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598화 (1,355/2,000)

1598화. 화로

*

“이걸 어찌 나눠야 좋을지 의견이 있으십니까?”

인십칠이 혀로 입술을 핥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옥병과 옥함에 무엇이 들었는지부터 보고 이야기하시지요.”

인구가 하얀 옥병을 끌어와 뚜껑을 열었고 한립도 또 다른 옥병을 들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맑은 향기가 퍼졌다.

옥병에 담긴 노란 단약은 은은하게 광이 났다. 한립은 단약의 이름은 몰라도 통원단 이상의 수행 증진용 단약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이건, 진선경 수사가 선규를 뚫을 때 큰 도움이 된다는 화신단(華晨丹)!”

“평요자가 자기가 쓰려고 준비해 둔 단약인가 봅니다.”

희색이 어린 인십칠을 보고 인구도 고개를 끄덕였다. 옥병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은 인구는 보라색 옥함을 들어 은색 부적에 법결을 던져 넣었다.

웅!

갑자기 은빛 기운이 피어올라 그의 법결을 튕겨냈다.

“이런…….”

인구는 다른 손바닥을 옥함 위에 올리고 주문을 외워 금빛을 방출했다. 한립과 인십칠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옥함을 주시했다.

이렇게 꽁꽁 봉해놓은 것을 보면 안에 괴이한 물건이 들어있을 것이다. 인구도 그걸 알아서 힘으로 금제를 뚫어 옥함을 열어볼 요량이었다.

웅!

옥함이 요란하게 은빛을 터트려 금빛을 치지직 태워버렸다. 인구는 얼굴을 찡그리고 더욱 강한 금빛을 방출했다.

금빛이 강해지면 옥함의 은빛도 강해져서 인구의 이마에도 땀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진성경 후기 수사인 인구가 속수무책인 금제라…….’

한립의 눈이 반짝였을 때 옥함의 은빛이 더는 인구가 방출하는 금빛을 따라잡지 못하고 어둑해졌다.

이에 입꼬리를 끌어올리던 인구가 돌연 옥함에서 손을 뗐다.

“인구 수사, 갑자기 왜 멈춘 것입니까?”

금제가 거의 풀려가고 있는데 손을 떼자 인십칠이 따져 물었다.

“금제를 설치한 자가 만만치 않군요. 가장 밑바닥에 자폭 금제를 숨겨 놓았습니다. 혹시 몰라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면 억지로 뚜껑을 열어보려다 내용물을 잃을 뻔했어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인구를 보고 인십칠과 한립이 난색을 표했다. 죽은 평요자에게 금제를 해제할 방법을 물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제 경험상 금제를 풀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신중하게 시도해야 해서 당장은 불가능하겠습니다. 두 분도 원하시면 시도를 해보시지요.”

그 말에 인십칠이 옥함을 받아들고 손바닥에 노란빛을 일으켰다. 옥함에 은빛 기운이 흘러나와 노란빛과 교전했다.

그가 신중한 얼굴로 주문을 외자 점점 노란빛이 진해졌지만, 은빛도 마찬가지로 더욱 밝게 빛을 발했다.

진땀을 흘린 인십칠은 양손을 빠르게 돌려 노란빛을 실의 형태로 침투시켰다. 깨알 같은 주술문자로 이루어진 노란 실이 은빛을 압도해갔다.

인구가 눈을 빛내고 한립도 한 걸음 다가섰을 때, 옥함이 웅! 떨면서 은색 주술문자를 내뿜어 노란 실들을 가닥가닥 끊어냈다.

“무슨 이런 괴이한 금제가 다 있답니까!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체면을 구긴 인십칠이 더는 힘을 쓰지 않고 손을 거두었다.

“교십오 수사도 원하면 가져다가 금제를 풀어보시지요. 이번에는 성공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흠흠, 해보는 건 좋지만 괜히 망가트리지 않게 조심해야 할 겁니다.”

실망한 인구가 한립에게 묻자 인십칠이 마른 웃음을 흘리면서 옥함을 건넸다.

“저도 실패할 가능성이 크지만, 어디 한 번 해보겠습니다.”

한립은 대수롭지 않게 그것을 받아들고는 양손으로 옥함을 감싸고 푸른 실을 뿜었다. 옥함의 은빛이 나타나 푸른 실과 싸우면서 반짝거렸다.

얼마 지나지도 않아 푸른 실들이 가볍게 찢겨나가고 어깨를 으쓱한 한립은 옥함을 바닥에 돌려놓았다.

“하아, 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군요.”

“옥함의 금제를 풀 수 없다면 시간이 부족하니까 다른 보물부터 분배합시다.”

“이번 임무의 책임자는 인구 수사입니다. 어떻게 분배할지 의견을 주시지요.”

한립과 인십칠이 인구의 대답을 기다렸다.

