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4화. 회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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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노인은 바닥을 굴러다니는 금색 화로를 보고는 너무 놀라 처량하게 울부짖었다.
“아, 안 돼……!”
너무 극단적인 반응에 한립 일행도 잠시 움찔했다.
“노부가 만 년 동안 심혈을 기울인 걸작을 이렇게 망쳐? 연단이 실패했으니 너희도 죽어야지! 네놈들은 죽은 목숨이야, 죽어 마땅해……!”
눈빛에 독기가 어린 노인은 마치 이성을 상실한 것처럼 소리를 질러대다 돌연 암홍색 단약을 입에 넣고 으적으적 씹어 삼켰다.
한립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제길! 저건 연영혈단(燃嬰血丹)입니다.”
한눈에 암홍색 단약을 알아본 인구의 표정도 확 달라졌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백발노인은 키득키득 괴이한 웃음소리를 내며 피부가 암홍색으로 물들고 나락에 빠진 듯한 두 눈은 반대로 금빛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모두 조심하십시오. 저자가 복용한 것은 동시에 원영과 정혈을 태울 수 있는 금지된 단약으로 짧은 시간 동안 수행을 대폭 상승시켜 거의 금선에 가까운 수행을 억지로 끌어다 쓸 수 있게 만듭니다.”
재빨리 거리를 벌린 인구가 당부하는 소리에 한립과 인십칠도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스스스슷.
그때 백발노인의 몸에서 옅은 붉은 색 증기가 피어올랐다.
휙!
작은 바람 소리를 남긴 노인의 신형이 불현듯 사라졌다가 인십칠 눈앞에서 번득 나타나 주먹으로 얼굴을 갈겼다. 인십칠은 주먹을 막을 새도 없이 어쩔 수 없이 손바닥을 펼쳐 얼굴을 가려야 했다.
퍽!
바위산이 날아든 듯한 육중한 힘에 인십칠은 자신의 손바닥으로 가면의 뺨을 때리고 날아가 골짜기 밖 검은 암벽에 처박혔다.
콰르르.
산골짜기를 사이에 둔 산봉우리 하나가 집채만 한 바위들로 쪼개져 무너져 내렸다.
흙먼지가 가라앉을 무렵 눈앞이 번득인 한립은 백발노인의 신영을 보고서도 피하지 못했다.
퍽!
그는 두 팔을 교차한 채 엄청난 괴력에 얻어맞고 날아갔다.
다행히 미리 진극막을 발동해 소매 속에 금색 비늘이 돋아 있었기에 훨씬 덜 날아가고 중심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그 모습에 백발노인은 깜짝 놀란 얼굴로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인구가 검을 들어 올린 것을 보더니 미친 듯이 으르렁대면서 그를 향해 쇄도했다.
그때 노인의 피부는 암홍색에서 선홍색으로 변했는데 속도도 빨라지고 주먹의 힘은 더욱 강해져서 내지를 때마다 공기와의 마찰음이 터졌다.
인구가 금색 검을 휘두르는데도 백발노인은 여전히 맨주먹으로 펑펑 검기를 막아 골짜기가 쩌렁쩌렁 울렸다.
위치를 바꾸어가며 교전하는 그들 주위로 무형의 법칙 파동이 퍼져 바닥에 거대한 구덩이를 만들었다.
인구가 펼친 검술은 무척 정교하면서도 빨랐지만 괴력으로 모든 것을 상쇄하는 노인의 공격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다 죽어버려!”
괴성을 내지른 백발노인의 두 주먹에서 열댓 개의 주먹 허상이 빠져나와 인구를 뒤덮었다. 인구는 검을 마구 휘둘러서 검기로 뭉쳐진 커다란 구슬을 쏘아 보냈다.
채채채챙!
찰나의 순간 구슬과 주먹 허상들이 부딪쳐 금속성의 마찰음이 날카롭게 들려왔다.
