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6화. 염우(念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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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가 찾아와서 막막할 때, 커다란 알은 오라비에게도 털어놓기 어려운 속내를 유일하게 드러낼 수 있는 대상이었다. 심지어 거대 알이 함께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빨리 화신기에 이를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천천히 몸을 굽힌 소녀는 힘겹게 자신에게 다가온 새끼 새를 안고 부드럽게 깃털을 쓰다듬어 주었다.
삐약.
새끼 새도 그녀가 손에 든 깃털에 머리를 문지르면서 지저귀었다.
“려 장로님, 이 아이의 이름을 무엇으로 하면 좋을까요?”
“네가 들고 있는 깃털은 그 녀석 어미의 것일 확률이 높다. 녀석을 염우(念羽)라 부르는 것이 좋겠구나.”
“어미의 깃털을 그리워하다라……. 염우, 좋은 이름이네요. 앞으로는 염우라고 부르겠습니다.”
몽천천이 염우라는 이름을 몇 번 읊조리다 밝게 웃음 지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한립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몽천천은 새끼 새를 톡톡 토닥이며 새가 듣든 말든 열심히 재잘거렸다.
“너는 이제 염우야!”
그걸 지켜보던 한립은 새의 턱 아래에 작은 살점이 튀어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미간을 좁힌 그는 몽천천의 손에서 새를 가져와 자세히 살펴보고는 두 날개와 꼬리 밑에서도 은은하게 빛을 머금은 깃털을 찾아냈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인지요?”
“아니다, 알의 내력을 몰라 줄곧 찜찜했는데 이제야 알 것 같구나.”
걱정스러운 몽천천의 물음에 한립이 웃으며 답했다.
“음……. 염우가 대단한 내력을 지닌 것인가요?”
“지금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바람 속성을 지닌 영조라는 것뿐이다. 진령혈맥을 타고났을지도 모르지.”
한립의 말을 들고 몽천천은 새끼 새를 보는 눈빛이 약간 달라졌다.
“염우, 너 대단한 녀석이었구나?”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 새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위 풍경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한립이 그걸 보고 푸른 단약을 꺼내 들었다. 단약은 그의 손에서 천천히 푸른 기운으로 녹아 새끼 새의 부리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삐약 거리는 소리를 멈춘 새끼 새는 사람처럼 트림을 꺽! 해서 몽천천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새끼 새의 눈꺼풀이 스르륵 감기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잠에 빠져들었다.
“내 법력을 이용해 녹여 주었지만 바람 속성을 지닌 단약의 품계가 너무 높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잠든 것이다. 단약의 약성을 다 흡수하면 깨어날 것이니 걱정할 것 없다.”
놀란 몽천천의 얼굴을 보고 한립이 설명해주었다. 소녀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깃털은 잠시 네가 갖고 있거라. 부화할 때까지 염우를 담당하였으니 앞으로도 네가 돌보게 할 것이다.”
“예, 려 장로님!”
“산의 약재밭에 적잖은 풍령초(風靈草)를 심어 놓았다. 그걸 뜯어다 먹이로 주되 처음에는 10년 정도 자란 영초를 주면서 점점 오래된 것으로 가져다 먹이거라. 다른 속성의 단약은 절대 먹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의하고.”
“꼭 기억하겠습니다.”
“이제 염우를 데리고 돌아가 보거라.”
한립은 손을 내저었다.
이에 몽천천은 인사를 하고 새끼 새를 안고 석실을 나서려는데 한립이 다시 불러세웠다.
“다른 분부가 있으십니까?”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벌써 화신기에 이르렀구나.”
의아한 표정의 몽천천을 향해 한립이 미소를 머금었다.
“아, 진작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 기회가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염우 때문에 깜빡 잊었고요.”
“그래, 네가 오라비보다도 자질이 뛰어나구나. 이건 화신기 수사가 쓸만한 단약이다. 경지 상승을 축하하는 선물이라 생각하거라.”
한립은 하얀 자기 병을 던져주었고 몽천천은 여러 번 감사를 표하고서야 즐거운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그녀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푸른빛이 적하봉 바깥으로 날아올랐다.
* * *
둘째 날, 쾌청한 대낮.
종명산맥 서쪽은 눈이 녹지 않아 온통 새하얬고, 제자들이 일찍부터 청소를 한 대전과 광장 주변만 다른 빛깔을 띠고 있었다.
그밖에 지하에 화맥이 흐르거나 온천이 있는 곳은 눈이 녹아 푸릇푸릇 풀들이 자라났다. 고공에서 푸른빛이 날아들어 서림봉 옆 반달 형태의 골짜기로 떨어져 내렸다.
그는 백작곡을 찾아온 한립이었다.
