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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609화 (1,366/2,000)

1609화. 귀 큰 승려

*

펑!

진언보륜의 시간도문 하나가 둔탁한 폭음과 함께 어둑해져서 잿빛으로 변했다.

“어째서?”

통제를 벗어났을 뿐 의식연계는 유지되던 보륜 중 잿빛으로 변한 시간도문과의 연계가 단절되었다.

괴이하기 짝이 없는 신비함 힘이 무언가를 그의 마음속에서 앗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한립은 진언보륜에서 어렵게 시선을 옮겨 빛의 장벽을 지켜보았다.

시간도문 하나가 암담해진 후 장벽 위의 풍경은 약간 또렷해져 있었다. 어떤 산 정상에 몇몇 신영들이 서 있었고 고공에는 다채로운 빛깔의 물건들이 반짝였다.

그가 더 자세히 보려고 명청령안을 발동했을 때 펑! 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또 다른 시간도문이 암담한 잿빛으로 변해있었다.

굳은 얼굴로 그것을 본 한립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어서 펑! 진언보륜의 시간도문 또 하나가 빛을 잃었다.

진언보륜의 시간도문은 일정 간격으로 하나씩 꺼져갔다.

뭔가를 깨달은 한립은 빛의 장벽에 시선을 집중했다. 과연 두 개의 시간도문이 암담해진 뒤로 장벽의 풍경은 변해있었다.

녹음이 푸른 거산 정상에 울창하게 자라난 나무와 기암괴석들이 자라 있었고 그 주위로 운해가 뿌옇게 껴있었다.

괴상한 생김새의 암석과 나무들 사이로 새파란 원형 제단이 우뚝 솟아 있었는데, 군데군데 갈라진 틈에 이끼가 껴서 아주 오래된 것처럼 보였다.

돌 제단 주변에 있는 다섯 명의 신영들은 하나같이 괴이했다.

키가 큰 신영은 대나무처럼 마르고 길쭉한 몸에 헐렁한 노랑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거기에 볏짚 같은 누렇고 푸석푸석한 머리카락과 나무 껍데기처럼 울퉁불퉁한 피부가 더해져 영계에서 보았던 목족(木族) 인물을 생각나게 했다.

황포 목인(木人) 옆의 작은 신영은 머리는 물통처럼 크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몸집이 가늘어 져서 언제라도 푹 고꾸라질 것처럼 생겼다.

세 번째 신영은 손발이 유난히 커서 손이 부채만 하고 헐벗은 새빨간 상반신에는 이상한 문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화염처럼 붉은 머리카락에서는 때때로 정말 불똥이 튀어서 신기했다.

네 번째 신영은 대여섯 살 정도 먹은 어린 여자아이로 둥그런 몸집에 둥그런 머리를 지녀서 공처럼 보였고 팔이 유난히 길어 무릎까지 닿았다.

마지막 신영은 나머지 인물들보다 훨씬 큰 몸집을 무슨 요수 가죽으로 두르고 검푸른 피부가 철탑같이 단단해 보였다.

절대 인족은 아닌 기괴한 모습의 다섯 존재였다.

다섯 명은 서로 몇백 장 정도 거리를 두고 둥글게 모여 서거나 앉아서 혹은 땅에 기대듯 누워서 돌 제단 중앙만을 바라보았다.

돌 제단 중앙에는 후덕한 몸집에 귀가 큰 홍포(紅袍) 승려가 앉아 있었다.

살에 짓눌려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승려는 귀가 길게 늘어져 어깨에 닿았고 품이 넉넉한 붉은 가사도 그 비대한 몸을 가려주지는 못해 불룩 튀어나온 뱃살이 거의 땅에 끌렸다.

작은 살점의 산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승려를 처음 본 한립은 이런 의심이 들었다.

‘걸을 수는……. 아니, 그보다 일어날 수나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 뒤에는 다른 점들이 눈에 띄었다.

승려가 걸친 가사는 각종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그 자체로 비범한 보물이었고, 팔에 차고 있는 벽옥 염주도 알알이 현묘한 검은 빛과 주술문자를 품고 있었다.

귀 큰 승려의 비대한 피부조차 보광을 머금고 있어 마치 불상을 앞에 둔 것처럼 경건한 감정을 들게 했다.

승려는 입을 떼고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 같았다.

화아아-

그의 입술 사이에서 오색 주술문자들이 날아올라 오색 광채로 주변을 감싸고 천지와 은은하게 공명했다.

빛의 알갱이들이 흩어지면서 광풍이 불어 마른하늘에 붉은 비가 쏟아져 내리더니 빗물이 닿는 곳에는 얼음이 맺혔다.

