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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607화 (1,364/2,000)
  • 1607화. 진실안(眞實眼)

    *

    대략 두 시진이 흘렀을 때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가며 2성 공법을 암기한 한립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2성 공법에는 진실안(眞實眼)이라는 비술이 덧붙어 있었다. 환술과 허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신통이었다.

    진실안 비술을 익히는데 전제조건이 바로 진언보륜을 제련한 후 최소한 도문 13개를 응집하는 것이었다.

    한립의 표정이 묘해졌다.

    장천병 덕분에 그는 겨우 공법 1성을 익혀 놓고 진언보륜의 시간도문이 24 개나 되었다.

    두 손으로 수결을 맺은 그의 등 뒤로 진언보륜이 떠올랐다.

    비석에 앉아 이끼나 쪼아 먹던 하얀 참새가 이상한 파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는데 여전히 동작에 거침이 없었다.

    한립은 비석의 공법을 다시 한 번 살핀 뒤 차분히 공법 구결을 읊어보았다.

    파아앗.

    잠시 후 수결을 바꾸고 주문 소리가 거칠어지자 등 뒤의 진언보륜이 급속도로 회전하면서 휘황찬란한 금빛을 방출했다.

    원래 여섯 개만 은은한 빛을 머금던 시간 도문이 하나씩 더 빛나고 있었다. 도문들이 밝아질 때마다 10장 내의 시간 흐름은 점점 더 느려졌고 진언보륜의 회전속도는 빨라졌다.

    쾌속으로 회전해 흐릿해진 진언보륜에서 금빛 실들이 넘실넘실 흘러나와 중앙의 구멍으로 집결했다.

    한립은 선령력이 급속도로 유실되는 것을 느껴 선원석을 꺼내 들었다. 비술은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12번째 도문에 빛이 들어오고 금색 고리가 웅! 크게 울면서 회전을 멈추었다. 중앙으로 모여든 금빛 실들은 엉켜 주먹 크기의 실뭉치를 이루고 반짝거리고 있었다.

    “뭉쳐라!”

    한립의 외침에 금빛 실뭉치가 태양처럼 밝은 빛을 내 눈이 아파진 한립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몇 호흡이 지나 금빛이 어둑해지자 한립은 눈을 비비면서 금빛 고리의 변화를 확인할 틈도 없이 또 다른 선원석을 꺼내 선령력을 보충했다.

    한참 후에야 몸을 돌린 그는 진언보륜이 약간 커지고 그 중간의 구멍에 금빛 눈이 꼭 감겨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게 진실안이라는 건가…….”

    한립은 다시 수결을 맺고 진실안 비술 구결에 따라 금색 눈을 발동해 보았다.

    이번에는 선령력이 대량으로 유실되는 현상 없이 진언보륜의 도문 12개가 동시에 밝아지더니 금색 눈이 중앙으로부터 좌우로 떠지며 금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눈알 전체가 금색이었지만 중심으로 갈수록 금빛이 짙어져서 순금을 부어 놓은 것 같았다.

    눈동자 바깥으로는 기이한 주술문자들이 깨알같이 작게 적혀 있었는데 빛이 아주 약해서 눈동자보다 못했다.

    눈꺼풀이 완전히 다 떠지고 진실안의 기이한 주술문자들이 날아올라 눈동자로 은은한 금빛을 투사했다.

    얼른 금빛 눈을 투과해 주변을 살핀 한립은 푸른 산들이 사라지고 반투명한 공간장벽과 그 바깥의 잿빛 안개가 나타나는 것을 확인했다.

    ‘겨우 이게 다란 말인가?’

    진실안의 위력이 이것뿐이라면 그의 명청령안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가 천천히 움직이자 등 뒤의 금빛 고리가 이동해 금색 눈도 바라보는 방향이 바뀌었다.

    한립은 부서진 비석을 보고 있었다.

    비석에 갑자기 옅은 하얀빛이 어리더니 연기처럼 변해 그의 시선을 가리고 비석에 앉은 하얀 참새도 천지원기 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했다.

    놀란 한립은 전력으로 진언보륜을 운용했다.

    금빛 고리의 도문 24개가 빛을 발하자 거의 실체화된 금빛이 비석의 하얀 연기를 뚫고 들어갔다.

    우웅.

    비석이 진동하는 통에 놀란 하얀 참새가 날개를 파닥이면서 날아올랐다. 부서진 비석 내부에서 미약하지만 익숙한 시간 파동이 느껴졌다.

    “이 비석 자체가 시간의 힘을 함유한 법기였다니!”

    이어서 그가 눈을 크게 뜰만 한 일이 벌어졌다.

    비석의 부서진 단면에서 금빛이 차올라 이리저리 교차하더니 사라진 부분을 채우기 시작했다. 천천히 비석과 양옆의 짐승 조각까지 보수를 마치자 비석은 새것 같아졌다.

