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0화. 폐관수련 100년
*
1년 뒤.
밀실에 앉은 한립의 등 뒤로 진언보륜이 서서히 돌며 주술문자와 금빛을 방출했다.
진언보륜의 시간도문 중 하나가 깜빡거리자 주술문자들이 그 안으로 흘러 들어가 잿빛이던 도문을 밝게 만들었다.
다른 도문들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시간도문이 회복해 가슴에 얹은 커다란 돌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도문 하나를 회복하는데 대충 1년이 걸렸다. 그렇다면 108개를 전부 회복하려면 백 년이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수련에 차질이 있겠지만 한립은 마음을 가볍게 먹기로 했다.
어차피 백 년 정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기도 했고 그동안 귀 큰 승려에게 들은 여덟 구절의 구결을 음미해보면 된다.
1년 넘게 어떤 깨달음도 얻지 못했지만 가면 갈수록 무언가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시간이 지나면 단약을 제련할 원재료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한립은 옥함 하나를 꺼내서 평요자에게서 얻은 약방들을 확인했다.
그중 두 개는 진선 중기 수사에게 적합한 승울단(承菀丹)과 옥형단(玉衡丹) 약방이었다.
둘 다 진귀한 재료가 필요 했고 해수가 오래된 영약들을 요구하고 있었다.
무상맹을 통해 모은 선원석과 영석은 거의 다 써서 남은 재료로 두 약방의 재료들을 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도문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고, 녹액도 잠시 수정 알갱이를 응결할 필요 없으니 영초들이나 키우고 있으면 되겠군.”
그러고 보면 장천병이 진언보륜과 공명해 일으킨 이변에서 보륜은 영향을 받았는데 작은 병은 달라진 점이 없었다.
도문을 되돌릴 동안 두 약방에 필요한 주재료와 보조재료들을 작은 병을 이용해 숙성시키면 될 듯싶었다.
팟.
자리에서 일어난 한립은 밀실을 나와 전신 법기에 법결을 던져넣었다.
잠시 후 몽운귀와 손부정이 동부 대문으로 들어와 돌탁자에 앉은 그를 향해 예를 올렸다.
“려 장로님을 뵙습니다.”
“난 계속해서 폐관 수련을 하려고 한다. 그동안 너희 둘이 바깥을 돌아다니면서 재료들을 구해주어야겠다. 이것이 목록이니 확인하거라.”
한립이 그들에게 나눠준 옥간에는 두 단약방의 주재료와 보조재료 그리고 보조재료의 종자 등이 적혀 있었다.
그들은 내용을 확인하고는 당황스러웠다. 대부분이 너무 귀하고 희귀한 것들이라 모으기 쉽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모으기 쉽지 않을 거란 것은 안다. 조급해 말고 백 년 내로 구할 수 있는 만큼만 구해 오면 된다. 그 전에 수확이 있으면 언제든 갖고 와도 되고.”
한립은 영석이 든 저물대도 하나씩 던져주었다.
“예!”
그들은 저물대를 받아들고 답했다. 그들이 나간 후 한립은 다시 밀실로 걸어갔다.
* * *
백 년의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종명산맥은 그간 몇 가지 일들이 발생해 못 보던 얼굴이 늘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했지만 촉룡도 전체로 보면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전히 종문에는 13명의 금선들이 버티고 앉아 큼지막한 일을 상의해 처리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구석에 있는 적하봉은 한립이라는 조용한 내문장로가 들어앉아 그 존재를 기억하는 이들이 몇 되지 않았고 더더욱 산봉우리의 동부를 방문하는 이들도 거의 없었다.
누가 방문을 했다 하더라도 적하봉 자체가 봉쇄된 것을 알고는 그대로 돌아갔을 것이다.
진선급 수사가 백 년 동안 폐관 수련하는 일은 너무 흔해서 얘깃거리도 되지 못했다.
생사관을 작정하고 들어간 진선 장로들은 천년 심지어 만년을 폐관하고 나타나지 않는 일도 흔했다.
백 년간 거의 동부를 떠나지 않은 한립은 귀 큰 승려가 들려준 여덟 구절을 날마다 반복해서 되뇌었다.
유일하게 휴식을 취할 때는 손부정이나 몽운귀가 가끔 목록에 적힌 재료나 종자를 찾아와 바칠 때, 혹은 거원 꼭두각시의 업무를 조정할 때 정도였다.
지금 밀실 안은 먼지조차 내려앉지 못할 만큼 고요하고 차분했다.
푸른 장포를 입은 한립 뒤에서 진언보륜이 유유히 돌아가면서 108개 도문이 전부 반짝반짝 법칙 파동을 방출하는 중이었다.
법결을 거두고 보륜을 거두자 밀실 안은 갑자기 금제가 사라진 듯 공기의 흐름과 빛줄기 속에 떠있는 먼지가 자유롭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휴, 드디어 전부 회복이 되었구나…….”
가볍게 숨을 내쉰 한립은 오랜만에 일어나 밀실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적하봉의 청량한 공기가 지금 그의 기분과 같았다.