이 엄청난 기현상이 자욱한 운해를 요동치게 만드는데도 돌 제단 주변의 산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동시에 귀 큰 승려의 머리 뒤쪽에서 거대한 금색 구름이 떠올라 반짝거렸고, 상서로운 구름은 허공에 눈에 보이는 파문을 일으켰다.

기이하게 생긴 인물들은 천기현상에는 일절 눈길도 주지 않고, 오직 귀 큰 승려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취한 듯 빠져들어 있었다.

빛의 장벽에 비춘 귀 큰 승려는 한동안 이야기하다가 말을 멈추었다. 허공의 오색빛이 천천히 흩어져 사라지고 하늘도 조용해졌다.

갑자기 황포 목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승려를 향해 멀리서 예를 올리자 승려와 다른 인물들이 그를 쳐다보았다.

황포 목인은 맨손으로 허공에 선을 그어가면서 의문점들을 질문하고 있었다. 다른 신영들도 비슷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지 진지하게 승려의 대답을 기다렸다.

질문을 듣고 앙천대소(仰天大笑)하는 귀 큰 승려의 살들이 출렁였고 동시에 산봉우리도 그와 같이 웃는 것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한립은 경악해 웃음만으로 천지에 영향을 미치는 귀 큰 승려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졌다. 웃음을 그친 귀 큰 승려는 두툼한 손을 움직여가며 황포 목인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었다.

그 몇 마디에 큰 깨달음을 얻은 황포 목인이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다른 인물들도 차례로 일어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을 묻고 승려에게 예를 올리고는 다시 앉았다.

귀 큰 승려가 이야기할 때마다 그들은 매우 집중해서 귀를 기울였다. 한립도 그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지만 빛의 장벽의 화면은 또렷해도 소리는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보륜의 시간도문이 하나씩 빛을 잃을 때마다 빛의 장벽에 떠오른 장면은 안정적으로 변했고 드문드문 작은 소리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좋았어!’

귀 큰 승려가 무슨 말을 하면서 입술 사이로 오색 주술문자들을 방출해 광채가 다양한 화초와 수목들 그리고 한 번도 보지 못한 기이한 맹수들을 만들어냈다.

이번에도 다섯 괴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질문하고 승려의 몇 마디 답에 흡족한 얼굴로 인사를 올렸다.

한립은 무슨 말이 오가는 것인지 듣고 싶어 발을 동동 구를 지경이라 어두워지던 시간도문을 걱정하던 마음이 어서 빨리 도문들이 더 암담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잠시 후 빛의 장벽의 화면이 반짝이지 않고 고정되자 몇몇 단어들이 크게 들려왔다. 저도 모르게 장벽에 바짝 다가앉은 한립은 수결을 맺고 선령력을 두 귀로 흘려보내 청각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온화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치는 목소리에 자연스럽게 집중되었는데 들리는 단어 하나하나가 무척 낯설었다.

잠시 귀를 기울이던 한립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듣기만 해도 마음이 울리고 머릿속에 현묘한 변화가 일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변화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이게 웬 떡인가 싶어 한립은 승려의 목소리를 통으로 외워나갔다. 그러자 한립의 몸이 금빛, 푸른빛, 은빛 등 각종 색으로 바뀌면서 다양한 공법과 신통들이 승려의 목소리에 반응해 자동으로 운용되기 시작했다.

정신이 번쩍 든 한립은 더욱 의식을 집중해 겨우 일곱 구절을 듣고 구름 속에 떠오른 듯 괴인들처럼 아득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

다양한 빛으로 점점 더 밝게 빛나던 그의 몸에서 은빛 뇌전들이 뭉쳐 뇌붕 허상을 만들었다.

푸른빛은 웅웅 선회하다 거대한 새로, 금빛은 가슴을 두들기며 포효하는 거원으로 변했다. 별안간 한립이 지금까지 수련했던 진령 허상들이 전부 떠올라 그를 둘러싸고 선회했다.

다른 공법도 마찬가지였다.

체내의 선령력이 더없이 빠르게 돌아 그 속도를 감당하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귀 큰 승려가 말한 여덟 번째 구절을 들을 무렵 한립은 꿈을 꾸듯 이상한 일을 겪었다.

그는 부르르 몸을 떨며 사지와 백골이 나른해지면서 단전이 따끈해지는 것을 감지했다. 그 편안함 속에 몸속에서 무언가 펑!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움찔한 한립의 얼굴이 밝아졌다.

펑! 펑! 펑! 펑! 펑! 펑! 펑! 펑!

여덟 개의 빛덩이가 떠올라 이전에 있던 24개의 빛덩이와 마찬가지로 휘황찬란한 빛을 반짝였다. 놀랍게도 단번에 선규 8개를 뚫은 것이다.