구슬이 흩어지고도 주먹 허상들이 남아 있자 인구는 놀란 낯빛으로 대량의 금빛을 몸에서 불러내 앞을 막았다.
이때 그들과 머지않은 구덩이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인십칠의 신영이 나타났다. 그는 소매 속에 숨기고 있던 황토색 밧줄을 뿜어서 일고여덟 줄기의 밧줄 허상으로 백발노인을 붙들려 했다.
퍼퍽!
이에 계속해서 인구를 쫓으려던 백발노인은 밧줄의 함정에 걸려 속박되고 말았다. 한 손으로 밧줄의 끝을 쥔 인십칠은 힘차게 바닥을 박차 노인을 끌어당겼다.
쇄애액!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한립이 한 손에 은색 장검을 들고 끌려가는 노인의 머리를 찔렀다.
크아악!
금빛으로 두 눈을 반짝인 백발노인의 몸에서 핏빛이 강하게 발산되더니 두 팔의 살점이 터져나가고 하얀 뼈가 튀어나와 칼날처럼 황토색 밧줄을 잘라냈다.
탈출한 노인은 지척으로 다가온 한립을 칼날과 같은 두 팔로 가르려 했다.
채애앵!
은백색 장검과 하얀 뼈가 만나 섬뜩한 마찰음을 냈다.
검을 타고 전해지는 엄청난 괴력에 깜짝 놀란 한립은 힘으로 겨루고 싶지 않아 잠시 물러났다.
노인은 자신의 공격을 가볍게 받아낸 그를 보고는 잠시 움찔하더니 방향을 돌려 밧줄을 쥐고 있던 인십칠 쪽을 노렸다.
섬광이 번득이고 인십칠 뒤에서 나타난 노인은 상대가 겹겹이 두른 보호막을 가르고 날카로운 뼈 칼로 가슴을 꿰뚫었다.
허리를 숙인 인십칠은 울컥 대량의 피를 토하고는 허리춤에서 하얀빛을 터트리며 추락해 바닥에 엎어졌다.
움직임이 없어 인십칠의 생사를 알 수 없었다.
이에 백발노인은 키득키득 웃어젖히며 더는 그를 신경 쓰지 않고 이번에는 멀리있는 한립에게로 스산한 시선을 돌렸다.
한립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노인은 본래 육체의 힘을 단련해온 현선으로 연영혈단을 복용해 그 힘을 무시무시한 경지까지 끌어올려 정면으로 맞붙으면 부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이제 두 눈이 완전히 금색으로 물든 노인은 완전히 이성의 끈을 놓은 듯했다. 문득 노인의 신영이 흐릿하게 사라졌다.
한립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뒤로 물러나면서 두 팔을 금색 비늘로 뒤덮고 전방의 허공을 강타했다.
쿠앙!
그의 주먹은 갑작스레 나타난 백발노인의 주먹과 맞닿아 있었다. 무형의 기파가 두 사람의 주먹을 중심으로 퍼져나가 무너진 산봉우리의 잔해를 휩쓸고 먼지를 일으켰다.
한립은 방대한 힘에 밀려나 검은 암벽에 등을 부딪치고서야 몸을 가누었고 노인은 반대쪽으로 얼마 튕겨 나가지 않아 멈춰 설 수 있었다.
“교십오 수사도 현선일 줄은 몰랐습니다. 허나 강력한 공격을 정면으로 받지 말고, 제가 상대를 가둘만한 진법 설치를 마치면 그쪽으로 유인해 주십시오. 이지를 상실했으니 정혈과 원영이 다 타버릴 때까지만 시간을 끌면 됩니다.”
고공에서 인구가 크게 소리쳤다.
“저도 오래 붙들어 둘 수 없으니 서둘러 주시지요.”
체내의 기혈을 안정시킨 한립이 인구를 향해 답했다. 말을 마친 그는 지면을 박차고 고공으로 날아올라 은백색 장검을 투척했다.
