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1화. 검
*
‘저건?’
희희낙락하며 옥함에서 약방들을 꺼낸 그의 눈가가 꿈틀했다. 나뭇잎처럼 얇은 비수를 꺼낸 그가 옥함 안의 모서리에 찔러 넣고 비틀었다.
캉.
매끈한 보라색 옥판이 옥함 밑바닥에서 떨어져 나왔다.
밀실의 불빛을 빌려 자세히 살펴보니 종이처럼 얇고 매끈한 옥판에 가느다란 선들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꽃밭 같은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의식을 이용해 그것을 살피려다 옥판에서 흘러나온 금빛 주술문자들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몇 번을 시도했지만 옥판이 불안정해지는 것을 보고 혹시나 깨질까 봐 더 강한 의식은 불어넣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옥판과 약방을 전부 옥함에 돌려놓고 그는 회백색 돌화로를 꺼내 텅! 하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후왕에게 얻은 돌화로는 담겨 있던 후아주를 꺼냈는데도 은은하게 술향이 남아 있었다.
후우!
한립이 길게 숨을 내쉬고 두 손으로 수결을 맺어 기괴한 법결을 날렸다. 푸른빛이 날아가 회백색 돌화로에 떨어질 때마다 표면의 주술문자가 은빛을 반짝였다.
“역시!”
인구에게 알아낸 보물을 제련하는 구결은 과연 돌화로에도 통했다. 즐거운 눈빛으로 연달아 법결을 날린 그는 빠르게 주문을 외워보았다.
빛이 왕성해질수록 달그락달그락 거리며 진동하던 회백색 돌화로 표면에 나뭇잎의 잎맥처럼 무늬가 떠올라 은빛을 내뿜었다.
은빛 속에서 회백색 돌 껍질이 한 겹씩 벗겨져서 커다란 돌화로는 거의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투박하던 돌화로 대신 똑같이 큼지막한 주술문자 8개가 새겨진 화려하고 정교한 문양의 은으로 만들어진 화로만 남게 되었다.
‘이걸로 연단을 하면 도움이 될지도……!’
한립은 본모습을 드러낸 화로의 재질과 기운이 평요자가 사용하던 금색 화로 못지않은 것을 보고는 즉시 은빛 화염 소인을 불러냈다.
천방지축처럼 폴짝폴짝 뛰어다니던 꼬마아이는 금방 화로에 시선을 빼앗기더니 한립을 돌아보았다.
한립이 미소를 지으며 의식으로 뜻을 전하자 소인이 화로 뚜껑으로 펄쩍 뛰어올라 볼을 부풀렸다.
화르륵!
소인의 입에서 어울리지 않게 거대한 화염 덩어리가 분출되어 화로 아래쪽으로 떨어졌다. 이글거리는 은색 화염 덕에 밀실 안의 온도가 후끈해졌다.
잠시 후, 문양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화로가 유유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 위에 선 소인은 흥미 가득한 얼굴로 아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화로와 함께 흔들거렸다.
팟.
한립의 손짓에 촉령초 등 십여 가지 영약이 저물탁에서 빠져나와 허공에 나타났다. 그가 두 손바닥을 비비자 영약들이 펑! 가루로 변해 둥실둥실 뭉쳐 있었다.
검지와 중지를 뻗어 은색 화염 소인이 앉아 놀고 있는 화로 뚜껑을 들어 올린 한립은 가루들을 순서대로 화로 속에 집어넣었다.
화륵!
다시 뚜껑이 닫히자 화로의 은색 주술문자들이 밝게 빛나더니 아래쪽 은색 화염이 무형의 힘에 통제를 받는 것처럼 비틀비틀 꺾여 작은 화염의 용으로 변해 화로를 감쌌다.
이에 화로 위에 앉아 있던 소인이 흐릿하게 은색 불새로 돌아가 화염의 용 속으로 융합되었다.
쿵.
바르르 떨린 화염 용의 열기가 몇 배로 상승했다.
지켜보던 한립이 눈을 크게 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결과 연단 시간이 획기적으로 짧아졌는데 단약의 성공률은 어떨지 알 수 없었다.
수시로 진언보륜을 동원하는 한립 앞에서 광채가 흐르는 화로가 약간의 약향도 놓치지 않고 떠 있었다.
일고여덟 시진이 지났을 때, 화로의 일곱 빛깔 광채가 팟! 사라져 원래의 은백색으로 돌아갔다. 은색 화염도 은색 소인으로 돌아가서 한립의 어깨 위로 날아올랐다.
텅!
한립은 열기를 머금은 채 바닥에 떨어진 화로를 보고는 조심스럽게 손을 저었다. 뚜껑이 열리면서 압축된 약향이 밀실을 채웠고, 화로 속에 열여섯 개의 동그란 금색 단약이 하얀 수증기를 뿜고 있었다.
“이렇게 효과가 좋을 줄이야! 제련시간도 대폭 줄어들고 단약 성공률도 높아졌어.”
