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1화. 임무
*
적하봉 동부 약재밭.
한립은 밭고랑 옆에 서서 생기 가득한 영약들을 보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무상맹의 여러 임무를 통해 대량의 영석을 모았고 녹색 액체로 5만 년 이상 된 촉령초도 상당히 모아서 이제는 한동안 수련에 매진해도 될 것 같았다.
약재밭 서남쪽 귀퉁이의 넓은 땅은 아직 텅 비어있어 녹음이 푸른 다른 곳과 비교가 되었다. 바로 모두(母豆:어미콩)를 심은 곳이었다.
이렇게나 오래 정기적으로 영액을 부어주었건만 모두는 싹을 틔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호언장로의 깨달음이 담긴 서책에 따르면 두병의 발아에 관련된 요인이 너무 많아서 수백 년 만에 싹을 틔우는 일도 있다고 했다.
“…….”
문득 표정이 달라진 한립이 동부 밀실로 발길을 돌렸다. 안으로 들어선 그는 바로 푸른 소머리 가면을 썼다.
가면에서 주술문자들이 반짝이더니 그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푸른 인영을 만들어냈다. 그는 피풍의 모자가 달린 장포를 입고 체격이 무척 큰 데다 사슴 머리 가면을 쓰고 있었다.
“인구(麟九) 수사, 갑자기 연락을 다 주시고 무슨 일인지요?”
한립은 웅산으로 의심되는 진선경 후기의 고계 수사를 보며 입을 열었다.
“놀랄 것 없습니다, 교십오 수사. 오늘 연락한 이유는 특수한 임무에 같이 참가하자고 수사를 청하기 위해서니까요.”
푸른 인영이 담담히 용건을 밝혔다.
“제 기억이 맞다면 저와 인구 수사는 교류가 잦지 않았던 것으로 압니다. 어째서 제게 그런 제안을 하시는지 알고 싶군요?”
“최근 들어 맹의 회원이라면 교십오 수사의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겁니다. 이전에 한번 임무를 같이 했기에 허황된 명성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요. 그래서 특별히 연락을 취한 것입니다.”
인구는 한립을 칭찬하면서도 최대한 객관적인 어조를 유지했다.
“제 소문이 좀 좋게 났다 한들 인구 수사의 명성에 비할 수는 없겠지요! 인구 수사께서 눈여겨보실만한 임무라면 쉽게 완수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확실히 이번 임무는 특수해서 가입한 지 얼마 안 된 회원은 참여할 수 없고 진법과 둔술에 정통한 수사만 가능합니다. 임무를 수락하기 전까지는 구체적인 내용도 알려드릴 수 없고요.”
“임무의 내용이 비밀이라면 최소한 장소는 알 수 있겠습니까?”
“명한대륙(冥寒大陸)입니다.”
“명한대륙처럼 먼 곳이라면 저는 안 될 것 같군요. 이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고운대륙 북쪽에는 끝없이 펼쳐진 얼음 해역이 있었다. 그 해역 반대편에 사시사철 얼어붙어 있는 눈 천지인 땅이 바로 명한대륙이었다.
전송진이 있어서 뇌폭해양을 건널 때처럼 고생스럽지는 않더라도 오고 가고 하는 시간이 몇 년은 걸릴 것이다.
“임무의 보상을 들어보시고 거절하셔도 될 텐데요.”
인구는 이미 예상했는지 놀라지 않았다.
“한 번 들어보지요.”
“선원석 3백 개에, 낭선운석(琅銑雲石) 하나가 걸린 임무입니다.”
“제가 낭선운석을 구하는 것을 알고 계셨군요.”
자신 있는 인구의 말에 한립은 가면 아래 희색을 감추고 냉랭히 물었다.
“수사가 낭선운석을 구한다고 임무를 등록한 지 어언 7, 8년 되었지요? 아직까지 맹내의 누구도 임무를 수락하지 않았는데 계속 기다리기만 하실 겁니까?”
인구의 꼬드김에 한립은 생각에 잠겼다.
7, 8년 전 무상맹 임무를 나갔던 그는 별생각 없이 현빙산맥에서 백소원을 기습한 야윈 노인에게 빼앗은 요수 가죽 서책을 펼쳐 보았었다.
서책에는 금속을 녹여서 검을 제련하는 무척 독특한 용금연검술(鎔金煉劍術)이 적혀 있었다. 비검의 위력을 대폭 상승시킬 수 있는 술법이었다.
한 벌로 된 비검들을 한꺼번에 제련하면 전투 시 하나로 합쳐 원래 위력을 훨씬 뛰어넘는 공격을 할 수 있었고, 더 중요한 것은 용금연검술을 거친 비검들이 첨가한 보조재료 때문에 다른 기운을 내뿜는다는 것이었다.
