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599화 (1,356/2,000)
  • 1599화. 설련화(雪蓮花)

    *

    몇 달 뒤, 종명산맥.

    적하봉 저택의 전당 안에서 팔걸이의자에 앉은 한립이 청록색 찻잔을 들고 목을 축이고 있었다.

    몽운귀 등이 두 줄로 늘어서서 복도를 지나 전당 안으로 급히 들어왔다.

    “려 장로님, 손부정은 폐관 수련 중이라 함께하지 못하였고 나머지는 분부하신 대로 모두 모였습니다.”

    시종들 사이에서 몽운귀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한립이 아홉 명의 시종들을 살피자 다들 차이는 있었지만 수행이 크게 올라가 있었다.

    수행이 가장 높은 것은 몽운귀와 폐관 중인 손부정이었고, 수련 속도가 가장 빠른 것은 몽천천이었다.

    그녀는 몽운귀 옆에 서서 존경심 어린 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종문을 떠나 있을 예정이다. 그리고 오늘 너희들을 부른 것은 할 말이 있어서이다.”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내가 떠나 있는 동안 적하봉을 봉쇄하고 손님을 일절 받지 않는다. 너희도 함부로 산봉우리를 떠나서는 안 되며, 수련에 정진하면서 약초밭의 영초를 돌보는 데만 힘쓰거라. 수련에 필요한 것들은 운귀에게 내줄 것이니 받아가면 된다. 되었다, 이제 가서 일들 보거라.”

    한립은 할 말을 마치고 손을 훠이훠이 저어 보였다.

    “예!”

    나머지 시종들은 공손히 대답하고 물러났고, 단약을 받아야 하는 몽운귀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몽천천이 다른 수사들을 따라 나가려는데 한립이 입을 열었다.

    “천천, 너도 같이 남거라.”

    그 말에 몽천천이 남몰래 웃음을 지으며 얼른 몸을 돌려 오라비 곁으로 돌아왔다.

    “이번에 돌아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단약을 충분히 넣어두었으니 일정 기간을 두고 한 번씩 나눠주거라. 그중에 고원단(顧元丹)은 손부정이 출관하면 새로운 경지를 견고히 하는 데 쓰라고 내주면 된다.”

    “예.”

    한립이 남색 저물대를 던져주자 몽운귀가 그것을 받아 고개를 조아렸다.

    “이제 너도 가보거라.”

    한립의 명에 몽운귀가 의아한 눈빛으로 여동생을 힐끗 보고는 말없이 물러났다.

    “며칠 전 가보니 알을 아주 잘 돌보았더구나. 아직 부화하지도 않았는데 생기가 넘쳐서 깜짝 놀랄 뻔했지.”

    한립은 미소를 머금고 몽천천을 칭찬했다.

    “아직 알을 부화시키지 못했으니 제 잘못이 큽니다.”

    “때가 되면 자연히 부화할 것이니 그리 신경 쓸 것 없다. 그저 앞으로도 알을 잘 돌봐주거라.”

    “그건 안심하셔도 됩니다, 려 장로님! 제가 최선을 다해 돌보겠습니다.”

    한립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몽천천을 보고는 미소를 짓고 옥병 하나를 따로 내주었다.

    “예전에 구한 화염단(火炎丹)이다. 이제 이걸 복용할 수준이 되었으니 가져다 수련에 쓰거라.”

    “감사합니다.”

    몽천천의 얼굴이 활짝 피더니 두 손으로 서둘러 약병을 받았다.

    “이제 너도 가봐도 좋다.”

    한립이 손을 저었는데 몽천천이 머뭇거리면서 쉽게 걸음을 떼지 못했다.

    “왜 그러지? 할 말이 있다면 해 보거라.”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셨는데 또 나가신다고 하셔서요. 거기다 적하봉까지 봉쇄하시고……. 혹시 무슨 일이 생기신 건지 걱정됩니다.”

    몽천천은 조심스럽게 걱정을 토로했다.

    “바보 같기는, 진선인 내게 무슨 일이 생길 수 있겠느냐?”

    “역시 그렇지요? 그럼 다행입니다. 저도 물러가 보겠습니다, 장로님.”

    웃으며 답하는 한립을 보고 몽천천이 한시름을 놓으며 떠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한립의 얼굴에 웃음기가 걷혔다.

    종문으로 돌아온 지는 사흘밖에 되지 않았지만 명한대륙을 벗어난 지는 어느새 반년이 훌쩍 지났다.

    한눈에 그들이 무상맹 수사들이라는 것을 알아본 고걸 화신이 자신이 북한선궁 장로라는 것까지 밝히고 죽이겠다고 협박한지 반년이 지났다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종문에 머무는 것은 현명하지 않은 일 같아서 돌아오자마자 임무를 핑계로 멀리 떠나려는 것이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한립은 즉시 전당을 나섰다.

    한립이 지하 화맥에 있는 용암동굴 속에 나타났다. 그는 부글부글 끓고 있는 용암 호수를 바라보았다.