한립은 희열을 억누르며 화로 속 단약을 옥병에 옮겨 담고 새로운 영약 재료들을 늘어놓았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기왕 시작한 거 단약을 실컷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 * *
몇 달 뒤, 화로 아래 은색 화염이 불새로 변해 빠져나오더니 소인의 모습을 하고 쪼르륵 한립에게 달려왔다.
그의 옷자락을 잡고 기어오른 은염(銀焰) 소인은 어깨까지 기어올라 자리를 잡았다. 한립은 약간 피곤해 보였지만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부드럽게 뚜껑이 열린 화로 안에서 진한 약향이 빠져나왔다. 그 안에는 용 눈알 크기의 청록색 단약들이 들어있었다.
“좋았어! 한번에 11개면 단약 성공률이 상당히 높아진 셈이야.”
그는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단약들을 백옥병에 담아 넣고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바닥에 주저앉아 소머리 가면을 썼다.
우웅.
밀실 벽 옆으로 푸른 화면이 떠올랐고 한립은 임무를 유심히 살피다 가면을 벗었다.
“하아, 올 것이 왔구나.”
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인십칠이 무상맹에 발표했던 임무들이 한 번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정상적으로 다른 회원이 임무를 수행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본인 혹은 무상맹 가면에 문제가 생겨 일어난 일이 틀림없었다.
의식을 움직여 비경 입구와 뇌폭해양 해안절벽에 남겨둔 의식 표지가 온전한 것을 확인한 그는 긴장을 풀었다.
그렇게 경계심을 풀지 않고 하루하루가 지나 어느덧 십여 년이 흘러갔다. 그중 절반은 단약 제련에 정신이 없었고 동시에 장천병으로 적잖은 수정 알갱이도 응결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부 광장에 수십 명의 촉룡도 수사 복색을 한 젊은 남녀들이 날아들어 저택 대문 앞으로 모였다.
한립은 대문 앞 돌계단 위에 서서 몇 사람을 호명했다.
“호침, 나당, 심수…….”
“예, 려 장로님!”
7명의 사내와 여인들이 무리에서 걸어 나와 공수를 했다. 연허기 최고봉에 이른 이들로 비경에 주둔 중인 수사들 중에 실력이 출중한 무리였다.
“산봉우리를 봉하고 폐관 수련에 들어갈 생각이다. 비경의 일은 너희에게 맡겨 둘 테니, 서로 상의해서 결정하고 급한 일이 아니면 내게 알릴 것 없다.”
“존명!”
“이 부적은 너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겼을 때 영력을 주입하면 내게 알려줄 것이다.”
“예!”
한립의 분부에 수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최선을 다해 맡겨주신 책임을 다할 것이니 걱정 놓으셔도 됩니다. 려 장로님.”
일곱 수사 중 연배가 있어 보이는 까만 피부 청년이 나와서 양손으로 부적을 받아들었다.
“이제 다들 물러가 보거라.”
한립의 말에 촉룡도 수사들이 인사를 올리고 날아올랐다.
쿠릉.
반나절 후, 한립이 기거하는 산봉우리가 크게 흔들리며 푸른 빛기둥들이 솟아올라 동그란 보호막을 만들어냈다.
그는 산봉우리에 거대한 동굴을 뚫고 왼쪽 벽 옆에는 바닥을 파고 불구덩이로 삼았다. 그리고 그 옆 탁자에 일고여덟 가지의 재료가 올라가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어두운 금색의 금속 열댓 개와 주먹 크기의 하얀 돌멩이 하나였다.
전자는 꽃잎과 같은 문양들이 독특했고 후자는 은은하게 향기가 났다. 각각 곡문정금과 낭선운석이었다.
불구덩이 옆에 선 한립은 낭선운석을 집어 들고 부드러운 촉감을 느꼈다.
단약을 제련하면서 줄곧 촉룡도 쪽 소식에 귀를 기울였는데 어디에서도 고걸의 소식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종문의 어느 금선이 쫓아 보낸 것이었으면 좋겠는데.”
백의 여인이 그를 쫓아 보냈다는 것을 모르는 한립은 여전히 금선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이제 단약도 충분하겠다 수련을 시작하기 전에 청죽봉운검을 새롭게 제련해 놓을 때였다. 새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정염 불새가 그의 몸 안에서 튀어나와 불구덩이에 화륵! 불을 지폈다.
손에 들린 낭선운석이 선령력에 휩싸여 서서히 은색 불길로 날아갔다.
처음에는 하얀 돌멩이가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한립이 수결을 맺고 주문을 외기 시작하자 불구덩이 네 면에 박아놓은 검은 석판이 빛나면서 은색 화염도 기이한 파동을 만들어냈다.
츠츳.
낭선운석이 서서히 녹아 우윳빛 액체로 녹아들자 그윽한 향기가 밀실을 가득 채웠다. 이에 한립은 낭선운석이 전부 액체 상태가 되자마자 선령력을 감싸 불길에서 끄집어냈다.
