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화. 옥함을 열다
*
“정말 아름다운 것들을 아낄 줄 모르는 분이군요?”
자신을 빗댄 것인지 아니면 꽃을 빗댄 것인지 자리에서 일어난 여인이 설련화 꽃잎을 찌르고 있는 비검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푸른 비검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애달프게 웅! 떨더니 고걸의 수중으로 되돌아갔다.
고걸은 무심코 튕겨 돌아온 비검을 받아들고는 손이 간지러운 것을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 비검 칼자루에 분홍색 가루가 반짝였다.
그가 손을 놓기 전 가루 알갱이들이 화려한 무늬의 나비 떼로 변해 달려들었다. 이에 고걸은 갑옷에서 가느다란 푸른 등나무 줄기들을 뿜어 나비들을 제거해 나갔다.
하지만 그는 곧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눈앞의 설련화와 백의 여인이 감쪽같이 사라져서 기운조차 감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자 광활한 설원마저 사라져 모든 것이 텅 비어 있었다.
“겨우 환술 따위로 나를 가두려 들어?”
고걸은 눈을 감고 묵묵히 입술을 달싹여 손, 갑옷 그리고 비검에서 동시에 보광을 방출했다. 번쩍 눈을 뜬 그는 두 손으로 쥔 비검을 힘껏 휘둘렀다.
쿠쿠쿠쿵!
산봉우리가 넘어가는 것처럼 거대한 푸른 검 그림자가 허공에 떨어졌다. 일곱번의 검 그림자가 연달아 베어낸 공간은 격렬하게 진동하다 고요해졌다.
놀랍게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러다 드디어 고걸의 표정도 흠칫 달라졌다.
“고 수사, 우리끼리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 차분히 앉아서 이야기를 좀 나누실까요?”
이때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백의 여인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겁니까!”
“제가 이해한 바로는, 수사가 찾는 이들은 그저 맹의 임무를 집행했을 뿐 잘못이 없지 않습니까.”
“헛소리! 천단사가 될 가능성이 높았던 선궁의 진선경 수사를 살해했는데 잘못이 없다니요! 그럼 목숨 빚을 받기 위해 그들을 찾아 나선 내 잘못이란 말입니까?”
고걸은 대로하며 목청을 높였다.
“당연히 고 수사께서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으셨겠지요. 허나 그쪽은 한 명이 죽었는데 수사께서 죽인 무상맹 그리고 촉룡도 수사가 어디 한둘이던가요?”
“그까짓 놈들이 어디 평요자와 같이 거론될 주제나 된 답니까!”
“그건 수사의 입장이고, 제 입장에서는 지나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슬슬 화를 풀고 돌아가시지요.”
고개를 저은 백의 여인이 평온하게 말했다.
“다른 두 놈을 마저 죽이기 전에는 돌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북한선궁의 체면을 생각해서 긴말을 늘어놓았건만. 계속 눈치 없이 고집을 부린다면 아예 못 돌아가게 만들어 줄 수도 있습니다. 천년 정도 폐관할 작정하고 수사의 12개의 선규를 봉해 원기를 크게 상하게 만들어드릴까요? 설마 선궁에서 겨우 수사와 같은 금선 한 명 때문에 촉룡도와 무상맹을 뒤집어 놓을 거라 믿고 있는 것은 아닐 테지요.”
백의 여인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자 고걸도 정신이 번쩍 들어 입을 다물었다.
“당신이 죽인 이들에 대해서는 무상맹과 촉룡도 모두 책임을 묻지 않겠습니다. 이 일은 여기서 마무리 짓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일의 경중을 안다면 속히 고운대륙을 떠나는 것이 좋을 겁니다.”
백의 여인이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다가 사라졌고, 고걸의 머리 위에서 무수히 많은 꽃잎이 떨어져 그를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멀리서 설련화가 번득 사라지고 있었다. 고걸은 허공에서 붉으락푸르락 화를 다스리다 북쪽으로 몸을 날렸다.
* * *
반나절 후, 촉룡도 어느 산봉우리의 동굴 속.
원형 제단을 둘러싼 8개의 검은 돌기둥에 붉은 불길이 타오르는 화로들이 얹어져서 공간을 비추었다.
불빛 속에서 푸른 사슴 머리 가면을 쓴 피풍의를 걸친 키 큰 사내가 초조하게 제단 아래를 서성이고 있었다. 사내는 바로 인구였다.
그는 촉룡도 구역의 무상맹 수사들이 연달아 살해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여러 정보들을 끼워 맞추어 범인이 북한선궁의 금선 장로라고 확신했다.
화들짝 놀란 그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 공간으로 들어가 금선이 될 때까지 숨어서 나오지 않으려 했는데 무상맹의 고위층 회원이 절대 종명산맥을 떠나지 말고 이곳에 숨어 있으라는 소식을 보내왔다.