    “진실안에 옛것을 복원하고 법기를 보수하는 능력이 있단 말인가!”

    한립은 깜짝 놀라 중얼거리다 땅을 박차 비석으로 다가갔다. 손바닥으로 비석의 윗부분을 만져보니 허공이었다.

    “아……. 옛 모습을 보여주는 것뿐이었어.”

    한립은 웃음을 흘리며 완전해진 비석을 올려다보았다. 두 단락밖에 없던 구결 위로 금전문으로 된 새로운 단락이 복원되어 있었다. 바로 진언화륜경 제3공법이었다.

    한립은 엄청난 기연을 만났다는 것을 깨닫고 기뻐했다.

    “이제 1시진 밖에 남지 않았다.”

    하얀 참새가 딱딱한 목소리로 시간을 알려주었다. 한립은 감정을 가라앉히고 의식을 집중해 묵묵히 진언화륜경 3성 공법을 외워나갔다.

    전력으로 도문 12개를 발동하면서 동시에 진실안을 일으키느라 선령력이 물처럼 줄줄 새어나가 선원석을 쥐고 보충을 했는데도 반 각밖에 버티지 못했다.

    수직으로 된 금빛 눈이 사라지고 거대 비석의 윗부분이 깜빡거리다 금빛으로 흩어지는 것을 보고 한립은 진언보륜을 거두었다.

    그는 작게 숨을 내쉬고는 양손에 선원석을 쥐고 실소했다.

    백작곡으로 의심되는 곳을 찾아왔을 때만 해도 이렇게 많은 수확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시간이 되었다.”

    하얀 참새가 비석으로 돌아가 부리를 움직였다.

    “감사합니다. 음……. 선배님.”

    한립은 고민하다가 안전하게 하얀 참새를 선배라 칭했다.

    “난 비경의 금제가 만들어낸 영체에 불과하니 선배랄 것도 없다.”

    “선배님, 묻고 싶은 것이…….”

    한립이 무어라 질문을 하려다가 하얀 참새가 두 날개를 펼쳐 갑자기 그를 향해 달려드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참새와 함께 공간 전체가 밀려들어 그를 밀어내는 것 같았다.

    팟.

    다음 순간, 반궐곡 중앙 호수에 파문이 일고 한립이 천천히 떠올랐다. 고개를 숙여 보아도 이미 잔잔해진 호숫물은 그를 비출 뿐이었다.

    산골짜기의 빛이 어둑해진 것으로 보아 저녁 무렵인 듯했다.

    * * *

    이튿날 아침.

    적하봉으로 돌아온 한립은 아무도 몰래 동부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금제를 펼치고 바닥에 앉아 하얀 자기 찻잔을 꺼내 들었다.

    무슨 특별한 법보나 보물이 아니라 방금 정당을 지나면서 탁자 위에 있던 것을 가져온 것이었다.

    차칵.

    손끝에 살짝 힘을 주자 찻잔 끄트머리가 부서져 떨어져 나갔다. 한립은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고 수결을 맺어 등 뒤로 진언보륜을 불러냈다.

    반투명한 도문에 하나씩 불이 들어와 24개가 발동되었을 때 은은한 금빛 파동이 밀실 공간을 잔물결처럼 찰랑찰랑 채웠다.

    보륜 중앙에서 수직 눈이 천천히 양옆으로 뜨이고 금색 눈알의 기이한 주술문자가 금빛을 내뿜었다. 한립의 시선을 따라 진실안이 투사하는 금빛도 천천히 부서진 찻잔으로 향했다.

    하얀 찻잔에 금빛이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것 외에 다른 변화는 없었다.

    “평범한 물건은 메우지 못하는 것 같군.”

    그러나 놀란 얼굴은 아니었다. 평범한 물건에 진실안이 통하지 않는다면 다른 조건이 있기 마련이었다.

    침음하던 그가 이번엔 손바닥을 뒤집어 새까만 팔각 보탑(寶塔)을 불러냈다. 보탑은 적을 가두는 진법을 펼칠 수 있는 귀한 보물이었는데 손상이 심해 본래 위력을 내지 못했다.

    그저 탑에 새겨진 주술문자들이 특이해서 연구나 할 겸 갖고 있던 것으로 난간이며 각층으로 통하는 계단들이 섬세하게 만들어진 탑으로 총 7층 중 마지막 층이 부서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보탑을 내려놓은 한립은 진실안을 천천히 움직여 투시하게 했다. 그러나 금빛이 비춰도 사라진 마지막 층은 나타나지 않았다.

    “역시 소용이 없다…….”

    미간을 좁힌 한립은 보탑을 넣어두고 망가진 주홍색 인장을 꺼내서 내려놓았다.