    용암 위에 설치해둔 진법은 아직 떠 있었는데 진법을 이룬 깃발은 어둑해져 있었고 중앙의 불꽃 고치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걸 본 한립은 의식으로 정염 불새를 찾아보았다.

    쉭!

    잠시 후, 용암 호수의 기포가 올라오고 그 안에서 은색 그림자가 빠져나와 한립에게 날아들었다. 엄청난 열기를 머금은 그림자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

    은빛이 가슴에 펑! 뛰어든 탓에 한립은 불에 덴 듯한 뜨거움을 느껴야 했다. 그가 손을 뻗기도 전에 은빛 그림자가 보통 사람 절반만 한 은색 화염 소인으로 변해서 주변을 빙빙 돌았다.

    한립의 눈에 희색이 어렸다.

    은색 화염 소인은 정염 불새가 변한 것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한 대여섯 살의 꼬마 아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영계에 있을 때보다 기운이 훨씬 강해진 것은 물론 영리한 눈빛을 지닌 것이 그간의 수련으로 적잖은 성취를 이룬 듯했다.

    신이나서 날뛰던 은색 화염 소인은 불빛 덩어리로 변했다가 한립의 손바닥에 올라 다시 소인으로 돌아갔다. 한립이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은색 소인은 충분히 즐기다가 머리를 그의 손바닥에 문질렀다.

    “화맥이 네게 큰 도움이 되는 건 알지만 오래 떠나 있을 계획이라 너를 두고 갈 수가 없구나.”

    한립은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지 아닌지도 모르지만 정염불새에게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소인은 은색 불새로 변해 맑게 지저귀었다. 허공을 선회해서 곧장 그의 몸속으로 들어간 불새는 한립을 따라가는 것이 기분이 좋은 듯했다.

    그 모습에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한립은 설치해둔 진법과 불새의 흔적을 지우고 용암동굴을 나섰다.

    다음으로 간 곳은 호호봉이었다. 평요자가 남긴 저물탁에서 규룡초도 찾았겠다, 춘림단 약방을 구해 떠날 생각이었다.

    밤늦게 소리 없이 동부로 돌아온 그는 약재밭의 귀한 영약과 후왕이 바친 돌화로까지 챙겨 훌쩍 촉룡도를 떠났다.

    * * *

    반년 후.

    고운대륙 북부, 푸른 빛이 고공에서 추락해 쿵! 하고 높다란 산봉우리에 떨어졌다. 그 충격에 산사태가 난 산봉우리에는 금색 무늬의 푸른 고대 갑옷을 걸친 중년 남자가 엄청난 위압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냉랭한 표정의 중년인은 바로 고걸이었다.

    그의 발밑에는 촉룡도 외문장로 복색을 한 사내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서, 선배님 살려 주십시오……. 제, 제발 목숨만은! 정말로 선배님이 찾으시는 인물이 누군지 모릅니다…….”

    고걸은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뚱보 사내의 미간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에서 뻗어 나간 푸른 실이 이마를 파고들자 뚱보 사내는 윽! 하는 신음을 남기고 의식을 잃었다.

    퍽!

    얼마 후, 손을 거둔 고걸은 손바닥으로 뚱보 사내의 머리를 냅다 쳐 깨트려 버렸다. 또 푸른 실에 꽁꽁 묶인 채로 금색 소인이 끌려 나와 결국에는 재가 되어 사라졌다.

    고걸은 그 자리에서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한참 후 그의 손에 7개의 청색 혹은 남색의 짐승 머리 가면들이 떠올랐다.

    그는 뚱보 사내에게서 찾은 푸른색 말 머리 가면을 그것들과 모아 놓고 쳐다보았다.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닌 보람이 있구나. 역시 촉룡도에 있었어…….”

    휙! 하고 손을 저어 가면들을 전부 가루로 만들어 버린 중년인은 푸른빛으로 변해 종적을 감추었다.

    * * *

    몇 달 뒤, 종명산맥 동부의 으슥한 산골짜기 안.

    눈이 쌓인 골짜기 입구와 달리 안쪽은 깊이 들어갈수록 눈이 녹아서 검은 암석에 촉촉하게 이끼가 자라고 초록빛 풀들도 언뜻언뜻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골짜기 끝에 있는 암벽에 깡마른 인영이 덩굴에 칭칭 감겨 있었는데, 머리부터 몸통까지 수직으로 갈려있어 덩굴이 아니었다면 벌써 둘로 나뉘어 떨어졌을 것이다.

    몸이 갈라진 사내는 두 눈이 쥐처럼 작아서 잊지 못할 인상을 남겼다. 그를 매달아두고 고문하는 청갑 중년인은 바로 고걸이었다.

    고걸의 손에서 금빛 원영이 발버둥 치고 있었다.

    “그날 너랑 같이 평요자를 죽이러 온 것들은 어디 있지?”

    “당신이……. 선궁 금선 장로라 해도, 이럴 권리는……. 없습니다. 본 종 도주께서 절대 당신을 가만두지…….”

