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5화. 백작곡(白雀谷)
*
천천히 닫히는 대전 문을 뒤로하며 한립은 딴생각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전에 연달아 맡은 임무와 이번 부산 비경 주둔 임무로 공적점이 4천 점 정도 모였다.
꽤 많은 공적점이었지만 진언보류경 2성 공법을 교환하기 위해서는 한참 모자라는 양이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가면서 나머지 공적점 5천 점을 어떻게 채워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그 순간 무언가 번득 떠올랐는데 태현전 금색 석벽 위에 붉은색으로 적힌 진언화륜경을 2성까지 익히라는 임무의 보상이 공적점 5천 점이었다.
태현전 안은 여전히 북적북적해서 오늘은 금색 석벽 아래도 십여 명의 내문장로들이 서서 임무를 확인하고 있었다.
한립은 다른 임무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들어 붉은 임무만을 쳐다보았다. 몇 글자 안 되는 임무였지만 반 시진은 보고 있었다.
자격이 안 돼서가 아니라 자신이 이 임무로 공적점을 받아간 것을 다른 이들이 알게 되면 시선을 끌 것이 꺼려졌기 때문이었다.
이 공법을 익히는 이들은 많았지만 성공하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고, 그가 펼치는 진언화륜경의 위력은 너무 강해서 보통의 진선경 수사라면 십만 년 혹은 수십 만년을 매진해도 그 위력의 10분의 1을 내기가 어려웠다.
그가 1성을 마치고 2성 수련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퍼지면 분명 촉룡도 내에 풍파가 일 것이다.
종문의 금선들이 자신을 주시할 것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 왔다. 고생스럽게 찔끔찔끔 공적점을 모으더라도 당당히 진언화륜경 2성을 교환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아직 1성을 익히지 못했다면 누가 공적점 9천 점을 주고 2성 공법을 교환해 가겠는가?
‘이러다…… 훔쳐야 하는 거 아니야?’
이런 생각이 들자 한립은 고개를 흔들었다.
촉룡도가 영환계 냉염종도 아니고 부도주들 외에 금선들까지 머무는 이곳에서 공법을 훔쳤다가는 죽은 목숨이었다.
그렇다고 공법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촉룡도로 온 이유 중에 진언화륜경 공법도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한립은 그냥 대전 밖으로 걸음을 돌렸다.
반나절 후, 한 손에 깃털 부채를 든 유생 복장의 사내가 천천히 태현전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금색 석벽 앞에 이른 그는 고개를 들고 임무를 확인하는 다른 내문장로들 틈에 섞여들었다.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던 사내는 다른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때 얼른 장로 영패를 꺼내 벽에 가져다 대었고, 석벽에서 빛이 날아들어 영패로 스며들었다.
유생 복장의 사내는 무상맹 가면을 쓰고 변장을 한 한립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일단 보상은 받고 봐야지 공적점 5천 점을 날릴 수는 없었다.
감응해보니 영패 안의 공적점이 9,132점으로 변해있었다.
이 임무는 원래도 붉은 글씨 임무들 사이에 섞여 있어 별로 관심 갖는 이들이 없었다. 다들 이야기를 나누거나 자신에게 적합한 임무를 찾느라 바빠서 그빛이 어느 임무에서 빠져나간 것인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가면으로 변장하고 있어 누군가 눈치를 채더라도 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한립은 내심 한숨을 쉬며 영패를 거두고 몸을 돌리려 했다.
‘엇, 저건!’
그런데 그때 그의 시야에 석벽의 붉은 글씨가 변하는 것이 보였다.
다시 몸을 돌린 한립은 붉은 글자 뒤쪽에 은은하게 금색 금전문이 생긴 것을 발견했다.
“백작곡(白雀谷), 현진륜(現眞輪).”
여섯 글자는 모호한 금빛에 가려져 있어 어렴풋이 보였고, 다시 눈을 비비고 보려 하자 사라지고 없었다.
놀란 한립이 슬쩍 주변의 눈치를 보니 다들 여전히 낮게 속삭이거나 임무를 보고 있었다. 침착한 표정으로 보아 석벽의 변화를 본 것은 그뿐인 듯했다.
‘백작곡? 그게 어디였더라…….’
머릿속에 남아 있는 세 글자에 촉룡도 곳곳을 떠올려 보았지만 생각나는 곳이 없었다. 환상처럼 사라진 글자였지만 그의 안력에 잘못 보았을 리도 없었다.
‘백작곡’이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그곳을 찾아 무엇이 있는지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한립은 잠시 서 있다가 슬쩍 구석으로 빠져서 입문할 때 받은 종명산맥 지도를 꺼내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도에 적힌 지명을 전부 살폈지만 백작곡이라는 곳은 없었다.