“영초와 재료 그리고 단약은 수량이 충분하니까 똑같이 나눠 가지면 되겠는데, 저 금색 화로와 그 안의 실패한 도단 그리고 법보들과 옥함이 문제군요.”

“우리 셋이서 한 사람은 화로, 한 사람은 법보 전부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이 옥함이랑……. 저 실패한 도단까지 챙겨 가면 어떨까요?”

인구가 고민하자 인십칠이 빠르게 의견을 제시했다.

“합리적인 생각입니다. 허나 누가 무엇을 가질지는 어찌 정한단 말입니까?”

“제가 연단에 관심이 많아서요. 연단로는 제가 갖고 싶습니다.”

인구의 물음에 인십칠이 공수를 하면서 나섰다.

“이런, 우연이 있나! 저도 연단술에 매진해온 지 오래입니다만.”

인구가 눈을 번득이며 의미심장하게 웃자 인십칠이 얼굴을 굳혔다. 한립은 말없이 서서 머리를 굴렸다.

금색 화로는 딱 봐도 후천선기의 일종으로 세 선택지 중에 가장 값어치가 있는 물건이었다. 그 넓은 촉룡도에도 지단사가 얼마 없는 판에 갑자기 지단사가 둘이나 나타날 리 있겠는가?

단약을 제련해서 수련의 고비를 넘으려면 그야말로 화로가 가장 필요했지만 한립은 끼어들지 않고 그들이 다투도록 방관했다.

의식으로 화로를 훑었을 때 검은 장도를 손에 넣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선궁 금선인 고걸이 평요자를 지키고 있던 것을 보면 저 화로에도 무슨 수작을 부려놓았을지 알 수 없었다.

화로를 챙기려다 금선의 추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생각하다 보니, 진선경 중기인 인십칠은 몰라도 진선경 후기인 인구도 정말 화로에 뭔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인지 의아해졌다.

“오랫동안 수행이 늘지 않아 마침 연단을 할 좋은 화로가 부족하던 차였습니다. 이것만 제게 넘겨주시면 나머지 보물은 3분의 1정도 제가 덜 가져가지요.”

인십칠이 슬쩍 한립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그러시다면…….”

한립이 무어라 답하려는데 인구가 급히 끼어들었다.

“큼, 이런 말씀까지는 드리지 않으려 했지만, 적합한 화로를 찾아다닌 지 어언 천여 년째입니다. 어렵게 마음에 차는 물건을 구했으니, 두 분이 양해해주시면 제 몫에서 3분의 2를 포기하겠습니다.”

이번에도 한립은 혹한다는 얼굴로 눈을 반짝였다.

“잠깐! 저는 화로만 넘겨주시면 나머지 영초와 재료는 하나도 필요치 않습니다. 어떠십니까?”

화로를 보며 이를 악문 인십칠이 이렇게 말했다.

“……허허, 인십칠 수사께 화로가 이렇게 중요한 물건인지 몰랐습니다. 저는 더 이상 화로를 두고 다투는 것도 염치가 없을 듯한데요. 교십오 수사의 뜻은 어떠신지요?”

잠시 뜸을 들이던 인구가 살짝 웃으면서 한립을 쳐다보았다.

“화로를 가장 원하시는 분이 갖게 해드려야지요! 축하합니다, 인십칠 수사! 아까 기절하시기 전에도 화로가 눈앞에 있었다면 조금 더 빨리 깨어나셨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한립은 미소를 머금고 인십칠을 향해 공수했다. 그의 말에 어린 조소를 읽고 인십칠은 화가 났지만, 상대의 실력을 떠올리자 거짓말처럼 노기가 가라앉았다.

인십칠은 노란빛으로 화로를 휘감아 나머지 진귀한 재료에서 힘겹게 눈을 떼고는 옆으로 물러섰다.

“남은 법보들과 옥함 중에서 교십오 수사는 어느 것을 원하십니까?

“이번 전투로 두 자루가 한 벌로 이루어진 비검 영보가 망가졌습니다. 쓸 만한 법보가 없으니 법보들로 할까 합니다.”

인구의 물음에 한립이 법보들을 가리켰다.

“허허, 교십오 수사께서는 물 속성 법칙을 수련한 것이 아닙니까? 이것들은 대부분 금속 속성이라 수사와는 잘 맞지 않을 겁니다. 제가 마침 금속 속성 공법을 익혀서 법보들을 얻으면 수행에 도움이 될 듯싶군요. 굉장한 보물이 들었을지도 모르는 저 옥함을 수사께 양보하겠습니다.”

눈을 번득인 인구가 허허 웃으면서 설득했다.