한립은 72자루의 청죽봉운검을 다시 제련하고 싶었다. 그러나 문제는 용금연검술의 재료가 극히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주재료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곡문정금(斛紋精金)이고 보조재료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낭선운석이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한립은 곡문정금은 지니고 있었다.
신원수 궁전에서 찾은 어두운 금색 금속과 나중에 현빙산맥에서 야윈 노인에게 얻은 것들이 적지 않아서였다.
다른 재료들은 촉룡도에서 선원석을 이용해 구할 수 있었는데 유독 낭선운석만 무상맹은 물론 종문 밖 시장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 크기의 낭선운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구하기 어려운 귀한 물건이라는 것은 수사께서 더 잘 아실 테지요. 이번 보수로 제공될 낭선운석은 주먹만 한 크기입니다. 이걸 주재료로 비검 한 자루는 제련할 수 있는 양입니다.”
“임무를 수락하겠습니다.”
한립은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먹만 한 크기의 낭선운석이면 72개의 비검을 제련할 때 보조재료로 충분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교십오 수사까지 가담했으니 이번 임무도 순조롭게 완수할 수 있겠어요.”
“임무를 수락했으니 구체적인 내용을 듣고 싶습니다.”
“아직 임무에 필요한 인원을 다 구하지도 못했으니 조급해 마세요. 준비하고 계시다가 3년 후, 고운대륙 북단의 장호도(長弧島)로 오시면 세부적인 사항을 들을 수 있을 겁니다.”
한립의 말에 인구가 손을 내저었다.
“그때 뵙지요.”
인사를 하고 인구의 신영이 흐릿해지다 사라졌다.
* * *
어느덧 3년이 지나갔다.
고운대륙 최북단, 가늘고 구불구불한 반도(半島)가 망망대해를 향해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까무잡잡한 반도의 땅 위에는 두껍게 얼음층이 쌓여 있어서 식물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기다란 땅의 끝, 검은 암석 위에 키 큰 인영이 널찍한 검은 장포를 입고 얼굴에 푸른 사슴 가면을 쓴 채 앉아 있었다.
바로 인구였다.
그리고 검은 암석 옆에는 매화가 수놓아진 황토색 의복을 입은 마른 사내가 푸른색 쥐머리 가면을 쓰고 서 있었다. 가면으로 보이는 작은 눈동자는 무엇을 훔치려고 눈치를 보는 쥐의 눈빛과 비슷하게 반짝였다.
“벌써 이레째입니다. 그자는 아직도 안 나타났어요. 너무 거만을 떠는 것 아닙니까?”
쥐머리 가면 사내의 목소리는 가느다랗고 높았다.
“인십칠(麟十七) 수사, 우리가 일찍 도착해서 기다린 것이니 약속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인구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자 쥐머리 가면 사내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히더니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일각이 흘렀을 때, 하늘 끝에서 푸른빛이 날아들었다. 검은 암석 앞에 푸른 소머리 가면을 쓰고 나타난 것은 한립이었다.
“인구 수사.”
한립은 두 사람을 훑어보고는 공수를 하고 인구 수사에게 인사를 했다.
“교십오 수사, 이분은 인십칠 수사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인구가 고개를 끄덕이고 일행을 소개해 주었다.
“말씀은 많이 들어왔습니다.”
“저는 많이 기다렸고요!”
한립의 말에 인십칠은 작은 눈을 부릅떴다. 한립도 당연히 상대의 불만을 알아챘지만 그저 웃어넘겼다.
“다 모였으니 임무의 내용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인구가 암석에서 펄쩍 뛰어내려 그들 옆에 서서 입을 열었다.
“명한대륙 남부의 폭설삼림(暴雪森林) 구역에 합수곡(合手谷)이라는 곳이 있고 골짜기 바깥에 높은 수준의 금제 진법이 설치돼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임무는 그 진법을 건드리지 않고 몰래 골짜기 안으로 침입해 진선경 중기 수사 한 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인구는 귀를 기울이는 한립과 인십칠을 보면서 말했다.
“금제 진법의 이름이나 특이한 점을 알 수 있겠습니까?”
“임무를 통해 주어진 정보는 방금 다 말씀드렸습니다. 구체적인 상황을 파악하려면 직접 가보는 수밖에 없겠지요.”
한립의 질문에 인구가 답했다.
“그리 어려운 임무도 아닌 것 같은데 특수임무란 것들은 하나같이 왜 이 꼴인 겁니까? 답답하게 제대로 된 정보도 주지 않고 말이에요…….”
인십칠이 입을 비죽이며 투덜댔다.
“시간이 충분치 않으니 바로 출발합시다.”
인구는 그런 인십칠을 상대하지 않고 손을 저어 찬란한 금빛을 뿌렸다. 들판에 드리운 별빛처럼 떨어진 빛들이 황금색 3층 누각을 얹은 선박으로 변했다.
