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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590화 (1,347/2,000)
  • 1590화. 인구(麟九) 수사

    *

    옥간에는 야윈 노인의 모습과 백소원 등에게 했던 말, 그리고 한립과 싸워 패하기까지의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야윈 노인이 백봉의를 거론한 대목에서 웅산의 표정이 약간 달라졌다.

    “누가 기록을 했는지 꼼꼼하게 잘했습니다. 전투 상황을 세밀하게 분석한 것도 그렇고요.”

    자료를 살핀 호언 노인이 입을 열었다.

    “하하, 운 도주의 제자인 백소원이 기록한 것입니다.”

    구양규산이 웃으며 답했다.

    “자질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머리도 제법이군요.”

    호언은 힐긋 백포 부인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가 재빨리 눈길을 돌렸다.

    “저는 안목이라는 게 있어서요. 눈뜬장님 같은 누구랑은 다르게 말이죠.”

    “…….”

    운 도주, 운예의 말에 호언 노인이 붉은 코만 긁적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큼! 다들 자료는 다 살펴보신 것 같은데요. 이 진선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규산이 일부러 헛기침을 하며 어색한 분위기를 깼다.

    “지닌 물건들이 범상치 않지만 신분을 확인해 줄 만한 것은 없더군요. 수련한 공법을 생각하면 상아대륙(上阿大陸) 수사일 수도 있을 듯합니다.”

    “금갑괴뢰는 명한대륙(冥寒大陸) 성괴문(聖傀門)의 명왕괴뢰(明王傀儡) 같고요.”

    검은 치마 여인이 조금 탁한 목소리로 의견을 내놓았고, 금발 청년이 덧붙였다.

    “명왕괴뢰가 확실해 보입니다. 하지만 성괴문 명왕괴뢰가 귀하다고 해도 값을 주면 구하지 못할 것도 없으니 그걸로 상대의 신분을 확정할 수는 없겠지요.”

    고개를 끄덕인 호언 노인의 말에 구양규산이 웅산을 돌아보았다.

    “웅 부도주의 의견은 어떠한가?”

    “도주님의 견문이 저보다 넓으신데 감히 의견을 내기 어렵지만, 상대가 펼친 검진은 천생검종(天生劍宗)의 칠살검진(七殺劍陣)과 비슷해 보였습니다.”

    웅산이 겸손히 대답했다.

    “칠살검진! 그 검진이야 당연히 들어보았네만 명성이 자자한 천생검종 필살의 검진이 겨우 이 정도 위력밖에 내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려 씨 녀석이 대충 몇 번 치니까 비검 다섯 개가 부서졌다고 적혀 있던데?”

    금발 청년은 웅산의 말을 믿지 않고 조소했다.

    “저도 확신할 수는 없고 그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말씀을 드려보았습니다.”

    “웅 부도주는 본래 검술에 정통하고 천생검종이 남긴 업적을 어느 정도 이어받았으니 잘못 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일격에 검진을 멸한 것은 검진이 너무 약한 탓이 아니라 려 장로의 수단이 고명한 덕일 수도 있고요. 자료를 보아하니 물의 법칙의 힘을 함유한 중수로 진언보륜을 제련했던데 퍽 독특하고 위력이 남달라 보이더군요. 그가 없었다면 제자 넷이 육신을 잃는 것으로 간단히 끝나지는 않았을 겁니다. 구양 수사, 제 생각에도 포상하는 것이 합당할 듯싶습니다.”

    호언 노인은 차분히 제안했다. 그 말에 나머지 사람들이 생각에 잠겼다. 기록만으로 구체적인 상황을 그려낼 수는 없지만 호언 노인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렇게 처리하도록 하지요. 그런데 침입한 진선의 수법과 보물이 다양해 신분을 확인할 수는 없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구양규산이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금발 청년은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호언 노인을 보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운예의 표정이 가장 어두웠다.

    상대가 납치하려던 사람이 그녀의 제자인 백소원이었으니 정체를 밝히지 않고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머뭇거리던 구양규산이 다른 화제를 꺼냈다.

    “흠……. 또 한 가지 이야기해 볼 일이 있습니다. 적이 백봉의를 언급했는데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지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아까운 인재였습니다. 그 일 만 아니었으면 뛰어난 자질에 14대 금선 도주가 되었을지도 모를 사람이었는데 말입니다.”

    다들 표정이 가지각색인 가운데 호언 노인이 탄식했다. 운예도 어딘가 슬픈 얼굴로 눈빛이 가라앉았다.