“혹시 종문 안에 알려지지 않은 비경이 있는 것일까?”
그는 성큼성큼 석벽으로 걸어가 한참을 서 있다가 몸을 돌려 태현전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태현전 바깥에 나타난 그는 푸른 장삼을 걸치고 뒷짐을 진 채 사라졌다.
* * *
그날 밤, 적하봉 정상 동부의 밀실.
주홍색 네모난 탁자 위에 푸른 고대 등잔이 타고 있었다. 등잔 안 기름은 그윽한 향기를 내면서 방안을 대낮같이 비추었다.
탁자 구석에는 두꺼운 푸른 가죽 서책들, 옥간 서너 개 그리고 반쯤 펼쳐진 누런 두루마리가 놓여 있었다.
두루마리가 펼쳐진 부분에는 먹으로 그려진 생생한 푸른 산봉우리들과 작은 글씨들이 가득했다. 한립은 그 탁자 앞에 앉아 너무 오래되어 거의 헐다시피 한 서책을 들고 탐독하고 있었다.
서책들과 두루마리는 종명산맥의 산수와 기록물들로 오늘 어룡봉 내전각(內典閣)에서 빌려온 것들이었다.
몇몇 옥간을 제외한 낡은 서책과 두루마리는 원래 복제물만 구할 수 있었는데 한립은 옛 기록 그대로 보기 위해 귀한 공적점을 적잖이 주고 원본을 빌려왔다.
구석구석 빠짐없이 살피고 있건만 아직도 ‘백작’이란 이름의 산골짜기는 찾을 수 없었다. 비슷한 이름을 가진 곳이 몇 군데 있었는데 전부 종문의 요충지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중점적으로 찾고 있는 것은 대부분 지도에는 누락 되어 있고 옛날 자료에만 간간이 관련 내용이 적힌 묵령산하도에서 검은 구역으로 나타나 있던 종문의 금지들이었다.
지금 그가 들고 있는 <고운경략(古雲經略)>이 그가 빌려온 마지막 서책이었다.
이 책은 사실 지리 서적도 아니었고 수행이 잘 풀리지 않아 낙심한 어떤 수사가 고운대륙 풍경에 대해 남긴 유람기에 가까웠다.
이 책을 썼을 때는 아주 옛날이라서 심지어 촉룡도와 비슷한 세월동안 존재해온 것 같았고 책의 표지에는 진법 금제까지 펼쳐져 있었다.
그 진법이 흩어지면 책도 버티지 못하고 썩어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한 장 한 장 유심히 살피던 한립은 미간을 좁히고 책을 둥글게 말아 들고 어떤 문장에 집중했다.
“서쪽 산에 골짜기가 있는데 하얀 참새, 백작(白雀)들이 무리를 지어 살았다. 양치기가 참새를 따라 골짜기에 들어가면 골짜기는 보이지 않고 자욱한 안개 속에 궁궐과 옥으로 만든 누각 그리고 높은 탑들만 가득해 선녀가 춤을 추고 선인들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더라…….”
한립은 짧은 이야기를 곱씹었다.
이야기 속의 양치기는 금색 갑옷을 입은 도사에게 채찍질을 당해 정신을 차린 후에야 자신이 여전히 산골짜기 안에 있으며 모든 것이 꿈이었음을 깨닫는다는 내용이었다.
줄거리는 속세의 이야기꾼들이 주점이나 다루에서 꾸며내는 소설과 비슷했지만 하얀 참새들이 무리 지어 살아간다는 내용이 그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여러 경전에서 하얀 꾀꼬리, 새하얀 눈 같은 꿩, 흰색 솔개라는 표현은 보았어도 하얀 참새는 이 서책에서 처음 보았다.
“이 서쪽 산이라는 게 어디를 말하는 것일지…….”
서책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면서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불현듯 동작을 멈추고 다른 서책들을 들어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유서산(酉西山). 높이가 7,257장에 이르고 산세가 가파르고 험하다. 남북으로 뻗어있는 산줄기의 해가 드는 언덕에는 노양초, 완일화가 자생하고 주요 산물로는 경린석(經燐石)…….”
“서천산(西泉山), 높이가 8,931장에…….”
“택서봉(澤西峰), 높이가…….”
* * *
달이 서쪽으로 기울고 한밤중이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한립은 탁자에 쌓인 경전을 정리해서 한쪽에 잘 쌓아두었다.
유일하게 펼친 채 남겨둔 것은 산하지형도였고 서림봉(西林峰)이라는 산봉우리가 그려져 있었다.
