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5화. 선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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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인영은 나타나자마자 백발노인의 시체를 내려다보고는 분노에 차 한 팔을 휘둘렀다.
쿵!
푸른빛들이 그의 손짓에 가느다란 푸른 실로 뭉쳐져 믿기지 않은 속도로 한립, 인구, 인십칠을 향해 떨어졌다.
푸른 실이 지나는 허공은 왜곡이 일어나 흐릿해 보였다. 그리고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주위에서 푸른빛이 밀려들어 골짜기의 토양과 그 위의 들풀과 나무들을 말려 죽이고 세 가닥 푸른 실에 달라붙어 빛구슬을 만들었다.
직경이 팔뚝만 한 푸른 구슬은 훼천멸지(毁天滅地)의 강렬한 법칙 파동을 품고 있었다.
빛 구슬 주변의 허공이 미친 듯이 떨리다 하얀 균열을 남기고 갈라져서 공간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런!’
화들짝 놀란 한립은 피부에 반투명한 막을 띄우고 눈부신 검은 빛 속에서 중수진륜을 불러내 거대 방패처럼 앞을 막았다.
쾅!
엄청난 충격에 그는 부들부들 몸을 떨며 중수진륜과 함께 거의 천여 장을 튕겨 나가고서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부단히 물의 법칙을 함유한 중수를 흡수시켜서 바위산 몇 개와 맞먹을 무게를 지닌 중수진륜이었다.
그를 날려 보낸 푸른 빛 구슬은 스스로 붕괴해 흩어졌지만 한립은 마음이 전혀 편해지지 않았다. 조금 전 공격은 이전에 만났던 어떤 진선 후기 고수들의 공격보다 훨씬 강력했다.
얼른 중수진륜을 살피자 표면에 옅게 자국이 남아 있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서둘러 선령력을 주입한 한립은 물의 도문을 반짝인 진륜이 검은 물빛을 머금고 자국을 치유하는 것을 보고서야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빛 구슬에 맞은 인구와 인십칠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멀리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그들도 쓸 만 한 보물을 발동해 큰 부상은 피한 것 같았다.
인십칠은 용머리에 거북의 몸을 한 요수가 새겨진 거북 껍데기 모양의 방패를 띄우고 있었는데 방패에 선명하게 금이 가서 무척이나 아까워 하는 중이었다.
또한 인구는 금색 비검을 치우고 금색 맷돌을 불러낸 채 한립의 중수진륜을 보면서 흠칫 놀랐다가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돌리는 중이었다.
찰나의 변화였지만 한립은 예민하게 그것을 포착하고 마음이 불편해졌다. 설마 이전에 자신의 중수진륜을 본 적이 있는 것인가?
화아앗!
세 사람을 격퇴한 푸른 인영은 급히 그들을 쫓지 않고 백발노인의 시신 옆에 내려서서 어떻게든 그를 살려보려고 푸른빛을 뿜었다.
하지만 혼백마저 소멸한 백발노인은 껍데기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한립 일행을 보는 그의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이 흉악한 무상맹 잡것들이 간덩이가 부어도 유분수지, 감히 선궁을 건드리다니! 정녕 죽고 싶은 것이냐!”
“선궁!”
그 말에 한립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인구 수사, 이게 무슨 소립니까?”
그는 당장 인구를 향해 따졌고 난감한 얼굴의 인십칠도 인구를 쏘아보고 있었다.
“절대 오해 마시지요, 저도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백발노인을 죽이라는 임무를 받았을 뿐 자세한 신분에 대해서는 저도…….”
인구가 씁쓸한 얼굴로 변명을 했다. 유심히 그의 반응을 살핀 한립은 거짓말 같지 않아 시선을 거두었다.
눈앞에 엄청난 강적을 앞두고 그들끼리 싸울 수는 없었다.
파앗!
푸른 인영은 벌써 두 손으로 수결을 맺어 줄무늬가 가득한 푸른빛을 방출하고 있었다.
푸른 빛구슬 세 개가 붕괴되면서 흩어진 빛들이 줄무늬를 따라 몰려들어 상대를 거대한 청갑(靑甲) 거인으로 변신시켰다.
약속이라도 한 듯 의식으로 청갑 거인을 훑은 세 사람은 헉! 하고 거친 숨을 들이켰다. 연영혈단을 집어삼킨 노인 비슷한 기운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섭령반원(攝靈返源)! 상대는 금선의 화신입니다, 모두 조심하세요!”
인구의 외침에 대충 짐작하고 있던 한립도 가슴이 서늘해졌다. 촉룡도에 입문한 지 꽤 되었지만 아직 금선경의 경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아무래도 인구가 말한 섭령반원 현상이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인 듯했다.
금선은 진선보다 선령력을 자유롭게 조종해서 전투 중에 소모되는 영력 일부를 공간 너머에서 불러들여 채울 수 있었다.
청갑 거인은 나무 법칙을 장악한 금선 화신으로 강력한 공격을 쏟아내도 주변 산에서 영력을 회복할 테니 상대하기 골치 아픈 존재였다.
후웅!