    “구양 수사, 당장 그 진선의 정체를 밝힐 수는 없겠습니다. 나머지 일은 아무래도 수사께서 알아서 결정하시지요.”

    “잠시만요. 호언 도주, 어딜 그리 급히 가시나요?”

    호언이 이렇게 말하고 몸을 돌려 대전을 빠져나가려 했는데 하얀 그림자가 호언 노인 앞에 떨어져 길을 막았다.

    “평소에 술이라면 거절하지 않잖아요? 얼마 전 좋은 선주를 몇 병 구했는데 품평이나 해주시죠. 안 그래도 수련하면서 의문인 부분이 있어 호언 수사께 지도를 청하고 싶었거든요.”

    호언 노인을 막아선 운예의 눈동자가 물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어……. 큼, 노부가 요즘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바빠 그럴 시간이 없겠습니다.”

    호언 노인은 운 도주의 말에 쩔쩔매다 고개를 휘저었다.

    “머리가 어지러울 때면 제 동부의 만년현빙침상이 도움이 될 겁니다. 침상에서 한잠 푹 자고 일어나면 어찌나 몸과 마음이 개운한지…….”

    운 도주가 반짝이는 눈으로 눈짓했다.

    “아,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중요한 단약을 제련 중이었는데 불을 지펴놓고 깜빡 잊고 그냥 나왔지 뭡니까. 노부는 그럼 이만!”

    호언 노인은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냅다 몸을 돌려 펑! 하고 남색 빛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에 입을 비죽인 운예는 다른 이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음을 흘렸다.

    흑군 여인과 금발 청년은 마치 호언 노인과 운 도주 사이의 대화를 못 들은 것처럼 말없이 대전을 떠났고 웅산도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대전 안에는 이제 구양규산과 운예 두 사람뿐이었다.

    “그들을 어찌할 생각입니까?”

    웃음을 멈춘 운예가 정색하고 물었다. 입을 다문 구양규산은 아직도 확실히 결정을 내리지 못한 얼굴이었다.

    “대답하시기 전에 제 입장을 분명히 밝혀두죠. 려비우란 자 덕분에 우리 소원이가 납치당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있는 한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 실책으로 뒤바뀌는 일은 없을 겁니다.”

    운예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알겠습니다. 종문을 관리하는 제가 공정한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분란을 만들게 될 테지요. 려비우는 확실히 공을 세웠지만 호위를 맡은 장로로서 실책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공로를 생각해 그 벌을 감하겠습니다. 다만 소동초는 마땅히 책임을 다하지 못한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 밖에 호언 수사께서 기왕 언급하셨으니 제 명의로 려비우에게는 따로 작은 보상이 주어질 것입니다.”

    구양규산의 말에 운예가 고개를 끄덕이고 하얀빛으로 변해 대전을 떠났다.

    잠시 후, 또 다른 산봉우리에 그녀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산봉우리 위, 반짝이는 하얀 궁전은 거대한 백옥을 통으로 깎아 만든 것처럼 보였고, 이름 모를 옥석은 달빛처럼 부드러운 빛을 발산해 냉기를 배척했다.

    운예가 궁전 안으로 들어가자 극한의 냉기를 머금은 하얀 안개가 밀려들다 무형의 힘에 밀려 나갔다.

    궁전 중앙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초승달 형태의 연못이 보였고, 그 위로 주술문자들이 새겨진 우윳빛 원반이 떠 있었다.

    그리고 바깥보다 음산하고 냉랭한 기운이 10배는 강한 호수 위의 원반에는 하얀 치마를 입은 소녀, 백소원이 앉아 있었다. 은은한 빛의 장막에 둘러싸인 그녀는 부단히 연못의 냉기를 흡수하는 중이었다.

    운예는 이미 연허기 후기에 가까워진 소녀의 기운을 감지하고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 오셨어요?”

    백소원이 긴 속눈썹을 바르르 떨며 눈을 뜨고 원반에서 내려왔다.

    “소원이 너는 나날이 예뻐지는구나. 어느 운 좋은 녀석이 너를 데려갈지!”

    운예가 가만히 백소원의 고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스승님! 스승님도 아직 혼례를 치르지 않으셨는데 제가 어떻게 시집을 가겠어요.”

    “나날이 그 입도 방정맞아지고 말이야.”

    운예는 제자를 꾸짖으며 싱긋 웃었다.

