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4화. 한계
*
‘어쩔 수 없는 것인가!’
한립은 결연한 기색으로 손바닥을 뒤집어 영액이 가득 찬 세숫대야 크기의 옥 사발을 불러냈다.
똑!
녹색 병을 기울여서 그 안의 신비한 영액 한 방울을 떨구자 물 색깔이 연한 녹색으로 물들었다. 또 다른 옥그릇을 불러낸 한립은 사발의 연한 녹색 물을 약간 따라놓았다.
신비한 영액을 직접 마셔서 그 안에 함유된 시간 법칙을 더 깊이 있게 감응하려는 의도였다. 옥 사발을 옆에 내려놓은 한립은 묵묵히 72자루의 청죽봉운검을 불러내 하나로 합쳤다.
은색 부적을 붙이자 청죽봉운검의 기운이 가려져서 평범한 단검처럼 보였다. 작은 병과 청죽봉운검을 옆에 내려놓은 그는 정염 불새를 나오게 했다.
팟.
불새가 소인으로 변해서 그의 주위를 날아다니며 즐겁게 지저귀었다. 한립은 미소를 지으며 소인을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두 눈을 마주쳤다.
“녀석, 이 사람을 기억하겠느냐?”
그의 손을 빠져나간 푸른빛이 백의 소녀, 남궁완의 형상을 이루었다. 은염 소인은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여 남궁완의 모습을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영계에 있을 때도 제법 지능이 있었기에 남궁완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 두 가지 물건을 네게 맡길 테니,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것들을 꼭 이 사람에게 전해주어야 한다. 얼마의 시간이 걸리든 반드시 찾아서 전해줘야 해.”
정염 불새는 아직 지능이 높지 않아 한립이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말귀는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꼬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한립은 은염 소인을 옆에 내려놓고 진지하게 마음을 다스렸다. 작은 병의 녹색 액체를 먹고 몸이 터져 죽은 산토끼 두 마리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난성해에서 원영기를 벗어나지 못하던 열풍수(裂風獸) 풍희도 녹색 액체 때문에 죽음을 맞이했다.
지금 그의 수행은 풍희를 월등히 뛰어넘었고 현선의 몸도 지녔지만 작은 병의 녹색 액체도 당시의 녹색 액체가 아니었다.
소량이지만 녹색 액체를 희석한 물을 마시는 것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모험이었다.
한립은 감당할 수 없으면 녹색 액체를 억지로 몸 밖으로 배출하거나 만일의 사태에는 원영만이라도 몸을 탈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깨우쳐 보려고 노력하다 삼대 지존법칙인 시간 법칙을 장악하려면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속세에서 떠들길,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옥 그릇에 담긴 연한 녹색 물을 바라보던 한립은 심호흡을 했다. 옆에 있는 아기자기하게 생긴 은염 소인을 본 그는 결심하고 옥 그릇을 들어 절반을 쭉 들이켰다.
꿀꺽!
약간의 쓴맛과 함께 청량하게 넘어가던 녹색 영액은 단전에 이르자 기이하게 뜨겁게 변해서 작열하는 기류를 몸 곳곳으로 퍼트렸다.
이해할 수 없는 기운이 전신의 경맥에 충돌해 몸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다행히 머릿속에 불현듯 서늘한 기운이 돌아 정신을 맑게 해주었다.
한립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푸른 빛에 휩싸여 무형의 힘이 몸 곳곳을 뚫고 다니는 것을 살폈다.
체격이 커지고 팔과 다리가 두꺼워져 있었다. 미세한 경맥과 근육들이 충격에 찢겨나갔다가 왕성한 생기를 받아 다시 빠르게 치유되었다.
한 호흡 만에 이런 일이 전신에서 수천 수백 번 반복되었다.
그 대가로 이미 불가사의한 경지에 이른 그의 몸에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머릿속은 맑기만 했다.
신비한 힘이 일으키는 일종의 육체 변이에 한립의 몸이 저항하면서 격렬한 충돌이 벌어지고 있었다.
장장 한 시진이 지나도록 이런 고통은 줄지 않았지만 한립은 내심 안도했다.
점점 익숙해지기도 했고 녹색 액체가 몸에 가하는 위해가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치명적이지 않다는 점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훨씬 더 많이 마셔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꿀꺽!
결국 당차게 옥 그릇을 들어 남은 연녹색 영액도 단번에 들이킨 한립은 더욱 강렬한 열기가 체내로 유입되어서 낮게 신음을 흘렸다.
푸른빛에 휩싸인 그는 고통 속에서 반 시진을 버텨냈다.
예상대로 온몸이 극한의 상황에 이르렀고 처음보다 몇 배는 끔찍한 고통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죽기 직전의 한계에서만 깨우칠 수 있는 것이 있는 법clr이었다. 눈을 감은 한립은 몸 상태는 개의치 않고 신비한 힘의 기류에 집중했다.