    반나절이 지나 선원석을 쥔 한립 앞에는 열댓 가지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전부 어딘가 망가진 법보나 보물들이었다.

    “백작곡 비경의 비석과 이것들이 뭐가 다른 거지?”

    진실안이 비석에 효과가 있었다면 분명 특별한 점이 있었을 것이다.

    “설마!”

    눈을 빛낸 한립은 푸른 부적으로 봉인된 기다란 백옥함을 꺼냈다. 가볍게 문질러 부적을 떼어버리자 옥함이 달칵 열리면서 진한 약향을 뿜어냈다.

    그 안에는 잎맥이 연한 보랏빛인 영초가 들어있었다.

    녹색 액체로 키워낸 지계 단약의 주재료로 쓰이는 5만 년 정도 된 야담초(夜曇草)였다.

    선원석을 회수한 한립은 진언보륜을 불러내서 24개 도문을 전력으로 운용하며 진실안으로 금빛을 투사했다.

    야담초는 진실안의 주시 아래 급속도로 작아져서 손가락 마디 크기의 이제 막 싹을 틔운 어린잎으로 변했다.

    “역시 그랬어……. 진실안은 시간의 힘을 함유한 물건에만 효과가 있었던 거야!”

    한립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손을 뻗어 다 자란 영초를 만져보고 이것이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의 손바닥에 또 다른 네모난 청록색 옥함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잿빛 돌멩이 모양을 한 외눈박이 거인의 눈알이 들어있었다.

    한립의 조종으로 진실안을 비추자 금빛을 머금은 눈알에서 기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표면의 금빛들이 실처럼 뻗어 나가 이리저리 교차하면서 금색 골격의 거인 형상을 이룬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밀실 안에는 반듯하게 누운 외뿔 거인 환영이 생겨났는데 워낙 체구가 크다 보니 몸 절반이 석벽을 넘어가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한립은 거인 환영을 살피다가 진실안의 시선을 거두었다. 허공에는 잿빛 돌멩이만 덩그러니 떠 있었다.

    숨을 고른 한립은 물방울 크기의 반투명한 수정 알갱이를 꺼냈다. 장천병 녹색 액체를 응결해 만든 시간의 힘을 함유한 수정 알갱이였다.

    진실안의 금빛이 드리우자 수정 알갱이는 눈을 찌를 듯한 하얀빛과 강렬한 영력 파동을 출렁출렁 방출했다.

    한립이 멈칫하며 수정 알갱이를 치우려 할 때 이변이 일어났다.

    차칵.

    수정 알갱이 중간에 균열이 간 것이다. 그 틈으로 금빛 실이 한 줄기 튀어 나가 진언보륜 중간의 눈으로 찔러 들어갔다.

    이에 한립은 보륜이 강력한 타격을 입은 것을 느끼고 비틀거렸다. 이어서 진언보륜이 요동치며 무형의 파동을 터트리려 했다.

    놀란 한립은 재빨리 비술을 멈추고 금색 눈을 감게 했지만, 금빛 실이 불러온 충격은 없어지지 않았다.

    어찌될 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무턱대고 진언보륜을 체내에 돌려놓을 수 없어 한립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금빛 고리의 변화에 집중했다.

    다행히 일각 정도 요동치던 진언보륜은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바로 그때, 눈꼬리가 홱 올라간 한립은 믿기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보륜에 새로 생긴 반투명한 도문을 쳐다보았다.

    ‘25번째 도문이라고?’

    두 눈에 강렬한 남색빛을 일으킨 한립은 도문들을 샅샅이 살펴 정말 시간도문이 25개로 늘어난 것을 확인했다.

    ‘진실안이 시간의 힘을 흡수하는 능력도 있단 말인가?’

    도문이 임시로 늘어난 것인지 아니면 영구적으로 늘어난 것인지 알 수 없어도 무척 놀라운 일이었다.

    “수정 알갱이가 한 알 뿐이라 다음 달에나 다시 실험해 볼 수 있을 텐데. 아무래도 지기 화신 쪽으로는 한동안 수정 알갱이를 보낼 수 없겠구나.”

    한립은 진언보륜을 체내로 회수하고 의복 깊숙한 곳에서 목에 걸어둔 작은 병을 꺼내 들었다.

    수도의 길로 들어서서 내내 그와 함께한 장천병은 강력한 시간의 힘을 지닌 보물이자 그가 가장 정체를 알고 싶어 하는 물건이었다.

    작은 병을 코앞에 두고 표면의 나뭇잎 무늬를 살핀 한립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장천병은 가장 중요한 보물이자 그의 가장 큰 비밀이었다.

    수정 알갱이를 들킨 것만으로 그가 당한 변고를 생각하면 장천병이 세상에 나오면 어떤 풍파가 있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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