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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592화 (1,349/2,000)

1592화. 판단

*

노인을 따라가던 한립은 통로 양쪽에 작은 고랑이 파여 있고, 그 안에 신비로운 문양이 가득한 것을 발견했다.

섬 중심을 향해 이런 통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인구 수사, 제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저 노인은 촉룡도 수사로 보입니다.”

한립은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인구에게 전음을 보냈다.

“맞습니다. 아마 촉룡도의 내문장로일 겁니다.”

“설마 고운대륙과 명한대륙을 연결하는 전송 대전을 전부 촉룡도가 만든 것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촉룡도는 이곳만 장악하고 있고 명한대륙 쪽 빙극도(氷極島)의 전송진은 북한선궁이 관리합니다.”

“아, 그랬군요.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하얀 수염의 노인은 섬 중앙 인근의 평평한 지대에 도착했다.

멀리 공터에는 어른 팔 길이로 일곱 아름은 되는 수십 개의 돌기둥들이 원형 진법을 따라 박혀 있어 굉장히 웅장해 보였다.

그런 원형 진법 바깥에 일곱 명의 수사들이 서거나 앉아서 대기 중이었다.

“부 장로, 이 세 분도 빙극도로 가신답니다. 인원이 찼으니 바로 진법을 발동하시지요.”

하얀 수염의 노인은 비슷한 복장을 한 중년인에게 말했다.

“모두 진법 안으로 들어가 주십시오!”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내하자, 기다리던 이들이 우르르 전송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립 일행도 그들을 따라 바로 전송진에 올랐다.

10명이 전부 자리를 잡자 두 촉룡도 장로는 각자 진법 양측의 원형 제단으로 올라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우웅!

그들이 주문을 외자 하얀 돌기둥들이 하나씩 빛을 밝게 머금으면서 진동을 했다. 빛을 타고 섬 전체의 거대한 진법이 운용되고 있었다.

웅웅웅…….

하얀 인공섬이 격렬하게 떨린 뒤, 한립은 허공에 구름이 몰려들어 거대한 구멍을 형성하고 간담이 서늘해 질 법한 공간 파동을 내뿜는 것을 올려다보았다.

안개가 그 기운에 영향을 받아 섬 밖으로 밀려나면서 둥그렇게 안개의 벽을 만들어내었다.

쿠쿵!

오색찬란한 광채가 진법 중심에서 솟아올라 거대한 빛기둥을 이루고 구름을 꿰뚫은 순간, 진법 위의 사람들은 빛에 사로잡혀 사라졌다.

진법이 빛을 잃은 후에도 안개의 벽은 오래도록 유지되었다.

* * *

얼어붙은 해역의 북부.

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에 광풍이 몰아쳤고, 굵은 눈송이들이 날리는 해수면 위로는 바닷물과 눈송이들이 뭉쳐져서 거대 얼음송곳들이 비죽비죽 돋아나 있었다.

콰릉!

그 한가운데 푸른빛의 장막에 둘러싸인 타원형의 섬이 있었는데, 천둥소리와 함께 오색 광채가 번지면서 섬의 진법 위로 10명의 수사가 나타났다.

한립을 포함한 연릉도에서 이곳으로 전송된 수사들이었다.

초장거리 전송의 부작용으로 다들 안색이 창백했고 수행이 비교적 부족한 이들은 혼백이 진탕된 듯한 느낌에 잠시 비틀거렸다.

한립은 약간 가슴이 답답한 것 외에 다른 불편함은 느끼지 못했다.

주변 환경은 연릉도와 비슷하게 섬 전역의 기둥들이 커다란 진법을 이루고 있었는데, 다른 점은 하얀 돌기둥 대신 반짝이는 얼음 기둥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전송은 완료되었습니다. 언제까지 거기 서 있을 생각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전송진 밖에서 돌연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얀 피풍의를 걸친 백발의 노파가 구불구불한 규룡 지팡이를 짚고 그들을 시큰둥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수사들은 서둘러 전송진에서 내려와 노파를 따라 섬의 북쪽으로 쫓기듯 이동했다. 그곳에 있는 하얀 얼음 대전에는 동그란 얼굴에 꽤 인자하게 생긴 노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냉담한 노파와 달린 노인은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명한대륙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빙극도를 떠나기 전에 각자 선원석 3개씩만 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노인은 손바닥을 내밀며 싱글거리면서 선원석을 요구했다. 이에 한립은 뒤를 돌아 인구에게 이게 뭐냐는 시선을 보냈다.

“촉룡도와 북한선궁의 관례입니다. 나중에 돌아갈 때도 연릉도에서 따로 선원석을 내야 하지요.”

인구의 설명에 한립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솔직하게 어이가 없었다. 갈 때만 선원석이 총 10개나 들면 여비로 왕복 20개를 내야 한다는 소리였다.