세 사람이 머리를 굴릴 동안 청갑 거인은 육중한 몸을 바람처럼 움직여 거대한 주먹을 인구 머리 위로 떨어뜨렸다.
뇌전이 터지는 소리와 돌풍이 나타나 강력한 법칙 파동을 흘렸다. 그러나 인구는 피하지 않고 두 손으로 수결을 맺어 금색 맷돌을 작은 산만하게 키웠다.
쿠앙!
굉음이 울리자 금색 맷돌이 주먹에 맞아 날아갔다. 그리고 인구도 몸을 떨며 뒤쪽으로 튕겨 나갔는데 금색 맷돌도 예사 물건이 아닌지 청갑 거인이 뒷걸음질 치게 만들었다.
파팟.
그 순간 푸른빛을 보충하려던 거인 양쪽에 한립과 인십칠의 신형이 떠올랐다.
낮게 기합을 넣은 한립은 커다랗게 변한 중수진륜을 쾌속으로 회전시켜 강력한 중력 파동을 일으켰다.
그의 손짓에 따라 중수진륜은 검은 빛줄기로 변해 청갑 거인을 쳤고, 연이어 인십칠이 수결을 맺어 네모반듯한 거대 인장을 불러냈다.
속세 황제의 옥쇄처럼 노란 용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는 인장은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인십칠이 주문을 외자 노란 인장이 백배로 커져 흐릿하게 노란 용 허상을 품고 청갑 거인을 짓눌렀다. 세 사람은 이전 전투로 그럭저럭 합이 맞아가고 있었다.
청갑 거인은 당황하지 않고 두 팔을 뻗어 중수진륜과 노란 인장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푸른 파문 십여 겹이 일어난 손바닥이 인장과 중수진륜에 부딪쳤다.
콰콱!
노란 인장은 연달아 몇 겹의 푸른 파문을 뚫었다. 그러나 푸른 파문이 지닌 특수한 신통인지 그럴 때마다 노란 인장의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겨우 여덟 겹의 파문을 뚫은 노란 인장은 위력을 전부 잃고 손바닥에 잡혀버렸다. 이에 인십칠의 안색이 안 좋아진 것은 당연했다.
반대편에서는 한립이 조종하는 중수진륜도 푸른 파문과 충돌했다. 중수진륜은 마치 얇은 종잇장을 뚫는 것처럼 십여 겹의 푸른 파문을 뚫고도 여전히 빠른 속도를 유지했다.
청갑 거인은 의아한 얼굴로 손바닥을 그러쥐어 주먹을 만들었다. 찢겨 나간 푸른 파문들이 주먹 주변으로 모여들어 단단하게 뭉쳐졌다.
흐압!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기합을 넣은 한립은 복잡한 수결을 맺었다. 중수진륜의 물의 도문이 맹렬히 빛나더니 물의 칼날들이 일렬로 튀어나와 예리한 파공음을 내며 푸른 주먹에 꽂혔다.
쿠쿠쿠쿵!
아직 푸른빛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던 주먹이 둘로 갈라졌다. 중수진륜은 빠르게 돌면서 갈라진 거인의 팔을 타고 아예 두 동강 내려고 힘껏 덤벼들었다.
안색이 달라진 청갑 거인은 중수진륜의 위력이 이 정도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는지 급히 입을 벌렸다.
그러자 강렬한 법칙 파동을 머금은 가느다란 푸른 실이 튀어나와 소리 없이 중수진륜을 휘감았다.
잠시 중수진륜이 멈추고 튀어나오던 물의 칼날도 푸른 실에 부서져 나갔다. 바로 그때, 한립이 수결을 바꾸었다.
웅!
중수진륜 표면에 떠오른 검은 주술문자들이 푸른 실을 뜯어내고 번개처럼 진륜이 굴러가 거인의 한쪽 팔을 잘라냈다.
까가가강!
거인의 팔뚝은 금속성의 마찰음을 내면서 산산조각이나 푸른빛으로 흩어졌다. 청갑 거인은 잘려나간 팔을 보고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내 너희들을 좀 얕본 것 같구나.”
그의 어깨에서 푸른빛이 흘러나와 잘려나간 팔이 자라나긴 했지만 거인은 아직도 분노에 가득 차 의미심장하게 한립을 바라보았다.
중수진륜을 불러들인 한립도 원기를 크게 소모해서 창백한 얼굴로 선원석을 꺼내 선령력을 보충했다.
인구와 인십칠이 보고 있기에 일부러 더 고된 척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인구는 한립의 창백한 모습에 내심 안도했다.
검은 고리의 위력에 깜짝 놀랐는데 한립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오래는 사용하지 못할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인십칠은 한립의 행동까지 신경 쓰지 못하고 수결을 바꿔가며 열심히 푸른 거인의 다른 손에 잡혀있는 인장을 회수하려 애썼다.
노란 인장은 빛을 반짝였지만, 거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지는 못했다.
“북한선궁의 어느 금선 선배님이신지 여쭈어도 될지요? 저희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곳에 왔을 뿐 결코 북한선궁과 대립할 의도는 없었습니다. 무슨 오해가 있는 것은 아닐지요…….”
