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596화 (1,353/2,000)
  • 1596화. 시간을 끌다

    *

    은색 뇌전 속에서 한립은 고민을 거듭했다.

    청갑 거인의 수행은 금선에 미치지 못해도 수단이 고명해 법칙의 실을 응결한 푸른 검기반으로는 막을 수 없을 듯싶었다.

    “이제 와 도망가려 해도 늦었다.”

    청갑 거인은 그들이 달아나자 냉소를 흘렸다.

    웅!

    그가 양팔을 펼치자 녹색 빛의 바다가 폭발해 무수히 많은 푸른 빛들이 허공으로 스며들었다.

    쿠르르릉.

    허공에 푸른빛이 별처럼 떠올라 푸른 영역을 만들더니 한립, 인구, 인십칠을 가두었다. 주변 공기가 무거워진 한립은 속도가 확 줄었고 인구와 인십칠도 매한가지였다.

    한립은 중수진륜을 쾌속으로 회전하게 만들어 물의 칼날들로 활로를 뚫으려 했지만 푸른 공간은 출렁거리며 번득이다가 원상태로 돌아가 버렸다.

    얼굴을 굳힌 그가 다른 방법을 쓰기 전에 푸른 주술들이 몰려와 주변을 맴돌았다.

    눈앞이 부옇게 변한 그는 별안간 푸른 거인 앞으로 이동했고, 다른 두 명도 어느새 옆에 서 있었다.

    “여, 영역?”

    다시 왼팔을 만들어내느라 원기가 크게 상한 인십칠이 당황해 중얼거렸다. 인구는 훨씬 침착해 보였지만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영역만이 아니라 다른 방법과 혼합한 것 같습니다.”

    한립이 주위를 둘러보고 답해주었다.

    푸른 공간은 영역처럼 그들을 외부세계로부터 단절시켜 천지원기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면 본 실력의 5할도 발휘하기 힘들었다.

    “하찮은 것들이 주워들은 것도 많구나. 그래, 너희가 처음부터 달아났으면 나도 화신의 몸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었겠지. 허나 이제는 전부 이곳에 뼈를 묻어야 할 것이다.”

    청갑 거인 주위로 커다란 푸른 뇌전 구슬들이 알알이 떠올라 한립 무리를 향해 우박처럼 쏟아졌다.

    금색 맷돌로 앞을 막은 인구는 화려한 금빛 속에서 검기들을 불러내 주위를 금빛 검기의 바다로 둘러쌌다.

    그리고 한립 앞에서는 중수진륜이 몸을 부풀려 요란한 검은 물빛을 분출했다. 두꺼운 검은 물의 구름이 그를 보호했고 물의 도문에서 남색 물 폭탄들이 튀어 나가 콰르릉거렸다.

    마지막으로 어느새 노란 호리병박을 꺼내든 인십칠은 난해한 주문을 외워 커다랗게 변한 호리병박에서 수천 개의 황금 모래 알갱이를 불러내고 있었다.

    모래 알갱이들이 빠르게 퍼져 모래사막을 만들어 그를 보호했다.

    쿠르릉! 콰콰콰쾅!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남색 뇌전 구슬들이 세 사람이 펼쳐놓은 방어수단에 작렬했다.

    번쩍거리는 뇌전 빛과 굉음이 천지를 뒤덮어 그 안에 매몰된 한립 무리의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나무 속성을 품은 푸른 뇌전 구슬의 위력은 제한적이었지만 흩어진 빛이 다시 구슬로 뭉쳐져 끝도 없이 공격이 이어지고 있었다.

    중수진륜이 방출한 남색 물 폭탄들이 뇌전 구슬을 터트렸지만 뇌전 구슬도 검은 물구름을 난도질했다.

    검은 물구름은 격렬하게 몸을 떨며 점점 얇아져 갔다. 그러는 동안 인십칠의 노란 사막도 점점 좁아져 그는 선령력을 들이부어 가며 겨우 버티고 있었다.

    강력한 보물들을 몇 개나 잃은 그는 이제 이 천절정사(天絶晶沙)밖에 믿을 게 없었다. 세 사람 중에서는 그나마 인구의 형편이 가장 나아 보였다.

    검기의 바다는 약간 암담해졌지만, 아직도 잘 운용되고 있었다.

    한립 무리가 힘겹게 버티는 동안 하늘을 뒤덮은 뇌전 구슬이 드디어 동이 났다. 세 사람은 기쁘면서도 동시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푸른 뇌전 구슬이 나타난 뒤로 청갑 거인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그들의 예상대로 이변이 발생했다.

    고공에 푸른 소용돌이들이 나타나 그 속에서 푸른 나뭇가지들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휘휘휘휙!

    거목보다 더 굵은 가지들이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그들도 잠시 공격이 멈춘 사이 협공에 유리하게 한군데로 모여 각자 한 방향씩 방어했다.

    한립의 구름층은 나뭇가지가 꽂힐 때마다 진동하면서 그들에게 접근하는 나뭇가지의 3분의 1을 막아냈고, 인구도 주변의 검진을 운용해서 매서운 검기로 나뭇가지들을 가루로 만들었다.