어젯밤 적하봉을 나와 산 아래 화맥 동굴에 정염 불새를 풀어놓자 쪼그만 녀석이 신이 나서는 쏜살같이 안으로 들어가 열기를 즐겼다.
그러고 나서 바로 임전각을 통해 종명산맥 서부로 오는 길이었다.
포령곡 임전각을 거쳐 서림봉으로 왔으면 시간도 아끼고 해가 뜨기 전에 반궐곡에 도착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진선경 수사가 포령곡에 도착하면 시종을 고르러 온 줄 알고 모두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립은 일부러 조금 더 먼 회양봉(會暘峰)에서 둔술을 펼쳐 이곳까지 날아왔다.
반궐곡은 서림봉과 맞닿은 특산물이랄 것도 없는 평범한 골짜기로 종문에서도 크게 중시를 받지 않아 장로나 제자들의 동부도 없었다.
골짜기 입구에 내려서 안으로 쭉 걸어 들어간 한립은 온통 두껍게 쌓인 눈 아니면 갈색 암석밖에 없는 황량한 풍경을 마주했다.
수백 장을 걸어가자 지형이 점점 넓어지면서 골짜기 밖에 비해 확실히 고도가 내려갔다. 비탈이 심하지 않은 내리막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반 시진 정도 전방으로 향하자 갑자기 짙은 안개 때문에 풍경이 흐릿해졌다.
길을 막고 있는 커다란 바위를 빙 돌아가 보니 꽤 면적이 큰 반달 형태의 호수에서 뜨거운 김이 풀풀 올라왔다.
온천이 샘솟는 곳이었다.
한립은 열기로 눈이 녹아 갈색 암석이 드러난 호숫가로 다가가 영목 신통을 발동했다. 옅게 파문이 일자 맑은 호숫물 아래로 울퉁불퉁한 돌들만 보이고 물고기나 요수는 살고 있지 않았다.
한립은 조심스럽게 의식을 퍼트려 산골짜기를 감쌌다. 반궐곡은 평범한 산골짜기에 불과한지 이상한 점이 없었다.
“백작곡, 현진륜…….”
태현전에서 보았던 구절을 중얼거린 한립은 진지한 얼굴로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주저앉았다.
“이곳이 백작곡이 맞다면 진륜을 불러내면 뭐가 달라질까?”
한립은 양손으로 수결을 맺고 진언화륜경 공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웅!
등 뒤로 팔뚝 크기의 은은한 금색 고리가 떠올라 천천히 회전했다.
보륜의 24개 시간 도문들이 기이한 법칙 파동을 발산해서 10장 범위의 공간이 시간이 멈춘 것처럼 이상하게 변했다.
산바람과 공기의 흐름이 더없이 느려지고 호수의 물결도 얼어붙은 듯 미세하게 바뀌었다. 그리 멀지 않은 호수 표면의 짙은 안개가 하얀 연기 기둥들처럼 극히 천천히 꿈틀거렸다.
‘여기가 아닌가?’
한립은 제자리에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어떤 이상한 점도 찾을 수 없었다. 잘못된 곳을 찾은 줄 알고 그가 진언보륜을 거두려 할 때 이변이 발생했다.
앞쪽 허공에 손바닥 크기의 하얀 참새가 나타나 호수 방향으로 날갯짓을 해갔다.
분명 진언보륜이 영향을 미치는 범위였는데 하얀 참새는 쪼르르 잘도 날아서 암홍색 두 발로 호수 표면을 가볍게 건드려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한립은 시선으로 하얀 참새를 쫓으면서도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하얀 참새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고는 회색 부리로 호수 표면을 콕콕 쪼아댔다.
퐁!
호수 표면의 파문이 연이어 퍼지더니 물보라가 점점 커져 호수 양쪽에서 하얀 물보라를 일으켰다.
그 물보라 중앙에 검은 동굴이 나타나 팔각형 진법을 드러냈다.
“비경!”
한립이 탄성을 터트렸다.
그러나 하얀 참새는 그가 머뭇거리는 것이 불만스러운 눈길로 날개를 활짝 펴고 검은 동굴 속으로 쏙 들어가 사라졌다.
이에 한립도 더는 주저하지 않고 진언보륜을 체내로 돌려놓고 펄쩍 뛰어들었다. 하지만 무형의 장벽에 막힌 것처럼 두 발이 검은 동굴 위에 떠서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음?’
두 눈 깊은 곳에서 남색빛을 일으킨 그는 무형의 장벽에 주먹을 뻗어보았다. 그 결과 주먹은 솜을 때린 것처럼 대부분 힘을 잃고 말았다.
그 후에도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 보았으나 도검으로 치고 불로 태우는 것도 통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눈을 반짝인 한립은 이곳이 백작곡이라는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다.