햇살이 따사로워서 눈 덮인 산봉우리에도 온기가 감돌았다.
높이 날아오른 한립은 늘 가던 골짜기에서 여덟 구절에서 깨우친 새로운 신통을 시험해 보려다가 몽천천을 포함한 대여섯 명이 산봉우리 약재밭에 모여 있는 것을 보고 그곳으로 내려갔다.
“려 장로님!”
그를 보고 서둘러 예를 취한 무리는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한립의 시선은 수산수에게로 향해있었다.
데리고 온 뒤로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시종들이 돌보게 했는데 어느새 합체 중기에 이르러 있었다.
그러나 그가 진짜 보고 있는 것은 쌍두사응수가 아니라 그 목에 타고 있는 푸른 괴조(怪鳥)였다.
머리가 기이하게 크고 목은 가느다란 웬만한 성인 두 배만 한 괴조는 가슴 앞에 커다란 살 주머니가 달려있었다.
자기보다 훨씬 몸집이 큰 쌍두사응수에 탄 괴조는 사방을 내려다보면서 위세를 부리고 있다가 한립이 다가오자 깜짝 놀란 것처럼 두 날개로 머리를 감싸고 겁먹은 눈빛을 보냈다.
몽천천의 부드러운 눈길에 겨우 안정을 되찾은 괴조는 쌍두사응수 위에 엎드려 날개 틈으로 한립을 관찰했다.
“……이 녀석이 염우가 맞더냐?”
“예, 염우가 맞습니다.”
의아한 한립의 물음에 몽천천이 미소를 머금고 답했다.
“백 년간 못 본 사이에 거의 원영기에 이르렀구나.”
“그러니 말입니다. 려 장로님께서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정말 많이 먹습니다. 분부하신 대로 풍령초 외에 다른 영초와 단약은 일절 주지 않았는데 가끔 몰래 적하봉을 빠져나가 바깥에서 무엇을 잡아먹고 돌아오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한립은 바닥에 나른하게 엎드려 있는 쌍두사응수와 그 목에 탄 염우를 번갈아 보았다.
“이 둘은 어찌 된 것이지?”
“2년 전에 염우가 처음으로 몰래 적하봉을 빠져나갔다가 화신기 요수를 마주쳐 쫓기는데 수산수가 나서서 한입에 요수를 잡아먹고 구해준 일이 있습니다. 그 뒤로 친해진 것 같더라고요.”
“보아하니 겁도 없이 그 요수를 잡아먹으려 달려들다가 거꾸로 쫓긴 게 아닌가 싶구나! 그렇지, 네 오라비와 손부정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이냐?”
“벌써 7, 8년 전에 돌아왔습니다. 출타해서 무슨 깨달음이라도 얻었는지 둘 다 원영 후기로 들어서기 위해 폐관 수련에 들어가 아직까지 나오지 않고 있지요! 그들이 갖고 돌아온 영약은 약재밭에 심어두었습니다. 아, 이것들은 종자입니다, 장로님.”
몽천천은 저물대를 꺼내 한립에게 바쳤다. 이에 한립은 저물대를 의식으로 살피고 약재밭까지 둘러보고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찾아온 종자와 보조재료의 양이 상당해서 잘만 키우면 수십 번 제련할만한 재료를 모을 수 있을 듯했다.
그들의 수행에 쉽지 않았을 것인데 얼마나 고생하고 돌아왔을지 훤했다.
“몽운귀와 손부정이 아주 잘 해주었구나. 난 다시 폐관에 들어갈 수 있으니 네가 단약을 전해 주거라. 경지를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게다.”
“오라버니와 손 오라버니를 대신해 감사 올립니다.”
한립이 단약병 두 개를 몽천천에게 내주자 소녀가 감사를 표했다. 한립의 손짓에 푸른빛이 날아가 약재밭의 영약 백여 그루를 뽑아냈다.
이파리에 맺힌 이슬과 잔뿌리의 흙까지 하나도 유실되지 않고 둥둥 떠올라 그를 따라 동부로 날아갔다.
영약들이 아직 어려서 녹색 액체로 성장을 촉진하려면 동부 안의 약재밭에 옮겨 심어야 했다.
* * *
반 시진 후, 적하봉 영지.
돌멩이들이 가득 쌓여 있는 황야에 푸른 둔광이 날아들었다. 경치 좋은 산골짜기였던 이곳은 한립이 역전진륜 신통을 수련하는 백 년 동안 양쪽 산봉우리가 무너져서 지금의 모습이 되고 말았다.
허공에 뜬 한립은 숙연한 얼굴로 몸에서 특이한 파동을 퍼트리고 있었다. 두 눈에서 금빛을 방출한 그는 별안간 강대한 의식으로 주변 백 리를 뒤덮었다.
수결을 맺지도 않고 두 눈동자에 깨알 같은 주술문자들이 떠올라 예전에 귀 큰 승려에게 들었던 구절 중 세 구절을 만들었다.