“물론 그럴지도 모르지만 저는 실력이 부족해 옥함을 열려다가 안에 든 보물까지 날려 먹을지도 모릅니다. 가장 수행이 높은 인구 수사야말로 보물 찾을 확률이 가장 높겠지요. 저는 그냥 평범한 저 법보로 가져가려 합니다.”

“골짜기로 들어오면서 교십오 수사가 얼마나 진법에 정통한 지 우리가 다 보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옥함의 금제를 수사께서 풀지 못한다면 저는 더 희망이 없을 겁니다. 저를 곤란하게 하지 말아주시지요?”

“과찬은 감사하지만 다들 금제를 풀려고 시도를 해보았으니 성공적으로 보물을 꺼낼 가능성이 1할밖에 되지 않는 것은 아실 겁니다. 인구 수사처럼 높은 신분에 교우 관계가 넓으신 분이어야 말로 금제에 정통한 고인을 찾아 옥함을 열 수 있을 듯합니다.”

한립은 고개를 크게 저으면서 꿋꿋이 답했다.

“……교십오 수사, 이 법보들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지 마시고 옥함과 실패한 도단 외에 나머지 재료도 저와 6대 4로 나누는 것으로 하시지요. 그럼 보상이 되겠습니까?”

한립을 응시하던 인구가 결정을 내렸다.

“하아……. 그렇게 하시지요. 다만 재료 중에 교룡초와 구뢰목은 꼭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수사께서도 재료 중에 원하는 것을 두 개 먼저 고르시면 공평할 테지요?”

고민하는 척하던 한립은 자신이 양보한다는 투로 물었다.

“공평하군요! 고맙습니다, 교십오 수사.”

그 말에 인구가 공수하고는 별이 새겨진 대검과 금색 거울 그리고 나머지 법보들을 챙겨 갔다.

다른 법보는 그도 큰 관심이 없었는데 진법의 진안이었던 구성금검(九星金劍)과 고대 거울이 필요했다.

그가 익힌 공법과 상성이 잘 맞을 뿐 아니라 천여 년 정도 착실하게 제련하면 선기에 뒤지지 않는 위력을 내줄 보물이었다.

한립은 담담히 미소를 짓고는 손을 저어 푸른 기운으로 보라색 옥함과 망친 도단을 거두었다. 나머지 영초와 재료 그리고 선원석은 인구와 한립이 각자의 몫을 가져갔다.

분배를 마친 세 사람은 한립이 조금 울적해 보이는 것을 빼면 굉장히 흡족한 얼굴이었다.

“자, 다 되었으니 이제 속히 이곳을 떠납시다.”

인구가 손가락에서 화염을 튕겨 평요자의 시신을 재로 만들고는 말했다. 그걸 본 한립은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곧 골짜기에서 둔광 세 줄기가 날아올랐다.

* * *

몇 개월 뒤, 연릉도 전송 대전에서 세 사수가 걸어 나와 광장 한쪽으로 몸을 숨겼다. 험상궂은 거한, 청삼 유생 그리고 하얀 피부의 소년은 고운대륙으로 막 돌아온 한립 일행이었다.

“변수가 있기는 했지만 두 분 덕에 무사히 빠져나왔습니다. 이것은 미리 말씀드린 보수이니 확인해 보시지요.”

인구는 저물대를 한 개씩 건넸다.

“확인했습니다. 저는 일이 있어 먼저 가보겠습니다.”

저물대를 든 인십칠이 먼저 인사를 하고 노란 빛줄기로 변해 사라졌다.

“인구 수사, 임무를 마치고 보니 보상이 일의 난이도에 비해 너무 박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임무를 수락할 때 이상하다는 것을 모르셨습니까?”

둘만 남자 한립이 몸을 돌려 인구를 바라보고 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인구의 눈썹이 꿈틀했다.

“수사가 받은 이번 임무의 보수는 이게 다는 아니었을 거란 말입니다. 하하, 그럼 몸조심해서 가십시오!”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한립도 푸른 빛줄기로 변해 멀리 날아갔다.

“……흥, 충분한 대가가 없었다면 나야말로 이 고생을 했겠는가! 자질이 그렇게 떨어지는 산수가 솜씨가 제법이야. 그때는 내가 눈이 삐었었지.”

멀리 사라지는 한립의 둔광을 보며 혼잣말을 남긴 인구가 번득 금빛을 남기고 없어졌다.

푸른 빛으로 날아가고 있는 한립은 양손에 보라색 옥함과 실패한 도단을 불러내 들고 씨익 웃고 있었다.

실패한 도단이라도 들고 가서 찬찬히 살펴보면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옥함의 신묘한 금제는 아까 시도해보면서 어떻게 해결할지 미리 생각을 해두었다.

‘하하!’

인구와 인십칠 앞에서 법보들을 갖고 싶다고 피력한 것은 자신의 전리품 몫을 늘리기 위한 전략에 불과했다.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