    세 사람 중 인십칠이 가장 위태위태했다.

    부상을 입어 원기를 크게 상한 데다 그의 머리 위를 뒤덮은 황금 사막은 비처럼 쏟아지는 나뭇가지에 맞아 모래 알갱이가 튀면서 보일 듯 말 듯 금이 가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습니다. 내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으면 아무리 보상이 후해도 절대 임무를 수락하지 않았을 거예요. 괜히 선궁을 건드려, 목숨도 부지하지 못하게 생겼습니다.”

    인십칠이 소태라도 씹은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누군가의 계책에 이용당한 듯싶습니다. 거액을 주면서까지 우리가 저 선궁 장로의 일을 망치게 하다니요. 고의로 무상맹과 선궁의 갈등을 촉발한 것 아닙니까.”

    인구도 난색을 표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이곳에서 빠져나가서 따져도 늦지 않습니다. 두 분은 지금 상황이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니, 이게 무슨……!”

    한립의 말에 흠칫 놀라 주위를 살핀 인구도 이상을 감지했다. 푸른 나뭇가지들은 그들을 공격한 후 흩어져 분분히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굉장한 속도로 새싹들이 자라나는 중이었다. 새싹들은 순식간에 낮은 탑처럼 자랐고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

    별안간 그들은 푸르른 나무 속성 영기가 농염한 수풀 속에 갇히게 되었다.

    “이러다 이곳을 빠져나가지도 못하겠습니다. 우리 중에 인구 수사의 수행이 가장 높지 않습니까. 무슨 방법이 없으십니까?”

    인십칠이 좌불안석인 얼굴로 물었다.

    “상대는 금선의 화신에 불과하지만 괴이한 방법을 써서 달아나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행동해야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질 겁니다.”

    “반대로요?”

    고개를 저은 인구의 말에 한립도 마음이 동했다. 인구의 말대로 그들은 법칙의 힘을 함유한 푸른 영역에 있어서 제 실력을 낼 수 없기에 달아나기가 쉽지 않았다.

    한립만해도 진언보륜과 청죽봉운검을 모두 방출해 싸워도 달아날 수 있을 거란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두 보물은 워낙 걸리는 사건들이 많아 목숨이 경각에 이르지 않는 한 함부로 사용해선 안 되었다.

    진선경 후기의 수사인 인구도 이곳에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제약을 받았지만 아직까지 평정을 유지하는 것은 숨겨진 한 수가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인구가 입을 벌려 색색의 깃발 3개를 분출했다. 고풍스러운 양식의 깃발에는 8개의 주술문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모양이 똑같아 한 벌로 된 법보로 보이는 깃발들은 금색, 은색 그리고 검은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립은 깃발에 수놓아진 주술문자를 보고 이채를 띠었다.

    이전에 산 아래 원숭이 떼가 지니고 있던 돌화로에 새겨진 주술문양과 매우 흡사했다.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돌화로를 얻고 몇 번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아직 어떤 실마리도 찾지 못했다.

    “삼원대직번(三元大稷幡)이라는 보물입니다. 세 사람이 동시에 발동하면 상당한 위력을 낼 수 있고 특히 방어하기에 유용하지요. 다만 선령력 소모가 너무 커서 저 혼자서는 발동하기 어렵습니다. 대책 없이 달아나려 하기보다는 이 보물로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우선일 듯합니다.”

    “선령력 소모가 그리 크다면 나중에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선령력을 모두 소진하고 나면 더욱 큰일 아닙니까.”

    인구의 설명에 인십칠이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제가 알기로 저렇게 부적이 변한 화신류는 모두 일정한 제약이 있어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인구 수사의 뜻은 우리가 시간만 충분히 끌면 승산이 있다는 걸 겁니다.”

    “교십오 수사의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삼원대직번은 다른 보물들과는 뭔가 달라 보입니다. 깃발에 수놓아진 주술문자가 퍽 특이한데 어째서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지요? 목숨이 걸린 상황이라 무엇 하나 허투루 넘길 수 없군요.”

    한립은 자연스럽게 물었다.

    “저도 우연히 얻은 것이라 백여 년간 연구한 끝에 겨우 어떻게 제련하면 되는지 감을 잡았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어서 손에 익혀두시지요.”

    인구는 검결을 맺어서 푸른 나뭇가지 공격 절반을 잠시 막고는 한립과 인십칠에게 옥간을 하나씩 날려 보냈다.

    옥간에 적힌 구결은 그가 지금까지 본적이 없는 제련법이었다.

    한립은 빠르게 구결을 외우고는 돌화로를 떠올리며 은근히 기뻐했다. 그의 짐작대로면 이 제련법은 돌화로에도 통할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의 나무들은 낮은 산만하게 커져서 울창한 가지로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깃발을 받으세요.”

    미간을 좁힌 인구가 은색과 검은색 깃발을 한립과 인십칠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금색 깃발에 연달아 법결을 던져넣었다.

    한립도 특이한 법결을 은색 깃발 속으로 주입했다.