두근.
두근.
두근.
귓가에 심장박동이 선명하게 들려왔는데, 전신의 경맥을 타고 도는 신비한 힘이 희미하게 호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기운이었다. 시간 법칙의 파동이 생명의 원천의 규칙적인 움직임과 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깨달음이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머리를 굴린 한립이 선원석을 꺼내 한 손에 쥐고 진언보륜을 불러냈다. 시간 도문에서 강렬하게 퍼져 나간 파동의 영향에 신비한 힘의 기류도 미세하게 느려졌다.
연신결을 운용한 그는 잡생각을 지우고 생각을 이어갔다.
녹색 액체의 열기가 소진되다 두세 시진 뒤에는 완전히 종적을 감추자, 눈을 뜬 한립은 묘한 얼굴로 진언보륜을 체내에 넣어두었다.
아직 시간 법칙은 장악하지 못했어도 시간의 힘의 파동은 또렷하게 감응할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어지럼증에 비틀거린 그는 입가의 피를 닦아 냈다
미세한 상처가 그의 몸속에 가득했다. 현선이 아닌 다른 진선이었다면 몸이 터져 죽었을 것이다.
‘녹색 액체의 양을 좀 늘려도 되겠어.’
조금 전 그는 시간 법칙의 오묘함에 접근하기에 딱 한 걸음 부족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을 더 극한으로 몰아붙이지 않으면 깨달음은 꿈도 꿀 수 없을 듯했다.
* * *
며칠 후.
단약을 복용하고 치유를 하던 한립이 눈을 떴다.
몸을 회복한 그는 곁에 둔 옥 사발을 끌어다가 안에 든 영액 한 줄기를 끌어올려 입에 부었다.
끙! 앓는 그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 하얗게 질렸다 난리였다. 한립은 곧 천천히 눈을 감고 체내의 변화에 의식을 기울였다.
쿨럭!
한 시진 넘게 꼼짝도 하지 않던 그가 피를 토해내고 형형한 눈빛으로 눈을 떴다. 이번 경험으로 시간 법칙에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역시 수도의 길에서는 위험을 감수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단약을 먹고 몸을 보한 한립은 며칠 뒤에는 아예 옥 사발에 남은 영액을 전부 마셨다.
양손에 선원석을 쥐고 진언보륜까지 발동한 채 그는 약간의 흥분과 의문이 교차하는 얼굴로 눈을 떴다.
“어째서 매번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드는 것일까?”
어찌 되었든 통하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으니 지금 그만둘 수도 없었다.
이십여 일이 지나 작은 병에 새로운 녹색 액체 한 방울 응결되었을 때, 한립은 작은 병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꿀꺽!
녹색 액체 자체를 삼킨 그는 몇 호흡 지나지 않아 진극막으로도 막을 수 없는 미세 폭발들로 인해 온몸의 피부가 갈라지고 새빨간 혈인(血人)처럼 변했다.
몸을 덜덜 떨고 있는 그는 조금만 방심해도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두 시진이 흘러서야 겨우 안정을 찾은 한립은 양손에 선원석을 쥐고 진언보륜을 발동해 감응을 시도했다. 반나절 뒤 울컥 피를 토하면서 눈을 뜬 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턱을 괴었다.
두 번째 녹색 액체로 이해도가 높아지기는 했는데 아직 아니었다.
“한 방울 더!”
그는 심각한 부상을 당하고도 의지가 벅차올라 단약을 삼키고 때를 기다렸다.
한달 뒤, 한립은 녹색 액체 한 방울이 차오른 작은 병을 들고 있었다. 녹색 액체를 삼키자 그의 몸에서 묵직한 폭음들이 연달아 들려왔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륜에서도 계속해서 시간 법칙의 힘이 흘러나왔다. 밝은 금빛을 방출한 진언보륜의 회전 속도는 더없이 빨랐다.
눈을 감은 한립 주변으로 작은 금색 주술문자들이 모여들어 화염처럼 이글거리는 중이었다.
12개의 시간 도문이 부르르 진동하며 금색 화염이 커졌을 때 이변이 발생했다. 진언보륜에서 깜빡거리던 금빛이 점점 느려지더니 표면에 균열이 가면서 떨림이 멈추었다.
금빛이 반짝이고 진언보륜이 한립의 체내로 들어갔다. 한립은 낮게 신음하며 검붉은 피를 토해내면서 눈을 떴다.
푸른 보호막은 언제라도 깨질 듯 깜빡거렸고, 온몸의 뼈와 근육이 바르르 떨렸다.
흠칫 놀란 한립은 양손으로 연달아 법결을 맺어서 푸른빛을 안정시키고 단약을 꺼내 삼켰다.
