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8화. 경이(驚異)
*
거듭 고민을 하던 한립은 결심을 했다.
간절하게 장천병의 내력을 알고 싶기도 했고, 이렇게 고계의 보물이 쉽게 손상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바닥에 작은 병을 내려놓고 진실안을 발동했다. 수직의 눈에서 은은한 금빛이 드리우자 암녹색 작은 병이 부르르 몸을 떨며 떠올랐다.
팟.
작은 병 안에서 쌀알 크기의 하얀빛이 일어나 병 표면의 나뭇잎 무늬가 녹음이 푸른 진짜 나뭇잎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한립이 허상이라 여기고 시선을 떼지 않을 때 작은 병의 빛이 암녹색 소용돌이로 변해 진실안의 금빛을 잡아먹으려 들었다.
화들짝 놀란 한립은 진실안을 감게 했으나 작은 병의 반응은 거기까지였다.
그는 한숨을 돌리고 체내의 선령력을 불어넣어 막 생겨난 25번째 도문에 빛을 일으켰다. 25개 도문이 동시에 빛난 진언보륜의 진실안이 성대한 금빛으로 다시 장천병을 비추었다.
이번에는 뜻밖의 현상이 일어났다.
맹렬하게 반짝인 암녹색 병이 금빛을 잡아먹고 녹색 광선을 반사했다. 광선은 그리 빠르지 않았는데 한립은 왠지 막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녹색 광선은 소리 없이 금색 눈에 닿아 그것을 비취색으로 물들이고 진언보륜을 미친 듯이 떨게 했다. 왜곡된 진언보륜 자체가 불안정하게 변해서 곧 붕괴할 것 같았다.
‘이런!’
그걸 본 한립은 서둘러서 보륜을 멈추려다 식겁했다. 금빛을 잃은 보륜이 엄청난 흡입력으로 체내의 선령력을 쫙쫙 뽑아갔기 때문이다.
그는 속으로 끙! 앓으면서도 선령력을 차단하지 않았다. 대량의 선령력을 받아들인 보륜이 평온해지자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순식간에 한립 체내의 선령력 3분의 2를 뽑아간 보륜은 녹색 빛이 사라진 채 진동을 멈추었다.
진언보륜과 진실안이 상하지 않은 것에 안심한 한립은 보륜을 거두고 급히 작은 병을 들어 올려 섬세하게 살펴보았다.
“내 너를 줄곧 너무 얕보고 있었구나! 진실안의 능력을 높여 다시 시도해봐야겠어.”
멀쩡한 병을 들고 한립은 괜히 놀란 것에 쓴웃음을 흘렸다. 그는 다시 병을 목에 걸고 방석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리고 비경에서 외워온 진언화륜경 구결을 복기했다.
1성 구결은 익숙했고 2, 3성 구결을 찬찬히 뜯어보아도 진실안과 연관된 내용은 더 찾을 수 없었다.
앉은 자리에서 그렇게 7일 밤낮을 보낸 그는 천천히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답을 찾지 못한 그의 눈에는 실망 대신 환희가 가득했다.
공법을 연구하면서 진언보륜을 몇 차례 불러냈었는데 25번째 시간도문이 계속 남아 있었다.
장천병이 응결한 수정 알갱이를 흡수해 만들어진 시간도문은 영구적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두고 봐야 할 일이었다.
그 밖에 공법 구결에서도 반가운 발견을 했다. 3성 구결에 ‘역전진륜(逆轉眞輪)’이란 신통을 익히면 진언보륜의 감속 능력을 뒤집어 시간을 가속할 수 있었다.
이 신통은 적이 아닌 술법을 펼치는 본인에게 쓸 수 있었고 진언보륜을 체내에 넣은 상태에서 가속을 진행할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신통을 사용하는 전제조건은 진언보륜에 18개 이상의 도문을 응결하는 것이어서 몇 성까지 공법을 수련했는지와는 무관해 보였다.
다른 수사들이었다면 3성 공법까지 익혀야 도문 18개를 응결할 가능성이 있겠지만 벌써 25개의 도문을 응결한 그는 바로 역전진륜 신통을 시험해 볼 수 있었다.
실력을 단번에 증가시킬 수 있는 신통이라 한립은 2성 공법을 수련하려던 계획을 변경해 먼저 역전진륜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전진륜을 익히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가 연구해온 진언화륜경과 상반되어서 전혀 도움은 되지 않고 오히려 방해만 되었다.
한립이 밀실 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수결을 맺자 등 뒤의 진언보륜이 천천히 회전해 금빛을 반짝였다.
18개의 도문에 빛이 들어온 뒤 그의 수결과 주문이 달라졌다. 진언보륜이 웅웅거리면서 점점 느릿하게 돌더니 나중에는 허공에 멈춘 것 같았다.