은빛을 터트린 장검에서 검 그림자들이 천여 개의 꽃잎을 지닌 연꽃처럼 뭉쳐서 백발노인을 뒤덮었다.
쿠쿠쿵!
폭음이 골짜기를 울리며 암석들이 가루가 되고 뿌연 흙먼지가 노인의 신영을 가려버렸다. 그저 그 안에서 짐승과 같은 포효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흙먼지 속에서 풀쩍 뛰어오른 백발노인의 피부에는 새빨간 균열이 가 있었고 긴 흰머리가 휘날려 흉신악살처럼 보였다.
뼈가 드러난 두 팔로 얼굴을 가린 그는 한립의 은색 검 그림자들이 만들어낸 연꽃 속에서 거침없이 몸통박치기를 해댔다.
쾅! 쿵! 쾅!
검 그림자들이 흩어진 자리에는 은색 장검이 똑 부러져 있었다. 이에 한립은 얼굴을 찌푸리며 금색 비늘을 일으키고 두 팔을 크게 휘둘러 주먹을 마구 날렸다.
쿵!
산골짜기 구석에서 인구가 팔뚝 굵기의 금색 몽둥이를 힘껏 땅에 박아 넣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금색 몽둥이들로 이루어진 원형 진법은 동쪽과 서쪽에만 틈새가 있었다.
“교십오 수사, 이제 유인하면 됩니다.”
인구가 소리를 높이자 한립이 휙 하고 몸을 틀어 그쪽으로 질주했다. 진작 이성을 잃은 백발노인은 의심 없이 약간 빠른 속도로 그 뒤를 쫓았다.
한립이 진법 인근에 다다랐을 때 백발노인은 그를 따라잡아 팔뚝의 노출된 뼈 칼로 그의 등을 찌르려 했다.
채챙!
이때 금색 비검이 옆에서 불쑥 튀어나와 뼈 칼을 쳐내면서 금색 불똥을 만들어냈다.
불시의 일격에 노인이 진법 위에서 멈칫하는 사이, 인구가 금색 몽둥이 하나를 한립에게 던져주었다.
“받으세요!”
몽둥이를 받은 한립은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며 그 힘으로 몽둥이를 깊이 꽂아 넣었다. 반대편에 있던 인구도 거의 동시에 마지막 몽둥이를 땅에 찔러넣었다.
웅웅!
무형의 파동이 일어나 몽둥이의 금색 주술문자들이 요란하게 반짝이며 빛들이 사슬을 이뤄 백발노인을 꽁꽁 묶었다.
금색 사슬에 묶인 백발노인은 하얀 수증기를 풀풀 날리면서 극심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쇄룡곤(鎖龍棍)이라 불리는 금색 몽둥이 열댓 개가 지면에 단단히 박혀 폭풍을 버티는 나무처럼 노인의 저항을 견디고 있었다.
“인구 수사께서 볼 때 저자가 얼마나 버틸 것 같습니까?”
한립이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인구를 향해 물었다.
“벌써 오장육부의 정혈을 태우고 있을 테니 잠시 후면 기름 떨어진 등불 꼴이 날 겁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되겠지요.”
그때 바닥에 엎어져 있던 인십칠이 힘겹게 일어나 앉았다. 뻥 뚫려있던 가슴의 상처가 서서히 아물고 있었다.
“아아, 위험했습니다. 여기서 죽을 뻔 했어요…….”
아직 살점이 다 붙기도 전에 인십칠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한립과 인구는 어이없어 했지만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인십칠은 눈을 굴리면서 눈치를 보다가 무너진 석전 더미로 달려가서 암석들을 파헤치고는 암석 더미에 깔려 있던 단약로를 주우려 했다.
“감히!”
그 순간 쇄룡봉 진법에 갇혀 있던 노인이 그 모습을 보더니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화르륵!
불길이 꺼진 줄로만 알았던 화룡 진법이 갑자기 밝게 빛나고 화룡들이 앞다투어 백발노인을 향해 날아들었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나 막을 새도 없었다.