선박 양옆에는 가속비행을 위한 주술문자가 꼼꼼하게 새겨져 있었고 선박 위의 3층 누각은 지붕과 기둥이 보석들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명한대륙으로 가기 위해서 연릉도(烟陵島)에서 전송진을 탈 예정입니다. 연릉도까지는 제 금문영주(金紋靈舟)를 타고 가시지요.”
인구가 먼저 선박의 갑판에 오르자 한립과 인십칠도 날아올라 선박 좌현의 난간 위로 올라섰다. 선박에 올라서 보니 3층 누각의 복도와 창문에도 복잡한 주술문자들이 새겨져 영력 파동을 발산하고 있었다.
누각의 각 층에는 잘록한 허리를 지닌 묘령의 여인들이 서 있었는데 금색 혹은 일곱 빛깔 비단옷을 걸친 그녀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한립은 금방 절색의 여인들이 전부 정교하게 만들어진 꼭두각시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원하는 층을 골라 쓰시고 사소한 심부름은 저 꼭두각시들을 불러다 시키시면 됩니다.”
이렇게 말하고 인구는 먼저 가장 높은 층으로 날아올라 들어가 버렸다. 인십칠 역시 한립을 흘끗 보고는 2층 누각으로 올라가서 문 앞의 여인 꼭두각시의 뺨을 쓰다듬었다.
“호오, 촉감도 나쁘지 않구만…….”
웃음을 흘린 인십칠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우웅!
선박은 잠시 요동치다 금빛을 머금고 고공으로 떠올라 먼바다를 향해 질주했다. 뱃머리에는 한립이 누각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뒷짐을 진 채 바람을 맞고 서 있었다.
두꺼운 얼음이 깔린 망망대해에는 검은 암초나 거대한 빙산이 산발적으로 퍼져있었다. 아주 먼 곳은 자욱하게 안개가 깔려 있어 시야가 흐릿했고 하늘은 무척 고요해서 적막한 느낌을 주었다.
겉보기에 그렇지만 사실 한립의 의식에는 극히 높은 고공의 구름속이나 심해 혹은 빙산 속에 숨은 강력한 요수들이 포착되었다.
선박에 탄 세 사람의 기운이 워낙 강대해서 요수들이 몸을 숨기고 있을 뿐이었다. 이전에 건넜던 뇌폭해양과는 완전히 다른 이곳의 모습에 한립은 내심 감탄했다.
인계는 물론 영계에서도 이런 풍경은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아직 가보지 못한 풍경들이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한립은 자기도 모르게 영계로 숨어들기 전 남궁완과 함께 보냈던 따뜻한 시간을 떠올렸다. 마음속 깊이 묻어놔서 평소에는 잘 건드리지 않는 기억이었다.
수도의 길에 들어서면 대부분 시간을 홀로 버틸 수밖에 없었기에 쉽게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마음에 둔 사람과의 이별을 떠올리는 것은 그를 약하게 만들 뿐이었다.
‘완이가 지금 옆에 있다면 이 풍경을 마음껏 나눴을 텐데. 지금 완이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녀의 자질이면 충분히 대승기에는 이르렀을 테지.’
‘이번 생에 우리가 다시 만 날 날이 있을…….’
한동안 넋이 나가 남궁완을 그리워하던 한립은 조용히 몸을 돌려 누각 1층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 * *
약 반년 후.
꽁꽁 언 바다 남쪽, 자욱하게 안개가 깔린 해역의 둘레가 천장이 되지 않는 하얀 섬.
매끈한 둘레를 지녀 하얀 도자기 접시처럼 보이는 섬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낸 인공섬이었다.
섬 위에는 여러 가지 주술문자들이 새겨지거나 영력이 충만한 영석들이 박힌 돌기둥들이 서서 그 자체로 거대한 하얀 진법을 만들었다.
그리고 섬 인근 해역에 금색 무늬가 가득한 선박이 날아들어 번득 사라지고 세 사람이 내려섰다.
머나먼 길을 달려온 한립 일행은 수행은 감추고 외양도 처음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인구는 구불구불한 수염이 얼굴의 절반을 뒤덮은 험상궂은 거한, 인십칠은 푸른 청삼에 높다란 관을 뜬 유생 문사 그리고 한립은 새하얀 피부의 약관(弱冠) 소년의 모습이었다.
바로 소형 광장을 지나 하얀 바위를 땋아 만든 대전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원형 제단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하얀 수염의 노인을 보았다.
노인은 진선경 초기 수사로 촉룡도 내문장로 복색을 하고 있어 깜짝 놀랐다.
“명한대륙으로 가기 위해 오신 것입니까?”
대전 안으로 세 사람이 들어서자 하얀 수염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습니다.”
험상궂은 거한, 인구가 자연스럽게 답했다.
“한 명 당 선원석 7개를 주시면 됩니다.”
세 사람이 각각 가격을 치르자 노인은 원형 제단에서 내려와 그들을 뒤쪽의 석문으로 안내했다. 석문 뒤의 통로는 섬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