“돌아라.”
멈추었던 진륜이 한립의 명령에 반대 방향으로 돌고 있었다. 희색을 드러낸 한립이 보륜을 체내로 집어넣으려는데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피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왔다.
그가 수결을 멈추자 진언보륜은 마구 떨리다가 원래 상태로 변해 그의 체내로 들어갔다.
“생각대로 쉽지는 않구나. 선령력을 운용하는 방식만 바꾸어서는 조종하기 어렵겠어. 수백 번 시도하면서 천천히 조정을 해봐야지”
한립은 입가의 혈흔을 쓱 닦아내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익숙하지 않은 운용에 선령력이 충돌해서 내상을 입을 뻔했다.
* * *
3년 후.
적하봉 영역의 어느 산골짜기 안에서 흐릿한 금빛이 허공을 이리저리 오가는데 그 속도가 불가사의할 정도로 빨랐다.
더욱 신기한 것은 금빛의 잔영이 남기는 궤적이 불규칙해서 분명 앞으로 나아갈 듯하다가 또 반대 방향에 나타난다는 점이었다.
금빛이 돌연 허공에 멈춰 키 큰 청년, 한립의 모습으로 변했다.
붉은 얼굴로 벅찬 감정을 드러낸 그의 주변에 은은한 금빛이 한겹 드리워 기이한 파동을 발산했다.
“도문 25개를 발동하는 동안 속도가 계속 빨라졌어. 보륜의 도문이 증가하면 속도가 더 높아질 여지가 남아 있다는 거겠지. 그저 선령력 소모가 상당한 것이 문제인데…….”
그가 중얼거리는 동안 윤곽의 금빛이 옅어지다 체내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체내의 진언보륜 속으로 흡수된 것이었다.
처음 1년 동안은 선령력 운용 방식이 서툴러서 역전하는 보륜을 몸속으로 넣기까지 빈번하게 실수를 했었다.
아직 멀리 있다고 안심하고 날아가다가 산봉우리에 부딪혀 통째로 부숴 먹은 적만 수백 번이었다. 그 때문에 주변 천 리의 풍경이 상당히 변하고 말았다.
전부 자신의 영지가 아니었으면 분명 시선을 끌었을 게 분명했다.
그나마 같은 공법을 기반으로 한 신통이라 다른 것만은 아니라서 수많은 실패 끝에 점점 역전진륜을 다루는 법을 익힐 수 있었다.
이제는 바깥으로 불러낼 필요도 없이 체내에서 역전을 시켜 비술을 펼치는데 드는 시간도 크게 줄어들었다. 이 신통과 뇌진 둔술을 함께 사용하면 평범한 금선경 강자가 쫓아와도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시간을 꽤 지체했으니 이제 그것도 시도를 해봐야겠구나.”
한립은 몸을 돌려 아래쪽 동부로 날아가 밀실에 앉았다. 그의 손에는 반투명한 수정 알갱이가 진실안의 금빛에 휩싸여 있었다.
역전진륜을 익히는 데 전념하고, 또 25번째 시간도문이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지 지켜보기 위해 꼭두각시를 시켜 생성된 녹색 액체를 영약들에게 주도록 하고 최근에야 수정 알갱이를 하나 응결했다.
수정 알갱이가 갈라지면서 그 안에서 금실 한 가닥이 튀어나와 진실안 속으로 들어갔다.
강력한 일격을 맞은 것처럼 몸을 떤 한립은 이번에는 진실안이 눈을 감게 만들지 않도록 금실이 천천히 녹을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진언보륜에 하얀빛이 응결해 반투명한 시간도문을 만들어냈다.
26번째 시간도문이었다.
“좋았어!”
한립은 활짝 미소를 짓고는 진실안이 수정 알갱이를 흡수해 영구적인 시간도문을 만들어낸다고 믿게 되었다.
그 말은 즉, 매달 수정 알갱이를 하나씩 응결할 때마다 진언보륜의 시간도문을 늘릴 수 있다는 소리였다.
진언화륜경을 수련하는 다른 수사들은 수백 수천, 심지어 수만 년을 공들여 선규 두 개를 뚫을 때마다 시간도문 하나씩을 얻었지만, 그는 1달에 한 번 시간도문을 늘릴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아직 그 한계가 정해져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24개의 시간도문이 십여 배의 감속 효과를 냈고, 도문 6개가 늘어나 때마다 비교적 큰 변화가 있었다.
만일 30개, 36개 심지어 60개 108개의 도문을 지니게 된다면 어떤 위력을 발휘하게 될 것인가! 이제는 2성 공법을 수련하면서 매달 꼬박꼬박 수정 알갱이로 도문의 수만 늘리면 만사형통이었다.
