암석 틈에 은은하게 금빛이 반짝였고 한립은 그 주위를 들쑤셔서 주먹 크기의 금룡단(金龍胆)들을 찾아냈다.

아주 특수한 연단용 재료로 초목, 요수의 뼈, 광석 세 가지의 특성을 골고루 가진 물체였다.

한립은 재료 수집 임무를 잘 수락하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연단에 금룡단이 필요해 어쩔 수 없이 이것을 골랐다. 재료도 구하고 보수도 받을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었다.

수련용 단약 재료와 함께 도단을 제련할 준비도 하느라 엄청난 영석과 선원석이 필요해 다시 임무광(任務狂)으로 돌아가서 무상맹 임무들을 해치우는 중이었다.

* * *

10년 후.

이름 모를 협곡 양쪽에서 짐승 가면을 쓴 인영 서너 명이 튀어나와 바닥에 엎어져 거의 숨이 끊겨가는 요수와 큰 키의 사내를 번갈아 보았다.

진선경 초기 요수를 참살하는 임무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줄은 몰랐다.

오는 동안 포위 계획에도 참여하지 않고 과묵하게 지내던 키 큰 사내는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엄청난 전투력을 드러냈다.

포위 계획을 비웃듯 혼자 힘으로 요수를 잡은 것이다. 그의 과감한 행동에 일행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키 큰 사내는 마음이 급했다.

한립은 눈에 띄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다음 임무를 위해 한 달 내로 동류해역에 가야 했다.

* * *

시간이 금방 지나 또 30년이 흘러갔다.

아침 햇살을 받아 따듯해진 적하봉과 달리 한립의 저택은 썰렁했다.

손부정과 몽운귀가 승급에 성공한 뒤로 한립의 명을 받아 영약 종자를 찾아 떠나고 몽천천도 명목상 경험을 쌓는다며 적하봉을 떠났다.

그녀가 염우를 데리고 가는 바람에 쌍두사응수도 오랫동안 시무룩하게 지내야 했다.

동부 밀실에서 한립이 나타나 가면을 벗었다.

막 임무 하나를 마치고 선원석 백여 개를 대가로 받아냈지만 지금 그가 필요로 하는 양에 비하면 어림도 없었다.

밀실을 나온 그는 동부 안의 약재밭으로 갔다.

잡다한 영약들이 가득 자라있었고 좌측으로는 덩굴나무들이 지지대를 따라 구불구불 자라 과실을 맺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생명력이 왕성했지만 서남쪽 구석은 예외였다.

텅 빈 흑회색 땅에는 아무것도 심어놓지 않은 것처럼 영초가 보이지 않아서 한립도 거의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달라져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가 밭 중앙에 쭈그리고 앉으니 콩잎보다 더 작고 부드러운 새싹이 돋아나 있었다.

아주 약해 보였지만 왕성한 생명력을 품은 새싹은 모두(母豆)였다.

“드디어 싹이 났구나!”

의외였다. 모두를 심어둔 백 년 동안 가끔 녹색 액체를 주기는 했지만 나중에는 수정 알갱이를 제련하고 다른 영약을 키우느라 방치해두고 있었는데 싹이 난 것이다.

자세히 살피니 작고 여린 새싹에 동글동글하게 어두운 금색 무늬까지 보였다. 그는 미간을 좁히고 당장 누런 서책을 꺼내 들추었다.

꼼꼼하게 내용을 읽었는데도 그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이상한데……. 어째서 호언 장로가 적어둔 기록과 다른 거지?”

혼자 궁리해보아도 답을 찾을 수 없자 그는 새싹에 묻은 흙을 떼어내 주고 이파리에 나타난 암금색(暗金色)무늬를 그려서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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