이번 임무의 보상이 여비를 제하고도 후하지 않았으면 무척 속이 쓰렸을 것 같았다. 다들 군소리 없이 선원석을 건네주고 대전의 다른 쪽 문으로 걸어갔다.

동그란 얼굴의 노인이 그들을 따라가 손바닥으로 허공을 짚자 푸른빛과 함께 한 사람이 넉넉히 지나다닐만한 원형 통로가 생겨났다.

“허허, 즐거운 여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노인의 웃음기 어린 인사에 인구가 먼저 통로를 지나 광장으로 나섰고 한립과 인십칠도 그 뒤를 바짝 쫓았다.

세 사람 뒤로 나머지 일곱 명도 분분히 걸어 나와 하늘을 뒤덮은 눈보라와 뼈가 시린 극한(劇寒)의 기운을 느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한립마저 무심코 눈살을 찌푸릴 만한 온도였다.

하얀 눈 세상을 바라본 그는 처음 북한선역으로 비승했을 때를 회상했다. 그때 느낀 추위는 지금보다 훨씬 더했었다.

가슴 속에 선계에 대한 동경심과 기대감을 가득 품고 있던 그는 그 후 오랜 시간 기억을 통째로 잃고 말았다.

막막한 수도의 길에 위험천만한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서 언제쯤이면 정정당당하게 자신의 본명을 밝히고 살아갈 수 있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언젠가는 꼭!’

이런 생각이 들자 한립은 소매 속에 가려진 두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그러는 동안 함께 도착한 수사들 대부분은 전신을 밝은 빛으로 둘러쌌다.

품속에 든 화룡(火龍) 모양의 옥패나 허리춤의 새빨간 허리띠, 혹은 문양이 빼곡하게 수놓아진 하얀 장포가 훈훈한 빛을 발했다.

크오오!

잠시 후 하얀 코뿔소가 괴성을 지르며 눈보라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 누린내를 풍겼다. 허리에 새빨간 허리띠를 찬 거한이 바닥을 박차고 코뿔소 위에 올라 달려나갔다.

쿵쿵쿵쿵…….

요수는 네 발로 얼음 바닥을 사정없이 찍으면서 섬을 벗어나 눈보라 속으로 날아올랐다. 다른 이들도 설조빙호(雪雕氷狐) 등 각종 요수를 타고 출발해 그곳에는 세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인구는 사방을 훑어보고는 다시 금문영주를 불러내서 일행을 태우고 북쪽 대륙을 향해 날아갔다.

* * *

십여 일 후.

눈보라가 칼날처럼 불어대는 얼어붙은 바다 위를 인구의 금문영주가 쾌속으로 질주했다.

그런데 갑판 왼쪽 난간에 큼지막한 검은 촉수가 척 걸쳐서는 금문영주를 바닷속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검은 촉수는 아래쪽 거대한 얼음 구멍 속에 있는 거대 문어의 다리였다.

콰콰콱!

문어는 힘껏 선박을 끌어당겼다.

“이놈이 감히! 죽어라!”

선박의 누각 3층에서 금빛이 튀어나왔다가 돌아 들어갔다. 그러자 순식간에 난간에 걸쳐 있던 검은 문어 다리가 산산조각이 났고, 얼음 구멍 속 거대 문어는 몸이 퍽! 하고 터져서 검붉은 피로 두꺼운 얼음 아래 바닷물을 물들였다.

1층 누각에 앉아 있다 바깥으로 나온 한립이 그 모습을 보고는 눈썹을 꿈틀했다.

순식간에 거대 문어를 해치운 인구는 속도 법칙 혹은 금속 속성 법칙을 장악한 것이 틀림없었다. 전신을 뒤덮은 문어의 단단한 비늘 갑옷은 강도가 상당해 이렇게 빠르게 처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 * *

3개월 후, 그들은 명한대륙 남부를 가로지르는 설산들로 가득한 드넓은 산맥에 있었다.

기다란 산맥 양쪽으로는 지맥들이 뻗어 나가 고공에서 보면 얼음 지네처럼 보였다.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만장 산봉우리들은 얼음과 눈으로 뒤덮여 있어 간간이 눈이 녹은 곳에서만 새까만 암석이 본 모습을 드러냈다.

맑은 하늘에 분명 태양이 떠서 빛을 비추고 있건만 지면에서는 온기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 산맥 남쪽 천장 산봉우리 두 개 사이에 깊은 골짜기가 있었다.

골짜기 바깥은 바로 광활한 설원으로 이어졌고, 키 큰 설송(雪松)들은 눈에 뒤덮여서 겨우 꼭대기만 내밀고 있었다.

캬오!