미리 준비해둔 새빨간 문양이 새겨진 흑돌 병에 그것을 담자 병이 무척 뜨거워졌다.
다음은 곡문정금이었다.
수결을 맺어 불구덩이 석판에 새겨둔 진법을 발동한 한립은 동굴의 돌 제단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도 곡문정금은 문양을 반짝일 뿐 전혀 녹으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도 힐끗 한 번 살핀 한립은 눈을 감고 신경 쓰지 않았다.
낮과 밤이 일곱 번 지나, 더없이 새빨갛게 변한 곡문정금 표면에 금색 액체 방울이 녹아 있었다. 그 아래서는 이전보다 큰 흑돌 병이 떠서 떨어지는 금색 액체를 한 방울씩 담았다.
다시 하루가 지나서야 곡문정금 한 덩이가 겨우 다 녹았다.
한립은 대수롭지 않게 일어나 흑돌 병을 회수하고 다른 곡문정금을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 넣었다.
세 달 뒤, 불구덩이 옆에 선 한립은 요수 가죽 서책을 들고 손끝으로 허공에 무언가를 그려가며 공부 중이었다.
“흠…….”
그가 앉아 있던 돌 제단에는 구불구불한 그림이 그려진 수천 장의 누런 종이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고, 그중 가장 위쪽의 네 장은 네 송이의 동그란 꽃을 그려 놓은 것처럼 그림이 섬세하고 완성도가 있었다.
종이 더미 왼쪽으로는 다양한 영액을 가득 담은 십여 개의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병들이 놓여 있었다.
한립은 각종 약재들을 제련하면서 요수 가죽 서책에 적힌 용금연검술에 따라 종이에 진법 도안을 그려댔다. 수천 장을 그려놓고도 무엇이 불만인지 아직까지 제련을 미루고 있었다.
잠시 후 책을 팍! 덮은 한립은 눈을 감고 오른손 검지만을 유려하게 움직여 허공에 그림을 그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눈을 뜬 그는 자신 있게 불구덩이로 가서 금색 비늘을 일으킨 두 손가락으로 석판에 무언가를 새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극히 느렸던 움직임이 대충 위치를 잡고는 빨라져서 물 흐르듯 문양이 완성되었다.
그 형태는 수북하게 쌓인 종이들 중 마지막 네 장의 도안과 흡사했다.
한참 만에 불구덩이 네 면에 도안을 완성한 그는 도안들이 서로 호응하는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정염불새를 내보내 불길을 일으키니 72자루의 청죽봉운검들이 벌떼처럼 날아올라 웅웅 몸을 떨었다.
“가라.”
불길 속에 청죽봉운검들을 집어넣은 한립은 그 앞에 앉아서 두 손으로 특이한 수결을 맺고 묵묵히 주문을 읊조렸다.
우우웅!
불구덩이 속 도안들이 금색 빛기둥을 발산해 청죽봉운검과 정염불새를 금빛으로 에워쌌다. 차례로 날아오른 목이긴 병들이 금빛 속으로 액체를 떨구었다.
투명한 금색 막 안에서 곡문정금 용액이 스스로 흩어져 72자루의 비검에 골고루 발라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후우욱!
한 시진 후에는 한립의 입에서 원영의 불길이 흘러나와 은색 화염과 합쳐졌다. 거세진 불길에 휩싸인 청죽봉운검이 변화를 보였다.
열댓 개의 비검들이 열기를 견디기 어려운 듯 미친 듯이 허공을 베면서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그러나 한립은 방대한 의식을 방출하고는 의식 감응을 해 비검들을 안정시켰다.
“그때 흡수한 검원이 아직 전부 융합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니. 그동안 꽁꽁 잘도 숨어 있었구나.”
그는 문득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검원들이 지금 발작해서 다행이지 전투 중에 통제를 벗어났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불길 속에서 다양한 영액에 감싸인 청죽봉운검 안에서 불순물들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제야 마음을 놓은 한립은 원영의 불길과 은색 화염을 섬세하게 조절해 청죽봉운검들이 무지갯빛으로 변화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거의 49일이 지나서야 불구덩이의 금빛 장막 속 일흔두 자루의 비검은 맑은 물을 얼려 놓은 것처럼 투명하게 변했다. 이전보다 검 끝이 손가락 한마디는 길어졌고 너비도 늘어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낯선 모습의 청죽봉운검을 응시하던 한립이 마지막 흑돌 병에서 우윳빛 영액을 뿌렸다.
치이익!
마치 초봄에 내리는 단비처럼 메마른 청죽봉운검에 생기가 일었다. 동시에 비검들은 진동하며 겉에 새겨진 문양에서 금색 뇌전실을 터트려 작은 뇌전의 숲을 이루어냈다.
금색 장막이 막지 않았으면 산을 통째로 날리고도 남았을 뇌전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