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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603화 (1,360/2,000)

1603화. 진언보륜의 위력

*

키하악!

달아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다들 절망에 빠져있는데 거대한 뱀 머리 9개가 동시에 뒤로 물러섰다가 비린내가 풍기는 시뻘건 입을 쩍 벌리고 달려들었다.

“요물이 감히 어딜!”

절체절명의 순간, 위엄 어린 목소리가 촉룡도 수사들의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혼비백산한 수사들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기도 전에 푸른 인영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키 큰 사내가 푸른 장포를 바람에 휘날리면서 보물처럼 광채를 뿜고 있었다.

“려 장로님!!”

호침이 예의고 뭐고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아!

다른 수사들도 죽기 진전에 구출된 이들처럼 환희에 차서 소리를 질러댔다. 한립은 뱀 머리가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것을 보고 차분히 소매를 펄럭여 푸른빛으로 수사들을 감쌌다.

그 후 그의 손에서 아홉 자루의 푸른 비검이 날아올라 수많은 검빛으로 갈라져 검빛 장막으로 대협곡을 틀어막았다.

푸른 비검의 정체는 새롭게 제련을 마친 청죽봉운검이었다.

평소에는 하나든 아홉 개든 자유롭게 뭉쳐서 쓰다가 아무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곳에서는 72개로 분리해 사용할 수 있었다.

쿠쾅!

뱀 머리들은 푸른 비검 아홉 자루가 만들어낸 검빛 장막과 충돌해 튕겨 나갔다. 푸른 장막은 구김하나 가지 않았다.

한립이 검결을 맺자 모든 검빛의 날이 아래쪽으로 향해 강력한 살의를 뿜어냈다.

호침 등은 만검(万劍)으로 이루어진 검빛 장막을 보고 자신들이 형성한 만종검진은 종이칼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가라.”

한립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푸른 검빛이 유성처럼 꼬리를 길게 남기면서 추락했다. 위험한 느낌을 감지한 뱀 머리는 안개 깊은 곳으로 숨은 지 오래였다.

콰르르르.

청죽봉운검이 뱀 머리들을 쫓아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공간이 흔들렸다.

안개 속에 파묻혀 있던 부산 몇 채가 바스러져 그곳에 숨어든 백귀들이 수도 없이 죽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키하악!

일고여덟 번의 참혹한 비명이 멀리서 울려 퍼졌다. 한립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유유히 안개 속으로 내려가다 미간을 좁혔다.

안개가 강력하게 의식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위쪽에 모인 수사들은 당당히 안개 속으로 들어가는 한립의 뒷모습에 마음을 푹 놓고 몇몇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했다.

“와, 정말 검선(劍仙)이 따로 없구나!”

그러나 그 소리를 다 듣고 있던 한립은 종문에 퍼진 소문을 떠올렸다. 촉룡도에 ‘천남제일검’이란 대검선이 숨어 있다는 소문…….

안개로 이루어진 망망대해는 그의 예상보다 더 드넓었다. 방금 검빛에 조각난 부산 조각들 외에도 내려갈수록 커다란 산봉우리가 많았다.

마치 대협곡 안의 심연이야말로 부산 비경의 본체 같았다.

일부 산봉우리 위에는 무언가 그림자들이 움직이면서 활동을 했는데 살아남은 백귀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쭉 하강하자 한립은 거대한 산봉우리를 지나쳐 겨우 푸른 비검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키에엑!

그러자 커다란 뱀의 몸통이 검은 산봉우리를 칭칭 감고 있었고, 9개의 뱀 머리에는 비검이 하나씩 꽂혀서 산에 바짝 붙어 있었다.

오늘 소란은 아홉 마리의 뱀 괴물이 아니라 머리가 9개 달린 괴물 한 마리의 소행이었다. 뱀 머리 중에 가운데 머리 하나만 눈을 번득이는데 더는 검과 겨룰 힘이 없어 보였다.

손짓해 비검들을 불러들인 한립은 그것들을 하나로 합쳐 손에 들고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뱀 머리 쪽으로 다가갔다.

‘……?’

한립은 문득 얼굴을 찌푸리며 허공을 박차며 뒤로 물러났고, 마지막 뱀 머리가 펑! 하고 터져 살점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그를 쫓았다.

검은 비늘 갑옷을 입은 젊은 사내였다.

새하얀 뺨에 뱀눈을 지닌 사내는 눈썹과 머리카락이 없었고 길게 삐져나온 날카로운 송곳니 네 개 사이로 새빨간 혀를 날름거렸다.

불완전하게 화형을 한 뱀 괴물이었다.

괴물 사내는 어찌나 속도가 빠른지 하얀 뼛조각을 들고 그의 심장을 노렸다. 한립은 손에 든 장검을 휘둘러 하얀 뼛조각을 가르려 했다.

키엑!