    촉룡도 13금선 중 한 명인 그녀도 가장 아끼는 제자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인자해졌다. 운예는 백소원의 팔을 잡아끌어 의자에 앉혔다.

    “소원아,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너무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한월담(寒月潭)은 음기가 너무 짙어서 월화선체를 지닌 네가 기운을 보하기에 안성맞춤이지만 과하면 몸을 상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예.”

    백소원은 스승의 염려에 얌전히 답했다. 운예는 몇 가지 수련 상의 지도를 해주었고, 영특한 백소원은 그녀의 말뜻을 곧잘 알아들었다.

    “그런데 스승님, 오늘은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왜, 내가 너를 보러온 것이 불만이더냐?”

    백소원의 물음에 운예가 장난스럽게 답했다.

    “그런 뜻이 아닌 걸 아시잖아요.”

    “알겠다, 알겠어. 그만 놀리마. 다른 늙은이들이랑 시험 때 벌어진 일로 논의하고 오는 길이다. 의견을 나누었지만 아쉽게도 침입자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드넓은 북한선역에 그런 짓을 벌일만한 기인들이 수없이 많으니까요. 촉룡도가 세력이 크다 한들 모든 것을 다 알 수도 없고요.”

    탄식하는 운예를 보고 백소원도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그자의 정체를 알아내기 전까지 출타를 자제하고 수련에 매진하거라. 이 일은 내가 끝까지 파볼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예.”

    백소원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하고는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물었다.

    “……당시 네 명의 제자가 육신을 잃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암위를 서던 장로님들이 벌을 받게 되시나요?”

    그 소리에 운예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우리 소원이가 려비우란 녀석에게 관심이 많구나? 평소에 다른 사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않던 애가…….”

    “무슨 말씀이세요, 스승님! 려 장로님은 백가를 구해주시기도 했고, 또 저를 촉룡도로 데려오고 이번에도 납치당하지 않게 도와주셨잖아요. 제자는 그 은혜를 생각해 한 마디 물었을 따름입니다.”

    “하하하, 그래?”

    “그렇다니까요……. 누가 그런 까무잡잡하고 별 볼 일 없는 사람을 마음에 두겠어요!”

    백소원은 사부의 눈길을 피하면서 티끌만치도 관심이 없다는 듯 덧붙였다. 그럴수록 운예의 웃음소리는 더욱 커졌지만 말이다.

    “아이, 스승님도 참…….”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백소원은 작은 목소리로 투덜댔다.

    * * *

    촉룡도에서 멀리 떨어진 산 좋고 물 맑은 경치 좋은 산맥.

    후욱!

    나무꾼 복장을 한 청년이 동굴 안에서 하얀빛으로 몸을 감싸고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청년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눈을 떴다.

    “자질이 썩 괜찮은 몸이라 이전 수행의 1할은 회복했구나.”

    자리에서 일어난 나무꾼이 자신의 몸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려비우, 내 몸을 망가트린 원한은 조만간 갚아주고야 말겠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동굴을 나선 나무꾼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 * *

    십여 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그동안 한립은 계속해서 무상맹 임무를 수행했다. 약재밭에 두병과 다양한 약재들을 돌봐야 했기에 고운대륙 인근의 임무만을 받았다.

    좁은 지역에서 빈번히 임무를 수행하는 데다 좋은 성과를 내서 고운대륙의 다른 무상맹 회원들 사이에 상당한 실력을 지닌 임무광(任務狂) ‘교십오’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오갔다.

    특히 임무 중에 교십오가 진선 중기 괴음수(魁陰獸) 세 마리를 참살해서 대부분이 그를 진선 후기의 강자로 여겼다.

    빠르게 명성을 떨친 덕에 고운대륙의 적잖은 이들이 임무를 수행할 때 그와 한 조가 되고 싶어 했고, 몇몇은 임무를 등록하면서 직접 연락을 취해 고난도의 임무를 맡기기도 했다.

    이와 정반대로 한립은 촉룡도 내에서는 몸을 낮추고 되도록 시선을 끌지 않았다. 집사급 임무 세 가지를 수행한 이래 대외적으로는 폐관 수련을 핑계로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그러나 구양 도주와 운 도주가 그를 불러 시험 암위를 맡았던 일에 통 크게 공적점 1천 점을 수여하고는 이 일을 절대 소문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원래도 입이 무거웠기에 그들이 말하지 않아도 소문낼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어쨌든 공으로 떨어진 공적점 1천 점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그는 종문에서 차차 잊혀 갔다. 그가 바라던 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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