    원영 소인은 겁에 질려서도 종문의 위세를 빌려 어떻게 든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

    “네 놈의 원영에 금제가 걸려 있어 추혼술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허나 너도 종영술(種嬰術)은 들어보았겠지? 질 좋은 유수악토(幽水惡土)에 널 가져다 심으면……. 큭, 아주 기대가 되는구나.”

    고걸의 말에 금빛 원영이 덜덜 떨었다.

    선천 영토(靈土)를 사용한 종영술은 원래 원영을 보양하는 술법인데 이를 선천 악토(惡土)로 바꾸어주면 지독한 고문이 되었다.

    악토에 묻힌 원영은 혼백이 찢기는 고통을 받으면서 점차 악토의 일부가 되었고 이를 되돌릴 방법도 없었다. 이 과정은 천만년 정도를 지속하다가 원영은 윤회의 기회를 잃고 마는 것이다.

    “너도 관을 보아야 눈물을 떨굴 놈이었어.”

    고걸은 손바닥을 뒤집어 세 발 달린 향로를 꺼내 들었다. 향로 안에는 향초가 아닌 썩은 내가 진동하는 시꺼먼 진흙이 잔뜩 들어있었다.

    금빛 원영은 부글부글 악취를 풍기는 악토를 보고는 기겁해 소리를 질렀다.

    “마마, 말하겠습니다. 그들은…….”

    쥐 눈 사내도 인구와 교십오의 진짜 정체를 몰랐지만 청갑 중년인의 협박에 아는 것을 죄다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들은 고걸은 흉악한 미소를 짓고 힘껏 원영을 으깨 죽여버렸다. 그의 손짓에 세로로 갈린 마른 사내의 시체에서 저물탁이 날아들었다.

    금색 화로와 푸른 쥐머리 가면을 찾아낸 고걸은 화로 표면을 문질러 숨겨진 주술문자가 떠오르게 했다.

    “내가 심어 놓은 표식을 거의 다 지워서 찾기 어려웠던 것이었군.”

    중년인은 눈썹을 끌어올려 물건을 넣어두고 촉룡도 중부로 향했다.

    * * *

    보름 뒤 촉룡도 중부의 어느 설원.

    푸른 신영이 솔개처럼 하늘을 갈랐다.

    그 뒤에는 하얀 거대 설련화(雪蓮花)가 빙글빙글 회전하면서 그보다 빠른 속도로 쫓고 있었다.

    설련화에 비스듬히 기대 누운 여인은 풍만한 몸매를 지니고 적홍색 여우 가면으로 얼굴을 가려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가면 미간에는 기괴한 문자로 작게 ‘삼(三)’자가 적혀 있었다.

    푸른빛과 하얀 연꽃은 가까워지다 동시에 우뚝 멈추었다. 백의 여인은 머리카락을 넘기면서 다른 손으로는 연꽃의 꽃잎을 쓰다듬으며 고걸을 응시했다.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은 것이지 두려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화를 자초하지 마십시오!”

    푸른 갑옷을 입은 고걸은 설련화 속의 백의 여인을 향해 서늘하게 쏘아붙였다.

    “하하, 수사가 저를 잡아먹을 것도 아닌데 두려워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저 북한선궁의 장로인 수사가 불쑥 촉룡도에 침입해 마구 살생을 해대는 것은 선궁이 촉룡도를 우습게 본다는 뜻인지요?”

    “무상맹 가면을 쓰고 입으로는 촉룡도 수사를 자처하다니! 원래 아무 일에나 참견하시기 좋아하는 성품이신가 봅니다.”

    “하아, 요즘 너무 심심해서 바람이나 쐴 겸 나왔다가 수사가 살생을 저지르는 것을 발견했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백의 여인이 탄식하는 소리가 봄바람처럼 살랑살랑 불어와 고걸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잇, 감히 본좌를 미혹하려 하다니!”

    고걸은 빽 소리를 질러 순식간에 주변을 맴돌던 여인의 목소리를 흩어버리고 푸른 비검을 불러내 날려 보냈다.

    백의 여인이 어떤 동작도 취하지 않았건만 설련화가 밝은 빛을 방출해 이파리를 흔들었다.

    챙!

    푸른 비검은 이파리에 손가락 한마디만큼 박혀서는 더는 나아가지 못하고 웅웅 떨기만 했다. 그걸 본 고걸이 수결을 맺고 주문을 외웠다.

    파앗!

    비검의 칼끝에서 주술문자들이 떠오르더니 푸른빛이 나무 속성 기운을 띠고 반짝였다. 그러자 백옥같이 하얀 꽃잎이 점점 비취색으로 물들어갔다.

    푹!

    쌀알 크기의 푸른빛은 머리카락 굵기의 실들로 풀어져 무서운 속도로 꽃잎을 뚫고 들어갔다.

    거대 꽃 안에 기대 누워있던 여인이 눈을 반짝이더니 이파리가 달리지 않은 하얀 꽃을 불러내 푸른 실들을 가볍게 쳐냈다.

    푸푹!

    녹색 실이 꽃송이의 꽃잎 두 개를 뚫고 흩어진 뒤 구멍이 뚫린 꽃잎도 검게 물들어 떨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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