그렇게 동굴에 숨은 지 벌써 1년째였다. 그러나 걱정이 커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바로 그때, 제단 중심에 흰빛이 일고 설련화가 피어났다. 그 위에 앉은 것은 백의 여인이었다.
“운……. 인삼(麟三) 선배님.”
서둘러 고개를 숙인 인구가 공손히 예를 올렸다.
“이전에 자네에게 진 신세를 갚았다 치겠네. 앞으로는 결코 나서 주지 않을 것이니 신중히 행동하게.”
백의 여인은 이 몇 마디를 남기고 흰빛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이에 인구가 쓴웃음을 지으며 허공을 향해 인사를 하고 사슴 가면을 벗었다.
화려한 금포를 입은 땅딸막한 사내는 바로 웅산이었다.
* * *
고운대륙 바깥, 동류해역의 얼어붙지 않은 쪽빛 바다.
암초들이 둥그렇게 모인 아래로 칠흑 같은 해구(海溝)가 파여 있었다. 바다 속의 깊은 협곡과 같은 이곳 바닥에는 검은 해초가 달라붙은 회백색 비석이 가라앉아 있었다.
바닷물에 침식되어 울퉁불퉁해진 통나무 높이의 비석은 사실 촉룡도 관할의 비경(祕境)으로 통하는 입구였다.
“…….”
그 비경 속, 녹색 산봉우리에 세워진 백석 광장에 한립이 난간을 짚고 서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산봉우리들이 뚝뚝 떨어져서 떠있는 이곳은 산 아래에서 길게 늘어진 푸른 덩굴들이 아래쪽의 잿빛 안개로 이어져 있었다.
이곳이 이름은 ‘부산(浮山)’으로, 허공에 뜬 수천 개의 영기 충만한 산봉우리에서 다양한 극품 영약이 자라났다.
그중에는 지계 단약을 제련하는데 많이 쓰이는 산복신(山茯神) 복룡삼(伏龍參) 같은 영초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부산 아래에는 끝을 알 수 없는 대협곡에 짙은 안개가 가득 퍼져 있고, 그 속에 사람을 닮은 회백색 피부의 이상한 생물들이 서식했다.
본명은 어떤 경전에도 나와 있지 않아 촉룡도 사람들은 백귀(百鬼)라고 불렀다.
일반적으로 백귀들은 대협곡을 벗어나 부산에 오를 수 없는데 수천 년에 한 번씩 대협곡을 채운 짙은 안개가 용솟음쳐 부산까지 닿는 기간이 있었다.
이때 대량의 백귀들이 안개로 몸을 숨기고 부산으로 숨어들어 각종 영약을 뜯어먹고 그걸 막는 수사들을 포악하게 살해했다.
백귀 하나하나는 전투력이 강하지 않아도 그 수가 많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 충돌이 있을 때마다 쌍방 모두 피해가 속출했었다.
나중에 영원히 백귀들을 차단하기 위해 촉룡도 내의 진법에 능한 도사들이 부산 아래쪽에 강력한 금제를 펼쳐서 안개가 용솟음치는 것을 방지했다.
안타까운 점은 안개의 범람이 그치자 부산들의 영약 생산량이 해가 다르게 줄어들었고 산복신이란 영약은 아예 멸종되어서 한 뿌리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제야 비경의 독특한 자연환경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파악한 촉룡도 수사들은 금제 진법을 거두고 짙은 안개가 용솟음칠 때 백귀들만 넘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 대신 의외의 사고를 막기 위해 비경에는 대량의 연허기 수사들과 꼭두각시들 외에 진선경 장로 한 명이 상주하도록 지침이 내려왔다.
현재 이곳의 유일한 진선경 상주 장로가 바로 한립이었다.
그는 광장 가장자리 난간에 붙어 서서 기이한 풍경을 내려다보았지만 마음은 딴 곳에 있었다.
한 달 전 이곳에 도착했을 때 대협곡 내부를 제외한 주위 환경을 샅샅이 조사해서 드나들 수 있는 출입구는 하나뿐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입구에 금제진법을 펼쳐 놓았고 의식도 한 줄기 남겨 놓았으니 고걸이 그를 죽이러 비경에 들어오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출입구가 하나라 달아나기도 어려웠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운대륙 남단에 다녀왔었다.
뇌폭해양 가까이의 해안절벽에 몰래 동굴을 하나 파놓고 구뢰목 9개를 땅에 박아 초장거리 전송이 가능한 뇌진과 의식 표지를 남겨두고 온 것이다.
이제 고운대륙 인근에 있는 한 언제든 뇌진의 의식 표지를 감응해 눈 깜짝할 사이에 그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고걸이 여기까지 찾아오면 곧바로 그 동굴로 달아나서 뇌폭해양으로 숨어들 작정이었다.
한 가지 제약은, 뇌진을 항상 발동 상태로 유지해야 해서 구뢰목의 뇌전의 힘이 다하는 백년 후면 더 이상 이 방법을 쓸 수 없었다.
“그때 가서 또 방법을 강구해야겠지만 일단은 급한 일부터!”