* * *
시간은 초원을 내달리는 준마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10년 동안 한립은 2성 공법을 수련하면서 수정 알갱이를 진실안에 융합시켜 벌써 진언보륜의 시간도문은 108개나 되었다.
그 후로는 어떤 한계에 이른 듯 진실안의 금빛이 수정 알갱이를 비추어도 더는 도문이 늘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한립은 전혀 낙담하지 않았다.
진언화륜공에 적혀 있기로는 3성을 익혀도 보륜에 고작 18개의 시간도문이 생기는 게 다였고 촉룡도 역사상 성공한 사례도 없었다.
그의 진언보륜 영향을 미치는 범위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경이롭게도 천여 배의 감속 효과를 지니게 되었다.
꼭두각시에게 공격을 시켜본 결과 보륜의 영향권에 들어오면 움직임이 거의 멈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역전진륜 신통을 사용하면 그 가속 효과 역시 상상을 초월해서 한립의 신영이 거의 깜빡거리듯 사라지는 것만 볼 수 있었다.
다만 두 신통 모두 선령력 소모가 극심해서 위급한 순간이 아니면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
지금 밀실 안은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두 손으로 수결을 맺고 앉은 한립은 등 뒤에 띠워놓은 진언보륜에서 108개 시간도문이 내뿜는 후광 때문에 순금으로 만든 불상처럼 빛났다.
체내에서 선령력이 빠르게 빠져나가서 진작 선원석을 꺼내 들고 있었다.
난해한 주문이 중얼중얼 들려오고 보륜이 흐릿하게 변해 금빛 실들이 시간도문에서 흘러나와 고리의 중앙으로 몰려들었다.
“눈을 떠라.”
금빛 실이 뭉쳐 만들어진 진실안이 세로로 떠져 금빛 눈동자를 드러냈다. 눈을 감은 한립은 진실안을 통해 주위를 바라보았다.
밀실 벽과 금제가 투명하게 변해 무수한 영력의 흐름과 주술문자들이 손에 잡힐 듯 보이다가 더 먼 곳의 몽운귀, 몽천천 등이 있는 적하봉 풍경도 눈에 들어왔다.
허공에 떠서 그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또렷했다.
진실안의 환상을 꿰뚫어 보는 능력은 처음에는 명청령안과 비슷한 듯했지만 도문이 늘어나자 위력이 대폭 향상되어 그 통찰력은 명청령안의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
파멸법목과 명청령안을 합친 신통도 이제 진실안에는 미치지 못했다. 한립은 심호흡하며 녹색 작은 병을 꺼내 진실안으로 관찰하려는데 이변이 발생했다.
작은 병이 저절로 떠올라 녹색 태양처럼 강렬한 빛을 방출했다.
녹색 빛이 품은 거대한 힘에 속수무책으로 밀려나 벽에 등이 닿은 한립은 놀란 표정을 드러냈다.
진언보륜이 그의 등 뒤에서 날아가 평소보다 밝은 빛을 발하고 있었고, 특히 진실안 눈동자 바깥의 주술문자들이 살아 움직이듯 꿈틀거렸다.
마치 두 보물이 서로 호응하는 것 같았다. 선령력을 거침없이 내뿜어 상황을 통제하려던 한립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렸다.
장천병은 물론 진언보륜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가 다른 수를 쓰기 전에 진실안이 금빛을 내뿜어 녹색 병 속으로 흡수시켰다.
웅!
급속도로 커진 녹색 병 위에서 주술문자들이 꿈틀꿈틀 요동치고 있었다.
쉬익!
굵직한 녹색 빛기둥이 병을 떠나 허공을 찢고 들어갔다.
쿠르르…….
허공은 일그러져 검은 구멍을 만들었고, 그 안에서 무궁무진한 수정빛이 분출되었다. 맑은 물이 졸졸 흘러내리는 것처럼 공간균열에서 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한립은 우두커니 서서 진언보륜과 녹색 병의 변화가 화(禍)인지 복(福)인지 몰라 주춤거렸다.
그의 통제에 따르지는 않아도 선령력을 단절시키면 이런 현상이 사라질 것을 알았지만 그래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가 머뭇거리는 동안 또 다른 이변이 발생했다.
촤락!
공간균열이 느닷없이 위아래 양옆으로 쫙 벌어져서 더 많은 수정빛을 콸콸 쏟아냈다. 반짝거리는 빛들은 커다란 빛의 장벽으로 변해 한립의 시야를 가렸다.
우웅!
진언보륜도 돌연 쾌속으로 회전하더니 시간도문의 진동이 허공의 왜곡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안색이 수시로 달라지던 한립은 이를 악물고 변화를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빛의 장벽 빛들이 이리저리 흘러 무언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고 색깔도 다양하던 빛의 흐름이 몇 개의 윤곽을 만들어냈다.
아직 흐릿했지만 몇몇 인영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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