종명산맥 서쪽에 있는 이 산봉우리는 천지영기가 평범한 수준으로 특별히 진귀한 영약이 자라지도 않아 어떤 장로나 제자도 머물지 않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촉룡도 시종 선발을 하는 포령곡(蒲靈谷)과 가깝고 동쪽으로는 종명산맥의 지류 중 하나인 방지산맥(放支山脈)과 이어져 그 중간에 상당히 드넓은 반원형 산골짜기를 형성했다.
여러 서책을 대조해본 결과 한립은 반궐곡(半闕谷)이라 불리는 이 반달 형태의 골짜기가 백작곡일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손끝으로 고대 등잔의 심지를 쥐어 불을 끄자 그윽한 향기를 머금은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방을 나선 그는 문을 닫고 앞뜰로 가려다 정당을 벗어나기도 전에 총총히 걸어오던 몽천천과 마주쳤다.
“려 장로님, 부화하려 합니다. 부화하려고 해요!”
그녀는 한립의 신영을 보자마자 다급히 소리쳤고, 한립의 얼굴에 희색이 감돌았다.
“어서 가서 보자꾸나.”
한걸음에 그녀에게 다가간 한립이 몽천천의 팔을 붙들고 푸른빛으로 변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잠시 후 둘은 동부의 어느 석실 안에서 나타났다.
영기를 불러 모으는 소형 진법이 운용 중인 석실 안은 푸른빛으로 반짝였고, 그 중앙에 하얀 거대 알이 천지영기를 듬뿍 머금고 바르르 떨리는 중이었다.
한립과 몽천천은 일각이나 알이 진동하는 것을 보았지만 껍질이 깨지려는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심하게 흔들리고 껍질 안에서 쿵쿵 치는 소리가 들려서 곧 부화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급히 장로님께 알리고자 간 것인데…….”
몽천천은 그걸 보고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세밀하게 알을 관찰한 한립은 하단에서 아주 미세한 균열을 발견했다.
너무 가느다란 균열이라 자세하게 살피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미 부화는 되었다. 어미가 보이지 않으니 겁을 먹고 다시 숨어버린 것 같구나.”
고개를 저은 한립은 손바닥을 뒤집어 광채가 흐르는 기다란 깃털을 꺼내 몽천천에게 건넸다. 몽천천은 정체 모를 깃털을 받아들고 어리둥절하여 한립을 바라보았다.
“가서 녀석을 불러내 보거라.”
한립의 미소에 고개를 끄덕인 몽천천은 긴 속눈썹이 자라난 눈꺼풀을 깜빡이면서 커다란 알로 다가갔다.
손바닥을 펼쳐 가만히 알을 두드려 보아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깃털로 알을 부드럽게 건드려 보았다.
그러자 알이 뭔가를 감응한 듯 가볍게 흔들거렸다. 이에 몽천천은 깃털을 살랑거리면서 다른 손도 뻗어 알을 쓰다듬어 주었다.
커다란 알은 점점 움직임을 멈추다 나중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려 장로님, 아무래도…….”
고개를 돌린 몽천천이 무어라 하려는데 카득! 하는 소리가 작게 울리더니 알 아래쪽의 균열이 갈라져서 사람 머리통만 한 껍질이 떨어져 나갔다.
몽천천이 급히 고개를 돌리고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구멍을 살피자 안에서 삐약삐약 거리며 병아리 소리 비슷한 것이 들려왔다.
곧이어 깃털 가득한 머리통이 쑥! 하고 빠져나왔다.
그리 작지 않은 체구의 어린 새는 눈을 반쯤 감고 솜털에서는 은은하게 푸른빛이 났다.
새는 닭을 닮아 부리가 짧고 얼굴이 동그래서 약간 멍청해 보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한립을 보다가 다시 몽천천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에서 빠져나온 영수는 천천히 몽천천이 있는 쪽으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목이 가늘고 길며 큰 머리통에 비해 몸이 작아 영양이 온통 머리로 쏠린 것 같은 생김새였다. 한립은 어린 새의 모습에 실망하지는 않았지만 약간 못생겼다고 생각했다.
방반이 어디서 왜 이런 알을 구해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몽천천은 좌로 기우뚱 우로 기우뚱해가면서 다가오는 갓 깨어난 새끼 새를 보면서 진땀을 흘렸다.
가냘픈 목이 머리를 견디지 못하고 부러지기라도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못생긴 새가 되려 아주 귀여워 보였다.
외로운 수련 생활 중에 밤낮없이 함께하며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낸 것은 이 작은 새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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