칼날이 뼛조각에 닿으려는데 괴물 사내의 몸이 기이하게 늘어나서는 한립의 목을 향해 입을 쩍 벌렸다.

챙!

경쾌하게 하얀 뼛조각이 갈렸을 때 괴물 사내의 날카로운 이빨은 한립의 목과 지척 거리에 있었다.

우웅!

돌연 한립 등 뒤로 금색 고리가 떠올라 스물두 개의 반투명한 도문을 반짝이면서 선명한 법칙 파동을 방출했다.

모든 것이 일시 정지한 것처럼 짙은 안개의 흐름마저 멈추었다.

전혀 압박감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마치 시간이 극도로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져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괴물 사내의 눈빛에 공포가 어렸다.

“효과가 제법인데?”

슬쩍 몸을 빼서 이빨과 멀어진 한립은 가볍게 웃으면서 자신의 목을 문질렀다. 진언보륜의 위력을 시험해볼 생각으로 일부러 괴물 사내가 접근하게 둔 것이었다.

그의 수행에 그렇지 않았으면 벌써 열두 번은 괴물 사내를 죽였을 것이다.

퍼어어엉!

한립의 손바닥에 맞아 괴물 사내의 머리가 터지는 것도 느릿하게 진행이 되었다.

박살 난 머릿속에서 아직 덜 자란 검은 원영을 찾아낸 한립은 재로 만들어 버리고 진언보륜을 몸속으로 거두었다.

“도문이 24개가 되어 속도는 거의 열 배 이상 느려졌지만 진언보륜이 영향을 미치는 범위는 바뀌지 않았구나.”

여러 단약의 보조로 순조롭게 진선 중기에 이른 그는 진언보륜경 1성을 다 익혀 시간 법칙의 힘을 정식으로 이해해 법칙의 실을 응결해 볼 자격을 갖추었다.

한립이 붙들고 있던 괴물 사내의 몸통에서 비린내가 나는 어두운 금색 구슬을 꺼내고 던져버리자 한참 뒤에 아래에서 물고 뜯고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협곡 깊은 곳에는 더 많은 심연 생물들이 사는 것이 분명했다.

심연에서 시선을 돌린 한립은 거대 뱀이 똬리 틀고 있는 산봉우리 쪽을 보았다. 바싹 말라붙은 뱀 껍질은 괴물 사내의 허물이었다.

진선경 초기에 가까워진 뱀 요수가 환골탈태하기 전 대량의 힘을 보충하려 백귀들을 포식하다 이 사단을 낸 것이다.

한립은 뱀 허물도 저물탁에 잘 넣어두었다.

약성도 풍부하고 단단해서 갑옷을 제련하거나 단약을 제련할 때 쓸 수 있을 것이다. 허물이 사라진 산봉우리는 광택이 흐르는 어두운 남색이었다.

한립은 그 위에 수십 그루의 난초를 닮은 남색 식물들이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이파리들은 평범해 보이지가 않았는데 그다지 영력 파동이 느껴지지 않아 그냥 흔한 잡초 같기도 했다.

이때 짙은 남색 영초들이 바르르 떨면서 윙윙 진동했다. 극히 미세한 소리였지만 심연에서 메아리쳐 더욱 크게 들렸다.

“이 소리는…….”

안개가 용솟음치기 전에 소리가 났던 것을 떠올린 한립은 아연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남색 영초들을 모조리 채집해서 넣어두고는 빠르게 안개 속에 떠다니는 무너진 부산 산봉우리들을 스쳐 지나갔다.

원래 안개 밖에서 수많은 영약의 보금자리가 되어주던 산봉우리들이라 챙길 영약이 많았다.

어차피 종문에서는 부서진 산봉우리를 검사하지 않을 테니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 * *

반 시진 후, 자신의 거처가 있는 산봉우리 위.

한립은 동부 앞 돌계단 위에 서서 광장에 늘어선 촉룡도 수사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힘겨운 전투를 마친 흥분과 기쁨 그리고 약간의 불안감이 느껴졌다.

비경에 상주하는 진선 장로들은 일정 기간마다 바뀌었지만, 오늘처럼 이변이 발생하지 않는 한 다들 폐관 수련을 하느라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재난에 가까운 사고에 앞장서서 괴물을 없애주었으니 이곳에 주둔하는 수사들의 마음에 감동을 남기기 충분했다.

“이번 부산의 이변은 날벼락 같은 재앙이었음에도 잘 대응하여 피해가 적었다. 종문에 그대로 보고하여 너희들이 누려야 할 공로와 보상을 요청하겠다.”

한립은 수사들을 둘러보며 인자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려 장로님!”

진선 장로들이 맨날 폐관 수련만 해서 사고가 터진 것이라고 투덜대던 이들도 이 말을 듣고는 격동해서 입에 침이 마르게 감사를 표했다.