화룡들은 노인의 뱃속으로 흡수되었다.
크아아!
노인은 다시 폭발적으로 기운을 일으켜 강제로 금선경의 수행에 도달했다.
퍼퍼퍼펑!
노인이 두 팔에 불끈 힘을 주자 그를 묶고 있던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져서 십여 개의 쇄룡봉들이 땅에서 뽑혀 올라왔다.
이에 가까이 서 있던 한립과 인구는 노인이 두 팔을 풍차처럼 돌려 밧줄에 연결된 몽둥이로 공격을 가하는 것을 보고 빠르게 양쪽으로 비켜섰다.
그러나 백발노인은 그들은 신경 쓰지 않고 곧장 인십칠 눈앞에 나타나 주먹을 날렸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른 주먹에 피할 길이 없어진 인십칠은 황토색 깃발을 불러내는 동시에 하얀 보호막으로 몸을 보호했다.
깃대에 기이한 요수가 그려진 황토색 깃발은 평범한 보물이 아닌지 웅장한 흙 속성 기운을 발산했다.
활짝 펼쳐진 깃발에 백발노인의 주먹이 묵직하게 꽂히는 데도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주 부드러운 깃발은 늘어났다 줄었다 하면서 힘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잠시 후 깃대의 주술문양이 터지고 나자 깃발도 찢겨 나갔다. 그 아래 몸을 숨기고 있던 인십칠은 권풍(拳風)의 여파만으로도 하얀 보호막이 깨져 피를 토하면서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그 순간 백발노인은 순간이동을 하듯 쫓아와 그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한립과 인구가 도와주려 했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인십칠은 가면 아래로 울상을 지으며 이럴 줄 알았으면 노인이 죽기 전에 연단로를 건드리지 말걸 하고 후회했다.
‘그렇지!’
급한 마음에 인십칠이 휙! 몸을 돌려 금색 연단로의 손잡이를 쥐고 높이 들어 올렸다. 주먹을 내지르던 백발노인은 문득 눈빛이 달라지더니 놀랍게도 공격을 멈추었다.
눈을 감고 공격을 받아내려던 인십칠은 공격이 멈추자 조심스럽게 눈을 뜨고는 백발노인을 쳐다보았다. 노인은 엉망이 된 몸으로 그에게 주먹을 내지른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
갈라진 피부에는 아직 붉은 잔열이 남아 있었지만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한립이 다가와 노인의 유골을 살펴보고는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노인은 정혈과 원영의 힘을 다 소진해서 마지막 공격을 멈춘 것이었을까? 아니면 연단로를 차마 부술 수 없어 공격을 멈춘 것이었을까?
세 사람이 그제야 안심하려는데, 백발노인의 멍하던 눈동자에 회광반조(回光返照)처럼 빛이 돌아왔다.
“피해야 합니다.”
불길한 느낌에 한립이 재빨리 경고했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변이 발생했다. 노인이 새까맣게 말라비틀어진 입술을 달싹이더니 마지막 한 단어를 내뱉었다.
“가라”
그것을 끝으로 노인은 완전히 숨이 끊어졌다. 그러나 그의 소매 속에서 작은 금색 글자들이 적힌 푸른 부적이 빛줄기로 변해 빠져나갔다.
금전문으로 적은 부적이었다.
콰르릉!
눈을 찌를 듯한 광채를 방출한 부적은 푸른빛의 바다로 변해 천둥소리와 함께 골짜기 상공에 먹구름들을 끌어 모았다.
주변 만 리에서 천지원기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어 골짜기를 그득 채웠고 푸른 빛의 바다가 출렁였다.
파앗!
그 한가운데서 푸른빛의 실이 튀어나와 근엄하게 생긴 갑옷을 입은 푸른 인영으로 변했다. 부적이 날아오르고 낯선 인물이 튀어나오기까지 겨우 한 호흡이 지났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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