한립은 난간을 가볍게 탁탁 치고 광장 다른 쪽의 동부로 걸어갔다. 동부 밀실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그는 두 장의 누런 종이를 꺼내 꼼꼼하게 내용을 살폈다.
두 종이에 적힌 것은 통원단과 춘림단의 약방이었다.
빠르게 실력을 높이려면 대량의 지계 단약을 제련해서 수련을 보조하는 게 최선이었다.
통원단은 꽤 능숙해져서 성공률이 높아졌고 춘림단도 진언보륜의 도움을 받으면 어렵지 않게 초기의 실패 확률을 줄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장 두 단약을 제련하기에 재료가 부족하지 않은데도 그는 미래를 생각해 동부 약재밭에 대량의 영약들을 심어두었다.
같은 지계 단약 두 가지를 마구 복용하다보면 금방 내성이 생겨 효과가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더 많은 지계 단약 약방을 구해 다양한 단약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무상맹에 지계 약방을 구한다는 임무를 올려놓았는데 워낙 진귀하기도 하고 지단사들이 약방 거래를 원하지 않아 소득이 없었다.
팟.
눈을 반짝인 한립은 평요자의 물건이었던 보라색 옥함을 불러냈다. 천단사에 가까웠던 인물이 소중하게 여겼던 물건이면 연단사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약방일 수도 있었다.
한립은 문양이 그려진 열댓 개의 조그만 깃발들을 꺼내서 돌로 된 지면에 꽂아 넣었다. 새까만 깃발들이 복잡한 소형 진법을 형성했다.
옥함을 그 가운데 둔 그는 수결을 맺고 주문을 읊조렸다.
웅웅.
주문소리가 높아질수록 검은 깃발의 문양과 진법이 빛을 발했다.
“열려라.”
한립의 명령에 진법에서 폭발적으로 방출된 빛이 보라색 옥함으로 스며들었다.
파앗!
보라색 옥함에 붙어 있던 은색 부적에 갑자기 불이 붙어서 옥함의 문양을 타고 불길이 퍼졌다. 이에 보라색이던 옥함은 보랏빛 수정처럼 투명하게 변해서 더욱 아름다워졌다.
한립이 옥함을 꺼내 살펴보려는데, 옥함이 극심하게 떨리더니 문양이 거북껍데기처럼 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깜짝 놀란 한립은 명청령안을 발동했다.
보라색 옥함 내부에 숨겨진 주술문자들이 힘을 발휘해 옥함과 그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부수려 하고 있었다. 옥함은 겉면과 내부에 두 겹으로 금제가 걸려 있었던 것이다.
한립은 진언보륜경의 구결을 외워 금빛 속에서 고리를 불러냈다. 진언보륜이 쾌속으로 돌아 금색 파문을 발산하자 한립을 제외한 밀실 안의 모든 것이 느리게 움직였다.
그저 밝게 빛나는 것으로 보이던 보라색 옥함 내부의 주술문자도 이제 보니까 밝아졌다 어두워졌다하며 깜빡거리고 있었다.
거기서 영감을 받은 한립은 바닥에 박아둔 검은 깃발들을 이동해 새로운 진법으로 바꾸었다.
“열려라.”
그의 작은 목소리에 진법에서 검은빛이 화살처럼 날아올라 보라색 옥함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옥함 내부의 주술문자는 흩어지고 바깥의 불길은 줄어들었다.
달칵!
부적이 일으킨 화염이 사라진 보라색 옥함은 스스로 뚜껑이 열렸다. 진언보륜을 체내로 돌려놓은 한립은 보라색 옥함을 손에 쥐었다.
밀실 바깥에 따로 고계 차단 금제를 펼쳐 놓아서 옥함 안의 물건 때문에 위치를 들킬 일은 없었다. 옥함에 든 얇디얇은 옅은 금색 종이들을 보고 한립은 의식을 방출해 문제가 없는지 검사했다.
어떤 표식도 남아 있지 않은 종이 뭉치의 맨 앞장에는 고어체로 승울단(承菀丹)이라는 큰 글씨와 영약의 이름, 연식, 제련 방법이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그의 예상대로 옥함에 약방들이 들어있자 한립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빠르게 종이를 들춰보자 열댓 장 중에 무려 7장이 지계 단약의 약방이었다.
‘하긴 도단 제련을 시도할 실력자였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일곱 가지 지계 단약에 통원단, 춘림단까지 있으면 한동안 단약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인십칠은 화신단이라고 했지만, 평요자의 저물대에서 찾은 노란 단약은 약방에 적힌 단약에 대한 묘사가 승울단과 일치했다.
일곱 가지 단약은 춘림단보다 급이 높았고 자연히 필요로 하는 영약들도 귀하고 오래된 것들이었다.
다행히 부산 비경을 지키고 있는 그는 영약 창고에서 필요한 재료를 구해 쓰고 떠나기 전까지 돌려놓으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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