“설마!”
그는 번득 눈을 부릅뜨고 장로 영패를 꺼내서 검은 동굴의 팔각 진법에 가져갔다. 검은빛이 쏘아져 나와 영패의 공적점 9천 점을 제해 고작 132점 밖에는 남지 않게 되었다.
“역시 이거였어!”
그는 희색을 드러내며 검은 진법이 내뿜은 빛에 휩싸여 검은 동굴로 빨려 들어갔고, 호수 위 검은 동굴은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하늘과 땅이 뒤바뀐 듯 어질어질한 와중에 벌써 지면에 두 발이 닿은 한립은 백석 광장에 서 있었다.
뒤로는 푸른 산들이 먹빛으로 펼쳐져 있고 양옆에는 거대한 신장(神將) 조각이 커다란 법기로 땅을 짚고 한립 쪽을 노기 어린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힐끔 조각상을 훑은 한립은 시선을 전방으로 돌렸다.
광장의 끝에는 광활한 금빛 궁전이 상서로운 구름에 휩싸여 보광을 번뜩이고 있었다.
궁전 앞 사방 벽이 뚫린 높은 누각에는 신선 같은 모습의 선인 두 명이 마주 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고, 그 옆에 보라색 궁장 차림의 선녀가 작은 화로와 찻주전자를 들고 서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한립을 쳐다보는 이는 없었다.
궁전 대문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금빛 창을 든 금갑(金甲) 병사들이 그를 발견하고는 살기등등한 얼굴로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코웃음을 친 한립은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두 눈에 남색빛을 반짝인 그는 이상한 수결을 맺었다.
“사라져라.”
그의 방대한 의식이 구속에서 풀려나 사방으로 출렁출렁 퍼져나갔다.
쏴아아…….
한립을 중심으로 사나운 기운이 흩어짐과 동시에 백석 광장은 물론 거대한 신장 조각상이 금이 가서 무너져 내렸다.
달려오던 금갑 병사들은 광장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가루가 되었고, 금색 궁전과 누각의 선인, 선녀들도 재가 되어 사라졌다.
모든 환영이 붕괴하는 중이었다.
한립은 가만히 자리에 앉아 광장의 매끈한 하얀 돌이 이끼가 낀 흙으로 변하고 푸른 산으로 둘러싸여 드넓어 보이던 공간에 뚜렷하게 공간장벽이 느껴지는 것을 확인했다.
비경의 규모는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작은 듯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턴 한립이 앞쪽의 거대한 비석으로 눈길을 돌렸다.
좌우에 용과 뱀을 닮은 이상한 괴수가 새겨진 비석은 심하게 부서져서 머리 쪽이 크게 뜯겨나간 것 같았다.
비석의 갈라진 부분에는 이끼가 가득했지만, 다행히 아래쪽으로는 빼곡하게 적힌 금전문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빠르게 비석으로 다가간 한립은 뻣뻣하게 굳어 꼼짝하지 못했다.
“이건 진언화륜경 공법이잖아!”
부서진 비석에 적힌 문자들은 두 단락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잡초들에 가려진 아래쪽 단락은 한립도 익숙한 진언화륜경 제1성 공법이었고 그 위쪽이 제2성 공법이었다.
비석의 문자들을 훑어보던 한립은 생각에 잠겼다.
종문의 전공각에 진언화륜경 공법이 있었는데 어째서 이런 괴이한 방식으로 사람을 불러들여 제2성 공법을 알게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전공각에서 공적점을 지불해도 이곳으로 와서 2성 공법을 찾아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팟!
머리 위에 그를 이곳으로 이끈 하얀 참새가 나타나더니 부서진 비석에 앉아 이끼를 쪼아먹었다. 환영 같기도 하고 진짜 같기도 하고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참새였다.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자니 콕콕 이끼를 쪼아대던 참새가 놀랍게도 부리를 열고 사람의 말을 쏟아냈다.
“뭘 그리 보는 것이냐? 네게 주어진 시간은 반나절뿐이니까 공법이나 얼른 외우거라!”
“…….”
하얀 참새가 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한립이 잠시 멍해졌다.
“아직도 쳐다보고 있어!”
하얀 참새가 눈까지 부라리며 소리치자 한립도 쓴웃음을 지으면서 비석에 쓰인 글자에 집중했다.
진언화륜경 제2성 공법도 금전문으로 고대 어법에 따라 쓰여있어서 이해하기가 고역이었다.
그래도 1성 공법으로 기초를 뗀 한립은 느리지만 착실히 내용을 읽어나갔다. 그는 뇌리 속에 강대한 의식이 공법 내용을 강제로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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