“대협곡의 안개는 물러났지만 정리해야 할 것들이 많을 것이다. 급한 일을 마치면 보고해야 하니 사상자의 수를 파악해 내게 알리거라.”

“예!”

한립은 호침 등 몇 명에게 따로 단약을 상으로 내리고 자신의 동부로 돌아갔다. 밀실로 들어간 그는 진언보륜을 띄우고 생각에 잠겼다.

다른 수사들은 진언화륜경을 3성까지 익히고도 시간도문 18개를 얻기 어렵다는데 그는 진선경 중기의 수행으로 24개를 응결해 냈다.

진언보륜과 외양을 바꾼 청죽봉운검이 있으면 고걸 화신과 다시 싸우게 되어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고걸 본인이 온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야겠지만!

진언화륜경 1성 수련을 마쳤으니 서책에 적힌 대로 시간 법칙을 장악하기 위해 시도를 해야 했다. 다만 진언보륜의 시간의 힘은 짙은데 혼란스러운 느낌이 있어서 법칙의 실도 응결할 수가 없었다.

진정한 법칙의 힘을 장악한 이들과 비교 할 수도 없을뿐더러 신념의 힘을 법칙의 힘으로 응결하는 자신의 지선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삼대 지존 법칙 중에 하나인 시간 법칙이 겨우 시간을 늦추는 신통 하나밖에 없을 리가 없을 텐데.’

고걸 화신이 나무 속성 법칙을 운용하던 수법들과 그 위력을 생각하니 퍽 기대가 되었다.

한립은 선원석을 꺼내 쥐고 진언보륜을 발동했다. 시간도문이 반짝이고 십 장 너비의 구역이 금색 파문으로 뒤덮였다.

진언화륜경에 시간 법칙을 어떻게 장악하면 되는지 구체적인 방법이 쓰여 있지 않았으니 스스로 관찰하고 생각해서 깨달음을 얻는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세 달간 석상처럼 앉아 있던 한립은 굳은 얼굴로 눈을 떴다. 시간 법칙을 어떻게 장악해야 할지 실마리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법칙의 힘을 깨우친 진선도 얼마 없는 마당에 삼대 지존 법칙을 장악하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팟.

한립은 잿빛의 돌 구슬, 외눈박이 거인의 눈알을 꺼내 들었다. 그가 법칙의 힘을 장악하기 위해 준비해둔 여러 가지 중 하나였다.

두 손으로 돌 구슬을 든 그는 시간 법칙의 힘을 천천히 주입하니 희미한 하얀빛이 떠올라 시간 법칙 파동을 발산했다. 눈을 감은 그는 구슬 안에서 시간 법칙이 어떻게 운용되는지 비교해보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눈 깜짝할 사이에 몇 달이 지나갔다.

돌 구슬의 시간 법칙의 힘을 관찰하는 건 아무런 소득이 없는 짓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구슬을 치운 한립은 반짝이는 눈으로 녹색 액체 방울이 굴러다니는 녹색 병을 꺼내 선령력을 주입했다.

쿠릉!

동부 인근의 천지영기들이 급속도로 몰려들어 영력의 소용돌이가 만들어졌고, 촉룡도 수사들은 깜짝 놀랐다가 자기 할 일에 열중했다.

지난 2백 년간 이상한 천기 현상이 자주 일어나서 습관이 된 것이다. 며칠 뒤에 한립은 약간 창백한 얼굴로 수정 알갱이를 들고 있었다.

진선경 중기에 이르러 보유한 선령력이 늘어서인지 수정 알갱이를 응결하는 것도 이전처럼 힘들지 않았다.

단약을 하나 집어 먹고 빠르게 혈색을 회복한 그는 수정 알갱이에 의식을 주입했다. 그러자 수정 알갱이 속의 금색 수정실이 반짝거리면서 그의 등 뒤에 나타난 진언보륜의 시간도문과 공명했다.

드디어 뭔가 극적인 반응을 보이자 한립은 얼른 눈을 감고 현상을 관찰했다.

그렇게 한 달 뒤.

쨍강!

내부의 금색 실이 소실된 수정 알갱이가 깨져서 사라졌다. 눈을 뜬 한립은 들뜬 기색을 드러냈다.

확실히 뭔가가 잡힌 것은 아니지만 이전보다는 시간 법칙의 가장자리에라도 닿은 느낌이었다.

오랜 어둠 속에 겨우 발견한 작은 희망이었다. 한립은 벌써 녹색 액체를 한 방울 더 응결한 작은 병을 꺼내 들고 미소를 머금었다.

진언화륜경을 막힘없이 익힌 것도 작은 병 덕분 같았는데, 시간 법칙을 깨우칠 때도 작은 병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다만…….

수정 알갱이도 그렇고, 돌 구슬도 그렇고, 그 안의 법칙의 힘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절벽에 핀 꽃을 올려다보는 기분이었다.

제대로 법칙의 힘을 감응하기 위해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갈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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