이때, 골짜기 바깥의 설원에서 요수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동북 방향에서 설송들이 흔들리고 털이 복슬복슬한 하얀 귀 두 개가 위아래로 흔들리면서 무언가 깡충깡충 뛰어왔다.

설송들이 그 충격으로 마구 꺾여 쌓여 있던 하얀 눈들이 휘날리고 요수의 움직임에 따라 길이 뚫렸다. 하얀 몸에 새빨간 눈을 지닌 요수는 대형 토끼였다.

쿵!

토끼 요수는 갑자기 무형의 장벽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캬오오!

몸이 뒤집혔다 깡총 뛰어오른 요수는 화가 났는지 뒷다리에 힘을 주어 몇 배는 강한 힘으로 골짜기 쪽으로 몸을 날렸다.

골짜기 안쪽 허공에 불현듯 금색 주술문자로 뒤덮인 빛의 장막이 나타나 굵은 뇌전을 방출했다.

콰릉!

난데없이 벼락을 맞은 하얀 토끼 요수는 새까맣게 타서 터져버렸다. 그러자 공기 중에 고기 익는 냄새가 고소하게 퍼졌다.

멀리서 세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푸른 사람 머리 가면을 쓴 사내를 선두로 소머리와 쥐머리 가면을 쓴 사내들이었다.

“어떻게 보십니까?”

인구가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의 의견을 구했다.

“흐흐, 상고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금봉수뢰진(金峰戍雷陣)이군요. 조금 전 설토(雪兎)를 공격한 힘은 본래 위력의 만분의 1도 되지 않을 겁니다.”

“제 생각에도 금봉수뢰진이 확실한 듯합니다. 고공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진법의 근간은 두 산봉우리에 있고, 적어도 두 개 이상의 금속 속성 영보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진법의 범위는 두 산봉우리와 골짜기 전체이고요.”

작은 눈을 굴리는 인십칠의 말에 인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한립은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왜 그러시니까? 뭔가 이상한 점이라도 발견하신 것입니까?”

그걸 본 인구가 의문을 표했다.

“두 분이 말씀하신 금봉수뢰진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어떤 진법인지는 들어 알고 있습니다. 뛰어난 방어력과 압도적인 공격력으로 유명한 진법이라 일단 건드리면 온 세상이 금빛 뇌전으로 뒤덮여 소형 뇌겁에 맞먹는 위력을 보인다고 하더군요. 방금 설토가 건드렸을 때 보였던 뇌전의 위력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고 생각합니다.”

한립은 차분히 설명했다.

“그야 설토가 너무 약해서 그랬겠지요.”

“그래서 수사의 생각에 이건 어떤 진법 같다는 뜻입니까?”

헛웃음을 흘린 인십칠에 반해 인구는 눈썹을 끌어올리고 진지하게 물었다.

“……이런 진법은 저도 서책에서 본 적이 없어 이름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라는 게 제 의견입니다.”

“금봉수뢰진도 본 적 없다, 이게 뭔지도 모르겠다고 하면서 괜히 시간 낭비만 하게 할 것입니까? 모르겠으면 괜히 아는 척을 마십시오.”

한립의 말에 인십칠이 입을 비죽였다. 그러나 한립은 그러든 말든 전혀 화내는 기색 없이 정신을 집중해 진법을 살폈다.

“인십칠 수사, 이 진법이 금봉수뢰진이라고 확신하신다면 진법 안에서 눈치채지 못하게 침입할 방법도 아십니까?”

“금봉수뢰진은 81그루의 구뢰목(拘雷木)을 기본으로 저 두 산봉우리를 주축으로 하니까 보통은 그중 한 곳을 파괴하면 진법을 파훼할 수 있을 겁니다. 허나 이번에는 몰래 침입해야 하니 스스로를 진법과 동화시키는 수밖에 없을 듯 하군요.”

인구의 질문에 인십칠이 가면을 긁적이며 답했다.

“기운을 진법의 주축과 비슷한 금속 속성 혹은 진법의 기반이 되는 뇌전 속성으로 바꾸어 진입하자는 뜻이군요!”

“기운을 동화시켜도 재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진법을 촉발하게 될 겁니다.”

인십칠은 힐끗 한립을 보면서 얕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교십오 수사, 별다른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셨으면 인십칠 수사의 말대로 진행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인십칠 수사의 말씀에는 전혀 문제가 될 만한 점이 없으나 진법이 너무 기이합니다. 방출하는 뇌전이 남다른 구석이 있어서 뇌전의 힘을 흩트리지 않고 응집하기에 위력이 매우 강력한 것이지요. 무턱대고 진입하려다 설토의 꼴이 될 수도 있습니다.”

미간을 좁힌 한립의 말에 인구도 머뭇거렸다. 솔직히 인구도 인십칠 수사와비슷한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한립에 관한 맹 내의 여러 가지 소문이 아니었다면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밀어붙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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