인구는 정신을 차리고 어떻게든 이 사태를 좋게 해결해보려 했다. 한차례 겨뤄보니 금선 화신은 기껏해야 진선 최고봉에 상응하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훅!
청갑 거인은 말없이 입에서 푸른빛을 뿜어 손에 쥐고 있던 노란 인장에 불어넣었다. 벗어나려고 진동하던 노란 인장은 푸른빛이 둘러싸여서 결국 인십칠과의 연계가 끊겨버렸다.
“당신!”
대노한 인십칠이 몸을 날렸다.
오랜 세월 함께해온 인장 보물은 거의 본명법보에 상당해서 이렇게 빼앗겨버리면 한팔을 잘린 것과 다름없었다.
인구가 말리려 했으나 이미 늦고 말았다.
인십칠이 날린 노란 구슬 다섯 개가 작은 황토색 산봉우리들로 변해서 공중에서 하나로 합쳐졌다. 노란빛을 반발하는 거산 표면에는 주술문자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쿠쿵!
거산에서 뿜어져 나온 육중한 법칙 파동에 일대의 중력이 백배로 증가했다.
“중력 법칙.”
몸의 움직임이 느려진 한립은 전신에 푸른 기운을 흘려 자유를 되찾았다.
훼멸의 기운을 품은 거산이 청갑 거인을 향해 날아가는 것을 보고는 한립도 인구와 시선을 마주치고 동시에 움직였다.
청갑 거인의 양쪽에서 중수진륜과 금색 맷돌이 돌격했다. 상대가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뜻을 명확히 했으니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세 명이 동시에 공격하는데도 청갑 거인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는 중얼중얼 구문을 외고는 들고 있던 푸른빛의 인장을 날려 백배로 키웠다.
쿵!
인장이 고공에서 황토색 산봉우리를 내리찍는 동안 청갑 거인의 몸에서는 푸른빛이 용솟음쳐 주변을 녹색 바다로 물들였다.
휙! 휙!
중수진륜과 금색 맷돌이 양쪽에서 녹색 바다로 진입했다. 격랑이 인 녹색 바다는 거인을 중심으로 백여 겹의 물결을 만들어냈다.
쾌속으로 도는 중수진륜은 물결을 눈 깜짝할 사이에 오륙십 겹 뚫었지만 제자리에서 헛돌 뿐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금색 맷돌은 더 맹렬히 칠팔십겹의 물결을 뚫고도 청갑 거인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 우뚝 멈추었다.
물결이 진륜과 맷돌 두 보물을 중심으로 회오리쳐서 빛의 바닷속에 두 개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두 보물은 꼼짝하지 못했다.
한립과 인구가 그것을 알아채고 맹렬히 법결을 일으키자 중수진륜과 맷돌이 검은빛과 금빛을 터트리면서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나 소용돌이는 단단하게 빛구슬로 뭉쳐져 바르르 떨리기만 했다.
청갑 거인은 더는 한립과 인구를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황토색 산봉우리로 돌렸다. 거인의 손끝에서 푸른 실 다섯 줄기가 빠져나가 검기의 형태를 이루고 법칙 파동을 발산했다.
“저, 저럴 수가!”
거대한 산봉우리가 마치 두부 썰리듯 잘려나가서 인십칠은 기함을 금치 못했다. 푸른 검기의 실은 거의 줄어들지 않은 기세로 그마저 베려고 날아오고 있었다.
허공을 박찬 인십칠은 눈부신 둔광으로 변해 달아나면서 여러 보물을 불러내 겹겹의 보호막으로 몸을 보호했다.
보호막이 형성되자마자 푸른 검기의 실이 날아들었고, 그 안에서 참혹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수많은 부적과 보물을 불러낸 인십칠은 일격에 참살을 당하는 지경에서는 벗어났지만 왼팔이 잘려나가 기운이 쇠하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다음 순간 하나 남은 팔로 다급히 수결을 맺은 인십칠은 잘려나간 팔의 핏물을 태워 둔광을 핏빛으로 물들이고 빠르게 멀어져갔다.
그 모습을 한립과 인구가 못 봤을 리 없었다.
인구는 곧장 혀끝을 깨물어 정혈을 내뱉고 열 손가락으로 법결을 날려 핏빛 안개 속에서 번득 사라졌다.
이어서 푸른 빛구슬에 갇혀 있던 금색 맷돌도 폭발적으로 금홍색(金紅色) 빛을 발하고 쉭! 하고 탈출해 인구의 둔광에 합류했다.
인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인십칠과 다른 방향으로 달아났다.
거의 동시에 중수진륜도 도문을 번뜩여 물의 칼날들로 푸른 빛구슬을 잘라내고 한립의 수중으로 돌아갔다.
콰릉!
한 줄기 은색 뇌전으로 변해 또 다른 방향으로 쏘아져 나가는 한립의 속도도 인구 못지않게 빨랐다. 승산이 희박하다는 것을 깨닫자 과감히 후퇴를 선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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