세 구절은 승려가 읊조렸던 때와는 달리 각 글자의 배열이 마구잡이로 섞여 있었다. 사실 구절이 본래 지니고 있던 함의는 중요치 않았다.
그 글자들 자체가 특수한 힘을 지녀서 한립은 거기에 강대한 의식의 힘을 더해 ‘법언천지(法言天地)’라는 특유의 신통을 깨우칠 수 있었다.
“바람아 불어라.”
휘이잉…….
한립의 말 한마디에 황야의 맑은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어 광풍을 일으켰다. 황야에 쌓인 눈과 누런 흙먼지 그리고 돌멩이들까지 바람을 타고 날아올라 시끄럽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벼락이여 내리쳐라.”
이번에는 고공의 먹구름이 거대한 검은 소용돌이를 만들어서 그 가운데에서 어두운 남색 뇌전을 번득였다.
콰르릉!
항아리 굵기의 굵직한 뇌전 기둥이 떨어져서 바위와 돌멩이를 가루로 만들었다. 뇌성이 연달아 들려오고, 뇌전 기둥이 비처럼 꽂힌 황야는 갈수록 피폐해졌다.
대지의 바위와 돌멩이들이 새까맣게 타서 남색 뇌전을 타닥거렸다. 한립은 표정 변화 없이 또 소리쳤다.
“하늘과 땅이여 뒤집혀라!”
삽시간에 하늘과 땅의 빛깔이 달라졌다. 무시무시한 힘이 천지를 뒤덮자 눈앞이 번쩍한 한립은 발아래 먹구름과 뇌성이 가득한 것을 알아차렸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끝없이 펼쳐진 대지가 머리 위에 걸려 있었다. 바위와 돌멩이들이 붙은 땅에 거대한 산봉우리들이 종유동굴의 종유석마냥 매달려 있었고 그중 큰 것은 그의 적하봉이었다.
기이한 일은 모든 사물이 뒤집혔는데 떨어질 생각도 않고 흙먼지조차 그대로 붙어있다는 사실이었다.
한립은 주위를 살피다 미소를 띠고 손뼉을 짝! 쳤다.
순식간에 천지가 뒤집혀 먹구름, 뇌전, 광풍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원상태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립의 두 눈에서도 주술문자가 사라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효과가 더 좋은걸? 강적을 만나면 잘 써먹을 수 있겠어.”
법언천지 신통은 실질적으로 강력한 환술의 일종으로 진법이나 공법의 보조가 필요 없었다.
의식의 힘으로 일정 구역을 장악하고 주술을 외면 풍경이 바뀌어 적을 환상 속에 빠트릴 수 있었다.
상대의 의식이 한립보다 강하지 않고 특수한 법보로 몸을 보호하고 있지 않는 한 법언천지 신통에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일다경이 흐르고 한립은 자신의 동부로 돌아갔다.
밀실에 앉은 그는 무릎 위에 섬세하게 화단 그림이 새겨진 보라색 옥판을 꺼내 올려놓았다.
평요자의 보라색 옥함 속에서 얻은 옥판은 의식을 봉하는 금제가 걸려 있어 줄곧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진언보륜의 도문도 회복했으니 진실안을 써보려고 한 것이다.
명청령안과 비교해 108도문이 지탱하는 진실안은 환술을 깨거나 의식 봉인 금제를 무력화시키는데 열 배 이상 효과가 좋았다.
웅!
그의 등 뒤로 금빛 고리가 떠올랐다.
이어서 주문 소리와 함께 고리 중앙에 금색 눈이 수직으로 천천히 떠져서 금빛 시선으로 보라색 옥판을 바라보았다.
옥판의 도안에 금빛이 일더니 주술문자들이 진실안의 투시에 저항하려 했다. 하지만 진실안의 금빛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옥판을 비추었다.
한립은 자신의 두 눈이 아닌 진실안을 통해 옥판을 바라보았다. 금빛이 흐른 옥판에 화단 그림이 물결처럼 떠올라 그 아래 금빛 모래에 손으로 적은 듯한 금전문들이 늘어났다.
한립의 기분이 대번에 좋아졌다. 짐작대로 금빛 모래 위 글자들은 오매불망하던 도단의 약방이었다.
“뇌지금액(雷芝金液), 도령화예(筡靈花蕊), 유무초(幽霧草), 부생과(浮生果), 천조삼(天造蔘)…….”
대부분 낯선 재료의 이름들을 읽어나가자 뜨거워졌던 가슴이 차차 식었다. 이 영약들을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주재료인 뇌지금액만 해도 구중천에 산다는 탄뢰수(呑雷獸)가 십만여 년의 세월 동안 막대한 구천진뢰(九天眞雷)를 집어삼켜야 체내에 일정 확률로 쌓였다.
그래서 뇌지금액이 뇌전 속성의 법칙의 힘을 지닐 수 있었다. 이런 재료들은 그냥 오랜 시간을 들인다고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운이 따라줘야 했다.
그렇다고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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