천지간의 선령력이 천 줄기의 강물처럼 단전으로 흘러들어 그의 단전에서 소용돌이쳤다. 맑은 정신으로 몸 상태를 확인한 한립은 허공의 진언보륜을 올려다보았다.

108개의 시간도문 중 절반이 꺼져 있었다.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되돌릴 수도 없었기에 승려의 아홉 번째 구절에 귀를 기울였다.

여덟 구절을 듣고 선규 8개를 한 번에 뚫었으니 꿈같은 수련속도가 아닐 수 없었다. 아홉 번째 구절, 열 번째 구절을 듣고 나면 또 어떤 변화를 겪게 될 것인가?

안타깝게도 한립은 그걸 확인할 수는 없었다.

아홉 번째 구절을 읊조리던 귀 큰 승려가 말을 멈추고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한립이 있는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 다섯 괴인도 같은 곳을 보았고, 황포 목인이 벌떡 일어나 분노에 찬 노성을 내질렀다. 이전과 달리 전혀 현묘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상스러운 말 같았다.

‘이런, 들켰구나!’

긴장한 한립이 무언가를 해보기도 전에 귀 큰 승려의 입술이 움직였다.

쾅!

빛의 장벽이 조각나 터져나가 빛의 알갱이로 흩어졌다.

웅!

공간균열도 순식간에 닫히고 허공의 진언보륜 상에 남아 있던 시간도문들이 연달아 어두워지며 사라졌다.

울컥!

한립은 비틀거리며 피를 뱉어내고 창백한 얼굴로 체내의 혼란한 선령력을 다스렸다.

까딱 잘못했으면 주화입마에 들뻔한 그는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하얀 약병을 꺼내 단약들을 전부 털어 넣었다.

몸 곳곳에서 퍽퍽! 소리가 울리며 막힌 기혈들이 뚫려 나갔다.

눈을 감고 있는 한립의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 하얗게 변했다 하는 것만 보아도 무척 위험한 상황이었다.

반나절 만에야 파리한 얼굴로 눈을 뜬 한립은 기운이 상당히 진정되어 있었다.

다행히 경맥을 안정시키는 단약을 제때 먹어서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후우!”

한립은 크게 숨을 내쉬며 새로 뚫린 8개의 선규를 떠올리고 밝게 웃었다. 위험은 했지만 승려의 말 몇 마디를 훔쳐 듣고 선규 8개를 뚫었으면 막대한 기연을 얻은 셈이었다.

아홉 번째 선규는 아직 열리지는 않았지만 시간을 좀 들이면 곧 뚫을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0년간 시간도문 수련에만 신경을 써서 새로운 선규를 뚫지 못했는데 한순간에 이런 성취를 이루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

이미 진언보륜에 시간도문 108개가 있어서인지 선규를 뚫어도 도문이 추가되지는 않았지만 괜찮았다.

이번 일로 가장 그를 흥분시킨 것은 승려가 말한 여덟 구절이었다. 자세히 음미해볼수록 심오한 구절들은 아무래도 공법 구결 같았다.

“말 몇 마디로 진선경 수사가 선규를 뚫을 수 있게 만들다니, 설마……. 도조라도 된단 말인가!”

중얼거리던 한립은 번득 진언보륜을 떠올리고 불러냈다. 108개 시간도문이 잿빛으로 변해 이전의 신묘함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좋을 수는 없겠지. 승려의 진언(眞言)을 훔쳐 들은 대가로 도문이 전부 빛을 잃었구나!”

한립은 부상 치유용 단약을 꺼내 삼키고 눈을 감았다.

* * *

3일 뒤, 눈을 뜬 한립의 몸은 이미 회복되어 있었다. 그러나 진언보륜의 108 시간도문이 아직도 잿빛이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귀 큰 승려의 그 찰나의 시선이 보륜의 시간도문을 망가트렸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감속 신통을 펼쳐 보았지만 도문이 반응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금빛 파문영역 역시 방출되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역전진륜 신통을 시도했지만 한립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져만 갔다.

진언화륜경은 현재 그의 주 수련 공법이었다. 그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진언보륜의 시간도문이 망가지면 수련 자체가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진언화륜경을 운용해 진언보륜의 시간도문을 감응해보았다.

잠시 후 번쩍 눈을 뜬 그의 표정은 다행히 한결 나아져 있었다. 미미하지만 의식연계가 남아 있었다. 그 말은 시간도문이 회복될 가능성도 있다는 소리였다.

한립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진언화륜경으로 시간도문 회복을 시도하면서 몰래 들은 승려의 진언 8구절을 깨우치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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