시간 법칙과 너무나도 가까이 있어 손을 뻗으면 3대 지존법칙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았건만 마지막 순간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마지막 얇은 막을 뚫지 못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왜 이런 거지?”
진언화륜경에 공법을 1성까지 익히면 시간 법칙의 힘을 깨우칠 수 있을 거라고 했지만 언제 그렇게 될지는 모를 일이었다.
장천병이 응결한 녹색 액체의 보조가 있으니 이론적으로는 성공해야 옳았다.
그는 푸른빛에 휩싸여 단약의 약성을 흡수했다.
* * *
한 달 뒤, 녹색 액체가 응결되자 한립은 주저하지 않고 그것을 들이켰다.
꿀꺽!
그러자 등 뒤로 요란한 금빛의 진언보륜이 떠올라서 시간 법칙을 꿀렁꿀렁 방출하고 있었다. 그가 양손에 선원석을 쥐고 주문을 외울수록 금빛이 강해지면서 시간 법칙이 희미하게 뭉치려 들었다.
차칵!
바로 그때, 진언보륜에 금이 가고 법칙의 힘과 함께 소실되었다.
한립이 난색을 드러내며 눈을 떴다.
한 번은 우연이라고 칠 수 있어도 두 번은 아니었다. 그가 지닌 시간의 힘으론 시간 법칙을 깨닫기에 역부족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진언화륜경 2성을 익혀볼 때였다.
한립은 단약을 삼키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 * *
몇 달 뒤.
종명산맥에 며칠간 폭설이 내려서 열기를 잃은 적하봉도 눈이 쌓여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산봉우리 위 약재밭에서는 은백색 장포를 걸친 몽운귀가 원영초(元靈草)를 심어 놓은 밭 옆에 쪼그리고 앉아 보온용 진법을 점검 중이었다.
원영초는 적하봉에서 자영하던 영초 중 하나로, 추위에 극히 약해 화독을 품은 안개가 보호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오라버니, 려 장로님께서는 언제쯤이나 돌아오실까요?”
비취색 치마를 입은 몽천천이 허리를 굽히고 오라비의 모습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기운을 갈무리했는데도 반짝이는 눈과 얼굴이 사람의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천천아, 넌 대체 누구 누이인 것이냐? 내가 려 장로님의 명을 받아 종자들을 찾으러 떠돌 때는 그렇게 애타게 찾지 않았던 것 같은데…….”
몽운귀는 고개를 돌리며 서운한 척을 했다.
“헤헤, 그럴 리가요……. 전 그저 려 장로님께 제가 화신기 수사가 된 것을 얼른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오라버니, 화내지 마셔요.”
몽천천은 귀엽게 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이에 몽운귀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디서 기연을 얻은 것인지, 누이동생은 원영을 응결한 다음부터 오히려 수련에 속도가 붙어서 얼마 지나지도 않아 화신기 수사가 되었다.
가족으로서 누이의 성장이 뿌듯하고 기뻤지만 대놓고 칭찬하는 것은 삼가고 있었다.
단순한 성품의 누이는 아직 수도계에 발을 들인지도 얼마 안 되어 그런 찬사에 쉽게 우쭐하거나 의지가 흐트러질 수 있다고 여겨서였다.
이런 생각을 하며 몽운귀는 하던 일을 계속해나갔다.
하암!
약재밭 밖 공터에는 작은 수산수 두 마리가 번갈아 하품을 해대며 심심한 듯 바닥에 엎드렸다. 그런데 제대로 자리를 잡기도 전에 두 머리가 동시에 고개를 쳐들고 고공을 응시했다.
먼 하늘에서 푸른빛이 적하봉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산봉우리 밖 봉산 금제가 눈 녹듯이 사라지고 푸른 인영이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몽운귀와 몽천천은 기쁨의 눈빛을 교환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저택 쪽으로 날아올랐다.
그들이 돌아가는 동안 손부정이 벌써 다른 시종들을 불러 모아 정당 위에 가지런히 서서 한립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한립은 몽천천이 수행 결과를 말할 틈도 없이 적하봉에 별일이 없었는지 간단히 묻고는 시종들을 위해 단약과 물건들을 남긴 다음 급히 저택을 떠났다.
적하봉을 나선 한립은 인근의 임전각을 이용해서 경운봉으로 향했다.
태현전 뒤편의 편전에서 뚱뚱한 집사 장로가 책상에 앉아 한립의 장로 영패를 받아들고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말했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려 장로! 이전에 부산 비경에서 머물던 두 장로가 며칠 전 소식을 듣고 조사를 해본 결과, 수사의 보고와 일치하더군요. 중문에서는 장로께서 비경의 영약을 보호한 공이 있다고 판단해 원래 보수 이외에 따로 공적점 5백 점이 내려왔습니다.”
“감사합니다.”
한립이 포권을 하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집사 장로와 한담을 나누고는 장로 영패를 돌려받고 대전을 나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