    짤랑짤랑!

    천천히 떠오른 깃발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면서 방울 소리를 냈다. 눈을 감은 인십칠도 수결을 맺어 검은 깃발이 떠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이때 하늘 위에 파동이 일고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간 금선 화신이 나타났다.

    “네놈들이 버티는 것도 여기까지다.”

    금선 화신의 손에서 녹색 주술문자를 품은 푸른 빛덩이가 거목 중 한 그루로 떨어졌다.

    쿠쿵.

    그 거목은 땅에서 뽑혀 올라와 흐릿하게 사지와 머리가 생겨났고, 순식간에 낮은 산만한 나무 인간으로 변했다.

    나무 인간은 거대한 녹색 팔을 들어 올려 인구가 펼친 금색 검진을 쾅! 내리쳤다. 굉음이 사라지고 푸른 공간과 금색 검진이 진동하다 원래대로 돌아갔다.

    금선 화신의 손에서 푸른 빛덩이들이 하나씩 떨어질 때마다 거목들은 나무인 간으로 살아났고, 이와 상반되게 화신의 몸은 빛을 잃어갔다.

    나무 인간들이 주먹을 크게 휘둘러 푸른 주먹 허상들을 한립 무리 위로 투척했다.

    콰콰콰쾅!

    검은 물구름과 황금 사막 그리고 금색 검진은 점점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지만 아직 깨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에 금선 화신의 안색이 굳었다.

    그는 푸른 기운을 분출해 나머지 거목들을 휘감았고, 밝은 빛을 머금은 거목들은 바로 나무 인간으로 변해 하나로 융합되었다.

    거목들이 합쳐져 만들어진 거산 크기의 나무 거인이 등장해 팔을 들어 올렸다.

    후웅!

    나무 인간들이 푸른빛으로 흩어져 나무 거인의 손으로 몰려들더니 푸른 목도(木刀)로 변해 음산한 빛을 반짝였다.

    나무 거인은 준비를 마치자마자 두 다리를 굽혔다 펴며 펄쩍 뛰어올라 표면에 주술문자를 반짝이는 목도로 허공을 갈랐다.

    도광(刀光)이 하늘에서 푸른 물처럼 떨어져 내렸다.

    카카캉!

    직접 도광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무시무시한 힘이 밀려들어 검은 물구름과 황금 사막 그리고 금색 검진은 동시에 진동하면서 갈라지기 시작했다.

    쿠아아앙!

    거대 목도가 떨어져 검은색, 노란색, 금색 그리고 푸른색 빛이 교전하다 결국에는 검은 물구름, 황금 사막 그리고 금색 검진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 여러 기운이 섞인 돌풍이 사방팔방으로 퍼졌다.

    푸른 허공이 맹렬히 떨려 그 파문이 맨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다행히 거대 목도도 계속 나아가지 못하고 그 반탄력에 튕겨서 나무 거인이 쿵쿵 뒤로 물러났다.

    폭발이 가신 자리에는 한립 무리만이 남아 있었다. 앞에는 금색, 은색, 검은색 휘황찬란한 깃발 허상을 띄운 그들은 웅장한 영력 파동을 발산했다.

    깃발의 영향이 미치는 곳에서는 네 기운이 합쳐진 돌풍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열 손가락으로 수결을 맺은 세 사람은 긴장된 얼굴로 각자의 거대 깃발에 기이한 법결을 던져 넣었다.

    “천선(天旋), 수동(水動), 지요(地搖)!”

    인구의 외침에 세 개의 깃발 허상이 하나로 합쳐져 달걀 모양의 삼색 보호막을 이루었다. 바깥에서 보면 가장 겉면에서 선회하는 보호막이 금빛, 그 다음이 검은빛, 가장 안쪽이 은빛으로 되어 있었다.

    수많은 깃발 허상들이 보호막 주변을 어른거리면서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빛을 발산했다. 푸른 영역 안에 독자적인 공간이 형성되었다는 뜻이었다.

    고공의 금선 화신은 어두운 얼굴로 수결을 맺었다. 나무 거인이 성큼성큼 걸어와서 목도로 삼색 보호막을 내리찍었다.

    콰앙!

    보호막은 목도 때문에 움푹 파였다가 삼색 빛이 흐르자 곧 회복되었다. 나무 거인은 목도를 미친 듯이 연달아 휘둘러 보호막을 찍어댔다.

    쾅! 쾅! 쾅! 쾅…….

    보호막은 처음과 똑같이 부들부들 떨리다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하핫, 인구 수사의 삼원대직번이 아주 쓸 만합니다. 화신도 기운이 다 빠져가는 것 같으니 조금만 더 참으면 되겠어요!”

    한 손에 선원석을 쥔 인십칠이 들떠서 소리쳤다.

    “방심하지 말고 시간이 있을 때 최대한 선령력을 회복해 두시지요. 상대가 어떤 다른 수를 쓸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인구는 인십칠의 말에도 오연한 눈빛으로 충고했다. 한립은 말없이 선원석에서 선령력을 흡수하면서 속으로는 쓴웃음을 흘렸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